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성은 내 제의를 거절했다.

조금 의외였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데려가든 안 데려가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배신하기 전의 이현성은 내 말에 충실하던 사람이었어서 따라올 줄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초면이나 다름없으니, 살인자를 따라올리가 없지.


"서로 갈 길을 가죠."

그렇게 말하며 이현성은 뒤를 돌아 지하철 문을 열려고 했다.

뭐,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푸욱 - / "크헉...?!"


사람이 순진하다는 점이지.

이현성은 등에 칼을 맞고도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대체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왜 그러냐고?

왜?

그러는 당신들은 왜?


지금 이현성을 포함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들과 친해지고, 사랑을 하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나갈 것이다.


시나리오가 끝나고 모두 한 집에 모여 사는 계획도 세울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구원 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 절망할 것이고,


같이 한집에서 살기로 한 사람들에게 뒷통수를 맞고 절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사람이 모든 희망을 잃는 것을 보며, 나도 희망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죽을거야. 혼자서.

나와 한수영을 그렇게 만든데 일조한 것이 바로 당신이잖아.


"그런데..."


"허억... 허억... 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는 내 입에서 이렇게 차갑고 냉정한 투로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현성은 한수영을 고통의 굴레에 빠뜨리는 데에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한 적은 없다.

단지 '메뉴얼'대로 움직이면서, 다른 사람들이 한수영을 유린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게, 지금 이현성이 죽는 이유다.


"끄아아아아악!"


그대로 칼은 이현성의 눈을 관통했다. 눈을 움켜쥐는 이현성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살아있습니까? 잘됐네요."


칼은 손목을 절단했고, 다리의 힘줄을 끊어냈다. 복부를 관통했으며, 마지막으로 입에다 쑤셔 박혀졌다.

그럴 때마다 튀는 핏줄기들이, 내 옷을, 몸을, 마음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렇게 죽어가는 이현성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후련하다.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긴, 그렇게나 배신을 당하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하지.


방송은 놀라울만큼 조용했다.

어떤 후원메시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비형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적막뿐이 이 주변을 멤돌았다.


그리고 적막을 깨는 쾅쾅 소리.


쾅. 쾅. 쾅.


왔구나.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쾅. 쾅. 쾅.


나는 아직도 저 녀석이 왜 배신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전부 왜 배신했는지를 모른다. 한순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런 기별이 없다가, 갑작스럽게.

그중에서도 니가 제일 쓰레기야. 미친 싸이코패스 새끼야.


쾅!


열렸다.

유중혁은 날 쳐다보더니, 바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나도 칼을 바로잡았다.

사실 딱히 바로 잡을 필요도 없지만.


"너도 나와 같은 회귀자군."


"그래. 맞아."


[ 전용 스킬, '책갈피'가 발동됩니다. ]

[ 1번 책갈피, '유중혁'을 활성화 합니다. ]

[ 성흔, '전승 Lv. ???'이 발동됩니다. ]

[ '바람의 길 Lv. ???'을 전승합니다. ]


조금 가지고 놀아볼까.


[ '바람의 길 Lv. ???'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주변의 모든 공기가 피부로 느껴진다.

내 손 끝이 휘저은 곳에 공기가 움직인다.

이 모든 공기가 내 장난감이 된 기분이다.

유중혁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건가.


"크흑?!"


나는 바람으로 유중혁을 가볍게 밀쳤다.


바닥에 쓰러진 유중혁을 바람으로 짓눌렀다.

몸이 고정된채로 꼴사납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다시 조금 풀어주고, 격하게 짓눌렀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공기를 없앴다.


"...! ... ...!"


뭐라뭐라 하는 것 같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친다.

눈에선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새어나온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수영이 죽어갈때도 너는 그 표정이었지.

다른 일행들이 한수영에게 온갖 몹쓸짓을 하는걸 보면서도.


이길영이 벌레로 한수영을 유린하고,

신유승이 말로 한수영을 능욕하고,

이지혜가 그렇게 한수영을 줘 패고,

유상아가 사람을 불러서 한수영을 강간하게 만들고,

이현성이 그 모든 걸 돕고,

정희원이 그 모든 걸 계획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왜?


아니, 잠깐,


...왜?


이 모든 건 언제부터?


"...! ..."

나는 입 모양을 보고 사람 말을 알아듣는 재주는 없기에, 잠시 유중혁 주변으로 공기를 불러들였다.


"내...가... 아무래도... 허억... 저번 회차에... 네 적이었나보군..."


나를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끔찍한 적이었지."

"같은... 회귀자라도... 하아... 같은 회차를 사는 건... 아닌...건가... 하아..."


"아직... 나는 3번... 밖에 회귀하지 않았...지만... 너에게... 묻겠다..."


유중혁은 피 범벅이 되어있는 지하철 내부를 둘러보고 말했다.


"이게... 진정... 네가... 하고 싶었던... 건가?"


...

진정... 내가 하고싶은 것이라...


"응."


나는 칼을 바로잡고 엎드려 쓰러져 있는 유중혁에 등에 꽂았다.


유중혁은 한마디 비명없이 숨을 거뒀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솔직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내 일행들이 배신을 한것인가.

아니, 배신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의구심을 품고 있는 건.


일행들이 정말 자신들의 '의지'로 배신을 했는가?


나는 잠시 생각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한수영이 끔찍하게 죽은 뒤, 너무 감정에만 몸을 맡긴 게 아닐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 일행들은 왜 갑작스럽게 배신을 했을까.


이유를 추측할수도 없었다.

그 전날까지는 평소와 모든게 똑같았기에.


길영이와 유승이는 평소처럼 날 두고 신경전을 벌였고,

지혜는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아이였다.

상아 씨는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현성 씨는 언제나처럼 나에게 충실했다.

희원 씨는 든든한 나의 검이었고,

유중혁은 밉상이지만 좋은 동료였다.


그리고 한수영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졌고, 나는 분노에 미쳐 지금 여기에 서있다.


그럼 잠시 분노를 내려놓고, 이성을 들어보자.


일행들이 날 배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행들이 날 배신하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일행들이 날 배신하는 '이야기'를 원한 것은 누구인가.


한수영이 강간당하고, 능욕당하고, 처참하게 죽는 '이야기'를 원한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때문에 분노에 미친 내가 일행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원한 것은 누구인가.


이 세계에선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이 절대적이다.


모든 이야기가 그의 상상대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건 나야.


하지만 내가 그런걸 원할리가 없잖아.


내 생명의 은인이 처참히 무너져내려가는 꼴을 보고싶어했을 리가 없잖아.


그럼 누굴까.

'가장 오래된 꿈'에게 대적할 또다른 존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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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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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구나.


또 다른 '가장 오래된 꿈'


나의 조각들이.


그래.


너네 말이야.


푸욱.


내 관자놀이부터 타고 흐르는 새빨간 선혈이, 내 발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너네한테 보여줄 이야기 따위는 없어.









릴소가 있어서 쭉 읽었는데 갑자기 두 갈래로 나눠지더라.

근데 쓰는 건 2번 시나리오 쪽으로 쓰는 것 같아서 나머지 한쪽을 끝내놓을려고 씀.

재밌게 봐줬으면 나야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