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토요일이다. 보통 나는 주말에는 회사에서 받은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멸살법을 정주행하거나 하루종일 집에서 잠을 잤고, 오늘도 그럴 예정이었다. 모종의 사태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내가 미쳤지... 그 페스티벌에 멸살법 작가가 올 리도 없고..."
어제 회사에서 유상아와 약속을 한 까닭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 약속은 잡을때는 별 생각 없이 하게 되지만, 막상 약속에 나갈때는 귀찮기가 짝이 없다.
-독자 씨! 4시에 입장 시작이니까 2시에 만나서 가시는게 어때요? 주변도 둘러보고 할 겸.
하지만 막상 약속을 파토내기엔 들떠있는 유상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미노 소프트 앞에서 만나는건가요.
-굳이 주말에 회사에서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네요. 그럼 어디서 만나실래요? 페스티벌장 앞?
-음... 지하철 타고 가실거면 oo역 4번 출구에서 만나시는건 어때요?
-좋습니다. 그럼 2시까지 준비해서 나가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선 핸드폰을 내려놓고 옷장으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옷장에는 하얀색의 셔츠 3장과 흰 티 하나, 청바지 둘, 양복 바지 하나가 있었다.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놀러가는건데 양복 바지는 아닌 것같아서 흰 티 위에 셔츠를 입고 청바지를 챙겨입었다.
.
.
.
"아 독자 씨!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해요..."
나는 평소에는 유상아에게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남자라도 이 모습을 보고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굴곡진 곡선을 그리는 흰 블라우스와 그 밑에 블라우스가 들어간 짧고 주름진 치마와 검은 스타킹. 거기에 유상아의 얼굴까지 가미되어 순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독자 씨?"
"아, 아 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앗, 그나마 다행이네요!"
다행히 유상아는 내가 빤히 그녀를 쳐다본것에 대해 크게 의구심을 갖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럼 얼른 가요! 지하철 놓치겠어요."
"그러죠."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타자 지하철 안에는 붐비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많아요."
"주말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게 아닐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자전거를 타고 갔을텐데 말이죠."
"...그랬으면 저는 지금 집에서 유상아 씨 연락을 씹고 누워있었을겁니다."
"...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중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이 내리면서 자리 하나가 생겼다.
"아, 독자 씨 앉으세요! 전 아직 서있을만 해서..."
"...저도 서있을만 합니다."
뭔가 내가 약골로 인식되는 기분이라서 서러웠다. 나도 서 있을수 있는데.
"아, 그러면..."
순간 유상아가 고개를 숙였다. 유상아의 시선이 가는 곳을 보자 그제서야 그녀가 어째서 내게 이런 말을 꺼낸건지 이해가 됐다.
"...앉으세요."
"아, 아니요... 저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서야 눈치 챈 내가 약간은 한심스러웠고, 동시에 말해주면 도울 수 있는 것을 감추려는 유상아가 애처로워보였다.
그래서 나는 유상아를 앉히고 셔츠를 벗어서 그녀에게 살짝 포개어서 덮어주었다.
"앗, 독자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아니요, 그냥 덮고 계세요. 그리고 굳이 그런건 숨기실 필요 없이 말해주시면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네..."
유상아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무안을 준걸까.
"저... 상아 씨?"
"네,네! 독자 씨!"
내 말을 들은 유상아가 황급히 고개를 들며 내게 대답했다. 역시 유상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있었다. 굳이 무안을 줄 필요는 없었는데.
"미안합니다. 제가 좀 말을 공격적으로.."
"아, 아니에요! 별로 공격적이지도 않았고.. 그리고..."
유상아가 다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전보다 액션이 좀 더 커져있었다.
"......고마워요."
그 말을 하며 유상아가 얼굴을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상아의 표정을 보자 괜히 나도 얼굴이 붉어졌다.
"...아,아닙니다."
무안을 줬던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받은 것 때문에 오히려 부끄러워진걸까. 그렇게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 둘 사이엔 묘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말함. '멸살법이 없다'라는건 아예 멸살법이라는 소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게 아니고 실제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을 말한거였음. 그러니까 멸살법 작가도 한수영이 아닐수도 있는거... 쉽게 말하면 전독시의 내용 자체가 없는 세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