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본성론은 윤리학의 화두로서 종종 거론된다.

성선설과 성악설, 나아가 성무선악 등,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주제이며,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론이 가진 대중적 네임벨류에 비해,

본성론은 윤리학에 있어 주요화두는 아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악의 개념은 윤리학의 그것과 의미가 사뭇 다르다.


오늘, 본 게시글에서는

1) 윤리학에서의 본성론의 지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2) 본성론의 의미와 그 한계를 검토한 뒤,

3) 본성론의 본 고장인 유학에서의 성기호설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

1) 윤리학에서의 본성론


 윤리학은 '당위'의 학문이다.

본질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학문이기에, 도덕적 판단의 진위여부를 가리는데 큰 관심을 둔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직접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지시해주지 않는다면, 본성론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본성론의 지위가 윤리학에서 위태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본성에 대한 기술적 진술이 인간이 살아가야하는 당위를 논하게 된다면, 이는 무어가 지적했듯이 '자연주의적 오류'에 걸리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한다는 당위를 끌어낼 수 없고, 만약 이를 강하게 주장한다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악하게 살아야한다는 당위 또한 옳다고 판단하여야한다.


때문에, 특히 서양 철학에 있어, 인간본성론은 지극히 특수한 목적 하에서만 다루어져왔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계약론인데, 이 이론들에서는 '국가의 계약이 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 가'에 대한 설명으로 인간본성을 차용하였지, 인간의 당위를 논하기 위해 인간본성론을 사용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흔히 서양의 성선설자로 루소가 언급되는데, 그가 드는 성선설의 증거가 맹자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점과, 시기상 특징을 미루어볼 때, 그의 성선설도 상당부분 동양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러나 반대로, 동양에서는 특히 동양철학의 초기에 있어

인간본성론이 적극적으로 화두에 올랐다. 이에 대해 알아보자.


=

2) 본성론의 의미와 지위


본성론에 대한 입장은 크게 성선과 성악으로 나뉜다.


유교에서 성선을 채택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술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전술하였듯, 이것은 오늘날의 논리학으론 설득력을 잃는다.)


특히 맹자는 성선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불인인지심과 사단과 같은 선천적 도덕적 감정들을 그 증거로서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적 감정들은 하늘에서 준 것이므로

(당대 하늘은, 원인을 설명할 순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설명할 때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를 잘 지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맹자의 주장은,

선천적 도덕감정으로 미루어보아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따라서 잃어버린 선한 본성을 잘 회복하여 도덕적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선설에는 두 가지 논리적인 약점이 있다.

악한 일은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해야한다는 점과

어떻게 본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한다는 점이다.


악한 것이 본성에 어긋난다면 왜 악한 일을 인간이 의욕하는 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주의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을 본성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이에,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악설은 '인간은 도덕적으로 악하게 태어났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만약, 위와 같이 주장한다면,

이는 윤리학에 있어 악한 일을 그 자체로 의욕한다는 의미가 된다. 예컨데, 도둑질을 하는 이유는 도둑질 자체에서 오는 희열감과 배덕감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현대의 통념에도, 악한 일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는 주장보다도 허무맹랑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케이스도 있겠지만 인간의 보편적 본성이라하기에는 성선설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성악설의 핵심은 본능과 이기심에 있다.

인간은 자기 보존을 중시하기에, 자기 보존이 도덕보다 우선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우리가 가진 통념적인 악의 개념과는 다르다. 자기를 보존하는 것은 무조건 악한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선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보존의 욕구는 악한 일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악설이라 부른다.


우리의 통념과 성악설이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성악설 또한 약점을 지닌다.


인간이 자기보존을 중시한다면

도덕적 감정은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며,

도덕적 교화는 어떻게 가능한가하는 것이다.

(특히, 순자 또한 유학자로서 성악설에 기반함에도 도덕적 삶을 중시하기에 이러한 물음에 놓인다.)


결국 순자도 이 두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인간은 도덕적 감정과 도덕적 행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


3) 성기호설


역사적으로 유교에서의 본성론은 성선설의 승리였다.

그러나 조선의 정약용으로부터 본성론은 또 다시 화두에 오르게 된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모두 공통된 문제점을 지닌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은 결국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며, 악은 환경에 의해 본성을 잃은 결과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 인물의 도덕적 행위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그의 비도덕적 행위는 환경의 탓이 된다.


반대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주장한다면,

그의 비도덕적 행위는 그렇게 태어난 탓이 되어버리며,

그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근거가 빈약해진다.


결국 어느쪽이든 인간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귀인이 생겨

제대로된 교화가 불가해진다.


이 점을 통찰한 정약용은 본성은 기호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영지기호와

이기적 욕구를 지향하는 형구기호로 이뤄진다.


또한 인간은 이 둘 중 한 가지를 매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그의 용어로는, 자주지권)를 지니므로, 그의 도덕적 행위는 그의 공이요, 그의 비도덕적 행위는 그의 과가 된다.


즉, 정약용은 성선의 전통 내에서 악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선행과 악행의 책임을 모두 행위자에게 돌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도덕적 욕구와 이기적 욕구를 모두 인정하면서 도덕적 욕구를 우위에 두는 식으로 본성론을 풀어나간 것이다.


=


부록) 진화론적 도덕본성론은 왜 사장되었는가?


도덕적 유전자가 있는 편이, 도덕적 유전자가 없는 것 보다

유전적 총체도를 높이기 때문에, 적자생존을 위해 도덕성이 유전자 내에 박힌 것이라는 '진화론적 본성론'이 유행한 바 있다.


진화론이 사회학, 윤리학, 심리학 등에도 퍼져나감에 따라 등장했던 이론 중 하나이다.


위 이론이 후퇴한 이유는 전술하였던 이유들과 같다.


1. '진화론적 본성론'은 기껏해야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이유를 설명할 뿐이다.


2. 진화론적 본성론은 도덕적 행위와 비도덕적 행위를 구분하지 못한다.


3. 인간이 유전상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한다는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 내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4. 통념상, 도덕은 본능에 반하는 이성적 활동에 가깝지

본능대로 사는 유전적 활동과는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