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같이 가자, 응?"
우리엘의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가야죠. 언제 시작해요?"
"다음 주! 서울 고척돔에서 시작할거야!"
"그렇게 빨리요?"
"뭐야, 크리스마스 때부터 말했잖아. 우리 콘서트 있다고. 설마 까먹은거야?"
섭섭한 얼굴을 지어보인 우리엘은 내게 추궁했다.
나는 침착하게 해명했다.
"아뇨. 그냥, 새삼 시간이 빨리 지난 것 같아서요."
"역시 그렇지? 나도 독자 돌아온 후로 매일이 즐거워서 하루가 너무 빨라!"
금세 환하게 웃는 우리엘을 보며, 나는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음... 좀 있어. 사실 지금 애들 만나러 가는 길인데 너도 같이 가자. 가서 설명해줄게."
각기 다른 색의 날개를 펼친 그녀와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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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8 Ent.]
어딘가 익숙한 이름의 회사 앞에서 나는 놀랐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옥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웬만한 3대 엔터.... 아니지, 이제 없구나.
하기야 회사가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월드 투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삼엄한 보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한 우리엘은 나를 최상층 회의실로 데려갔다.
큰 회의실을 채운 인물들 중에서는 익숙한 얼굴과 회사의 중요 보직을 맡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벌써 왔냐? 어, 김독자도 데려왔네?"
소년의 모습으로 큰 탁자 위에 발을 올린 채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심연의 흑염룡]이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오랜만이구나, 막내야. 그동안 잘 지냈느냐?"
흰 머리를 멋지게 뒤로 넘긴 제천대성도 나를 맞아주었다.
"네, 두 분 모두 오랜만입니다."
"염룡이 너 탁자에서 발 내려!"
갑작스러운 우리엘의 불호령.
황급히 자세를 고쳐앉은 흑염룡이 불평했다.
"나도 좀 편하게 앉자! 어차피 회의 시작도 안 했잖아!"
"그래도 손님 왔는데 삐딱하게 그게 뭐야! 탁자에 흙 뭍히기나 하고!"
"그게 바로 '멋' 아니겠어? 아무튼 꼰대 대천사..."
"멋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를 ■■■■해서 ■■■■ 해버리기 전에 똑바로 앉아라."
"알겠어. 제대로 앉았잖아."
"아 ■■ 필터링... 그냥 풀어버릴까."
"대천사의 위엄을 지켜, 우리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음성의 주인은 다름아닌 가브리엘이었다.
"어서와, 김독자. 오는 동안 우리엘한테 설명은 대충 들었지?"
"네? 무슨 설명이요?"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우리엘을 쳐다보았다.
우리엘은 까먹었다는 표정으로 가브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까먹었당... 그래도 지금 설명해도 돼!"
그녀는 휘황찬란한 빛을 내는 PPT 화면을 TV에 띄우며 말을 시작했다.
"자 그럼... JUS 1st 월드 투어 공식 프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근데 프리뷰라는 단어가 맞다고 생각해? 애초에 그냥 계획 설명하는 최종 점검 브리핑이잖아?"
시작부터 태클을 거는 이는 한수영이었다.
"네가 왜 여깄어?"
"뭐. 애초에 이 엔터 투자자가 난데?"
"너가?"
"불만있어? 맞을래?"
"아니야. 계속해."
"아무튼, 우리엘. 그 단어 좀 어떻게 안 되겠어?"
"아 그냥 ■치고 봐! 어차피 다 알고 있잖아!"
"하여튼 성질은..."
한수영의 마지막 말을 무시한 채 우리엘은 설명을 계속했다.
나도 조용히 자리에 앉아 경청했다.
회의는 4시간 넘게 이어졌다.
.
.
.
"자, 이 정도면 다 한 거 같은데. 혹시 질문 있는 사람?"
.....이거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데?
서울 고척돔에서 시작해서 미국 LA 로즈 볼 스타디움,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O2 아레나, 프랑스 파리 스타드 드 프랑스, 일본 도쿄돔.... 이것 말고도 더 있다.
이 정도면 내가 아는 분홍색의 그룹이랑 비슷한... 아닌가?
하지만 내가 더 놀랐던 점은 특별 게스트들의 존재였다.
각 무대마다 나라의 유명인들을 불러놓고 노래를 시킨다니... 미친.
그리고 서울 고척돔의 게스트는 나였다.
"근데요, 우리엘. 언제 저한테 게스트 동의 받으셨어요?"
"아, 그걸 오는 도중에 받으려고 했는데. 어차피 할 거지? 그치?"
이건 뭐 거의 협박 아닌가.
"근데 저 노래 못하는데...."
"상관없어! 못 불러도 너니까 다 돼!"
너무 부담스럽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노래를 정말로 못 부른다.
"해줄거지?"
아까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한 대천사의 말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나는 또다시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오늘은 이쯤하고 해산하자! 오공이랑 염룡이는 연습실 갈거지?"
"아 좀 쉬고 하자! 저녁 먹고 하던가 해!"
"난 저녁 생각 없는데. 그럼 둘이 먹고 와. 난 먼저 가있을게."
"그럴게. 염룡아, 먹고 싶은거 있니?"
"마르크 주점 갈래?"
다들 집으로 가려는 분위기라 나도 슬쩍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기분 좋은 봄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집 가게?"
언제 나왔는지 한수영이 내 옆에 섰다.
"응. 넌 어디 갈건데?"
"애들 따라서 연습실 갈라 그랬는데."
"그래, 잘 보고 안 늦게 집 들어와라."
날개을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순간, 한수영이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지."
"혼자 먹게?"
"오늘 집에 길영이랑 유승이 있어서 같이 먹을건데?"
"걔네 둘이 데이트하는 건데 너가 껴서 방해하고 싶냐?"
"이래봬도 내가 걔네 이어준거야. 나도 애들이랑 밥 좀 먹자."
"이 눈치 없는 새끼가.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먹자."
"너 연습실 갈 거라며?"
"너랑 밥 먹으면 안 가도 돼. 같이 갈거야?"
한수영이 나랑 밥을 같이 먹자고 한다고?
뭔가 계락이 있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웠지만 데이트 방해하는 것이라는 녀석의 말에 살짝 망설여졌기 때문에 따라가기로 했다.
"그래 뭐. 어디로 갈거야?"
"내가 아는 곳 있어. 차로 가자. 지하에 주차해놨어."
"그냥 날아가는게 더 빠를걸? 날개도 펼친 김에 태워줄게. 어딘지만 말해."
"난 날개가 없거든?"
"내가 들고 가면 되지. 이리와."
"미친. 존나 싫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수영은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걸어왔다.
"빨리 가자. 올라가면 길 알려줄게."
나는 가볍게 한수영을 안아들고 뛰어올랐다.
"어... 여기서 동쪽으로 900m만 가면 바로 나와."
나는 몸을 돌려 날아갔다.
백허그한 듯이 내 품에 안겨있는 한수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귀가 빨개지는 것을 보니 너무 높게 날았나 싶어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어, 여기야."
우리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나무 문을 연 한수영을 따라 나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90년대 경양식 레스토랑 느낌의 인테리어가 왠지 모를 편안함을 주었다.
출입구에서 가장 먼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은 우리는 메뉴판을 펼쳐들었다.
"여기 뭐가 제일 맛있냐?"
"그냥 다 맛있던데. 하나만 고르기는 어렵다."
"음... 이거 괜찮아?"
"아 못 고른다니까. 차라리 커플 세트 먹을래? 이것저것 조금씩 나오는데."
"괜찮다. 근데 네이밍이 좀 그런데? 우리가 커플은 아니잖아?"
"난 상관없는데."
의외로 무덤덤한 한수영에 반응에 할 말이 없었다.
저 녀석이 더 질겁할줄 알았는데.
한수영은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마쳤다.
"요즘 몸은 좀 괜찮아? 쓰러지진 않고?"
힘을 받고 난 후로는 몸이 더 가뿐해진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다행이네."
배시시 웃음을 짓는 한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눈을 피하며 녀석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무슨 노래 부를지 생각해봤어?"
"내가 아는 노래가 별로 없어서. 그나마 부를 수 있는게 이거 밖에 없다."
"네드커넥션... 좋은 잠 좋은 꿈? 이거 부르기 어려울텐데."
"왜? 한 소절 불러줘?"
"가게 안에 손님들 고막 테러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나는 피식 웃었다.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한수영이 추천하는 만큼 음식은 맛있었다.
간혹 설화 음식도 있었지만, 입에 대지는 않았다.
맞다, 그 설화도 풀어봐야되는데.
집에 돌아가서 시도해봐야겠다.
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조용히 식사를 하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 노래, 누구 생각하고 불러?"
"응? 좋은 잠 좋은 꿈?"
"어. 가사가 사랑 노래에 가깝잖아."
"그렇긴한데. 이 노래는 단순히 멜로디가 좋아서 들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접시가 다 비워지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계산할게."
"어? 진짜?"
"응. 내가 먹자고 했는데 내가 내야지."
지갑을 꺼내려던 손이 민망해졌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은 밤공기가 쌀쌀했다.
"이제 집 가?"
"진짜 가야지. 애들 혼자 있어."
"그럼 같이 가자. 연습실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 이번에도 날아가?"
"여기서는 집 가까워. 그냥 걷자."
"너 차는 어쩌게."
"어차피 내일도 가야 돼. 아침에 운동하는 셈 치고 걸어가지 뭐."
"그러든가.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돼?"
"여기로."
앞장서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귀가 빨갰다.
식당 안이 좀 더웠긴하지.
집 갈 때 아이스크림이라도 좀 사서 가야겠다.
"빨리 안 오냐?"
"갑니다, 가요~"
[김독자 소멸까지
1094일 3시간 09분 39초]
다음 주, 콘서트 시작.
그 전에 수영이랑 아이스크림 먹어야겠죠?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