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흑운, 그 최심부에서 심연의 흑염룡은 패널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다 패널 속으로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중한 모습에, 샐리맨더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봐?]
흑염룡이 고개를 돌려 샐리맨더를 눈에 담았다. 동시에 수많은 인상들이 떠올랐다.
도룡농인지 도마뱀인지 모를 녀석. 귀찮고 말 많은 성좌. 허나 가장 친한 성좌를 뽑는다면 한 손에 들 존재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흑염룡은 자신이 보고 있던 패널을 공유했다. 패널 속 화신은 샐리맨더도 익히 아는 화신이었다.
[신유승?]
개연성 적합 심사를 받고 소형화된 래서 드래곤을 어깨에 얹은 소녀가 김독자를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었다.
샐리맨더 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흑염룡이 이 아이를 왜?
여기서 흑염룡이 간과한 바가 있다면, 샐리맨더는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은근히 눈치가 빠르다는 점이다. 특히 남녀 사이에 그렇고 그런 일에 관해서는 발군의 속도를 자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샐리맨더가 히죽 웃으며 흑염룡의 옆구리를 찔렀다.
[혹시 아스모가 부탁해서 보고 있는 거야?]
흑염룡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게임이건만 흑염룡은 허세를 부렸다.
[쳇, 이 몸이 겨우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
[응. 저번에도 그랬잖아.]
[ . . . ]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해야지. 대장을 한 방 먹인 것에 만족한 샐리맨더는 곧바로 연애 상담 모드에 들어갔다.
친구의 연애에 참견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나 성좌나 똑같나 보다.
[그래서 언제 고백할 거야?]
[. . . 몰라.]
[너 고백 안 하면 평생 솔로로 살 걸?]
[시끄러. 내가 알아서 한다고.]
[으유. 내가 답답해서 못 살아.]
샐리맨더가 제 가슴을 두드렸다. 솔직히 지켜만 보고 있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근 천년 동안 저렇게 쑥맥처럼 구는 모습을 보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제 수식언이 불을 삼킨 도마뱀이지만 그렇다고 화병이 나고 싶지는 않다고.
[수천 년 동안 반려는 약한 놈들이나 갖는 거라고 큰 소리 뻥뻥치던 놈은 어디로 갔냐?]
[ . . . ]
샐리맨더의 한탄에 흑염룡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흑염룡은 천 년 전 아스모데우스를 만났다. 그때는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 “지금 시나리오가 혹시 성마대전인가요?”
- “그럼 뭐겠냐?!”
하등한 마왕은 첫 만남부터 무례했다. 잔뜩 꼽을 주지 않나 멋대로 자기를 업지를 않나. 전혀 좋아할 구석이라곤 없었다. 없었는데 . . .
- “정신이 드나요?”
그 눈을 본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보랏빛이 감도는 눈동자에 흑염룡 자신이 비친 순간.
모든 게 아득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밀려든 것은 새로움이었다.
같은 성운 소속이 아닌 존재에게 도움받은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막 대해진 것도 처음이었다. 신선한 자극이며 동시에 낯선 타인이었다.
‘너는 누구야?’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생각했다는 사실에 흑염룡은 당황했다. 당황해서 무심코 아스모데우스의 손등을 쳤다.
- “윽!”
고통을 참는 신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서투른 사과를 건네고 훗날을 기약했다.
- “크흠! 너에겐 신세를 졌군. 그런 의미에서 이 몸의 수발을 들 기회를 주지.”
솔직히 두 번째 만남은 없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게 마왕이 성좌를 왜 찾겠냐고. 서로 멀리한 채 시간이 흐르면 이 낯선 감정도 사라지겠거니 생각했다.
허나 그녀는 평범한 마왕이 아니었다.
- “혹시 시간되나요?"
마왕은 연락을 했고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함께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마왕은 점차 흑염룡의 마음에 녹아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똑같은 웃음인데 느껴지는 감상이 다르다는 것은.
- “흐흐흐.”
- “왜 웃냐?”
- “그냥 보기 좋아서요. 근데 흑염룡은 왜 웃어요?”
‘이 몸이 웃었다고?’
평소처럼 허세 가득한 웃음이 아니었다. 순전히 기뻐서 짓는 웃음. 눈앞의 이성을 보고 순수하게 우러나온 감정.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 난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무심코 피어낸 흑염이 흑염룡의 마음을 대변했다. 원의 형상에서 가운데가 움푹 파여진 그것. 아스모데우스는 못 알아봤지만 흑염룡은 알아봤다.
- “찌그러진 원이네요.”
‘아니야.’
- “아닌가요?”
‘그래.’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흑염룡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가슴 한 켠엔 상대가 자기 마음을 모른다는 것에 안심하는 자아가 있었다.
머릿속에서 설화가 속삭였다.
- 아이는 어디에도 없는 곳에 동심을 버리고 어른이 된다.
- 그곳엔 나이를 먹지 않는 순수(純粹)가 검은 용의 탈을 쓴 채 살고 있다.
- 용은 동심을 삼키고 있다가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이 찾아오면 동심을 뱉어 돌려 준다.
-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보다 찾아오지 않은 사람이 많기에 용은 언제나 동심을 가진다.
그렇기에 흑염룡은 영원히 어린 소년의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이는 흑염룡이 자기 감정을 순순히 인정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 사랑은 순수(純粹)에서 가장 거리가 먼 감정이다.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흑염룡은 수많은 인간군상을 봤다. 개중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됐던가. 무엇보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흑염룡은 변하는 게 두려웠다. 변함이란 자신의 순수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헹. 이 몸이 그런 거에 휘둘릴까보다!’
그래서 마음을 가슴속 깊은 곳에, 심연에 숨겼다. "이 정도면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겠지?" 생각하며 바보같이 웃고 넘겼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하듯, 결국 흑염룡은 자신에게 자신을 숨길 수 없었다.
- “내 붕대 어때?”
- “멋지네요. 저도 비슷한 게 있는데 - ”
모르는 사이에 몸이 그녀에게 기울어져 있고.
- “큭, 이번에도 지다니!”
- “푸핫! 도대체 언제 이길 건가요?!”
아스모데우스가 웃는 걸 보면 가슴 한 켠이 몽글몽글해지고.
- “그러니까 붕대처럼 감으란 말인가요?”
- “그래.”
- “음, 한번 시도해 보죠. 저도 처음해 보는 거라 안 될 수도 있어요.”
급기야 상대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불가항력이다.
- 사랑은 순수(純粹)에서 가장 거리가 먼 감정이다.
‘알아.’
- 사랑은 순수(純粹)에서 가장 거리가 먼 감정이다.
‘안다고.’
근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기억하지 않을래도 기억나고, 귀를 막아도 머릿속에서 울리는 속삭임을 어떻게 하라고.
지독한 모순이 흑염룡을 덥쳤다. 짙은 고뇌 속에서 결국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설화, ‘천 년의 짝사랑’이 싱그럽게 웃습니다.]
설화(說話)인가, 설화(雪花)인가.
가슴 아픈 이야기인가, 꽃에 붙은 눈처럼 툭 치면 떨어질 마음인가.
흑염룡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몰랐다면 이런 마음고생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아직은 비밀이다. 설화를 부정할 용기가 나지 않는 한. 어쩌면 영원히 안고 가야 할지도 모르는 작은 속삭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신유승’에게 1000코인을 후원합니다.]
- “어? 감사합니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샐리맨더의 물음에 감상에서 빠져나온 흑염룡이 비웃음을 흘렸다.
[크큭, 이 몸에게 잔소리는 통하지 않는다!]
[이게 기껏 걱정해주니까 - ]
샐리맨더가 노호성을 토해낼 찰나, 두 성좌의 패널에서 알림이 울렸다. 두 성좌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관리국? 애네가 갑자기 뭔 일이지?]
그리고 제목을 읽자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계 채널 개설에 관한 공문?!]
서로 눈을 마주 본 두 성좌는 다급히 채널을 옮겼다. 마계엔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으니까. 패널이 번쩍이고 홀로그램 창에 밝기가 서서히 밝아졌다.
메인 화면에 잡힌 것은 황야. 흙먼지가 자욱했지만 흑염룡은 보자마자 그 황야가 어딘지를 눈치챘다.
[성마대전의 무대 . . . ]
그날의 추억이 또 한 번 재생될 찰나, 샐리맨더가 중얼거렸다.
[아스모데우스?]
[뭐? 어디?]
샐리맨더가 답해 줄 필요도 없었다. 메인 화면의 카메라가 곧바로 한 마왕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마왕은 보라색 머리카락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장착한 소녀였다. 격전을 치렀는지 남루한 행색에 거센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만큼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 [다수의 성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 [소수의 성좌들이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경계합니다.]
이쯤 되면 중계를 이어 나갈 도깨비가 나타날 차례지만, 도깨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스모데우스는 관리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 [아아. 내 말 잘 들리나요?]
아스모데우스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역 십자가 모양의 귀걸이가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름다운 외견과 다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문장은 비꼬는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 [참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습니다. 마계에 채널이 개설되는 것도 보고 말이죠.]
- [성운, <에덴>이 당혹스러워합니다.]
-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도깨비는 어디 갔냐고 묻습니다.]
- [흠, 저도 궁금하군요. 어쩌면 혹부리한테 당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두 종족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잘 알려진 이야기 아닙니까.]
- [소수의 성좌들이 미심쩍어 합니다.]
- [그렇다면 직접 내려와서 확인해 볼래요? 물론 목숨은 장담할 수 없으니 잘 알아두시고.]
- [채널 내 성좌들이 분개합니다!]
-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의 언행에 흥미로워합니다.]
아스모데우스와 성좌들의 기싸움이 한창이던 와중, 누군가의 진언이 울려 퍼졌다.
- [잡담은 그만하고 본론에 들어가라, 아스모데우스.]
- [. . . 이런, 그러고 보니 아직 손님을 소개하지 않았군요.]
아스모데우스가 핏빛 손아귀를 세차게 휘둘렀다. 광풍이 몰아치며 흙먼지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검게 보이던 실루엣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운 <게티아>와 <레메게톤>이었다. 최상위권 마왕들의 등장에 채널 내 성좌들이 일제히 동요한 순간, 아스모데우스가 폭탄 발언을 던졌다.
- [오늘부로 게티아는 레메게톤과 선의의 경쟁관계에서 벗어나 한 몸으로 일체가 됩니다. 레메게톤에 대한 공격은 게티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니 이점 양해해 주시고 - ]
[쟤 . . . 방금 뭐라 한 거야?]
[ . . . ]
정신이 아찔해지는 발표에 흑염룡도 말을 잃었다. 물론 다른 성운들은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쳤다.
- [성운 <베다>가 - !]
- [성운 <올림포스>가 - !]
- [성운 <파피루스>가 - !]
- [다들 닥쳐줄래요? 내 말 아직 안 끝났다고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성좌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동료 마왕들도 머리를 짚었다. 옆에서 아몬이 한숨을 내쉬고 아가레스가 중얼거렸다.
- [그냥 내가 할 걸 그랬군.]
- [동의하오.]
물론 사태의 장본인은 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두 번째 폭탄 발언을 준비했다.
- [다른 마왕들도 이 방송을 보고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