<모든 히어로가 죽었습니다.>

<당신은 이야기의 엔딩을 보는 데에 실패하셨습니다.>


최종보스는 피투성이인 채로 서 있었다.

저기에 딱 한 번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하면 최종보스는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내 몸 상태는 최종보스 이상으로 엉망진창이다.

팔다리는 걸레짝이 되었으며,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또다.

또다시 최종보스를 죽이고 엔딩을 보는 데에 실패했다.


분명 실수는 없었다.

그 어떤 회차보다도 이상적으로 이야기는 진행되었고, 이번에야말로 엔딩을 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번 역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마지막 히어로여, 유언으로 남길 말이라도 있나?"


최종보스가 내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언이라.

나에게는 크게 의미없는 말이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텐데, 뭔 놈의 유언이란 말인가.


욕지거리라도 시원하게 내뱉으려던 참이었다.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최종보스의 말에 있는 오류 한 가지를 지적했다.


"히어로 아니야."

"……뭐?"

"히어로 아니라고, 씹새끼야."


'씨팔, 빌런에 빙의해 놓고서, 그것도 아치에너미에 빙의해 놓고서 히어로 편에 붙은 게 문제였구나. 아치에너미가 사라지니까 주인공의 성장이 한참 모자라고, 결국 패배로까지 이어졌던 거야.'


지금껏 내가 빙의한 것이 원작의 엔딩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그녀가 원작보다 약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회차를 반복했는데, 원작과 비해 확연히 떨어졌던 그녀의 모습도 모를까.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작에는 적이었던 내가 히어로의 편에 붙었으니까, 그 구멍을 충분히 메꿀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다.


'애초에 내가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난 시점에서부터 엔딩 보기는 글러먹었던 건데, 씨팔…. 이걸 왜 지금껏 몰랐던 거지?'


사실 고백컨데.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한들 최종보스를 이기기란 요원한 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번번히 히어로 측에 붙은 것은 그녀에게 미움받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최종보스를 향해,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해 선언했다.


"나는 빌런이다."

"그게 무슨…."


내가 빌런이어야만 엔딩을 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만화에서 그랬듯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빌런들에게마저 배척당하며,

주인공에게 경멸받으면서도 집착하고,

결국 최후에는 주인공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야 마는,


히어로의 아치에너미가 되겠다.


<이야기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단칸방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나는… 빌런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싶은데 귀찮아서 날림

아무튼 이런 느낌의 회귀물 있으면 괜찮을 거 같지 않냐

후집피 + 착각 태그 달 수도 있어서 유입도 보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