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영의 부모 이름은 멋대로 지어버렸습니다.
오랜만에 창작이라 캐릭터 붕괴가 난무합니다.
김독자는 어머니와 같이 사는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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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정오 설화카페에서 봐. -11:00 AM
-ㅇㅇ-11:30 AM
한수영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채, 자신의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고 있다는 말도 없고, 그저 단답인 문자메시지가 전부였다.
먼저 연락할 수 있지만, 먼저 연락하긴 싫은 유치한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그저 오매불망 김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착했음." 이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반사적으로 카페의 입구를 바라보자 주변을 둘러보는 김독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 김독자. 여기야."
김독자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한수영이 있는 자리를 향해 걸어왔다.
"늦어서 미안. 음료수는?"
"너 오면 시킬려고."
"그럼 사죄의 의미로 음료수는 내가 살게."
자리에서 일어난 김독자는 자연스레 음료를 주문하러 카운터로 갔다.
몇분뒤, 레몬 아이스티와 카라멜 마끼야또를 들고온 김독자는 그녀에게 음료를 건네며 물었다.
"그래서 한수영. 무슨일이야? 나를 다 부르고?"
"...그냥 할 말이 좀 있어서."
"미리 말해두겠는데. 넌 내 취향 아니야."
퍽!
둔탁한 피격음이 들리며 김독자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커헉..."
"뭐라고했냐? 뒤질래?"
"장난인거 알면서 그러냐."
한숨을 깊게 내쉰 한수영은 마음을 가라앉힌채 입을 열었다.
"오늘 부른건 내가 부탁할게 있어서야."
"부탁? 뭔데?"
한수영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김독자는 평소와 다른 한수영의 모습에 그 부탁이라는 것이 뭔지 조금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뭘지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부탁이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 한수영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침묵이 짧은 순간 지속되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에 비례해 점점 두려움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한수영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내 약혼자좀 돼 줘."
"......?"
한수영의 발언에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침묵이 이어졌다.
순간이지만 김독자는 한수영이 무어라 말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들은게 맞는건가?
주변의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선 청각은 멀쩡한데.
"....야 대답 좀 해봐."
당사자또한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한수영의 반응으로 보아 정말 자신이 들은 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한수영."
"오,왜?"
"너 혹시 오다가 머리 부딫힌건 아니지?"
한수영은 또다시 내 정강이를 가격했다.
저번과는 비교도 안되는 파워였다.
"아!"
"뭐 이새끼야? 진짜 죽여줘?"
"아니 그러면 왜 그런 말을 하는데!"
"누가 진짜로 되어달래? 가짜로 되어달라고!"
"...가짜?"
"그래. 그냥 약혼자인 척 좀 해달라는 건데."
"아...."
이제서야 이해한 김독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가짜라서."
진심으로 안도하는 김독자를 보니 한수영은 다 때려치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주변에 정상적인 남자라곤 이 오징어 밖에 없었기에 한수영은 분노를 깊이 잠재웠다.
"그나저나 가짜 약혼자는 왜 필요한데?"
"집에서 연락이 왔어."
"집?"
생각해보니 한수영의 집안은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어머니는 배우인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녀는 딱히 집안과 엮이는 걸 싫어했지만, 인연의 끈이란 건 그리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길래."
없는 자식 취급할땐 언제고 이제와서 부모노릇을 하려는 행동이 역거웠다.
그렇게 한수영은 반발심으로 자신은 이미 약혼자가 있다고 해버렸다.
난 이미 약혼자가 있으니, 자신을 통제하려하지 말라고.
한수영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이 저항이 통했던 것일까.
아버지라는 인간에게서 이러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를 만족시키는 남자라면 인정해주마.
그래서 한수영은 자신이 아는 남자 중 그나마 나은 김독자를 선택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대답은? 해줄거야?"
"흠...그래 해줄게."
김독자의 대답에 한수영의 표정은 방금전에 비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나 김독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대신."
"...?"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소원권 하나. 어때?"
한수영은 그날따라 김독자의 미소가 유난히 더 약올랐다.
***
한수영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집안에 대해 조사를 해야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서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불편해 뒤지겠네."
한수영은 자신의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에 입던 가벼운 옷차림이 아닌, 격식을 갖춘 의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움직이기엔 불편했고, 목은 답답하기만 하다.
대체 이딴걸 왜 입는건지.
"좀만 참아. 아무리 그래도 옷은 잘 입어야지."
그 말에 한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김독자의 옷을 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정장과 그와 대비되는 하얀 코트.
꾸밀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힘을 주니 꽤 봐줄만한 모양새였다.
"그래서 계획은 그걸로 끝이야?"
"이정도면 될거 같은데."
어디선가 차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우리 앞에 정차했다.
그 속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공손히 우리에게 인사했다.
"아가씨. 의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구심을 온전히 지워내지는 못했다.
'아마 감시하려고 보냈겠지."
좋아. 그렇다면.
김독자는 차의 뒷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며 말했다.
"레이디 퍼스트."
"오,왜이래?"
"왜 이래라니 약혼자한테 이정도는 필수지."
김독자는 미소지으며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미소가 질렸다는 듯이 한수영은 '....고마워'하며 차량에 탑승했다.
김독자는 차량에 들어서는 동안 운전기사의 표정을 체크했다.
조금이지만 올라간 입꼬리.
호의가 보이는 것을 보니, 이정도면 합격선인가.
김독자와 한수영이 차량에 탑승하자 운전기사는 자신도 탑승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차가 향한 곳은 한 저택이었다.
한수영이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집 앞에 선 한수영의 눈빛은 묘한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미워하는 것 같기도 오랜 기억을 어림하는 듯했다.
조금이지만 긴장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집을 비우고 가짜 약혼자를 데리고 와 담판을 짓는데.
긴장이 안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 한수영을 향해 김독자는 어깨를 툭 건들였다.
"긴장하지마. 내가 있잖아."
"...ㅇ,어."
흠칫한 한수영은 이후 조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근데 얼굴이 조금 붉어진거 같은데 착각이겠지?
***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한 노신사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한수영도 아는 눈치인것을 보니 꽤나 이 집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같았다.
그가 안내해준 곳은 예상의외로 식당이었다.
당연히 접견실로 안내해줄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장소가 등장하니 둘은 서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퇴로는 없는 상황.
김독자와 한수영은 정면돌파 밖에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끼익.
문이 열리자, 정면에 한 남자가 둘을 맞이했다.
"어서오너라."
한수영과 같은 머리색에 의자에 앉았음에도 느껴지는 짧은 단신.
저 사람이 한수영의 아버지, 한상준인가.
의자에 앉으려던 김독자는 테이블 위에 내려진 요리들을 보고 흠칫했다.
마치 갓 만들기라도 한 듯한 뜨거운 김을 내뿜는 요리들.
몇 시에 도착할 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이러한 광경은 연출이 불가능했다.
'이거 아무리 봐도 호랑이 입으로 들어온 느낌인데.'
"오랜만에 얼굴 보니 좋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지?"
한수영의 말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박혀있었다.
그 비수를 이해한단 듯이 한상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쪽이 김독자 군이군. 만나서 반갑네."
자기소개를 안해도 자신의 이름을 안다.
이미 자신의 관한건 조사를 끝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의원님께서 저의 이름을 아신다니 영광입니다."
당찬 목소리로 말하자 한상준은 예상치 못했는지 표정에 미소를 떠올렸다.
"꽤나 당찬 친구로군."
"그런 말은 자주 듣습니다."
"아무튼 약혼자 얼굴 보여줬으니 됐지?"
"수영아."
"내 이름 부르지마."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누군가 식당 문을 열며 말했다.
한수영과 똑 닮은 외모.
눈가 밑에 있는 눈물점까지, 틀림없었다.
저 사람이 한수영의 어머니.
"한희연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김독자군."
"만나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신경써야 할 사람이 한명 더 늘었다.
희망을 걸어봤지만, 실패인가.
"식사는 아직이죠?"
"네 이제 막 들려던 참입니다."
"저희 집 요리사 분들이 요리를 잘 하셔서 입에 맞을 거에요."
미소를 짓고 있지만 저 미소에 속아 넘어가선 안됐다.
보이지 않는 수 싸움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니까.
이어지는 식사 시간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숨막히는 분위기 속.
분위기에 금을 가게 한 것은 한희연이었다.
"그래서 둘은 어쩌다 만나게 됐니?"
기습적인 질문에 김독자 와 한수영은 잠시 자신들의 심장이 철렁함을 느꼈다.
이건 준비하지 못한 질문인데....
'어쩔 수 없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도중 수영이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깜짝놀란 한수영은 반사적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어갔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안면을 트고 난 뒤 용기내어 제가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어머. 정말이니 수영아?"
"...어."
김독자의 기행에 어느정도 익숙해졌는지, 한수영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별다른 질문은 들어오지 않은 채, 식사 시간이 흘러갔다.
이후 식사시간이 끝나자, 한상준은 둘에게 푹 쉬라며 방을 배정해주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김독자와 한수영은 배정받은 방으로 쉬러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김독자?"
"한수영?"
바로 둘이 배정받은 방이 같은 방이라는 것.
***
"아 좆됐네..."
상황을 이해한 한수영은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약혼자들이 동침하는 것은 어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의 관계였다.
약혼자이지만 아닌 관계.
어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거짓말.
여기서 다른 방을 달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 둘의 관계를 의심할 터이니, 방을 바꿀 수 도 없었다.
이 흘러나오는 어색한 기류를 없애기 위해 김독자는 조심스레 농담을 건냈다.
"...침대가 참.. 크네."
"그딴 거 말하지 말라고...."
분위기를 바꿔보려 건넨 농담이 오히려 더욱 이상하게 바꿔버렸다.
젠장.....
"....."
"...."
침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순간 누군가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듯,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연 한수영은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을 보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있는 사람은 식당까지 우리를 안내해준 노신사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지금은 아가씨때문에 온것이 아닙니다."
그의 시선이 점차 김독자를 향해갔다.
"김독자군. 의원님께서 잠시 단둘이 이야기를 가지고 싶어 하십니다."
***
한수영의 만류에도 김독자는 안내를 따라갔다.
안내를 따라가 테라스에 도착하자, 그곳에 한상준이 있었다.
도시에 야경을 두 눈에 담고있는 듯, 미동도 하지 않은채 밖을 바라본다.
어째선지 그의 뒷모습이 슬퍼보였다.
"의원님. 김독자군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 수고했네."
운전기사가 돌아가자 넓은 테라스에 김독자와 한상준 두 명 밖에 없었다.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알겠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싶었네."
그는 점차 김독자에게 다가왔다.
이내 코앞까지 다가온 한상준은 김독자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수영이를 잘 부탁하네."
"그 말씀은....?"
"자네를 약혼자로 인정하겠다는 소리이네."
목표했던 바는 이루었다. 생각의외로 쉽게.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김독자는 용기를 내어 한상준에게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이유를 말하는 거지?"
"수영이를 사랑하시면서, 왜 그저 미움을 받고 계신겁니까."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국회의원쯤 되는 이라면 한수영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을 강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상준은 한수영에게 기회를 주었다.
또한 한수영과 만나면서 보여준 모습은, 도저히 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부모라곤 생각하긴 힘들었다.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눈이 커진 한상준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네. 이것은 내가 감내해야할 업보지. 그래도 나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네."
"그 이유가 뭡니까."
"그 아이를 이런 세계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네."
대게 국회의원의 자식들은 부모와 같은 길을 걷기 마련이다.
순수함은 잃어가고 숫자만을 생각하는 어른이 될 뿐.
그렇게 그는 한수영을 지키기 위해 최악을 선택하고 말았다.
무시라는 최악을.
"하지만, 의원님의 방법은 분명히 잘못 됐습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아무리 무어라 말한다 한들 의원님의 행동은 수영이를 버린것이나 다름 없는 행동입니다."
김독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무리 한수영을 위한다 한들, 그 속에 정작 한수영이 없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한상준은 아비로썬 부족한 인물이었다.
처음이라는 변명은 그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때 굳게 닫힌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를 보곤 한상준은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영아."
그곳에 한수영이 서있었다.
***
"이 새끼는 언제오는거야."
방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한수영은 김독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데려간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빠인데.
"하...."
한수영은 방문을 나서 김독자를 찾기 시작했다.
오래전 집을 나와도 자신의 집이었기에 구조는 머리 속에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접견실, 주방 등 있을만한 곳은 다 가봤지만, 김독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거야....
그 순간 과거 한상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영아. 하늘을 좀 봐보렴. 마음이 편해지지 않니?"]
언제였을지도 모를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아직은 따뜻했던 아빠와의 기억이 왜 이제서야 떠오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에서 하늘을 볼 수 있는 곳.
그 곳에 틀림없이 김독자가 있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문.
거기서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렸다.
"수영이를 사랑하시면서, 왜 그저 미움을 받고 계신겁니까."
...뭐?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한수영의 손은 김독자의 목소리에 의해 잠시 멈칫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네. 이것은 내가 감내해야할 업보지. 그래도 나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네."
틀림없는 아빠의 목소리다.
지금껏 몰랐던 진심이 이 문 너머에서 들리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그럴리 없다.
지금까지 차가운 시선만을 보내주었으면서.
알고보니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끼익.
"...수영아."
지랄 하지 말라 그래.
한수영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한상준을 지나쳐 김독자를 향해 다가갔다.
"김독자 가자. 이딴 곳 올 필요 없잖아 이제."
"수영아."
"왜 너도 저게 진짜같아?"
한수영은 분노에 찬 눈으로 한상준을 바라보았다.
"집 나오고 한번도 연락 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려고 했다고?"
"수영아 그건."
"듣기 싫어. 당신의 변명 듣고 싶지도 않다고."
다시 몸을 돌려 테라스를 나가려던 그 순간.
"미안하다."
그 한마디가 들렸다.
"이제와서 너무 늦었겠지만, 지금와서 용서받을 생각은 없다."
한상준은 고개를 숙였다.
평생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 같은 그가 고개를 숙여서 인지, 한수영조차 당황한 듯 보였다.
"이러한 행동조차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도 안다. 허나."
제 3자가 있는 곳에서 고개를 숙인다.
국회의원 쯤 되는 이라면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존심을 버린채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을 챙기는 것보다 아비로써 못해준 죄책감이 더욱 컸기 때문이었다.
"정말로....미안하구나."
대화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미 한수영과 한상준 사이에는 더 이상 너머가 보이지 않는 큰 벽이 있다.
하지만 그 벽에 흔적을 남긴다면.
언젠가 저 너머에서 이 흔적을 찾아주지 않을까.
한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왜 이제서야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한 원망도 들었다.
어떨때 보면 감정이란건 참으로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기쁘기도 슬프기도 하다.
화나기도 하고 이제서야 그 말을 해준 고마움도 있었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빠인데도.
인연의 끈이란 이토록 질긴 것이었다.
"...김독자. 잠시만 나가 있어줘."
한수영의 부탁에 김독자는 말 없이 테라스를 나섰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테라스 위에, 한수영과 한상준 두 명 만이 있었다.
한상준은 말 없이 한수영을 응시했다.
차가운 시선,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
어린 시절 보던 그 얼굴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알 수 있었다.
한상준의 눈빛은 그때와 달리 초조해하고 있단 것을.
그 오랜 침묵 속에서 한수영이 말을 걸었다.
"진짜야?"
"..."
"어릴때 하던 그 짓거리가 사실 나를 위해서 한거라고?"
한상준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 한들, 그 속에 정작 한수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는 변명은 그저 자기위로일 뿐이었다.
김독자가 지적한 것처럼.
"수영아. 나는...."
"아직 내 말 안끝났어."
한수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당신이 죽도록 미웠어. 나는 사랑 한번 받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인형인 줄 알았으니까."
어린 시절의 울분을 토해내듯, 한수영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냈다.
그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깊은 곳에 남겨진 상처를.
그 울분을 한상준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감내야 할 업보였으니.
"아무리 당신이 사과를 한다 해도, 이 관계가 기적처럼 회복되진 않아."
사과 한번으로 회복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오랜 단절은 큰 벽이 쌓이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 저게 정말 진실일까.
나는 그냥 진실을 피하고 있던건 아닐까 하면서.
사과는 받겠어. 하지만 아직 우리는 시간이 필요해."
한수영은 올곧은 시선으로 한상준을 바라보았다.
점차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벽의 틈새에 따라 오랜 시간 막아둔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툭. 툭.
한상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나는 아비로써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는데, 어느새 너는 나보다 좋은 어른이 되었구나.
"미안하구나...너무..미안해."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데에는 오랜 집중력과 노력을 필요로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부서진 것을 다시 쌓는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난다면, 원상태는 아니어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상준이 행동에 따라 둘의 관계는 점차 회복될 것이다.
한수영이 테라스를 나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테라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복도.
그곳에서 김독자가 서있었다.
그녀가 나올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것이다.
김독자는 한수영에게 조심히 물었다.
"..어땠어?"
"모르겠어."
한수영은 솔직히 대답했다.
10년간 뒤틀린 관계가 사과 한번으로 풀어지는 건 말이 안됐으니까.
"무어라 말했든 너의 선택이니까 난 존중해."
"어 고마워."
"고마우면 소원권 하나만 더 줘."
"....이 새끼한테 무드를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한숨을 내쉰 한수영은 이내 정문으로 향했다.
아빠랑 일이 있고나서 아직까지 남아 있기에는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한상준 또한 알고 있었는지, 정문에는 검은 자동차 한대가 시동이 켜있는채 기다리고 있었다.
"의원님의 말씀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타시죠."
운전기사의 말에 따라 한수영은 차에 탑승했다.
이제 약혼자 행세는 안해도 됐기 때문에 한결 편해진 표정이었다.
김독자도 차에 타려던 순간 지금껏 안내해준 노신사가 어느새 다가오더니 그에게 몸을 숙였다.
"오,왜 그러십니까?"
"아가씨와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회복시켜주어서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한건 딱히 없습니다."
"약혼자인 척 해주신 김독자군이 없었다면, 둘의 관계는 산산히 부서졌을 겁니다.
...알고 있었나.
연기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김독자! 왜 안 와!"
자신을 부르는 한수영의 말에 김독자는 "갈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차를 향해 걸어가던 중 넌지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식당에서 한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덕분에 편안히 지냈습니다."
김독자가 차에 탑승하자, 차는 재빠르게 정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 차의 뒷모습을 보며 노신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곧 다시 뵙겠군."
***
차에서 내린 한수영과 김독자는 자신들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일까.
하루가 너무나 길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이거 소원권 한장으로 될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해도 못 늘려준다."
"아쉽네."
김독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테라스에선 못 느꼈는데 이제 보니 늘 새까맣던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밝았다.
소위 말하는 '낭만적'이었다.
"야 근데 김독자."
"왜?"
"그 있잖아, 우리 가족이랑 식사할때..."
"어."
"그 첫 만남 그거 진짜야....?"
쑥스러워 하며 묻는 한수영이 귀여워 보여서 일까.
평소라면 "당연히 거짓말이지." 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겠지만, 왜 인지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감춰둔 진실을 고백하고 싶었다.
"어. 진짜야."
"....무,뭐?"
예상치 못한 답변에 한수영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붉게 물들여졌다.
이미 엎질러버렸기에 김독자는 용기를 내어 한발자국 더 내딛어보기로 했다.
"수영아. 나랑 새로운 관계가 되지 않을래?"
"...이게 소원이었어?"
"내 소원이야 이게."
대답을 들은 한수영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뻣뻣하게 김독자를 향해 다가왔다.
"숙여봐..."
갑작스럽게 숙여달라고 부탁하자 김독자는 말없이 그 명을 따랐다.
"왜..."
무방비한 김독자의 입술에 한수영은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김독자의 향기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첫키스는 레몬 맛이라던데, 정말이지 레몬 맛이 났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이내 끈적거리는 마찰음이 새어나왔다. 부드러운 자신의 아랫입술에 김독자의 윗입술이 느껴진다.
눈이 천천히 감겼다.
눈을 감으니 이제껏 들리지 않던 소리가 더욱 명확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길게 내뱉지 않는 숨소리가, 짧게 나오는 의미 없는 신음이, 자신의 심장소리가 자신의 귓가를 둥 둥 울려대고 있었다.
10분같던 1분이 지나 입술을 뗀 한수영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대,대답.... 됐지?"
그런 한수영을 김독자는 꼭 안았다.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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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 계획상은 이렇게 길게 쓸려고 하진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길어져버림...
찐친같은 독수가 좋다.
(피드백이나 오타 지적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