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지루한 세상이다.

 

창문 밖, 나는 구름 너머로 날아가는 어느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을 나는 능력자도 꽤 많단 말이지.’

 

확실히 실생활에서도 도움이 될 능력이다.

뭐, 겨울에는 쓰기 힘들 지도 모른다. 보통

하늘은 지상보다 추우니까.

 

‘어쨌거나 내가 그럴 일은 없으니.’

 

참으로 지루하고, 또 기묘한 세상이다.

 

초능력이 있는 세계, 내가 알던 세상에선

볼 수 없었던 개념이 존재하는 세계.

 

아니, 어쩌면 이게 바로 내 능력일지도

모른다. 환생이라, 그리 쓸모 있는 능력은

아닌 듯하지만.

 

‘애초에 환생 전 기억도 거의 없으니까.’

 

어쩌면 환생을 했다는 건 나의 착각, 혹은

망상에 불과하며 나는 그냥 특별한 능력이

없는 17살 소년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게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자명했다.

 

“저, 저기, 그, 내가 빌려준, 그거.”


“뭐? 아, 체육복? 3반 누구한테 빌려줬어.”

 

“그……누구한테 준 거야……?”
 
“나도 모르겠는데? 알아서 찾아, 알아서.”


문득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또 저러고 있군, 한심한 녀석 같으니.

물론 도와줄 마음 따윈 없다만.

 

“하지만, 그……그거 내 거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씨발! 아 좆같네 진짜,

자꾸 옆에서 칭얼거려 왜!? 뒤질래? 어?!”

 

일진……이름이 뭐더라. 귀찮으니까 그냥

일진이라고 부르겠다. 아무튼 일진이 버럭

소리치자 그녀가 몸을 웅크렸다.

 

“힉! 미, 미안……잘못했어…….”


“그만 귀찮게 하고 알아서 찾아, 알아서!

씨발년이 좆같게 진짜…….”

 

“야,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쟤 자살하면

우리 경찰서 가서 조사받잖아.”


“그럼 씨발 저년 애미 애비도 내가 쑤셔

버릴 테니까 걱정 마셔.”

 

여자애들이 왁자지껄 웃는 동안, 그녀는

조심스레 거길 빠져나갔다.

 

“……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그 아이는 거기, 그러니까 복도에 혼자

서서 3반이 어디인가 하고 찾고 있었다.

 

“그 체육복, 3반 이후성인가 하는 놈이

입고 있는 거 같던데.”

 

“어……그거 여자용인데……?”
 
“그 새끼 변태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그래, 나 같아도 내 체육복이 변태 손에

들어갔다는 걸 알면 기분이 좆같아지리라.

 

“……너도 참 한결 같네.”


소꿉친구라고 신경 써주는 것도 이젠 슬슬

지겹고 귀찮다.

 

이리혜,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소녀.


외모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이상하다, 정말

외모 빼면 모든 부분에서 평균 이하인 것도

이상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을 지언데.

 

“칭찬……이야?”


“아마도.”


“헤헤.”


좋단다, 어휴. 이 모질이 같으니.

진짜 소꿉친구만 아니었으면 연 끊고 절대

아는 척 안 하고 지냈을 텐데.

 

“이, 있지 성호야!”


“왜.”


“너, 너는 진로……어떻게 하기로 했어?”


아, 그거.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프로그래밍 쪽으로 더 배우려고.”
 
“그, 그래……너 그런 거 잘하니까……난

아직도 못 정했거든……헤헤.”

 

“너나 나나 초능력은 없으니까 말이지……

너도 적당히 쉬운 일이나 해. 경리 어때?”


“수, 숫자엔 약하잖아. 내가.”


“강한 건 또 뭔데?”


아, 이제 진짜 지겨워 죽을 거 같다.

 

재미없는 년 같으니. 

지루한 건 이 세상만으로도 충분하다.

 

“뭐, 알아서 해.”


“저, 저기……나 할 말이…….”
 
“난 없어. 그럼.”


난 그리 말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야, 정말.”


아마 이대로 쭉, 지루하고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가 죽겠지.

 

그리 생각하니, 정말로 죽고 싶어졌다.

 

 

 

 

 

하교하는 길에 심부름을 하는 게 영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필요한 일이긴 했다.

 

적어도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돌아오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가령, 평소엔 비싸서 자주 못 사먹는 고급

푸딩을 슬쩍 끼어 넣는다던가.

 

“……음?”


왠지 모르게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경찰차 수십 대가 미친 듯이 달려 나갔고,

하늘에는 몇몇 히어로들이 떠 있었다.

게다가 이 냄새, 화약의 냄새다.

 

“빌런이라도 나타났나.”


흔해빠진 일이라 이젠 아무 감흥도 없다.

 

처음엔 나름 흥미진진했는데, 결국엔 조금

스케일이 큰 흉기난동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사건도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내 주위에선 그런 일은 거의 보기

힘들었고, 딱히 보고 싶지도 않다.

 

나 같은 평범한 시민 엑스트라에게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기도 하고.

 

“무슨 일이에요?”

 

그때, 앞에 모여 있던 인파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테러라는데, 사람이 여럿 죽었대.”


“와, 요즘 시대에도 빌런이 있긴 하네요.

게다가 테러라니, 거물인가?”

 

“그야 모르지.”


테러, 테러라…….


요즘 시대에 그런 눈에 띄는 짓을 벌이다니

어지간히도 멍청한 모양이다.

 

잡히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기억을 잃고 인격을 개조당하거나, 아니면

평생 나올 수 없는 감옥에 갇힐 텐데.

 

“나랑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집에나 가자.

나는 발걸음을 옮겨, 아파트로 향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승강기를 타고

17층을 눌렀다. 이어서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살짝 출렁거렸다.

 

집에 가면 산 물건 냉장고에 넣고……

그 다음 씻고 낮잠이나 자야겠다.

 

일어나선 저녁밥 먹고 게임이나 하다가

새벽에 자야지. 음,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하는 게 제일이다.

 

띵, 승강기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거기서 내린 후, 복도를…….

 

복도를…….

 

음?

 

“뭐야 이게?”


그을음? 피? 묘한 흔적이 복도 바닥에 쭉

남아있었다.

 

17층에는 우리랑……그 녀석만 사는데.

 

이리혜.

 

문은 열려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죽을 뻔했다……히, 히힛……그래도

해냈어, 전부 박살을 내버렸다고!!”

 

이 목소리는……설마…….

 

나는 문을 열고 안을 슬쩍 보았다.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좀 오래된 영화에서

나올 법한 디자인의 슈트였다.

 

게다가 저 헬맷은 또 뭐야, 촌스럽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디자인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달칵.

 

그 순간, 힘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문이

조금 더 열리고 말았다.

 

“누구야!?”


쿠당탕! 나는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이리혜를.

 

“……코스프레는 아니겠지, 그거?”


“너, 너……네가 어떻게……아니…….”


쾅! 그녀가 날 들어올려 벽에 밀쳤다.

 

와, 얘 힘이 이렇게 좋은데 왜 학교에선

맞고 다닌 거지?

 

“소리 지르면 죽인다!”


“그래서 안 지르고 있잖아.”

 

“그, 그러네…….”


어째 나보다 얘가 더 당황한 거 같은데.


소꿉친구가 빌런이라는 걸 알게 된 사람과

소꿉친구에게 빌런이라는 사실을 들키게

된 사람, 둘 중 누가 더 놀라야 하는 걸까.

 

뭐, 적어도 난 그렇게까진 안 놀랐다.

 

“어, 어, 어쩌지? 어떻게 하지? 하필이면

들켜도 성호한테……아아아……!!”

 

“일단 좀 놓아주지? 나 화장실 좀 가고

싶은데.”


“아, 미안.”


리혜가 날 놓아주자마자, 난 화장실에 먼저

갔다 왔다.

 

“……근데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너도 내 나이쯤 되면 이렇게 될 거야.”


“나랑 동갑이잖아…….”


실제론 아니다, 환생 전에 정확히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20년

이상 살았을 테니까.

 

“소꿉친구가 빌런이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네.

 

차라리 히어로면 몰라, 빌런이라고?

이걸 경찰한테 신고할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래봤자 내가 얻는 건 없다.

 

……반대로 보복당하면 모를까.


“어, 어디 가서 마, 말하면 죽인다…….”


“그냥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하는 게 훨씬

낫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소꿉친구를 죽이는 건 나도

싫어! 비, 빌런도 친구는 아껴!”

 

그게 빌런이냐, 하여간 어설프기는.

 

“빌런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아가야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부모자식친구 모두

이용하고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테러범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아까 대충 봐도 여럿 죽었을 거 같던데.

 

“일단 옷이나 갈아입고 와, 샤워도 하고.

너 꼬라지가 진짜 좀 심각해서 그래.”

 

“아, 응. 미안.”


리혜가 그리 말한 뒤, 정말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씻으러 갔다.

 

……내가 지금 나가서 신고하면 어쩌려고.

하여간 빌런 주제에 빈틈 투성이다.

 

‘그보다 진짜 리혜가 빌런이라니.’

 

상상도 못한 전개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나도 꽤 놀랐다.

 

게다가 그 정도 인원이 움직일 정도이니

가게 하나 불태운 정도가 아닐 것이다.

 

‘살짝 볼까.’

 

나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그리고……스마트폰을 곧장 껐다.

 

“미친.”

 

슬쩍 봐도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사상자 마흔 명, 건물 두 채가 파괴됐다.

오죽하면 다른 도시 담당인 히어로들이

수습을 도우러 왔다고 하질 않나.

 

‘이 정도면 1급 위험 빌런이잖아.’

 

잡히면 무기징역, 아니면 인격 개조형이다.

어느 쪽이건 사실상 죽는 거나 다름없다.

 

“후아, 개운하다.”


리혜가 티셔츠와 짧은 바지만 입고 나왔다.

 

“그래서, 얼마나 한 거야? 이 짓거리.”


“아……얼마 안 됐어……이제 한 달?”

 

“그래, 한 달 동안 안 붙잡힌 게 용하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이 어설픈 녀석이 프로 히어로를 상대로

한 달이나 안 잡히다니, 진짜 기적이다.

 

“이제 어쩔 건데?”


“……너부터……해결해야겠지.”


해결.

 

해결법은 많다, 그리고 아마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를 죽이는 것이겠지.

 

시체를 처리하거나 알리바이 문제가 생기는

문제는 남겠지만, 적어도 내가 어디 가서

리혜의 정체를 신고하진 않으리라.

 

“솔직히 말하면 난 아직 죽기 싫어.”
 
“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라지만 딱히

죽고 싶은 것도 아니거든.”

 

죽고 싶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애초에 이 녀석 손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당장 아파트 밑으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리고 말해두겠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너 조만간 잡힐 거야.”

 

“…….”


“나랑 하등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지.”

 

소꿉친구가 잡혀가더라도 내 인생이 크게

변하거나 하진 않으리라.

 

어쩌면 내겐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성가신 바보 녀석을 돌봐줄 필요가 없으니.

 

“애초에 뭐가 목적인데? 돈? 악명?”
 
“아니야!!”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야.

내가 한 대 때리려고 하자, 리혜가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힉! 따, 딱밤 금지!”


“빌런이면서 딱밤을 무서워 해?”

 

“비, 빌런도 아픈 건 싫어!”


뭐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좀.

그나저나 진짜 이 사태를 어찌 하나.

 

“……나……나는……약하지……않아.”


리혜가 바닥을 보며 말했다.

 

“이, 이 힘으로 지, 지금까지 나를 무시한

것들을 저, 전부 죽여……버릴 거야……

날 방치한 것들도, 방해하는 놈들도……!”

 

“그럼 난?”
 
“……너는……친구니까 예외야.”


친구 아니었으면 죽였을 거란 소리인가?


이야, 이 녀석이 친구라 좋았던 적이 한 번

없었는데 이제야 생겼다.

 

“그럼 네 목표는 잡힐 때까지 날뛰다가

붙잡혀서 인격 개조를 당해 국가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는 거라고?”


“그, 그딴 건 싫어! 왜 무시무시한 소리를

해? 나, 나 혹시 미워해?”


“진짜 미워했으면 너랑 말도 안 했지.”


아, 진짜 성가시네…….

재미없는 년이 성가신 년으로 격상됐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대로 가면 몇 주도

안 지나서 넌 잡힐 거야.”

 

“……그건……알아.”


“네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제멋대로 날뛰는 것뿐일 테고.”

 

멍청하니까, 이 녀석. 

빌런이 됐다고 없던 머리가 생기진 않으니.

 

“그래서 말인데, 제안이 있어.”


“제, 제안?”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이래저래 재주가 있어.

컴퓨터도 만질 줄 알고, 여러모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기술을 알고 있지.”

 

“어, 그렇지. 으응.”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나는 리혜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도와준다고, 너.”


“어, 어어? 자, 잠깐……진짜로?”


“안 도와주면 네가 잡힐 테니까.”


솔직히 이딴 바보가 어떻게 되더라도 난

아무 상관없다. 슬프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안타깝게도, 우리 어머니는 이 녀석을 꽤

마음에 들어하고 계셨다.

 

얘가 빌런으로 잡혀 들어가면 분명 며칠을

펑펑 우실 테지……그건 좀 싫다.

 

무엇보다도, 이건…….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빌런의 사이드킥이 될 수 있다고?
위험하지만, 분명 재미는 있을 것이다.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이보다 더

달콤한 일탈이 어디 있겠는가?

 

“서, 성호야……훌쩍……!”


리혜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게 안겼다.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 갚을게!”


“뭐, 그러시던지.”


지루하고, 재미없고, 짜증나는 세상이다.

내겐 애착이랄 것도 없고 누가 죽어도 딱히

상관없다. 아무래도 좋단 말이다.

 

난 단지 지루함을 지우고 싶을 뿐이다.

 

“널 최고의 빌런으로 만들어주지.”


어쩌면.

 

이 녀석보다, 내가 더 빌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느낌의 피카레스크 빌런 사이드킥 소설이 보고 싶다

능력은 강하지만 빡대가리 겁쟁이인 히로인 + 피도 눈물도 없는 무능력자 사이드킥 남주의

피카레스크 빌런물...그런 게 세상엔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