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영은 멀리서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김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자식 또 뭘 꾸미는 것 같은데."
며칠 전부터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로 바삐 움직이는데, 대체 뭘 그리 열심히 하는 건진 모르겠다.
뭐, 아마 다음 시나리오 준비겠지, 하며 한수영은 고개를 돌렸다.
모처럼 일행들에게 찾아온 평화였고, 김독자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를 기다리는건, 아마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걱정은 되는....... 아냐 내가 뭔 생각을!'
한수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내었다.
"야, 이것 봐라 신유승!"
"나도 받았거든?"
"헤헤....."
쯧, 바보가 셋이구만.
솔직히 아이템을 받고 기뻐하는 일행들을 보니 부럽기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한수영, 너 단검 필요하지?"
"어? 어어......"
일행들한테 뭘 자꾸 주더니만, 이번엔 내 차례였는지 김독자는 어느샌가 내 앞에 서서 내 손에 단검을 꼭 쥐어주었다.
"......카사카의 독니? 뭔 이름이 이래?"
"보기엔 그래도 성유물이야. 아마 '그림자 군주'였나 그 성좌가 쓰던 단검일걸."
"뭐, 괜찮네. 잘 쓸게."
다들 받은거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김독자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저기 지나가는 유상아도 그랬다.
"야, 유상아. 너 김독자랑 잘 지내냐?"
"....독자 씨요?"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듯한 그녀의 얼굴에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니 한밤중에 김독자 방에 들어가는걸 봤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겨우 억눌렀다.
"요즘 사이 좋아보이던데?"
고개를 갸웃하던 유상아는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음, 그냥 회사 다닐 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지랄하고 있네.
"근데 왜요? 아까 희원 씨랑 지혜도 같은 질문을 하던데."
"아냐, 그냥."
저기 멀리서 김독자가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며 병동으로 가는게 보였다. 지금 보니 내가 15연참 했던 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오늘 밤에 차라도 한 잔 타줘야 겠네. 좋아하겠지?'
즐거운 마음을 숨기며, 나는 일행들과 시간을 보냈다.
*
-똑똑
"아, 들어오세요."
김독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하더니 문을 열었다. 물론 그 앞에는 내가 있었다.
"뭐야, 한수영? 웬일이야?"
"그냥, 너 피곤한 것 같아서."
대충 대답해주고 난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은 공작인지 방은 넓고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노트와 서류, 그리고 이상한 고철 조각이 있었다.
"이거라도 마시고 해. 내가 탄.... 아니 아니, 어떤 공민이 너 전해달라더라."
내가 고심해서 타온 완벽한 비율의 레몬티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내가 연참할 때 도움이 됐던 거니까, 아마 김독자한테도 도움이 되겠지.
"어? 어어, 고맙다 야."
그러면서 그는 슬그머니 책상 위를 치워버렸다.
마치 내가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야, 나도 좀 보자. 뭔데?"
"아직은 안돼. 때가 되면 보여줄거야."
나는 왠지 불쾌해졌다.
매일밤 유상아랑은 여기서 이야기 나누잖아. 서로 다 털어놓잖아. 근데 왜 나는 안되는데? 비지니스 관계여서? 나만 너가 내 동료라고 생각한거야? 넌 여전히 날 믿을 수 없는거야?
"왜, 못 믿겠냐?"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고 말했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보여주기 싫어."
그래, 그런거지? 나만 널 믿고, 나만 너한테 의지하고, 나만 널 바라보고, 나만......
-똑똑
"독자 씨, 저 들어가도 될까요?"
거봐. 또 유상아잖아. 역시 난 믿을 수 없는 거였어.
"씨발, 신뢰 없는 사람은 존나 서럽네."
"아니 한수영, 그게......"
"됐고, 어차피 다음 시나리오 고민하고 있겠지. 뭐, 넌 또 희생이나 하면서 넘기던가."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서, 나는 결국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을 입밖에 내놓고 말았다. 김독자는 내 말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연 문 앞에는 유상아가 서 있었다.
"어? 수영 씨?"
"둘이 짝짜꿍 잘 해먹어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
다음 날이 밝았다.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녀석은 아마도 계속 희생하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겠지. 그래도 악마성 때 그 지랄은 한번이면 충분했다. 더는 겪고싶지 않은 기분이었으니까.
'사과.......해야겠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변에선 공민들이 의식을 잃거나 피를 토하며 쓰러져있었다.
'.........!'
뭔가가 공단의 하늘에, 아니 이 세계의 위에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씨발, 저게 뭐야."
형용할 수 없다. 나조차도, 아니 그 누구라도 형용할 수 없다. 그냥 미친듯이 무력해졌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침묵합니다.]
씨발, 흑염룡 넌 그러면 안되지. 너만큼은 우릴 도와줘야지.
-쩌저저저저저저적!
'끝'이었다. 세계를 먹어치우는 저 존재 앞에서는, 그 어떤것도 소용이 없었다. 무력감이 몸을 덮쳤다. 아니, 공단 전체를 덮었다.
"독자 씨!"
그런데, 그 무력감 속에서, 시커먼 감정들 속에서 홀로 빛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씨발, 신뢰 없는 사람은 존나 서럽네."」
아니야, 그게 아니었어.
[성좌, '구원의 마왕'이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제발, 그러지 마. 제발.
「"됐고, 어차피 다음 시나리오 고민하고 있겠지. 뭐, 넌 또 희생이나 하면서 넘기던가."」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만은 그랬으면 안되는데. 제발, 제발 그러지만 마.
[이것은 독자(獨子)의 설화.]
사과하고 싶었는데. 다시 널 보며 웃고 싶었는데.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의 최가 담화자(談話者)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발, 너 자신을 태우면서 밤하늘을 빛내지 마. 밤하늘 따위 밝지 않아도, 칠흙같이 어두워도 되니까.......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35번 시나리오에서 '알곤킨의 뱀'을 잡을 때....."
그가 천천히 시계탑으로 걸어간다. 자신을 갈아낸 그 걸음걸이는, 그 거룩한 한걸음 한걸음은 누구도 감히 막지 못한다.
-텁
그가 주저앉아있는 내게 자신의 흰 코트를 덮어주었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사과해야 하는데. 넌 잘못이 없는데......
"그리고, 앞으로 일행들 잘 부탁한다."
"씨발, 개소리 하지 마! 지랄 말고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제발, 제발......."
내 목소리는 결국 그에게 닿지 못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빛도, 어둠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눈물로 가득 찬 내 눈에는 모든 것들이 전부 회색빛으로 소용돌이 치는 듯 했다.
[살아 주세요.]
그렇게 우리는 가장 빛나는 별을 잃었다.
*
73번째 마계에서 탈출한지도 어언 3개월. 세계는 아직 혼란스러웠다.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사스콰치'들을 박살내고,
「"35번 시나리오에서 '알콘킨의 뱀'을 잡을 때....."」
'알곤킨의 뱀'을 때려잡았다.
「[살아 주세요.] 」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가 남긴 코트와 함께였다.
그러던 어느날, 코트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시나리오 38번 '시독 코뿔소'를 잡는 도중이었다.
「한수영에게.
아마 이 쪽지를 발견할 때는 내가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침략을 해결했을 때 일거야.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너무 강해 내가 해결할 수 없었다면, 뭐 그렇지 않았길 빌어야지.」
그 녀석 다운 편지였다.
「난 너에게 사실을 알려주기 싫었어. 네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고민하지 않았으면, 네가 행복했으면 싶었거든. 아마 이게 내 마지막 편지일테니 딱히 돌려말하진 않을게. 네가 좋았거든. 네가 사랑스러웠거든, 너를 사랑했거든.」
아, 내 감정은. 이 마음은 이것이었구나.
「그래서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어. 정말 미안해. 뭐, 지금쯤 난 죽어있을지도 몰라. 내 계획대로라면 난 살아있겠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편지로만 말을 전하게 되서 아깝지만, 사랑했고, 사랑한다. 수영아.」
드디어 깨달았다!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다시 만나자, 수영아.
-너의 영원한 독자가.」
이 감정은, 이 마음은 널 위한거였구나. 널 사랑하는 거였구나. 난 널 사랑하고 있던거야.
"언니! 뒤에........"
뒤에서 '시독 코뿔소'가 돌진해왔다.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피하기 싫었다. 피하지 않았다.
-쿵!
이렇게 해서라도, 널 만날 수 있기를.
사랑해, 독자야.
오늘은 독수 '순애' 물이었음
너무오랜만에 쓰는 창작, 필력 많이 죽은게 느껴졌다.
시험 12시간 남았는데 글 쓰고 앉아있는 내 인생이 레전드;;
읽어줘서 고맙고 혹시 고칠 점 있으면 말해줘 고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