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5편https://arca.live/b/reader/30409255?p=1
[제 8612 행성계의 무료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이 뇌리에 들린 이후로 김독자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옥이라....내가 해쳐나가야할 길이군...
상념도 잠시 갑자기 공중에서 흰 털뭉치가 나타나며 외계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아#@!&아#@! ......」
[&아#@!&아#@!.......]
“뭐라는 거야 저거?”
“증강 현실인가?”
“......도깨비?”
다른 이들이 현실을 부정할 때 오직 아까 김독자와 같이 있던 여자가 공중의 털뭉치를 보며 도깨비라고 했다. 제 4의 벽이 도깨비 왕이였다고 했으니 저 털뭉치는 도깨비가 맞을 것이다. 그나저나 한 번만에 어떤 설명조차 없이 도깨비라는 것을 맞추다니 상당히 머리 회전이 빠른 여자다.
“왠지 스페인어 같은데, 제가 한 번 말 걸어볼까요?”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역시 끼리끼리 노는건가. 여자 김독자 같군 진짜 김독자보다는 몇 배는 낫지만.
“......저게 뭔지 알고요? 돈이라도 꿔 달라고 하시게요?”
“그건 아니지만.......”
그 와중 진짜 김독자가 여자 김독자의 생각을 부정하며 말리고 있었고 털뭉치 도깨비가 외계어(?) 대신 한국어를 시작했다.
[아. 아. 잘 들리시나요? 이것 참, 한글 패치가 안 돼서 고생했네. 여러분. 제 말 잘 들리시죠?]
익숙한 언어가 들려와서일까.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정장을 차려 입은 덩치 큰 사내였다.
“이봐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예?]
“영화 촬영입니까? 저 오디션이라 빨리 가 봐야 하는데요.”
옆의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 봐서 무명 배우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캐스팅 디렉터였다면 단번에 뽑아줬을 만큼 패기 넘치는 목소리.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존재는 디렉터가 아니었다.
[아아, 오디션. 그렇구나. 이 시간에도 오디션을 보는 구나. 하하, 이거 자료 조사가 부족했네. 분명 오후 일곱 시 쯤에 유료화 들어가면 제일 많이 따라온다고 그랬는데.]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자, 여러분들. 진정하시고 일단 자리에 앉아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지금부터 중요한 말을 전해야 하니까!]
“뭡니까! 빨리 열차 출발시켜요!”
“누가 기장한테 연락해요!”
“지금 시민 협조도 없이 뭐하는 거야!”
“엄마, 저거 뭐야? 만화야?”
[하하, 시끄럽네 정말.]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도깨비의 안광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뭔가가 퍼버벅, 깨지는 소리가 나고 지하철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어, 어. 어.......”
오디션을 보러 가야 한다던 무명 배우의 이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리던 사내는 동공이 풀린 채 자리에 쓰러졌다.
[이건 영화 촬영이 아닙니다.]
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다시 한 번 이어졌다. 이번에는 기장 타령을 하던 아줌마였다.
[꿈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며.]
하나, 둘. 허공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사람들의 머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도깨비에게 항의했던 사람들.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소란의 기색이 보이는 사람들의 머리에 죄다 바람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지하철은 피바다가 되었다.
[당신들이 알던 ‘현실’도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모두 닥치고 내 말을 들으세요.]
절반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피와 시체 조각이 낭자한 퇴근길의 지하철.
이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강력한 포식자를 앞둔 원시시대의 유인원처럼, 모두가 공포에 질려 도깨비를 보았다.
제기랄 확실하게 지옥은 지옥이군. 초자연적인 존재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다니..
[여러분, 지금까지 꽤나 살기 좋았을 겁니다. 그렇죠?]
노약자석. 도깨비와 눈이 마주친 할머니가 실금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너무 오래 공짜로 살아왔어요. 인생이 너무 후했죠? 태어나서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잘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제멋대로 번식을 해대고! 하! 여러분 정말 좆같이 좋은 세상에 살았네요!]
공짜. 퇴근길 지하철 안에 공짜로 살아온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버는 사람들의 공간. 누군가에게 낑겨서 힘들게 출퇴근하고 택시비가 아까워서 지옥철을타며 치열하게 삶을 이여가려는 현장일텐데....
그럼에도 그 순간 누구도 도깨비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인류 최약병기로 조롱당하고 고작 짐꾼노릇을 하며 받는 돈이라도 아끼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고 강자에게 머리를 굽히며 힘들게 살아가는 내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저 도깨비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런데 좋은 시절은 이제 다 끝났어요. 언제까지 공짜를 누릴 수 있을 리 없잖아요? 행복을 누리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하는 게 상식이지. 안 그래요?]
헐떡거리는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역시 저 입을 찢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려고 할 때 누군가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호, 혹시 돈을 원하시는 겁니까?”
대체 이 와중에 어떤 인간이 그런 용기있는 소릴 지껄일 수 있는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김독자가 아는듯한 얼굴이었다.
“한명오 부장?”
한명오라..짐꾼 노릇을 하며 수 많은 사람들을 봐왔던 경험에 의거하면 전형적인 낙하산, 실력은 없지만 인맥으로 윗자리에 쉽게 들어오며 밑의 사람들만 갈구고 잘되면 내탓 잘못되면 니들탓을 시전하는 돈이 최고인줄아는 자본주의의 노예로 보이는데..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습니다. 받으시죠. 참고로 저,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까지 꺼내 보이는 한 부장의 패기에 사람들이 응원 섞인 시선을 보냈다. 테러범에 대항하는 구원자라도 보는 분위기였다.
“얼마면 됩니까? 큰 거 한 장? 아니면 두 장?”
겨우 부장급이 저렇게 많은 수표를 지갑에 넣어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역시 낙하산이 맞다. 삥땅도 쳐놔서 비자금도 꽤 만들어 놓은 것 같고.
[흐음, 그러니까 당신네들 돈을 준단 말이죠?]
“그, 그렇습니다! 지금 가진 현금은 얼마 안 되지만......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돈, 좋죠. 많은 인간들의 상호 주관적 합의가 깃든 식물의 섬유.]
그 말에 한 부장의 안색이 밝아졌다. ‘역시, 돈이라면 다 된다니까’라는 표정이었다. 불쌍하게도. 그 방법은 좋지 않을 건데....
“저, 지금 가진 건 이것뿐이니까 이거라도―”
[어디까지나, 당신네 시공간에서는 그렇다는 얘기에요.]
“예?”
다음 순간, 허공에서 불길이 일었다. 한 부장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수표들이 모조리 불타올랐다. 기겁한 한 부장이 비명을 질렀다.
[그딴 종이는 거시 차원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한 번 더 그딴 짓을 하면, 머리를 터뜨려버릴 거니까 명심하세요.]
“으, 으으.......”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금 공포가 번져갔다. 다들 뒷내용이 빤한 소설책 같은 표정들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쉬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그리고 오직 김독자만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휴, 이렇게 떠드는 시간에도 당신들 부채는 쌓여가고 있다고요. 뭐, 그래요. 제가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직접 돈을 벌어보는 게 빠르겠죠?]
그 말과 동시에 도깨비의 뿔이 안테나라도 된 듯 길어지며, 몸체가 열차 천장 쪽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무료서비스가 종료되었다는 것과 같은 톤의 메시지가 뇌리 속으로 들려왔다.
[#BI-7623 채널이 열렸습니다.]
[성좌(星座)들이 입장합니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사람들과 김독자와 나에게도 위쪽으로 제각기 작은 창이 떠올랐다.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끄적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