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한탄을 엿듣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던 길에, 구석에서 부모와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도깨비. 동시에 사랑하는 딸이기도 한 비유의 사념이 내 전뇌를 파고들었다.
- 나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 . . .
타인을 동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비유의 간절한 소망을 듣곤, 나는 비유를 동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죄책감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일반적인 도깨비들은 성별의 개념이 희미하다. 그들은 설화를 먹고 태어나, 설화를 이야기하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비유는 일반적인 도깨비가 아니었다.
나는 41회차의 신유승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영혼을 도깨비알에 삽입했고, 결과적으로 관리국을 거스르는 이례적인 도깨비가 탄생했다.
한때 인간이었던 도깨비.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지금, 그녀는 도깨비지만 인간의 정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에요?"
사정을 들은 정희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다소 싱거운 답변을 내놓았다.
"그냥 말해봤습니다. 희원씨는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시는 편이니까요."
내 말에 잠시 생각해보던 정희원이 불쑥 말했다.
"소개팅은 어때요?"
"네?"
"엄마가 없다면 엄마를 만들어주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 그렇긴 한데 . . .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애초에 나 모태솔로인데 . . .
"하지만 상대를 찾기가 -"
"그거야 독자씨 하기 나름이죠. 뭐, 독자 씨가 여복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 보면 제 주변엔 미인들이 많았다. 상아씨야 시나리오 시작 전부터 미노소프트사의 아이돌로 유명했고, 한수영도 입만 다물면 눈물점이 매력적인 미인이다. 우리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따라서 정희원의 말에 동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겐 과분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믿고 시나리오의 끝까지 함께해준 동료들.
인생의 선물이라 생각해도 모자람 없는 사람들이, 나는 언제나 고맙고 미안했다.
그동안 마음 고생해온 그들에게 내 이기적인 부탁으로 또 한번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설사 제가 고백을 해도 그쪽에서 먼저 거절할겁니다."
애초에 받아주지도 않을테고.
그들이 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동료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까.
내 씁쓸한 대답에 정희원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 . . 네?"
영문모를 문장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희원이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잡았다.
"하아, 환장하겠네."
. . . 내가 뭐 잘못 말했나?
「김독 자는 멍청이 다.」
하다못해 벽한테도 꾸지람을 듣는 내 처지가 문득 서글퍼졌다.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다. 나는 할말이 궁해 눈동자를 굴려 공단을 관찰했다.
시나리오가 사라진 세계. 자신만의 일상을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로 분홍색 꽃잎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정희원을 바라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곳을 눈에 담고 있었다.
"올해는 벗꽃이 일찍 폈네요."
"봄이 왔나 봅니다."
함께 꽃을 보던 우리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평화도 찾아왔고요."
"평화롭네요."
이심전심일까? 우리는 서로를 보며 픽 웃었다.
"언제 일행들끼리 모여 피크닉이라도 가야겠어요. 구경만하긴 아깝잖아요. 안 그래요, 대표님?"
"날 한번 잡겠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정희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다르게 바쁜 사람이라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커피값은 내가 낼게요."
" . . . 그거 회사 법인카드 아닙니까?"
정희원이 앞면에 김독자 컴퍼니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카드를 경쾌하게 흔들었다. 시나리오가 사라져도 검사 특유의 분위기는 잔재한 탓에, 그녀의 동작이 아직도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대표님 고민 상담 만큼이나 중대한 사안이 어딨어요. 이럴 땐 팍팍 써야죠. 독자씨도 은근 구두쇠라니까."
" . . . 마음대로 하세요."
시원하게 카드를 긁은 정희원이 떠나기 전 내게 다가와 말했다.
"소개팅은 진담이에요. 요새 백수처럼 사느라 마음이 허전해 보이던데,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게 좀 덜 느껴진달까."
"아니, 저는 비유 때문에 - "
내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정희원이 웃으며 선수를 쳤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 . . . "
나는 얼빠진 얼굴로 멀어져가는 정희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정희원이 남긴 문장이 계속 멤돌았다.
- 요새 마음이 좀 허전해 보이던데.
확실히, 1864회차로 돌아온 이후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하다. 평화롭지만 적막한 시간. 일행들은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빴다.
정희원은 이현성과 함께 보안 업체를 차렸고, 아이들은 학업에 매진 중이다. 한수영은 대학교수가 되어 웹소설 작법 강의를 하고 있다. 듣기론 출석을 빡세게 잡는다고 원성이 자자하다고 . . .
아무튼 모두 열심히 살고 있다. 오직 나만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 채 정체되어 있었다.
그것은,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비유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이토록 진심인 것일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일 밖에 없었으니까.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새로운 시나리오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 . . 이렇게 보니 나도 새삼 글러먹었구나. 허구한 날 이설화한테 등짝을 얻어맞는, 전 회귀자 현 게임페인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었다. 유중혁과 동급의 미련함을 겸비했다는 사실에 나는 묘한 패배감에 휩싸였다.
여러 잡생각이 머리 속을 휘저은 끝에, 나는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소개팅 . . . 한 번 나가볼까?"
.
.
.
띠리리링!
귀청을 후벼파는 알람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사실 정확하게는 '눈이 떠졌다'가 맞는 표현이었다. 나는 핸드폰의 스크롤을 넘겨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 날짜를 가리키는 숫자 밑에 굵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 소개팅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씼고 나왔다. 면도도 하고 스킨 로션도 발랐다. 그리고 옷장을 활짝 여는 동시에, 전대미문의 고민에 휩싸였다.
무슨 옷을 입어야지?
예전에는 정장과 아공간 코트만 입고 다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얼마 전 한수영의 쇼핑에 끌려다녔을 때 옷을 사지 않았다면, 아에 입을 옷이 없었을지도 . . .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널널한 청바지와 흰색 반팔 티, 그리고 캐쥬얼한 셔츠를 선택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무난해 보이는 조합이었다.
준비를 마친 나는 1층 거실로 내려갔다.
아침 신문을 읽고 있던 한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웬일로 벌써 일어났냐?"
"그럴만한 일이 있어."
내 애매모호한 답변에 한수영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저번에 산 옷 입었네?"
"어때 보여?
"그런대로 봐줄 만은 하네."
한수영치곤 나름 고평가였다. 덕분에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조금 되찾을 수 있었다. 평소 함께 다니던 놈이 워낙에 미남인 탓에 상대적으로 묻혔을 뿐, 나도 나름 훈훈하게 생겼다. 정말로.
내가 바닥에 걸터앉아 신발끈을 묶던 와중 한수영이 불쑥 말했다.
"어디 여자라도 만나러 가냐?"
자기가 말하고도 이건 아니다 생각했는지, 한수영은 발언을 금새 철회했다.
"뭐, 넌 이미 멸살법이랑 결혼한 놈이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만분의 일 -"
"맞는데?"
만분의 일이 들어맞는 소식에 한수영이 돌처럼 굳었다. 그녀의 고개가 삐그덕 돌아갔다. 들고 있던 신문이 툭 떨어졌다.
". . . 다시 말해봐. 내가 잘못 들은거지?"
"네가 들은 거 맞아. 나 오늘 소개팅 가."
나는 스스럼 없이 말하다가, 한수영의 표정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처음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반은 분노로, 반은 당혹스러움으로 채워진 표정. 한수영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야, 갑자기 왜 그래? 무섭게."
" . . . 꺼져."
"뭐?"
나는 바보같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왜 저렇게 화난거지? 이럴땐 가끔 '제 4의 벽'의 힘을 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내 아연한 반응이 한수영을 더욱 빡치게 만들었는지, 그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흥분은 가라앉은 듯 보였지만, 어조가 서릿발처럼 냉혹했다.
"꺼지라고."
한수영의 손에 검은 아우라가 아른거렸다. 이런 황당한 일로 공동주택을 부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도망치듯 집밖을 빠져나왔다.
나름 고대하던 소개팅 날이건만, 아침부터 영 뒤숭숭했다.
.
.
.
한편, 홀로 남은 한수영은 김독자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것을 하나 꺼냈다.
"씨발."
하필이면 레몬 사탕이었다.
달달한 걸로 머리를 식힐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한수영은 레몬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달콤시큼한 향이 물씬 올라왔다.
[설화, '레몬 맛 사탕의 추억'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망할 설화 덕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김독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자신이 먹던 사탕을 김독자의 입에 넣었다. 정작 김독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 장난을 친 자신만 우습게 되었지.
아니 . . . 그보다 정말 장난이었을까.
마음 속에서 또다른 한수영이 말한다. 마음도 없는 상대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는다고. 간접 키스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냐고.
적어도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진, 거기에 대한 한수영의 답은 '지랄하지 마' 였다. 그딴 오징어 새끼가 뭐가 좋다고. 카이제닉스 섬에서 50년을 꿇은 후유증으로 정신이 서서히 나가는가 싶었다.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한수영은 그 '말도 안되는 소리'에 다시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김독자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멍해지고, 시답지 않은 농담에 헛웃음이 난다. 한수영 본인은 그렇게 웃음이 헤프지 않음에도.
그렇게 가랑비에 맨땅이 젖듯, 일상에 서서히 녹아든 한수영은 어느날 무심코 깨닫고 만 것이다.
'나 얘 좋아하나?'
한수영이 김독자를 좋아한다고.
불과 한달 전 일이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김독자 컴퍼니>라는 완결된 이야기에 불완전한 쉼표를 찍고 싶지도 않았다.
작가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김독자가 완전히 돌아온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냐고. 그 이상은 과욕이지 않냐고. 자신의 책을 읽어줄 독자만 있다면 작가는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수영의 행동엔 차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김독자를 굳이 옷가게에 데려가지 않았는가. 그것은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콰득.
레몬맛 사탕의 막대를 씹은 한수영이 어리둥절해하는 김독자를 떠올리며 재차 중얼거렸다.
"김독자, 이 나쁜 새끼."
데이트를 간 건 그렇다 쳐도, 그곳에 자신이 사준 옷을 입고 나갔다는 것엔 정말 울화통이 치밀었다. 뺀질거리는 얼굴이 그렇게 약이 오를 수가.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서자 입술 사이로 문득 실소가 새어나왔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한수영이 사납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떤 년인지 보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 없다. 자리를 파토낼 생각으로 일어선 한수영이 대학으로 메신저를 보냈다.
- 오늘 수업은 과제로 대체한다.
.
.
.
계획은 완벽했다. 잦은 구원튀와 실종으로 물의를 빚은 김독자 컴퍼니 대표는 위치 추적 장치가 부착된 옷을 입고 다녔다. 당연하지만 본인 모르게 컴퍼니 일행들이 설치한 장치다.
유상아 왈, 이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된다고.
아무튼, 그것을 추적해 한수영은 김독자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바로 옆 건물 카페에 자리잡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김독자와 자신보단 아니지만 나름 반반하게 생긴 여성. 오늘 하루 동안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 한수영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이 대개 그렇듯, 모든 계획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법이다.
"독자씨는 저런 타입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흠, 독자 형은 차이나 드레스에 가터벨트면 다 오케이일텐데."
"취향과 이상형은 다르니까. 그러고 보니 독자 씨는 참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상아씨?"
"네? 독자씨가 그랬어요?"
한수영은 눈앞에서 떠드는 4인방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딱 들어간 카페에 이길영, 유상아, 이현성, 정희원이 세트로 있을 수 있을까.
뭐, 여기까진 그래도 말이 된다고 치자. 옆자리에 앉은 성좌 3인방은 정말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막내가 벌써 장가갈 때가 오다니. 시간 참 빠르군.]
[독자를 꼬시다니 . . . 저 ■, 서큐버스 아니야? 한 번 확인을 - ]
[어이 누님! 진정해!]
. . . 솔직히 진작에 들통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조합이었다. 격을 숨기지 않았다면 그러고도 남았겠지. 한숨을 내쉬는 한수영을 정희원이 흥미롭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신경쓰여?"
" . . . 아니거든."
떨떠름한 대답에 유상아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사실 이 자리에 김독자에 대한 호감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명의 독자를 위해 유례없는 대서사시를 적은 작가.
한 명의 화신을 위해 수많은 별들에 맞선 대천사.
그들이 구원한 김독자를 시나리오 이전부터 지켜봐온 여사원까지.
어쩌면 얼굴만 잘생겼을 뿐, 성격은 개차반인 유중혁보다 연애 가능성이 더 높은 김독자였다. 그 놈의 빌어먹을 눈치만 아니라면.
은근한 어필에도 '갑자기 왜이러지?'로 일관하는 김독자때문에, 환장한 경험이 다수 있는 여성들이다. 다시 말해 자기들끼리는 연적이 누군지 대강 눈치를 챈 상태였다.
여기서 머리가 꽃밭인 우리엘은 '어차피 독자는 중혁이 아니면 나를 가장 좋아해.'로 생각하고 있어 딱히 치정싸움엔 개입하지 않는 편이었다. 따라서 부딪히는 사람은 주로 유상아와 한수영이었다.
"그런 것 치곤 눈을 떼질 못하던데?"
유상아의 뼈있는 말에 한수영이 지지 않고 말했다.
"사돈남말하네. 너아말로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
이상한 기류에 이현성과 이길영이 입을 다물었다. 둘다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 한 번 불이 붙으면 중재가 어려웠다. 이현성이 자신의 아내를 힐끗 쳐다봤다. 입술에 걸린 흥미진진한 미소가 아무리봐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우리엘을 진정시킨 제천대성이 그 대치를 보더니 장난 꾸러기처럼 웃었다.
[여난은 영웅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
[갑자기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두 여자의 기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생사를 동고동락한 화신끼리 고작 좋아하는 남자 한 명 겹쳤다고 사생결단을 내지도 않을 뿐더러, 오늘은 공공의 적이 있었다.
"야, 우리끼리 이래봤자 아무 소용없어."
" . . .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내 두 여자들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자 다시 김독자와 그 소개팅 상대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아직까진 순조로워 보였다. 아니, 꽤 죽이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주문한 커피가 식어가는 데도 둘 사이에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으니까.
"얼씨구? 웃어?"
감시자들의 염원과 다르게 이대로 가다간 커플이 성립될 게 불보듯 뻔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음? 저 아이는 . . . ]
카페문을 열고 들어간 순백의 여자아이. 처음보는 얼굴이었으나, 느껴지는 격이 매우 낯익었다. 일행들도 금새 아이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어?"
"쟤가 왜 온거지?"
이 와중에 눈치 빠른 작가는 [예상표절]로 김독자가 느닷없이 소개팅 자리에 나선 이유를 추리해냈다.
"어휴. 저 멍청한 자식."
아이가 김독자를 향해 말했다.
"아빠앗."
.
.
.
"김독자입니다."
"강예원이에요."
첫만남은 괜찮았다. 어플로 서로 취향이나 성격이 부합하는 상대를 만날 수 있었기에, 대화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강예원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한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는데. 이는 그녀가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구원의 마왕이 이렇게 재밌는 분이실 줄은 몰랐어요."
"하하 . . . "
유명세가 독이 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건가.
그 뒤로 이어진 일방적인 대화에 나는 쓴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까지 와준 것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했기에 입가엔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지만. 그마저도 슬슬 힘에 부쳐 입꼬리가 경련하고 있었다.
"혹시 취미가 뭐에요?"
"책 읽는 걸 좋아합니다."
"아 맞다!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하셨는데. 깜박 잊고 있었네요."
" . . . "
이런 식의 영양가 없는 대화가 반복되니, 심신이 서서히 지쳐갔다.
소개팅 어플, 쓸모 없구나.
이럴거면 차라리 아침에 한수영한테 얻어맞고, 그걸 구실로 자리를 파했어야 했는데 . . .
어쩌면 '예상표절'로 이 미래를 엿본 한수영이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 메소드 연기를 펼친 것은 아닌지, 정말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말이죠 - "
츠츳!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까 생각하던 와중에, 등뒤에서 익숙한 격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느껴져서는 안 되는 격이었다.
"비유?"
"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새하얀 소녀가 있었다. 백발과 금안을 갖춘 아이. 어딘가 신유승을 닮은 외모는 영락없는 비유의 인간 폼이었다.
나는 도깨비 통신으로 비유를 불렀다.
- 비유야. 여긴 어쩐 일로 왔어?
답신이 곧장 왔다.
- 아빠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도우러 왔어.
그리고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나를 향해 말했다.
"아빠앗."
"아, 아빠?"
당황한 강예원이 나와 비유를 번갈아쳐다봤다.
"독자씨, 유부남이셨어요?"
"아 그게 - "
비유가 선수를 쳤다.
"아줌마."
"으, 응?"
"우리 아빠는 왜 만나는 거에요?"
비유의 시선을 받은 강예원의 팔에 닭쌀이 돋았다.
마냥 어려보이지만 비유는 이 세계선의 도깨비 왕이다.
격을 감췄다 해도, 흘러넘치는 현기는 일반 화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 "
"돈 때문에?"
" . . . "
"지위. 명예. 사람들의 우러름."
" . . . "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비유가 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요, 아빠."
". . . 그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예원씨. 죄송하지만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나 봅니다."
[설화, '나는 나쁜 남자'를 획득했습니다.]
나는 형식적인 인삿말을 남기고 비유와 함께 카페를 나왔다. 망한 소개팅은 아쉽진 않았다. 다만, 당초 목표로한 비유의 소원 들어주기는 실패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함께 길을 거릴던 비유가 내 눈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하지마. 나도 저런 엄마는 필요없어."
영특한 아이답게 내가 여기 온 목적도 파악한 낌새였다. 그럼에도 나는 구태여 말했다. 그것은 그동안 아이의 이야기와 고민을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이기적인 속죄였다.
"그래도 미안해. 아빠가 비유에게 신경을 못 써줘서."
". . . 알면 잘해줘."
"응. 많이 놀아줄게. 비유의 이야기도 열심히 들어주고."
전처럼 시나리오로 화신들을 확대하는 일은 없지만, 비유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이야기꾼이었다. 내가 신경을 못쓴 사이, 아이는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내 진심어린 사과에 비유의 얼굴에도 그제서야 웃음꽃이 피었다.
"약속한거야!"
고개를 끄덕여주자 싱글벙글 웃은 비유가 허공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불완전한 시스템을 보수하기 위해 순간이동한 것이다. 나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이내 옆건물에 있던 카페로 들어갔다.
"그래서, 다들 뭐하시는겁니까?"
급히 신문으로 얼굴을 가려봤자, 누가 누구인지 다 보인다. 그나저나 저 세명은 이번에 월드투어 간다고 하지 않았나? 왜 여기 모여있는 거야?
"쳇. 들켰네."
[들켰군.]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안 들키길 바라는 게 이상한 것 아닙니까?"
자기들 딴엔 숨긴다고 숨긴거겠지만, 아주 난리법석을 피우는 데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남은 커피를 원샷한 한수영이 내게 질문했다.
"잘 됐냐?"
질문하면서 웃는 것이 이미 결과를 알고서 물어보는 듯 했다. 하여간, 성격 나쁘긴. 그래도 아침처럼 꽁해있는 것보단 이편이 나았다.
"망했지. 애초에 내 지위만 보고 온 사람이었어."
말하면서도 입 안이 썼다. 내 표정을 본 동료들이 태세를 바꿔 소개팅 상대를 욕하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엘은 정말 입에 담기 힘든 . . . 다소 폭력적인 표현을 크게 외쳐 카페에서 쫒겨날 뻔했다.
아무튼, 모두들 한 마음 한 뜻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일행들의 온기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마음 속 공백은 채워진지 오래. 어쩌면 내가 느꼈던 허전함은 모두가 평화롭기 때문에 느낄 수 있던,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니었을까.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다가 문득 정희원과 눈을 마주쳤다.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이왕 여기까지 나온 거, 꽃구경이나 하고 가죠."
일행들이 전부 깜짝 놀랐다. 원래 이런 건 상아씨나 아이들이 먼저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이내 들뜬 호응이 잇따랐다.
"피크닉이다!"
"지혜랑 유승이, 하영이도 불러야겠네. 수업 중일려나?"
"누나라면 수업 째고 나올 걸요."
"수업은 들어야지."
"필두 씨는 어디있을까요?"
"장소는 어디로 합니까?"
"음, 근처에 벗꽃 명소가 있긴 해요. 한 번 알아볼게요."
[칫. 유치하게 . . . 윽!]
[좋으면서 툴툴대긴.]
[오랜만에 술이나 마셔야겠군.]
나는 즐겁게 카페를 나서다가 문득 언급되지 않은 두명이 떠올라 물었다.
"근데 설화 씨와 유중혁은 어디있습니까?"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폭발음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하늘에서 누군가의 멱살을 틀어쥔 유중혁이 떨어졌다. 옛 기억이 떠올라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근데, 도대체 상대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유중혁이 저렇게 빡이 돈 것일까?
"네놈. 감히 이설화를!"
"오,오해예요! 저는 저 여자가 나올 줄 몰랐습니다!"
"몰랐는데 어떻게 자리에 합석한 거지?"
"그러니까 오해라고요! 원래 설화라는 여성분께서 나오는 자리가 아니었다고요!"
. . . 뭔가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옆에서 한수영이 내 생각을 그대로 읊어줬다.
"이설화가 대타로 나갔나 보네."
"그러니까."
이설화 성격상 이유만 합당하다면 쿨하게 승낙했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게 우연치 않게 유중혁의 눈에 띄어 이 사단이 난 것이고.
"어이 대표. 저것 좀 말려봐. 이러다 김독자 컴퍼니 괴담에 하나가 더 추가되겠어."
"도대체 그런 건 누가 만드는 거야 . . . "
아무튼 나와 일행들이 나서서 뜯어 말린 덕에 괴담 추가(?)는 막을 수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이설화가 유중혁을 갈구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우리는 꽃길을 걸었다.
"어, 지혜 누나? 어떻게 왔어?"
"병가 썼지."
"누나가 어디가 아프다고 . . ."
"마음이 아프다고 했어."
"퍽이나 되겠다."
도중에 학교를 짼 이지혜가 합류하고.
"나만 빼놓고 이런 재미난 걸 즐기게 놔둘 순 없지!"
"왔냐."
텐션 높은 장하영이 따라붙고.
"독자 아저씨! 필두 아저씨랑 명오 아저씨도 데려왔어요!"
"쯧. 꽃구경이라니. 답지 않게."
"그래도 기왕 만든 자리니 참석은 해야지."
공필두와 한명오를 드래곤에 태우고 등장한 신유승이 합류했다. 뒤이어 도착한 장소에도 반가운 분들이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
"기다리고 있었단다."
[선은 잘 봤니?]
나란히 발맞춰 걷는 두 분의 어머니. 그들의 품만큼이나 따스한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나무가 겆히고 드넓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는 이곳이 벗꽃 명소라 확신했다.
"이곳에 돗자리를 폅시다, 여러분."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우리는 강을 등진 들판에 앉아, 유중혁이 제작한 도시락을 하나씩 낀 채 담소를 나눴다.
[좋구나.]
흥이 오른 제천대성이 천상에서 훔친 과실주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도수는 약하지만, 특유의 향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우리는 봄에 취해 조금 더 진솔해졌다.
그러다 문득 시나리오 이야기가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계의 신격의 습격이 시작되기 직전, 일행들이 가진 짧은 휴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독자 씨는 개인 시나리오를 받으셨죠."
"그랬습니다."
황당한 시나리오였지. 어렵고 난해하고 . . .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일행들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데자뷔가 느껴졌다.
- 아주 커다란 집을 사서, 다같이 살면 좋겠네.
그렇게 말했을 때처럼, 떠들썩했던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정희원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웃으니까 인물이 달라지네. 평소에도 좀 웃고 다녀요."
"인정."
"뭐, 울상인 것 보단 낫네."
그리고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중간에 뚜렷한 오징어니, 잘생긴 오징어니 하는 단어가 들려왔다. 나도 슬슬 맛이 가는지, 굳이 반박하기 위해 썰전에 참여했다. 그렇게 투닥거리고, 웃고 떠들고, 베불리 먹다가 . . . 들판에 누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의식이 끊기기 전, 한 문구가 떠올랐다. 내 이야기가 한편의 책이라면, 그 마지막을 장식할 문장. 그것을 속삭이며 나는 잠에 들었다.
'저들을 좋아해서, 나는 이 세상이 좋아졌다.
.
.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해서 세상이 다 좋아진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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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잔뜩 마신 지혜는 다음날에 늦게 일어나 소개팅에 늦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