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었다. 나는 35살이 되었고, 유상아는 33살이 되었으며, 채아는 7살이 되었다.
"점점 나이를 먹는게 느껴져..."
유상아가 20살들도 부러워할 얼굴을 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체 어디가 나이 들었다는건지를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은 30대 후반에 결혼한대!"
"...우리도 결혼 할 예정은 없었지. 네가 나를 덮쳐.."
유상아가 말 없이 앞에 있던 깎인 사과를 내 입에 집어넣었다.
"엄마가 아빠를 덮쳤다고?"
채아가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뭐 먹으면서 말하는거 아니야. 다 먹고 말해."
"다 먹고 말하면 대답 안 해줄거잖아?"
"..."
둘이 아웅다웅하는걸 보다가 이제는 진부해진 싸움 양상에 질려 창문에 눈을 돌리자, 눈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네."
혼잣말을 중얼거리고서, 나는 잠깐 바람을 쐬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집에서 볼 때와는 달리, 포근해보이던 눈은 내 살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춥...!"
그리고 그 순간, 내 어깨를 누군가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괜찮으세요?"
"아, 네..."
고등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곱슬머리의 아이. 자연스레 가슴에 달린 금색 명찰에 눈을 돌리자, 이길영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안 추우세요?"
"그 쪽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래도 스웨터라도 입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이 학생, 이길영은 스웨터는 커녕 하복이나 되어보이는 반팔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저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요. 추워보이면 벗어주시던가요."
이길영이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나는 가만히 그에게 작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따라와요. 옷 몇개 챙겨줄게요."
"...진짜로요?"
나도 그랬다. 옷은 커녕 보일러도 못 틀고 이불을 꽉 동여매고 자던 생활.
그리고 이길영이 내 옆에 서서 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사실 엄마 아빠가 없어서 이모랑 이모부랑 살고 있거든요? 근데 이모랑 이모부는 지 아들만 이뻐해요. 그래서 맨날 가출하는데 이번엔 여름에 가출해서 지금까지 버티는 바람에..."
"나랑 비슷하네요."
"그래요?"
"나도 엄마가 아빠 죽이고 교도소 가서 친척들 집에서 살다가 눈치보여서 나왔거든요."
이길영이 갑자기 내 어깨를 툭 잡았다.
"그, 그럼 아저씨..! 저랑 같이 살면 안돼요? 같은 동족을 챙긴다는 느낌으로..."
"제가 아내랑 딸이 있어서."
이길영이 어깨를 축 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을 열자, 채아가 내게 달려왔다.
"아빠! 나도 놀러갈래!"
"나 놀러간거 아니야."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채아의 말을 듣고, 유상아가 현관문을 바라봤다.
"음? 학생이네? 오빠 아는 사람이야?"
"방금 안 사람이야."
유상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길영은 눈치가 보이는지 손을 공손히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안녕... 하세요..."
"어.. 응! 안녕?"
"아빠 숨겨진 아들이야? 그럼 내 배다른 오빠인.. 악! 왜 때려!"
채아가 내게 머리를 쥐어박히고는, 씩씩대며 유상아에게 갔다.
그리고 유상아에게 간 채아는 머리를 한 대 더 쥐어박혔다.
"누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래!"
"아 왜 때리냐고! 이거 아동학대야!"
이길영이 그걸 보고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표정을 정리하며 큼큼댔다.
"저... 옷..."
"아, 응. 갖다줄게."
옷을 가져다주자 이길영은 만족한듯 활짝 웃음을 지었다. 순간 유상아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웃으면 잘생겼는데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요.
"그래, 웃으면 잘생겼구만. 웃고 다녀."
"...고마워요."
* * *
이길영을 바래다주러 따라가자, 유상아가 패딩을 껴입고 나를 따라나왔다.
"...안 오셔도..."
"아니야! 나도 그냥 데이트하려고 가는거야!"
유상아가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와. 도와줄게."
"...네..."
그리고 이내 이길영이 가자, 유상아가 내 팔목을 잡고 엉겨붙었다.
나는 괜한 죄책감에 유상아에게 쓸데없는 말을 주저리 주저리 쏟아냈다.
"그게... 나 어릴 때랑 닮고... 그래서..."
"오빠는 좀 음침했잖아. 쟤는 활기차보이는데?"
"...상황이 비슷해."
유상아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내 앞으로 와서 나를 꼭 껴안아줬다.
"난 오빠가 뭘 하던지간에 항상 믿어!"
"...고마워."
내 턱 밑을 보자, 유상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춥다. 들어가자."
"응!"
사실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사실 왠지는 몰라도, 따뜻했다.
"사랑해, 항상!"
"...나도."
왠지 알 것 같기도 하고.
+회상 대사는 멸없세 8화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