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거 뭐야?"


어린 후순이와 후희는, 오랫동안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 이거? 인도에 갔을 때, 기념품으로 사 온 거야. 원숭이 손이라는데,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대."


아빠는 빙글빙글 웃으며, 후순이와 후희 자매에게 말했다.

쪼글쪼글 미라화된 원숭이의 손은, 손가락 셋을 펴고, 나머지 둘은 접고 있었다.


"여보. 또 이상한 거 사왔어?"


"에이, 외국 갔다가 오는 건데, 기념품 좀 사 올 수도 있지..."


"그래요, 그럼, 소원 하나 빌어봅시다. 우리 둘이 영원히 함께하고, 자식들이 평생 돈 걱정 없는 거!"


후순이의 엄마는 깔깔대며 웃으며 말했고

후순이의 아빠도 좋은 소원이라며 웃었다.


후희는 아빠가 사온 다른 선물에 정신이 팔려서 대화를 듣지 못 했고

후순이 혼자 그 광경을 끝까지 보았다.




다음날

후순이의 부모님은

같이 장을 보러 마트를 갔다가

화재 사고를 당했다.


불타는 건물 안에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들쳐업고 비상구를 찾아 이리저리 뛰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코와 입에 젖은 손수건을 가져다 대며, 어떻게든 서로를 살리려 했다.


둘의 시체는 끔찍하게 녹아내렸고

달라붙어 있어서 떼어낼 수조차 없어, 결국 둘의 시체를 같이 화장해서 유골함에 담았다.


후순이와 후희는

화재에 대한 보상금으로 수십억대의 보험금과, 위로비를 받았다.







후순이와 후희는 어릴 적 부모를 잃었지만

금전적으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언니 후희는 순둥순둥했고

동생 후순이는 똑부러져서


둘이서 서로의 부족한 것을 메꾸며 자랐다.



부모가 없는 자매에게 세상은 차가웠지만

후순이의 친구 후붕이는 달랐다.


자매 둘이 있는 집에, 초인종을 누르고, 누군가 하고 나온 후순이를 보며 흠칫 놀라는 후붕이는


"저기, 이거... 우리 집 오늘 여기 이사와서..."


처음엔 그저 어리버리해 보이는 애였다.


"부모님 계시면, 이거 전해드리라구 해서..."


"우리 부모님 없는데?"


처음 보는 애에 대한 긴장감으로, 후순이는 자기도 모르게 툭 내뱉었고


"아, 지금 안 계시면, 나중에 전해드리라구..."


"아니, 돌아가셨다고."


"얘, 왜 이래, 어머나, 시루떡이네. 고마워. 잘 먹겠다고 부모님께 전해드려."


처음 보는 사람의 호의가 낯설어서 툭툭 내뱉는 후순이를

무슨 일인가 하고 같이 나와본 후희는 방글방글 웃으며 말렸고


후붕이는 끝까지 우물쭈물 하다가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나갔다.




이틀 뒤

후순이의 반에, 후붕이가 전학을 왔다.


"자, 오늘 새로운 친구가 왔다! 자, 후붕아, 반 친구들에게 인사해 보렴."


"안녕하세요, 여기 새로 이사온... 어, 너..."


첫 인사를 하려다가 후순이를 보고 순간 굳어버린 후붕이를

반 친구들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후붕이는 나쁜 애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애였다.


가끔, 집에서 부모님이 해 준 반찬을 전해주러 오기도 했다.

가끔, 후순이가 말을 걸면 얼굴을 붉히곤 했다.


후순이도 후붕이가 싫지는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야, 둘이 사귀어?"


"사겨라! 사겨라!"


"전학 온지 며칠 됐다고 벌써 반 친구를 꼬시네, 이야, 후붕이 능력자네!"



반 친구들은 반 장난삼아 그런 둘을 놀렸다.


그게 싫었다.


평소에는 자기에게 관심도 없던 애들이

놀려먹을 거리가 생기자마자 그러는 꼴이라니.

사춘기라 그런지, 더욱 그런 게 부끄러웠다.



언니는 오늘 조금 늦는다고 했다.


텅 비어버린 집도 짜증나고

반 친구들의 놀림도 엿같고

신경질적으로 청소를 하다가


문득

아버지 방에서 못 보던 물건을 보았다.


아니, 못 보던 물건은 아니었다.

기억 저 편에 묻어두었던 것이었다.


쪼글쪼글 미라화된, 손가락 두 개를 편 원숭이 손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언니가 꺼내 뒀던가?

서랍 안에 있었지 않나?

아니, 애초에 이건 어디에 보관했더라?

원래 손가락 두 개를 폈던가, 세 개를 폈던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곧 짜증이 다시 뒤덮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 후붕이랑 친하게 지내고는 싶은데, 우리 반 애들이 좀 이런걸로 안 놀렸으면 좋겠다..."


투덜거리며

후순이는 원숭이 손을, 아버지 서랍장에 쑤셔박았다.




그리고


후붕이는 후순이를 볼 때마다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외면했다.

반 아이들의 놀림이 줄어들었다.


왜 그럴까 의문을 가졌지만

그래도 놀림이 줄어들었으니 괜찮겠지 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후회의 날은 곧 다가왔다.


어느 날 저녁식사 때.

후희 언니가 그날따라 공들여서 저녁식사를 준비했을 때.

후붕이가 그날 쑥쓰럽게 웃으며 집에 초대받아 왔을 때.


둘이 사귄다고 고백해왔을 때.

후희가, 후붕이에게, 늘 고마웠으니, 자기도 은혜를 갚게 해달라고 고백했다고 했을 때.


마음에 깊이 칼이 박혔다.




고백 이후, 친하게는 지낼 수 있었다.

후희와 후붕이는 팔짱을 끼고 카페나 영화관에서 데이트를 즐겼고

목격담이 많아짐에 따라, 후붕이를 놀리는 아이들은 많아도, 후순이를 놀리는 아이들은 없었다.




후붕이는 후희에 관한 일을 상담해왔다.

후희는 후붕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보내는지 물어왔다.


후순이 혼자, 속앓이만 하면서도

겉으로는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다.




속이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후붕이는 졸업 직후, 후희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신부 대기실에서

햇살이 얼굴에서 뿜어져나오듯 밝게 웃는 언니를 받쳐주며


처음 봤던 그 때처럼

어리버리하고 우물쭈물하면서 후희의 손을 잡고

그때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그때와 달리 입가는 미소를 그리며


후붕이는 후희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했다.


"신랑 신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겠습니까?"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고


후순이는 움직이지 않는 입가를 억지로 비틀어가며 웃으며

끝까지 결혼식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야, 후순이 널 처제라고 부를 날이 오네?"


아무것도 모르는 후붕이가 웃었다.


웃지 마. 네가 뭘 알아.


"여보, 벌써 주책이야? 후순아. 결혼식 준비 고마워. 너도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동생의 행복을 빌며, 후희도 웃었다.


더러운 위선 보이지 마. 그 자리는 내 거였어야 했어.


"둘 다 축하해."


억지로

마음 속 소리를 찍어누르며

후순이는 미소를 지었다.




둘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집엔

후순이 하나였다.



소주를 한 병 까고

한 병 더 까고

어차피 보는 이 없으니 실컷 울어제끼기나 해야지 하며

아버지 방에 들어가 술을 들이키다가


문득, 뭔가가 보였다.


원숭이 손.

손가락을 하나 편 채의.



잔뜩 취한 채로

후순이는 내뱉었다.


"하... 후붕이와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다. 둘이 같이 있던 추억만이라도 가지고 싶다..."




파스스스


그 순간

원숭이 손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후순이는 순간 오싹했지만

술에 너무 취해서, 자기가 헛것을 봤으리라 여겼다.




교통사고였다고 했다.


운전석에 있던 후붕이는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았고

조수석에 있던 후희는 즉사했다고 했다.


장례식에 오는 조문 행렬은

모두가 후순이에게 동정의 눈길만을 보냈다.


후붕이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저 분향소에서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만 줄줄 흘리며 앉아있었다.




늦은 밤

조문객들을 모조리 돌려보내고

분향소에는 후순이와 후붕이만이 있었다.


후붕이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후순아... 넌 괜찮아...?"


그 날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후순이는

원숭이 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있잖아. 언니 대신을 내가 해도 돼?"


"... 무슨 소리야?"


"부부관계도, 아이 키우는것도, 너랑 나랑..."


후붕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었다.


"마음은 고마운데, 너랑은 그런 관계가 되기 싫어."


마음 속 이 소리는

악마가 속삭이는 거겠지.


후순이는 취해버린 채로

자기 역시 원숭이 손에 조종당하는 것이라 자기합리화를 하며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네."


"응... 마음은 고마워..."


"부탁이 아니라, 강요야."


"....?"


후희의 영정사진 앞에서

후희를 기리는 분향소 안에서

상복을 벗기 시작했다.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후붕이에게

후순이는 속삭였다.


"내 마음은 왜 몰라줬어?"




후희의 영정사진 앞에서

후희를 기리는 분향소 안에서

후순이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내 마음을 몰라준 후붕이가 나빴고

나보다 먼저 행동한 후희가 나빴고

나를 조종하는 원숭이 손이 나빴고


나는 잘못이 없다고.




며칠 뒤

후붕이는 자동차를 몰고

절벽으로 악셀을 밟았다.


사람들은 수군댔다.

슬픔을 못 이긴 후붕이가

아내를 따라가고 싶어한 거라고.


내막은 모른 채로.




후붕이조차 잃은 후순이는

배 속에 있는, 후붕이와의 마지막 추억만을 쓰다듬으며

울면서 웃었다.


처음부터 소원 따위는 빌지 말걸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