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님?”
“네.”
“완치되었습니다.”
“...... 정말인가요?”
“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작용이나, 다시 아플 가능성은...”
“가능성이 0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무시해도 될 정도로 낮습니다. 다만...”
“네?”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계속 얘기를 해주거나, 사진을 보여주면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뭐 마실래?”
“음... 커피.”
“아이스?”
“응.”
엄마가 카페에 간 사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기다리고 있다.
「처음 너를 만났던 그날 설레던 5월의 아침...」
초등학교 선생님이 종례마다 들려주시던 노래를 듣고 있으니 괜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응?”
차창 밖을 보던 중 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집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차 문을 열고 발걸음을 뗐다.
“저기요...”
안에는 테이블 몇 개와 의자, 카운터가 놓여 있었다.
아마 가게로 쓰였던 곳인 듯했다.
“아무도 없나.”
가게 구석구석을 둘러봤지만,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를 실망감을 가지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였다.
멍! 멍!
어디선가 들려오는 개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꽤 큰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야?!”
헥헥
개가 한참 동안 나를 핥은 후에야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뛰어가는 바람에 목줄을 놓쳐서...”
“아니요. 그것보다 얘 좀 어떻게...”
“아! 호두야! 이리로 와!”
주인의 말은 알아듣는지 나한테서 떨어져 여자애를 향해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원래는 얌전한 앤데...”
“네, 뭐... 멀쩡합니다.”
“어...?”
“왜 그러시죠?”
여자애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김독자?”
“... 어떻게?”
“맞지? 나 기억 안 나?”
“......”
“몇년이나 지났다고 잊어버리냐?”
“진짜 미안한데 누구...?”
“내가 이제까지 이런 애를 기다렸다니...”
갑자기 나타나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것이 어이없었지 왜인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나야 나. 한수영. 너 이사가기 전까지 매일 놀았잖아.”
“......”
“서운하다 진짜. 기다려봐.”
한수영은 카운터로 가더니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깄다.”
한수영의 손에는 나와 한수영이 어깨동무를 하고 냇가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래도 모르겠냐?‘”
“... 사실 치료받으면서 기억이 좀 없어졌대.”
“치료? 아... 진짜...?”
“이런 거짓말을 왜 하겠어.”
“음... 따라와봐.”
한수영은 내 손을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산 중턱에 있는 간이역이었다.
역의 벤치에 앉아 내려다본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와...”
“예쁘지?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이 거의 없어.”
“여긴 왜 데려온 거야?”
“우리 같이 자주 놀던 곳이야. 이런 데 돌아다니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 고마워,”
“다음은...”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여보세요]
[어디니?]
[아, 잠깐 산책 중이었어요. 금방 갈게요.]
[빨리 오렴.]
[네.]
“누구야?”
“엄마. 이제 가봐야겠다.”
“아쉽네. 또 올 거지?”
오려면 기차를 타야 할 정도로 집과 꽤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다시 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다시 오고 싶었다.
“응. 또 올게.”
“그래! 아, 잠깐만...”
한수영은 역 팜플렛에 뭔가 적어 건넸다.
“내 전화번호. 오면 연락해.”
“그래.”
*
[승객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이번 역은 양원, 양원역입니다.]
양원역에서 내려서 오른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어떻게 가라고 했더라?
[여보세요.]
[여기 갈림길인데 어떻게 가라고 했지?]
[김독자?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갈게.]
전화가 끊어지고 20분이 지나서야 한수영이 나타났다.
“허억, 허억.”
한수영은 뛰어왔는지 숨을 고르다 갑자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 안녕. 괜찮냐?”
“당연히 괜찮지.”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좀 쉴래?”
“니가... 쉬고 싶으면... 쉬자.”
“그래 그래. 좀 앉아.”
근처 바위에 잠시 걸터앉으니 조금 진정된 듯했다.
“이제 갈까?”
“그래. 어디 갈 건데?”
“이 누나만 믿고 따라와.”
“누나? 너 몇 살인데?”
“26.”
“누나는 무슨. 앞장서.”
분하다고 얼굴에 써 있다.
“안 갈 거야?”
“... 눈 감아.”
“눈? 왜?”
“감으라면 감아.”
“감았어.”
“이제 앞으로 다섯 걸음.”
“갔어.”
“오른쪽으로 일곱 걸음. 눈 안 떴지?”
“안 떴어.”
“다시 앞으로 아홈 걸음.”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풀냄새와 벌레 소리로 봤을 때 숲속인 것 같았다.
“이제 눈떠도 돼.”
전체적인 모습은 스쿨버스를 개조한 듯했고 위에 해먹과 사다리로 층을 나눴다.
랜턴과 공, 책상, 달력 등 웬만한 물건은 모두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음... 아지트? 따라 와봐.”
한수영이 향한 곳에는 쌓여있는 책과 담요가 있었다.
“여기가 니 자리였어.”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윔피키드>, <마법의 시간여행>...
모두 내가 어릴 때 자주 읽던 책이었다.
“이게 왜 아직까지...”
“그럼 전학갔다고 치워버리냐? 유중혁 그자식은 치우자고 하긴 했지만.”
“유중혁?”
“걔도 기억 안 나? 둘이 맨날 싸웠잖아.”
“기억날 것 같기도 하고... 아!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그 사이코 맞지?”
한수영은 한참을 웃었다.
“맞아 그 사이코. 요즘도 똑같아.”
“아직 애들이랑 연락해?”
“하는 애도 있지. 유상아, 정희원, 이현성...”
“이현성은 그 군인같은 애고, 정희원은 검도 했었나?”
“오, 뭐야. 기억 잘 하네. 근데도 난 기억 안 나냐?”
“...... 미안.”
“됐네요.”
표정을 보아하니 삐진 것 같았다.
“삐졌냐?”
“...... 진짜 나 기억 안 나?”
“... 응.”
“하... 와봐.”
한수영은 나를 데리고 처음 만난 건물로 갔다.
“여긴 어딘지 알겠냐?”
“처음 만난 거기잖아.”
“... 아니, 그거 말고”
“......”
한수영은 내 멱살을 잡고 당겨 입을 맞췄다.
“야이 ■신아. 나 너한테 고백했었잖아.”
응?
“뭐, 뭐라고?”
“여기가 내가 너한테 고백한 데고. 이젠 좀 기억나냐?”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머릿속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윽...”
“왜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냥 잠깐 머리가...”
“여기 누워서 좀 쉬어.”
꽤 오랜 시간동안 누워있었지만 머리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너 괜찮은 거야? 재발하거나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냥 갑자기 많은 걸 생각해서 그런 거 같아.”
“그럼 다행이자만...”
*
“김독자. 내 자리에서 뭐 하는 거냐.”
“이거 빌려가도 돼?”
“안 된다. 가라.”
“힝”
...
“안 추워?”
“별로 안 차가워. 너도 와봐.”
“됐어. 너도 감기 걸리니까 그만 하고 나와.”
“누가 보면 니가 엄마인줄 알겠다.”
...
“김독자. 넌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너는?”
“있어.”
“진짜? 누구?”
“......”
“내가 아는 사람이야?”
“당연하지.”
“음... 누구지.”
“...... 너.”
“응?”
“너 좋아한다고.”
*
“야! 괜찮냐? 죽은 거 아니지?”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안 죽었으니까 소리 그만 질러. 귀 떨어지겠다.”
“걱정했잖아. 갑자기 머리 아프다더니 기절하고.”
“나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한 3시간 쯤?”
시간이 흐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는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고 하늘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또 한수영이 옮긴 것인지 나는 아지트 해먹에 누워 있었다.
“내가 너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쓰러질 거면 여기서 쓰러지든가.”
“별일 없었지?”
내 말을 들은 한수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얼굴이 빨개. 너도 어디 아프냐?”
“흠흠. 괜찮아. 멀쩡해.”
“금방 어두워지겠네. 가봐야겠다.”
“다음에 또 와.”
“이번엔 니가 와. 내가 우리 동네 소개해줄게.”
“그럴까?”
책상 위 수첩에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고 건넸다.
“여기로 와. 길 모르겠으면 전화하고.”
“다음 주말에 갈게.”
*
시간은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 오려나.”
한수영을 기다리며 tv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양원역과 승부역 사이 교각에서 추락 사고가 있었습니다. 20대 여성이 기차를 피하던 중 추락한 것으로 보이며...]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또 일요일 오후가 되도록 한수영은 오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전화를 받지 못할 사정이 있겠지, 무슨 일이 있어 오지 못한 거겠지, 라며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마음 한 켠의 불안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저 나갔다 올게요.”
“어디가니?”
“친구 만나러... 아니 여자친구 만나러요.”
역으로 가 가장 빠른 표를 구매해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는 역을 하나둘 지나치며 양원역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갈림길을 향해 뛰었다.
아지트로 가는 방법은 외우고 있었다.
앞으로 다섯 걸음, 오른쪽으로 일곱 걸음, 다시 앞으로 아홈 걸음.
그럼 눈앞에 아지트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다.
너무 크게 걸었나? 아니면 너무 작게?
보폭의 크기를 다르게 하며 몇 번을 다시 걸었지만 나오는 장소는 같았다.
분명 뭔가 놓친 게 있을텐데.
‘...눈 감아.’
‘눈을 감고’...
눈을 감든 뜨든 크게 다른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감고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앞으로 다섯 걸음, 오른쪽으로 일곱 걸음, 다시 앞으로 아홈 걸음.
이제 눈을 뜨면...
“김독자?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이래? 무슨 일 있냐?”
“아니었구나...”
그 말을 끝으로 기억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보이는 것은 아지트의 천장과 한수영의 얼굴이었다.
“일어났어? 갑자기 쓰러지냐.”
“한수영.”
“응?”
“그때 못 한 대답 지금 해도 될까?”

“갑자기 왜 이래.”
“좋아해 수영아.”
“...”
“널 더 빨리 만났으면 좋겠고 더 얘기도 나누고 싶고 더 같이 있고 싶어졌어. 우리 사귀자.”
한수영은 대답 대신 내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이제 두 번째야.”
“응?”
“나도 좋다고. 좋아해 김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