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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편

ㅡㅡㅡㅡㅡ


우리는 삼주동안 말 그대로 강호를 유랑하듯 천천히 이동했다. 가는 길에 틈틈이 희원 언니와의 대련과 아빠의 무공인 백청신공(白靑神功)을 수련했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대성(무공을 마스터 하는 것)하면 전인(電人)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벼락이 된다니. 과연 진짜일까?


역시 무공은 짜릿하고 신나고 늘 새로웠다.


그렇게 가다보니 이제 무림맹이 코 앞인 상태.


남은 거리는 경공으로 이동했다.

아빠가 그 내공 아껴둬서 뭐할거냐고 하면서 경공 대결을 펼쳤다. 나는 죽어라 뛰었다. 죽어라 뛰다보니 온몸이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물론 내가 졌다.

내공의 차이도 있었고 경공의 숙련도 차이도 있었다. 체력의 차이도 있었다. 그냥 날 놀리고 싶으셨나 보다. 어쩔 수 없었다. 아빠랑 언니들은 교에서 정상급의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옷도 말끔하고 땀 한방울 안 흘리는거겠지. 나랑은 차원이 다르다.


"저기 보이지? 저기가 바로 무림맹이야."


아빠가 가리킨 곳에 우리 마교처럼 거대한 성이 하나 있었다. 성벽 위로 무림맹원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별 거 없지? 저거 넘어가기 엄청 쉬워."


이 말은 아빠가 저 삼엄한 무림맹의 경계를 뚫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매일매일 아빠가 신기했다. 나중에는 용이라도 한 마리 잡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럴일은 없겠지만.


"일단 맹주님부터 뵈러 가자."


아빠와 언니들과 몸을 날려 무림맹 앞에 위치한 큰 길에 도착했다. 아직 비무대회가 열리기 사흘 전이었지만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아빠는 길거리에서 빙당(氷糖, 얼린 엿, 아이스크림의 일종)을 하나씩 사서 입에 물려주었다. 시원했다.


"두 분은 각자 볼 일 보세요."


언니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아빠는 빙당을 쪼옥쪼옥 빨면서 대문을 지키고 있는 위사들에게 건들거리면서 다가갔다.

직급이 높아보이는 위사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비무대회는 사흘 뒤에......"

"이래도요?"


아빠가 품에서 푸른 옥패를 내보이자 위사 아저씨들이 허둥지둥 하는게 보였다. 아빠가 나에게 손짓했기에 나도 아빠처럼 빙당을 쪼옥쪼옥 빨면서 아빠에게 걸어갔다.


내가 다가가는 사이, 직급이 좀 더 높아보이는 할아버지가 나왔다. 책임자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아빠도 예를 갖췄다.


그 모습을 본 책임자와 위사 아저씨들이 흠칫 놀랐다. 뭐지? 인사 처음 받아보나? 하긴, 마교주에게 인사를 받긴 처음일 것이다.

아무래도 저 옥패는 아빠가 마교주임을 알려주는 것인가 보다.


곧 안쪽 건물에서 안내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왔고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회의전의 문 앞에 도달했다.

나는 어째선지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은 죄 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는건가? 아니면 무림맹의 웅장한 기세에 밀린건가? 어느쪽이든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신 다음 회의전의 문을 열었다.


"오! 자네 왔는가."

"오랜만입니다, 맹주님."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아, 이 아이는 자네 딸이로군. 아주 훌륭한 마교주가 되겠어."


무림맹주, 파천문주, 파천검성, 여중제일인, 천하제일고수로 유명한 '남궁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덩치가 굉장히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였다. 아빠보다 키가 컸다. 그리고 굉장히 호쾌한 성격을 가지신 분 같았다.


아빠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십년지기 친구를 만난 것 처럼 보였다. 무림맹주에게 훌륭한 마교주가 되겠다는 칭찬울 듣다니. 강호 역사상 이런 일이 있었을까? 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그냥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역시, 포기하면 편하다. 


아님 말고.


"크흠..."

"대체 이게 무슨....."


맹주님의 덩치에 가려서 이제야 봤는데 길게 뻗은 탁자의 양옆으로 수염난 할아버지들이 깜짝 놀라며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딱 봐도 우리 이야기였다.


"반갑습니다, 강호의 장문인, 가주 선배님들. 오랜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교주 김비유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전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기에 나 나름대로 최대한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자.


"쯧...."

"......"


못 볼 걸 봤다는 듯, 혀를 차거나, 아예 무시를 하거나, 대놓고 인상을 찌푸려댔다. 


그래도 인자해 보이시는 스님은 합장을 해주었고, 포권을 취해주며 짧게 인사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정도면 우리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린 것이다.


뭐, 이 정도는 어느정도 각오하고 왔다. 아빠도 알려주셨으니까. 근데 너무 대놓고 아니야? 이 새끼들이 감히 하늘 같은 우리 아빠한테. 후......착하고 귀여운 내가 참아야지. 쓰읍 하, 쓰읍 하. 심호흡하자 심호흡.


"아, 일단 회의 끝나고 보세. 맹주전으로 모셔라."


맹주님이 손짓하자 방금전의 안내인이 다시 우리를 안내했다. "맹주전으로 모셔라"라는 말에 회의전이 크게 술렁였다. 당연히 무림공적을 자기 방으로 초대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놀랄만도 하다. 역시 무림맹주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아주 그냥 상여자셨다.


나는 수군대는 소리를 무시한 다음 무림맹 내부를 아빠랑 산책하듯 걸었다. 척봐도 이곳을 공들여서 가꾼 것이 보였다. 맹주님, 덩치와는 다르게 이런 예쁜 것을 좋아하셨나보다.


나는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촌놈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며 걸었다. 물론 나는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이 맞다. 그렇기에 맘 편히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

.

.


회의전.

중심의 무림맹주 남궁민영을 기준으로 우측에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좌측에는 세가연합의 세가 가주들이 일렬로 앉아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현이 짜증섞인 어조로 말했다.


"맹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사악한 마두들을 부른 것이오? 정녕 미치셨소?"

"궁금하오? 당신네 망나니같은 아이들 혼 좀 내려고 불렀소."

"허,......"


헛웃음 소리와 수군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림사의 방장 혜민 스님이 조심스레 말했다.


"시주에게 묻겠소, 만약 저 시주들이 우승 한다면......정말, 상품을 넘겨주는 것이오?"


혜민 스님은 지금, 소림사의 보물인 대환단이 마교의 손에 넘어가는 걸 우려하고 있었다.

몇 십년에 한 번 만들어지는 대환단은 그 가치가 어마어마했고, 정파 하면 떠오르는 단환이기도 헀다.


"이미 모두 결정된 사안이오. 그들에게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맹주!"

"이건 너무 합니다!"


순간, 남궁민영이 발끈했다.


"너무하다고 했소? 내가 보기엔 그대들이 더 너무하오. 예전에 이년 연속으로 흉년이 지속되었을때, 그대들은 뭐하고 있었소? 양민들을 구휼한 적이 있소? 아니면 재산을 나눠준 적이 있소? 지금의 마교주가 없었다면 수천명은 굶주려 죽었을 거요. 그뿐만이 아니오. 그대들이 언제 스스로 나서서 산적들을 토벌했소? 아니면 수적들을 토벌했소? 마교주는 그랬소. 그래놓고 자신의 공을 모두 무림맹에 돌려주었소. 생색도 내지 않았지......그대들이 당대의 마교인들보다 더 나은게 무엇이오? 안면몰수하고 큰소리 치는 것? 수치스러운 줄 아시오!"


남궁민영의 일장연설에 모두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회의가 억지로 진행되었다.


.

.


"제갈가주, 정말 이대로 두고 볼 겁니까?"

"맞습니다! 독단으로 마교주를 초대하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권력남용입니다!"

"방장 스님께선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허어.....아미타불....."


남궁민영이 회의전을 나가자, 남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세가 연합의 가주들이 모였다.


세가연합.

남궁세가, 하북팽가, 제갈세가, 사천당가, 황보세가, 산동악가, 진주언가, 위씨세가, 공손세가, 사마세가, 모용세가, 백리세가, 서문세가, 독고세가, 구양세가 등등. 명문가들의 연합이 당대의 강호에서 구파일방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구사하고 있었다.


무림맹주인 남궁민영도. 남궁세가의 사람이었다.

그런 자존심 높은 가문들의, 향후 무림을 이끌어갈 후기지수들이 마교의 소교주에게 패배한다면 정파 무림의 크나큰 망신이 될 것에 뻔했다.


백도는 명예와 체면에 미친 자들.

그들은 이런 평화로운 시기를 틈타 최고가 되려고 자기들끼리 경쟁하는 자들이었다.


"괜히 저희가 손을 썼다가 들키면 더 큰일입니다."

"그럼 눈 앞에서 대환단을 뺏기란 말인가?"

"그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진정들 하시고......"

"우리 아이들을 믿을 수 밖에 없는건가요?"

"아무래도 그것말곤 방법이 없는 것 같소."


회의전이 다시 한번 시끌벅적해졌다.


.

.

.


"비유야, 둘러보고 싶으면 좀 더 둘러봐. 나는 맹주님이랑 이야기 좀 할게."

"진짜요? 그럼 조금만 더 둘러볼래요."


언제 내가 이런 경험을 해보겠는가? 지금 당장 뽕을 뽑아야 했었다. 그렇기에 나는 미친 사람처럼 성 내부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우리 교의 성과는 구조가 달라 둘러보는 맛이 있었다.


근데 너무 미친듯이 휘젓고 다니다가, 나는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자승자박이었다. 무림맹에서 길을 잃은 마교의 소교주는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쓸모없는 업적 하나를 세웠다. 이 정도면  소교주의 이름값이 아깝지 않았다. 음!


......사실 나는 이대로 체포 당해 뇌옥에 갇혀도 할 말이 없었다. 영락없는 침입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나는 무심결에 목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래도 이거라도 있으니 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맹원 아저씨들을 찾아나섰다. 이 넓은 건물 안에 관리인 한명은 있겠지?


'말소리가 들려.'


민감한 내 귀는 말소리를 감지했다. 걷다보니 고급진 외관을 가진 방이 나왔다. 귀빈 접대실인가?

대화소리는 그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을 발견한게 어딘가? 나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창호문을 열고 사람이 한명 나왔다.


걸어나온 사람은 굉장히 젊었다. 아직 스무살도 안된 나이? 복장은 딱 봐도 나 "명문세가의 자식이오"라고 적힌 고급스런 비단 옷이었다. 아무래도 이 방은, 가주들과 같이 온 소가주나 후계자같은 아이들이 회의가 끝날때까지 잠시 머무는 곳이 분명했다.


그의 옷은 대충 흰색으로만 이루어진 내 옷과는 확연히 차이났다. 지금 입은 내 흰색 옷도 경공으로 달려오다가 흘린 땀과 흙먼지 같은 것으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에 후줄근하고 지저분 해보였다. 머리카락도 산발이었다.


물론, 나는 이런거 하나도 신경 안쓴다. 왜냐고? 아빠가 멋지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 말 들어서 잘못된 거 하나도 없었다. 아님 말고.


"뭐야, 개방(거지들로 이루어진 방파)에서 오셨나?"


그가 이죽거렸지만 녹색 장삼을 입은 것을 보니, 사천당가의 사람이었다. 아빠랑 설화 언니가 털어간 곳이라 나는 순간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이 사람이 갑자기 문을 두들겨서."


안쪽에도 사람이 더 있었나보다. 나도 이곳에 엄연히 손님 자격으로 왔고 아빠가 또래 친구들이랑 친분도 쌓으라고 했기에 자신있게 말했다.


"안녕? 난 십만대산에서 온 천마신교의 소교주 김비유라고 해. 별호는 없고.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

"......"

"......"


이놈들은 예의가 없다. 내가 출신, 소속, 이름, 아직 별호가 없는 무명소졸인 것 까지 밝혔는데, 자기들도 소개를 해야하는 것 아닌가?

이래서 요즘 애들은......떼잉, 쯧쯧.


정파 무림의 미래가 참으로 어둡구나......


"마, 마교의......소교주?"

"응. 그게 나야."


당가의 친구가 놀라더니 다른 친구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시선을 교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이렇게 계속 문 밖에 세워놓는게 말이나 되는건가? 그러나 나는 아직 들어오라는 말을 듣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예의범절은 중요했다. 특히 이런 자리에선 더 더욱.


스릉.


응? 이건 분명 칼 뽑는 소리다. 그리고 뭔가 좀 더 서란스라워졌다. 안쪽에서 들린 것 같은데......혹시 여기서 자기들끼리만 아는 재밌는 놀이라도 하고 있는건가? 궁금해 죽겠다. 나도 끼워달라 해야지.


"다시 한번 묻지. 그대가 정녕 마교주 김독자의 딸인가? 지금 그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는건가?"

"음...내가 소교주임을 증명할 방법은 맹주님한테 여쭤보면 될거고, 내가 자기소개를 했으니 너희도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는 거?"

"......어이가 없군."


당가의 친구가 뒤로 물러섰다. 다른 친구들이 나왔다. 오, 드디어 나랑 인사해주는 건가?


근데 뭔가 이상했다. 나를 무슨 사악한 악당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기도 꺼내들고, 역시 진검이라 그런지 다들 멋있었다.


검을 든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도를 쓰는 친구, 권법을 쓰는지 우락부락한 체격에 맨손인 친구도 있었다. 그들이 나를 빙 둘러쌓다. 봤는가? 내가 이렇게나 인기가 많다. 


아무래도 신고식? 같은 걸 하려는 건가 보다. 완전 기대된다.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정파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소."


......응?


"잠깐,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나 여기 맹주님 초대를 받아서 왔어."

"개소리! 맹주님이 왜 맹에 마교놈들을 초대한다는거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러게, 나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근데 진짠데....."


억울하다. 길 한번 잘못 잃어버렸다고 나도 아빠처럼 무림공적이 되게 생겼다.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저 칼에 썰리는 건 내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했다.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첫번째는, 목검을 꺼내들고 아주 멋있는 칼춤을 한번 추면서 17대 1의 전설을 세우는 것이고.

두번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젠장, 내가 목검이라서 참는다.

절대로 내가 약해서 도망가는게 아니다.

진짜다. 반박은 안 받는다.


나는 생각을 끝내고 실력이 가장 떨어져보이는 친구한테 달려들었다. 내 속도에 친구가 당황하는 틈을 타 발을 걸고 밀어 뒤로 나자빠뜨렸다.


포위망이 뚫리자 죽어라 경공을 펼쳤다. 이래서 아빠가 나에게 경공 수련을 매일 시킨 것일까? 진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뒤쪽에서 친구들이 고함을 치면서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게 섰거라!" 같은 말이었다.


칼을 들고 죽일듯이 쫓아오는데 멈추라고? 너희는 멈추겠냐? 


나는 달리는 와중에 목검을 꺼내들었지만.

아차, 목검이었지......

곧 목검임을 깨닫고 다시 도로 집어넣었다. 하......


결국 나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 단전에 힘을 주고 내력을 불어넣으며 소리 쳤다.


"사람 살려!!!"


제발 누군가가 들었길 빈다. 아무나 와서 내 오해 좀 풀어주길 바란다. 나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사람 살려!!!"


그렇게 무림맹에선 마교의 소교주 김비유의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음?"

"비유?"


대충 상황을 눈치챈 김독자와 남궁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맹주전을 뛰쳐나갔다. 무언가 사고가 터진 게 분명했다.


"미안하네, 내 독단으로 자네를 초대하다보니....."

"조금 언질이라도 넣어주셨어야죠."

"미안하네....."


김독자는 비유의 목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착한 곳에는 비유가 쫓기고 있었다.

김독자는 남궁민영과 비유의 앞에 내려섰다.

비유가 그새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쫓아온 아이들이 남궁민영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보게!"

"맹주 아줌마! 아빠! 저는 쟤네랑 친해지고 싶어서 자기소개를 했을 뿐인데 갑자기 칼 뽑고 쫓아왔어요!"


비유가 맹주 아줌마라고 부르자 아이들이 기겁했다. 남궁민영은 개의치 않고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인가?"

"그, 그것이......"

"맹주님, 정말......마교의 무리들을 초대하신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다."


아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그녀의 옆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흉흉한 마기(魔氣)를 쏘아보내고 있는 김독자의 존재가 그를 증명해주고 있으니까.


그 기세에 아이들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거나 몸을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시 시작했다.

남궁민영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제지했다. 기세가 수그러들자 아이들의 호흡이 편해졌다.


명문세가의 후계자들로만 이루어진, 십여명이 넘는 무리였지만, 단 한명의 기세도 똑바로 버티지 못했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일단 누가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이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마교의 교인들은 무림맹의 귀빈으로 와 계시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멀리서 소란을 들은 맹원들과 가주들, 장문인들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남궁민영은 "분란을 일으키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휴...영락없이 잡히는 줄 알았네."

"다친 곳은 없니?"

"완전 멀쩡해요."

"다행이구나."


김독자가 비유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 없었다. 남궁민영이 피식 웃었다.


"아가야, 정말 현명하게 잘 대처했다. 혈기왕성한 나 였으면 그 자리에서 다 때려눕힌 다음, 정당방위라고 우겼을텐데......자네, 아이를 제대로 키웠군."


남궁민영의 발언에 비유와 김독자도 긴장이 풀어져 웃기 시작했다.


"과찬이십니다. 우리 딸이 착해서 그런 겁니다."

"그건 맞지요. 제가 착한 거지요. 아~17대 1 찍을 수 있었는데......제가 참았습니다."

"이 년 좀 보게, 하하하하!"


셋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자네, 괜찮으면 대회 전까지는 이곳에 머물지 않겠나? 우리 파천문 애들을 좀 소개 시켜주고 싶은데, 다 자네 딸이랑 나이가 비슷하네."

"음, 저는 근처에 일이 있는데...... 비유야, 계속 있기는 좀 그렇지?"


음, 아무래도 불편하긴 불편했다. 또 싸돌아다니다가 만나면 그리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여기 밥이 맛있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겠나?"

"하하, 그리 말씀하시니 한 끼만 먹고 가겠습니다."


밥이 맛있다......밥이 맛있다......

그래, 무림맹에 왔는데 밥 한끼 먹여보내야 강호의 도리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도 그 호의를 돌려주어야 강호의 도리였다.


"아빠, 저 맹주님 제자 분들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맹주님 제자들은 괜찮을 것 같은데......"

"역시! 자네 딸이랑도 말이 잘 통하는구만! 원한다면 며칠은 더 있어도 된다."

"음, 그럼 맹주님.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무래도 맹주님은 내가 마음에 쏙 드셨나보다.

이제 이틀 동안은 여기서 놀고 먹으면 될 것이다.

언니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텐데......언니들 대신해서 한 그릇 든든하게 먹고 가야겠다.


맹주님은 지나가는 맹원 하나를 불러 뭐라뭐라 말했다. 아마, 제자들을 데리고 접대실로 오라는 말과 식사를 준비하라는 말일 것이다.


접대실로 들어가자 고급스런 식탁과 의자, 가구들과 그림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고풍스럽고 아늑한 분위기여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잠시 뒤, 인기척이 여러개 느껴지더니 키 큰 남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이 우리 아빠보다 잘 생겼는데, 동시에 좀 재수없게 생겼다. 세상 혼자 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근데 문을 열고 우리 아빠를 보자 놀란 얼굴이었다. 우리 아빠를 아는 건가?


그 뒤로 진짜 내 또래로 보이는 친구들이 들어왔다. 여자 두명에 남자 둘이었다.


"어? 중혁아, 안녕. 오랜만이다."


이름이 중혁이었는가 보다. 아빠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중혁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누군지 아세요?"

"아, 옛날에 내가 밥 먹고 있는데 쫓아와가지고 체포하겠다면서 큰소리 치다가 한 대 얻어맞은 애야. 젊은 친구가 꽤 대단해서 밥 한 그릇 먹이고 돌려보냈어."

"아, 그렇구나."

"크하하하! 아이고 우리 중혁이!"

"크흡!"

"풉!"

"......닥치십쇼."


맹주님하고 파천문 친구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웃음을 참는게 보였다. 그 와중에 중혁이라는 사람은 화가 났는지 얼굴이 벌개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맹주님이 상황을 진정시키자 친구들이 인사를 시작했다.


키가 큰 순서대로 이지혜, 장하영, 이길영, 신유승이었다. 유중혁은 아이들의 인솔자라고. 28세라니 보기보다 나이가 꽤 많았다. 이지혜는 한 살 언니였고, 장하영은 나랑 동갑이었다. 이길영과 신유승은 두 살 동생이었다.


"저기...진짜 마교주이신가요?"


한바탕 자기소개가 끝나자 유승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옆에 길영이와 하영이도 조금씩 눈치를 봤다. 귀여운 녀석들.


"그럼, 가짜 마교주도 있니?"

"헉......"


유승이가 조금 움찔하는게 보였다. 마교에 공포증이라도 있는건가?


"그......교주님?"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아빠는 손사래를 치며 호칭을 정정해주었다. 이건 나도 좀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아빠를 교주님이라 부른 적이 없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그냥 아빠라고 불렀다.


아빠를 아저씨라고 부를 수 있게 되자 친구들이 당황했다. 눈을 보니 '마교주가 정말 이런 사람이었나?'라고 적혀있었다. 대체 다들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건지? 너무 억울하다.


"그럼, 나 질문 몇개만 해도 되?"

"음, 일단 해봐."

"그....소문이 있는데....마교 사람들은......진짜 인육 먹어?"


아빠가 피식 웃으시며 말했다.


"응. 정확히는 옛날에. 가끔씩? 지금은 안 그래."


음? 뭐라고? 진짜 인육을 먹었다고?

나름 심각한 이야기였지만,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으셨다.


"이 이야기를 들어도 될지는 모르겠네......암튼. 예전에, 내가 교주가 되기 전에는 총본산 깊숙한 곳 석실에 백명? 조금 넘는 어린 애들을 한 곳에 밀어넣었거든? 물이랑 아무런 식량도 없이 날카로운 단검 한자루 쥐어줘놓고 최후의 다섯명까지 살아남으래. 그때부터 꽤 끔찍했지. 죽고 죽이고, 죽인 애 한테서 흘러나오는 피로 갈증을 해결하고, 허벅지 살을 잘라서 뜯어먹고, 힘줄은 질겨서 별로 맛은 없었어. 그렇게 다섯명이 살아남으면, 그때부터 이름이 붙어. 이름도 십 호, 십일 호, 십이 호......이런 식으로. 사실 이름이 아니라 번호였지. 그때부터 진정한 마교인이 되는거야. 난 그때 '구십일 호' 였지."


아빠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맹주님도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다.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가 조금 충격적이었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아빠가 숨을 한 번 내쉬고 또 말하셨다.


"그렇게 마교주의 개가 되서 이리저리 불려다니면서 살다가 동기가 전부 죽자 느낀거지. 이건 잘못되었다고. 그때부터 교를 탈출해 도망다녔어. 기연도 좀 얻어서 강해졌어. 그때 만난 스승님의 백청신공(白靑神功)덕을 많이 봤지. 그걸로 다시 교에 쳐들어가 전대 마교주를 죽이고 내가 교주가 된거야. 아, 그리고 도망다닐 때 나한테......독자(읽는 자)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만났어.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부턴 내 이름은 구십일 호가 아닌 김독자가 됬어."


지금까지 내가 들을 수 없었던 아빠의 이야기였다.

저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게 어쩐지 슬퍼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 처하면 보통은 빠져나가기 힘들다. 애초에 저게 잘못된 것이라 생각을 못 할 수도 있다. 보고 배운게 그것 뿐인데......


그런데 아빠는 스스로 교를 뛰쳐나가 닥치는대로 배워서 강해진 사람이다. 시덥잖은 환상 소설을 읽는 취미도 가지고,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도 알고, 사람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아빠였다.


그렇기에 나도 여기에 이렇게 아빠의 딸로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젠장, 이번에 반드시 우승해서 아빠한테 대환단 하나 드려야겠다. 반드시.


"그러니까 인육을 먹는다거나 인체 실험을 한다는 말은 어느정도 사실이었지, 지금은 내가 전부 없앴으니까 걱정들 하지 마렴."

"후.....나도 자네한테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군. 괜찮은가?"

"하하하. 괜찮습니다. 아, 내가 너무 분위기를 무겁게 했나? 일단 밥 부터 먹을까요? 식으면 맛 없어진다구요?"


진짜, 맨날 칼 안사준다고 떼 썼는데......칼의 무서움과 위험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나에게 목검만 쓰게 하신건가보다. 지금 당장 나는 해야할 말이 있었다.


"아버지."

"응?"


아버지가 금세 입에 넣은 요리를 오물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셨다. 하하....난 진짜 아빠가 너무 좋다.


"고맙고,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그래, 나도 사랑한다. 우리 딸."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밥 그릇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거고 밥은 밥이다. 일단 밥은 먹어야지. 아빠도 솔직히 지금은 나보다 밥이 더 중요하실 걸? 근데, 이거 진짜 맛있다.


아빠한테 여기 숙수들 전부 납치해서 마교로 데려가면 안되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진짜 '둘이 먹다가 너무 맛있어서 혼자만 먹으려고 서로 칼싸움 나는 맛'이었다.


역시, 사람은 맛있는 걸 먹고 살아야한다.


.

.

.


"이틀후에 보자~."

"아빠, 올때 <장씨세가 아가씨>랑 <화산기협> 최신화까지 사다주세요."

"<화산기협>보단 <무당귀환>이 더 재밌는데.....일단 알았다. 구해볼게."


나는 아빠한테 요즘 읽고있는 연정 소설이랑 최신 유행 환상 소설을 주문했다. 아빠도 분명 <멸살법>을 사러 가실게 분명했으니까.


아빠가 맹을 떠나자 파천문의 손님들이 머무는 숙소로 갔다. 바로 내 옆 건물이었다. 어제 같이 밥 먹으면서 엄청나게 친해졌다. 물론 그 유중혁이라는 인간은 빼고.


"얘들아, 안녕."

"소교주 어서오고."


지혜 언니랑은 농담도 주고 받았다.

나는 친구들이 서로 비무하는 것도 지켜볼 수 있었다. 다들 친해서 그런지 웃으면서 노는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특히 저 둘.


"실력도 안되는 똥개가!"

"응~ 이길영 저번에 본선전도 못 올라갔죠?"

"니도 한 방 맞고 뻗었으면서!"

"지금 해보자는 거지? 생사결(죽고 죽이는 혈투, 생사결은 어느 한 쪽의 사망으로 끝난다.) 한판 할까?"

"얼마든지!"


이길영과 신유승, 평소에는 사이좋고 얌전한 애들처럼 보였는데 비무만 하면 무슨 철천지원수처럼 싸워댔다.


저렇게 격해지다 보면.


"악!"

"억!"

"......적당히 해라."


유중혁 저 놈이 어슬렁 어슬렁 다가와 꿀밤을 먹여 제지시킨다.


"야, 이지혜. 우리도 몸 좀 풀까?"

"좋지."


길영이와 유승이가 터벅터벅 내려가자 지혜 언니와 하영이가 붙기 시작했다.


파천문은 검을 쓰는 문파지만, 하영이는 권법을 수련하는 친구였다. 맨손으로 검을 상대하는 걸 보면 꽤 실력이 있는 듯 했다.


"......"

"뭘 봐?......요."


어제부터 유중혁 저 놈이 나를 노려보는게 느껴졌다. 혹시 아빠한테는 안되니까 나한테 시비를 거는건가? 분명 그럴 것이다.


나도 덩달아 노려봤다. 

때릴테면 때려봐라. 그날 니 인생 끝나는 거야.




그렇게 이틀의 시간은 파천문과 친구가 될 시간으로 충분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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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대회 전날 전야제랑 예선전 등등일 듯

계속 재밌게 봐줘서 고마워


쓰다보니 이번편은 13000자가 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