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맑은 아침이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햇볕에 안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고운 금발은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항상 붉게 빛나던 왼쪽 눈은 이제 오른쪽 눈과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왼쪽 눈을 매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2년.
시나리오가 끝나고도 2년이 지났다.
마비되었던 사회는 가까스로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학교까지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역사책에는 ‘스타 스트림’에 대한 사건들이 새로이 도입되었다.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 외계 침공 사건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거대로 이상하겠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사건이 역사책에 실린다는 것은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의 이름도 기재되어 있었다.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
예언자.
자신을 대표하는, 아니 대표했던 이명. 그녀가 이렇게 불리지 못한지도 벌써 2년이나 지난 것이다.
다른 이들의 미래를 관통하던 왼쪽 눈은 이제 힘을 잃고 누구나와 같은 그것이 되었다.
안나는 계속해서 역사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왕의 수호자, 셀레나 킴]
[초월자들의 왕, 장하영]
[철혈의 패왕, 유중혁]
[치우의 후예, 페이후]
[대군 전투의 귀재, 란비르 칸]
.
.
.
“후우.”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익숙한 이름들을 읽어 나갔다.
모두 그녀와 한 번쯤은 대립, 동맹을 맺어봤던 이들이었다.
한 페이지를 넘기자 또 다시 익숙한 이름이, 또 한 페이지를 넘기니 친구였던 사람의 이름이, 또 한 페이지를 넘기자 원수의 이름이.
모두 스타 스트림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페이지를 넘기자, 생존자 명단의 마지막 페이지가 나왔다.
마지막 페이지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단 하나의 이름만이 기재되어 있었다.
황금색으로 코팅된 테두리, 천사와 악마의 날개를 본 뜬 것과 같은 장식들.
그것의 중앙의, 그녀에게도, 지금까지 페이지를 넘기며 봐온 이름들의 주인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실려 있었다.
[김독자]
다른 이름들처럼 자신을 대표하는 수식언은 생략되어 있었다. 그저 이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듯. 지금은 없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살아 숨 쉬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이름이 역사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안나는 일부러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그래. 지금 지구에 김독자는 없다.
***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눈물점이 매력적이게 나있는 단발머리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김독자가 자신을 희생해서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매우 다급해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어쨌든, 그녀는 내게 함께 그를 구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 말을 들은 안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김독자가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라면, 반대로 그를 구하면 이 세계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한수영의 눈에는 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비운의 주인공처럼 보이겠지만, 안나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그녀에게는 김독자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온 우주의 생명을 구한 ‘영웅’으로 보였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다수의 모든 생명들을 살리다니. 김독자는 안나가 어릴 적부터 상상한, 그리고 스타 스트림에서 이루려 했던 영웅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한 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희생해야 한다니, 그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나는 이 세계의 사람들을 돌봐야 해요.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저는 이 세계선을 포기할 수 없어요.”
“...솔직히 기대하지는 않았어. 알겠어. 그럼 몸조리 잘하고 음... 오래오래 살아라.”
“한수영, 당신도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집을 나갔다.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이제 진짜 안녕이네요.”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날은 꼴사납게 하루 종일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그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지났고, 그 한 달이 모여서 일 년이 지났다.
그렇게 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을 1864회차의 사람들을 돌보며 지냈다.
근래는 정말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안나는 이를 닦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여인은, 지나치게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웃어본 것이 언제였을까.
일행들이 1865회차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모인 파티에서 유중혁이 노래를 불렀을 때?
셀레나가 생일 선물을 받고 아이처럼 울었을 때?
페이후가 정희원과 이현성을 보고 돌처럼 굳었을 때?
한수영이 떠나기 전에 자신을 부등켜 안고 울었을 때?
......
모르겠다.
요즘은 내가 제대로 숨을 쉬는지도 모르겠다.
일 때문에 바빠서일까?
가족같던 이들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되어서 일까?
‘거짓말’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웃었다.
눈을 천천히 감고 다시 뜨자, 거울에 비친 자신은 다시 원래의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짓말이라.”
대충 양치를 끝내고 거실로 나왔다.
이렇게 서있으면 금방이라도 셀레나와 이리스가 달려와 어리광을 피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이제는 없다.
모두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위해서 떠났으니까.
딱히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완전한 밤’이라는 선택을 한 것처럼, 그들 또한 자신들의 선택을 한 거니까.
그래도 쓸쓸한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또 거짓말 하네.’
......
머릿속에서 또 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는 그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5초가 지났다.
10초.
20초.
또 30초.
.
.
.
“나도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이젠 잘 기억나지 않는 얼굴을 떠올렸다.
항상 장난스럽게 나를 부르던 사람. 유일하게 그 미래를 알 수 없던 사람. 항상 자신보다 일행들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
지금은 없는 사람.
하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이지만 자신이 살린 일행들에게 구원받을 사람.
사실 나도 그 자리에 끼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능구렁이 같은 말투를 듣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농담을 듣고 싶었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왔다.
금방이라도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지금 우는 거냐고 나를 놀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그런 나를 걱정해주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외롭다.
소소하게 일행들과 살아가던 삶은 이제 그 빈자리를 실감하는 부재의 시간이 되었다.
사실 나도 김독자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어.
설령 그게 원래 그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다시 한 번 그를 보고 싶었다.
항상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나를 골려주던 때 짓던 표정.
경매장에서 당당하게 300만 코인을 요구하던 그 손.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때면 항상 별처럼 빛나던 눈.
모두 점점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보고 싶어요.”
어쩌면 그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이럴거면 그냥 친절하게 대해 주지 말지.
방주에서 그의 앞을 막았을 때 그냥 죽여줬으면 좋을걸.
“하아.”
만약 당신이 정말 다시 돌아온다면, 당신은 함께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은 나를 원망할까?
아니면 나의 선택을 존중할까?
어쩌면, 나라는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잊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이 지독하고도 일방적인 마음을 이제는 정리할 시간이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선택한 나의 세계니까.
하지만, 당신도 내 눈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래.
당신의 모든 여정이, 당신이 해온 모든 선택이 부디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행복하기를.
그렇게 20년이 더 지나고, 그녀는 가까스로 일행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직은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