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쩌면 오늘일지도.


속으로 말하면서 자조했다. 학부생 나부랭이가, 고작 이딴 상황에 까뮈의 도입부를 꺼내와 말문의 시작으로 삼는 이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아니, 고작 이딴 상황은 아닐지도 모르지. 고작이라고 여겨질 상황이라면 아무리 무능한 나여도 이렇게 곤란해 하진 않을 테니까.


아. 다시 한번 되새긴다. 까뮈의 도입부는 정말 최고였다. 다자이 오사무의 첫 문장 또한 나의 심금을 울리는 문장이었지만, 이 한 문장만으로도 글의 뒷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이야기의 모든 성격을 표현한 나에게는 감동적인 문장이었다.

어땠을까, 방금 내가 말한 도입부는 까뮈의 말을 빌렸지만, 나는 내 상황을 한 문장에 일축하여 담아냈을까? 뭐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이다. 국가의 최고 고등 교육기관인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다. 늘 학술에 대한 교육만 할 것 같은 이 곳은 우습게도 결코 그런 고상하고 이상적인 일만이 존재하진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 대학 또한 하나의 사회다, 사회엔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마찰이 있다. 어떠한 물체든 서로 접촉하면 마찰이 0이 아니듯 말이다.


간단한 이야기다. 나 또한 사람이었고, 대학 생활에서 마찰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났을 뿐이다.


정말 안타깝게도.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심장 아주 빠르게 터질 듯이 뛰어 내 몸 전체를 진동 시키는 듯 하였었고, 숨은 넘어갈 듯 가빠왔었다. 내 시야에는 붉게 물든 바닥 위에 엎어져 미동조차 없는, 방금까지 나와 언쟁을 벌였던 교수님이 쓰러져있었다. 


고요하게,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면 이내 내 손에 들린 전공 서적에서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현실을 자각한 순간, 체온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피부 위로 흐르는 땀방울은, 내 평생 몇 번 흘려보지 않은 식은땀임을 자각했었고, 온몸이 다른 의미로 떨리기 시작했었다.


'똑똑'


문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잠시 멈춘 것 같았던 심장이 요동쳤었다.


"교수님. 김상훈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조교인 김상훈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했던 순간 이미 문은 열렸다.


"어?"


피로 묻는 서적을 들고 있던 나와, 그 앞에 쓰러진 교수. 그 장면을 보고 조교 김상훈이 상황을 이해하기엔 충분했었다.

김상훈이 고함을 치며 내 이름을 외칠 때.


나는 눈을 떴었다.


익숙한 천장이었다, 나는 가삐 숨을 몰아쉬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었다.

생생한 느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 코끝을 간질이던 비릿한 피 냄새까지.


그 때,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분명 꿈에서의 날짜는 11월 30일이었으나, 핸드폰의 화면은 11월 29일 오후 23시를 띄우고 있었다.


"뭐 이딴 불길한 꿈이 다 있어.."


한숨을 내쉬며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 내가 힘을 주어 교수의 머리를 때린 감촉과 내 코를 간질이던 비릿한 피냄새까지, 소름끼치듯이 현실감 있었다.


이유까지 납득이 갔었다. 팀원들과의 과제에 관련하여 마찰이 있었고 그에 따른 협력 없이 과제를 마무리하게 된 나는 점수 채점 방식에 대해 교수에게 문의하러 갔었고, 교수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인간관계를 소홀히 한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이내 부모님까지 들먹이며 거칠게 말을 했고 나는 홧김에 가방 속에 있던 전공 서적으로 교수를 살해하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더 자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교수에게 향했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는 교수에게 점수에 대한 문의를 해야 했다.

문을 노크하고 교수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데쟈뷰다. 내가 하는 말도, 교수가 내게 하는 말도 똑같다.

이상했다. 그래도 나는 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참자. 참자. 살의를 억눌렀다.


그 순간 몸이 멋대로 가방에 있는 전공 서적을 꺼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내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에 앉아있던 교수의 머리를 향해 힘껏 서적을 휘둘렀다.

꿈에서 느꼈던 감각, 맡았던 비릿한 피냄새가 다시 어제 꿨던 꿈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만들었다.


'똑똑'


"교수님, 김상훈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똑같은 노크 소리와, 똑같은 김상훈의 말. 곧 김상훈은 들어올 것이다.

어쩌면 이 또한 꿈이 아닐까.

문이 열리고 똑같이 김상훈은 내게 고함쳤다.


그 순간, 다시 나는 악몽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머리 맡을 더듬어 핸드폰 화면을 켰다.


똑같이 날짜는 11월 29일 시각은 23시였다.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교수를 죽였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교수에 대한 살의를 포기하는 순간 몸이 움직여 교수를 살해한다.

이후, 교수의 살해한 사실이 조교 김상훈에게 들키면 나는 11월 29일 23시로 돌아온다.


즉, 타임루프다.


그렇게 결론을 낸 지 4일.


나는, 지금 이런 상황을 5번이나 겪은 상태였다.


이건 분명 현실이었다.


루프의 조건은 간단했다.

나는 반드시 교수를 죽여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강제로 내 몸이 교수를 살해한다.

그리고 교수의 죽음을 타인이 발견하면, 그 순간 이 시점으로 회귀한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루프를 탈출하는 법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교수를 죽이는 건가.

왜 나에게 이런 꺼림직한 시련을 주는 건가.

교수에 대한 동정까지 들었다, 그 인간이 뭐길래 나에게 수없이 죽어야 하는 건가.


그럼에도 나는 이 끔찍한 반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손을 벌벌 떨면서도 꽉 쥐었다.


분명 나는 교수님을 죽일 것이다.

분명 내일 교수님을 죽일 것이다.

실패하면 내일 교수님을 죽였을 것이다.

성공하면 어제 교수님을 죽였을 것이다.


나는, 내일을 어제로 바꾸기 위해 창백한 얼굴로 어둑한 자취방에서 작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