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락-차라락-

 

 

늦은 밤, 방의 불을 끄고 작은 전등 빛에 의지해 소설을 읽던 김독자는 반쯤 읽은 소설의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다 이내 책장은 덮었다. 누가 보면 벌써 다 읽은 거냐고 놀라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책의 내용이 한 글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김독자는 의자에 기대어 마른 세수를 연신 했다.

 

 

“미치겠네…내일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렇다, 32+nnnnn살 평생을 모태 솔로로 살아온 김독자는 내일 한수영과의 인생 첫 데이트를 앞두고 있었다. 고백하는 과정에서 큰 잘못을 했었던지라 내일 그 과오를 만회하고 싶은 김독자였지만, 한수영의 취향에 맞춰 장소만 예약해 뒀을 뿐 데이트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고백하면서 키스까지 했으면서 무슨 고민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분위기에 취해 얼떨결에 저지른 일이었고, 얼마 전까지 여자 관계라고는 동료, 돌봐야 할 아이, 적밖에 없는 김독자가 맨정신에 그런 일을 하는 건 무리였다. 조언을 구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무뚝뚝한 유중혁이나 눈치는 파천신군에게나 줘버린 이현성은 도움이 안 될게 뻔했고, 이길영에게 부탁하기에는 자신보다 어린아이에게 연애 상담을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 관뒀다. 

 

 

“에휴…그냥 잠이나 자자.”

 

 

시간은 이제 막 10시를 지났지만 깨어있어 봐야 머리만 더 아플게 뻔했기에 김독자는 내일 어떻게든 될 거라는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김독자가 눈을 감고 억지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고 하는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발동됩니다.]

 

 

‘이 스킬이 왜?’

 

 

별안간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김독자의 의식이 누군가의 방으로 이동되었다. 이동된 곳의 주변을 둘러보던 김독자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귓가에 들어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김독쨔, 김독쨔, 나 배고파아~”

 

‘수, 수영이? 그리고 저건…나???’

 

 

한수영이 그녀의 방에서 김독자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혀 짧은소리로 누군가의 어깨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고, 그런 한수영의 앞에는 아공간 코트를 입은 김독자의 아바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김독자가 채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한수영의 말이 이어졌다.

 

 

“우웅~독자 오빠, 수영이 배고픈데 이거 사주면 안 돼요?”

 

‘쿨, 쿨럭! 쿨러억!!!’

 

 

 

연타석으로 날아오는 한수영의 애교에 화신체가 손상되는 착각이 든 김독자는 허리를 굽히고 연신 목젖이 떨어져 나가랴 기침을 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수영이가 아바타를 나누다가 뭔가 오류가 생긴 건가? 그래, 그런 걸 거야. 수영이가 제정신으로 저런 말을 할 리가…’

 

“나 꿍꼬또…아아아악 X발 못해먹겠네!!!!”

 

 

그때 애교를 계속하던 한수영이 소리를 지르자 김독자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흰 목과 대비되어 얼굴이 온통 붉은색으로 달아오른 한수영은 한참 동안 발을 구르다 무릎을 굽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정희원 걔는 이딴 걸 데이트하면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걔는 수치심도 없나.”

 

 

연신 툴툴대는 한수영의 무의식에 상영되는 어떤 기억이 김독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애교를 하라고?’

 

‘그래~남자들은 여자친구가 혀짧은 소리 내면서 애교하고 귀여운 짓 하면 좋아서 죽는다니까? 현성씨도 내가 한 번씩 애교 부리면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아기곰 마냥 어쩔줄 몰라하는게 얼마나 귀여운데.’

 

 

정희원이 가슴을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한수영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너 나 골탕먹이려고 하는거 아니야?’

 

‘연애 선배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는데 반응이 그게 뭐냐?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봐. 연습해서 내일 해보면 독자씨도 분명 좋아할 거라니까? 응? 응?’

 

 

그말과 함께 정희원이 계속해서 한수영을 독촉하자 한수영은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니야!’

 

‘아, 그런 거였구나.’

 

 

한수영의 기억을 읽은 김독자는 한수영이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자신을 위해 애교를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동시에 한수영을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독자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해제하고 일어나 핸드폰을 킨 다음 신유승에게 카톡을 보냈다.

 

 

[유승아, 지금 바쁘니?]

 

 

김독자가 메시지를 보내고 30초 정도 지나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아니요, 지금 드라마 보고 있어요. 시키실 일 있으세요?]

 

[수영이 방에 가서 수영이한테 희원씨가 부른다고 좀 전해줄 수 있겠니?]

 

[알겠어요 아저씨.]

 

 

신유승의 메시지를 받은 김독자는 다시 정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희원씨. 조금 있다가 수영이가 희원씨한테 갈 텐데 아무 말이나 하면서 잠깐만 수영이를 붙잡아주세요.]

 

[흐음~뭐 깜짝 이벤트라도 하려나 봐요? 알았어요, 마침 심심했는데. 그리고 내일 한수영이랑 할 데이트 기대해요. 말할 줄 수는 없지만, 걔도 엄청난 걸 준비하고 있거든요.]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정희원의 문자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은 김독자는 곧바로 누워서 다시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발동했다. 한수영의 방에 도착한 김독자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건 한수영도 마찬가지였다. 한수영이 김독자의 형상을 한 아바타를 다급하게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이 시간에 누구야??”

 

“저에요 수영 언니. 희원이 언니가 찾으시는데 잠깐 내려오실 수 있으세요?”

 

“아 알았어! 용건 있으면 문자를 하던가 밤중에 사람을 오가라 하고 있어.”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방을 나가는 걸 확인한 김독자는 곧바로 스킬을 해제하고 옷장을 열어 아공간 코트를 입은 다음 방에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한수영의 발소리를 들은 김독자는 곧바로 복도 끝에 있는 한수영의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방금 전까지 아바타가 있던 자리에 아바타와 똑같은 자세로 섰다. 

 

 

‘수영이가 오면 뭐라고 하지?’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실실 웃던 김독자는 멀리서부터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사람 불러놓고 한다는 소리가 달이 밝지 않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뭐야, 이게 왜 나와 있어???”

 

 

회수했던 아바타가 멀쩡히 서 있는 모습을 본 한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바타인척 하는 김독자를 노려봤다.

 

 

“분명히 회수했었는데…”

 

 

한수영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김독자는 입이 바싹 말랐지만, 침 삼키는 소리만 내도 한수영에게 들킬 것이 분명해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수영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뭐, 나가면서 무의식중에 다시 꺼냈고 간 거겠지.”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수영을 보며 김독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자신의 앞에 한수영이 서자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김독자는 한수영이 혀 짧은소리를 낼지, 오빠라고 부를지, 그것도 아니면 애교 섞인 몸짓을 할지 상상하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김독자의 예상과 달리 한수영은 그저 두 팔로 김독자를 꼬옥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김독자가 당황하고 있을 때 한수영이 고개를 들어 김독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해 김독자. 세상 누구보다도 널, 좋아해.”

 

 

그말을 하는 한수영의 얼굴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넘쳐 흘렀다. 말없이 한수영의 얼굴을 보고 한수영의 온기를 느끼던 김독자는 충동적으로 팔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뭐, 뭐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작은 기억만 떼어내 만들었던 아바타가 자신을 안자 한수영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을 감싼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한수영은 우연히 김독자의 얼굴을 보았고, 분명 무표정해야 할 아바타의 눈꼬리가 휘어진 것을 발견한 한수영이 버둥거리기를 멈췄다. 

 

 

“설마…”

 

 

한수영이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김독자의 말이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안녕 수영아?”

 

“야 이 미친놈아!!”

 

 

자신의 의심이 현실이 되자 한수영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니 그것보다, 아바타인 척은 왜 해?? 변태냐??” ”

 

“수영아 그렇게 말해봐야…네가 내 아바타 세우고 그 앞에서 애교하는 걸 이미 다 봐버렸는걸?”

 

“뭐, 뭐!?!?!?”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되더니 내 어깨를 흔들면서 날 오빠라고 부르거나 꿍꼬또라고 하는 네 모습이 보이더라.”

 

“이…이…!”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일이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입에서 적나라하게 나오자 한수영은 부끄러움에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수영이 애꿎은 입술을 물어뜯고 있을 때 한수영의 이마에 약간의 온기와 함께 무언가 촉감이 느껴졌고, 시선을 살짝 올리자 그녀의 윗이마에 입을 맞추는 김독자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떼어내고 한수영과 시선을 맞닥뜨린 김독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사랑해 수영아. 이 세상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더, 너를 사랑해.”

 

 

김독자의 말에 한수영은 부끄러운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지만, 괜히 심술이 나 홱 하고 고개를 돌리며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을 본 김독자는 한수영이 화가 많이 났다고 생각해 몹시 당황했다.

 

 

“자, 잘못했어 수영아. 스킬이 발동되자마자 다시 취소했어야 했는데 내가 나빴어.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화 풀어, 응?”

 

“몰라, 너 미워.”

 

“그러지 말고…내일 데이트 할 때 네가 해달라는 거 다해줄게,,,”

 

 

쩔쩔매는 김독자와 삐진 한수영 때문에 소란스러운 방과는 다르게,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고요하기만 하…

 

 

“바앗, 바앗~!”

 

 

…지 않고, 털뭉치의 모습을 한 비유가 창문을 통해 방안의 모습을 보며 신바람 난 목소리로 울었다.

 

 


*




 마지막 보면 대충 알겠지만 비유가 아빠랑 엄마(?) 진도 빼줄려고 전독시 스킬 발동되게 한거였다. 독자가 고백할 때 큰 잘못 했다는 건 전에 쓴 ‘나의 별’에서 설정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