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드디어 끝났다."


쓰러진 마왕의 목덜미에 성검을 꽂아넣으며 용사가 중얼거렸다. 


모든 힘을 소진하고 무너진 마왕은, 용사의 성검과 함께 봉인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용사의 모든 스탯도 봉인되었다. 


마왕의 봉인을 대가로 힘을 잃은 용사는, 이제 평범한 일반인이나 진배없었다.


"다들 수고했어. 어서 돌아가자."


마왕의 옥좌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 보는 히로인들에게 용사가 말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히로인들의 눈매가 심상치 않다.


"후후, 용사님? 성검과 함께 힘이 전부 사라지신 거 맞죠?"


"응, 맞아. 봉인의 담보로 성검을 바쳤으니까. 마왕의 봉인이 풀리지 않는 한, 성검도 돌아오지 않아."


"그렇다면......용사님은 이제 평범한 남자라는 소리? 저희가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는?"


"그래. 난 이제 평범한 사람이지 뭐, 하하."


사람 좋게 웃으며 대꾸하는 용사.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 대답을 하는 순간, 그야말로 끔찍한 지옥이 열릴 것임을.


"아주 좋아요, 용사님. 자 이리로 오세요.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든든한 갑옷을 입은 기사단장이 손을 내밀며 말한다. 그 말에 용사는 별 생각 없이 따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야, 손 안 치워? 더러운 년이 어디서 선수를 쳐?"


눈동자를 희번뜩이며 다크 엘프 도적이 단검을 치켜들었다. 


돌발적인 사태에 당황한 용사는 서둘러 둘을 말리려고 했으나, 곧 그 둘만의 감정 싸움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목격하게 되었다. 


언제나 용사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던 히로인들. 가지각색의 개성을 지녀 그를 즐겁게 해주었던 히로인들이 갑자기 아귀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아? 당신이야말로 왜 순서를 어기고 나대는 거죠? 다크 엘프는 제대로 된 매너라는 것도 못 배우나요?"


도도한 츤데레인 줄 알았던 엘프 족의 공주도.


"야, 전부 아가리 처닫아. 장유유서라는 게 있지. 니들은 애미애비도 없냐?"


듬직한 누나인 줄 알았던 아마조네스 여전사도.


"닥치세요, 이 상폐녀. 나잇살 처먹은 게 자랑인가요? 용사님도 눈이란 게 있지."


단지 말괄량이 영애인 줄 알았던 귀족 아가씨도.


"흥, 이래서 무식한 것들은 상대하기 싫어. 용사님의 곁에 제일 어울리는 건 나인 게 당연하잖아?"


늘 순수한 학구열을 뽐내던 마탑의 마법사도.


"전부 아가리 닫으세요, 여러분. 저 지금 엄청 참고 있거든요. 이 이상 그 더러운 입으로 용사님을 더럽힌다면 전부 천벌을 내려주죠."


성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던 맹인 성녀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머리가 한꺼번에 돌아버린 거야? 


그렇게 얼을 타고 있을 때 아마조네스 여전사가 성큼 옥좌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아, 됐어.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어차피 먼저 먹는 게 임자 아냐?"


"하? 힘으로 용사님을 차지해 보겠다고요? 진짜 바보 아닌가요? 제가 압승할 게 당연하잖아요."


"이봐, 얌전히 물러서라. 기사단장으로서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하하, 이 좆같은 년들. 자고 있을 때 죄다 멱을 따버렸어야 하는데. 용사님 생각해서 놔뒀다가 이리 통수를 맞네?"


"이것들이 돌았나? 마법사랑 힘으로 다투겠다고? 뭐, 좋아. 덕분에 용사님은 내가 먹겠네."


"쯧, 천한 것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까요? 누가 용사님께 가장 어울리는지 주제를 제발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후후, 역시 안 되겠네요. 신의 이름으로 전부 징벌하도록 하겠어요. 각오 단단히 하세요, 이 씨발 창년들."


그 순간 용사는 재빨리 가방에 있던 아이템을 꺼냈다.


단거리 텔레포트를 가능하게 해주는 구슬 모양의 마도구였다. 


번쩍! 마도구를 발동시키는 순간, 새하얀 광채가 용사의 시선을 가렸다. 


그리고 시력을 회복했을 때, 용사는 마왕성 입구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용사가 어떻게든 상황 정리를 해보려던 찰나.


콰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마왕성의 지붕이 통째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일곱 히로인의 찢어지는 절규가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용사니이이임---!!!!!"


씨바아알---!!! 속으로 미친 듯이 욕을 내뱉으며 용사는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났다.


그렇게 마왕의 봉인을 도로 해제하기 위한 용사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성검 있을 때는 얀데레 본성 숨기고 내숭 떨던 히로인들이 스탯 봉인되자 마자 본색 드러내는 집착물


그래서 살기 위해 봉인 풀고 성검 되찾으려는 용사


이런 거 재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