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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지끈거렸다.

익숙한 편두통이 나의 두개를 좌우로 사정없이 압박해온다.

마치 무언가에 의해 압박 당하는 것 처럼 말이다.


동시에 가슴이 하염없이 쓰라렸다.

얼어 붙을 것만 같은 시려움과 불편함.

나는 시큰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두 눈을 떴다.


따스한 햇살이 내 얼굴을 비추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는 상태.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전 11시를 막 넘기고 있을 시점이었다.

해집어진 이불을 보니 아내는 이미 일어난 듯 했다.


이상했다. 이렇게나 오래 자본적은 정말 오랜만인데.

몸두 찌뿌둥하고 영 불쾌한것이 아마 잠을 잘 못 잔듯 하였다.

아님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한참 동안이나 빈 벽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던 나는 이윽고 내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새파랗게 지나버린, 젋은 날의 내 청춘과 그에 얽힌 일화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짧았던 인연의 선배와 이름이 기억나지도 않는 내 첫 사랑까지.


생각해보니 꿈을 꿔 본 적도 상당히 오래되었던 것 같다.

뭐,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병 난다고 아까 전의 두통은 필히 그 이유 때문이겠지.


"...보."

".....보!!"

"...여보!!"


"헛, 으응??"


"몇 번을 말해야 일어나는거야!"

"어제 뭔 일이 있었던거야? 이렇게까지 오래 자는건 또 처음 보네?"


"아...그,그게 뭐라고 해야하나..."

"뭔가 좀...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으이그, 빨랑 일어나! 일어나서 음식물 쓰레기 좀 버리고 와."


"뭐어...?? 방금 일어난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거 아냐?"


"11시 까지 퍼질러 잔 사람이 시키면 해야지!"

"돌아올 때 즈음이면 밥 다 되어 있을테니까 빨리 버리고 와!"


"아...알겠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때어 놓으며, 나는 어제 꾸었던 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았다.

고교 시절의 이야기. 재미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여러가지 미숙한 면도 있기에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

충분히 꿈으로 꿀 수 있을만한 내묭이었다.


하지만 왜 꿈을 꾼 시점이 하필이면 지금인지, 나라고 알 방도는 없었다.

한창 학창 시절을 그리워 할 시점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어느덧 서서히 중년의 나이로 접어드는 지금 시점에 와서?

너무 늦지 않나. 그 시절 훤칠한 인상의 나는 이미 배불뚝이 아저씨로 변모한지 오래인데.

문득 시간의 흐름이 참 야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시간이 참 많이 흘렀지.

'그녀'와의 관계를 모두 정리한 후, 나는 수험 공부에 매진하였다.

물론 내 옆에는 나츠키 선배도 함께였다.


선배는 배구부를 그만두었다.

들리는 말로는 부보님께 쫒겨날 뻔 했다거나 뭐라나.

뭐, 언제나 허풍이 많은 선배의 말이기에 그리 신빙성이 있지는 않다만.

어찌되었든 이후 선배는 곧바로 수험에 매진하였지만 결과는 당연히 참패.


마음을 먹은 시점이 너무 늦은 탓일까?

선배는 면목이 없다며 내게 다시금 도움을 청해왔다.

나와 선배는 열심히 공부에 힘을 썼고, 그 결과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 선배는 더 이상 선배가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어쨋든.


이후 '그녀'와의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전화는 물론 기존에 몇 번씩 문자마저도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볼까 라고도 생각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한 번쯤은 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내가 그녀에게 너무 가혹했던걸까.


나와 선배는 달달하면서도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선배와의 연애도 결국은 끝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이 되었다.

세월이 참 야속하다는 말을 어째서 어른들이 입에 한결같이 달고 살았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달까.


"...하아? 이 사람이 아직도 안 나가고 뭐하는거야!"


"아...알겠어, 다녀올게에!!!"


아내에게 급히 쫒겨나듯 집을 나선 이후에도 잡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이를태면 '그녀' 라던지.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하니, 문득 근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결혼도 한 몸이고, '그녀'도 세월이 있기에 아마 어엿한 가정을 꾸렸겠지.

딱히 전화를 한다고 해서 안될 일도 아니었다.


"어디~ 보자~ 연락처가~"

"이름이... 아이자와였나...? 아잇,젠장...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

[...]

[...여보세요?]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남자였다. 그것도 아주 걸걸한 목소리를 소유한.

솔직히 누가봐도 아이자와는 아니었다. 아이자와는 성격이 걸걸할지언정 어디까지나 여자였으니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향긋한 요리 향기가 내 콧속을 간질였다.


"아, 왔어? 여보도 이거 봐봐."

"배구경기인데 오랜만에 보니까 재밌네 이거."


"배구? 내가 또 한 배구 하지..."


"뭐래, 배구 한 번도 해본적도 없으면서... 흐흐."


"말이 그렇다는거지 말이 이 사람아..."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내는 내게 수저를 내밀며, 말없이 TV를 가리켰다.

화면에는 요즘 성황리에 진행중인 올림픽 중계가 한창이었다.

나는 아내의 일을 도움과 동시에 TV속 화면에 집중했다.


[...그런 고로 이번이 30년만의 8강 진출이죠?]


[네 그렇습니다. 이번 선수단은 역대 선수단들과 비교해도 특히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은 편인데요...]


"못 보던 얼굴이 꽤 많은 것 같은데?"


"그러게. 나도 요즘 통 배구에 관심이 없어서 영~"

"...뭐해...? 누가 가만히 TV만 보랬어! 수저 놓으라고 수저!"


"아,아얏! 알겠어...!!"


경기의 진행은 꽤나 루즈했다.

연이은 실수에 코앞에서 놓친 듣점기회 등등.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 대표팀은 전반전에서 그닥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계속되는 실점으로 인해 경기에 대한 기대도, 흥미도 서서히 떨어져 갈 시점.


"선수 교체라... 감독도 꽤나 급했나본데."


"그러게... 뭐 지금 새로운 선수를 투입 한다고해서 결과가 달라질까 싶다만."


.

.

.


[득점합니다! 역시 후반전의 제왕, 우리 대표팀의 에이스이자 든든한 맏언니이죠!]


"으응??? 뭐,뭐야!"


[그렇습니다! 지금 이 자리의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존재만으로 팀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든든한 전력이 되는, 그야말로 철의 여인!]

[18번 아이자와 하나에! 아이자와 선수입니다!]


"오, 아이자와잖아?"


"...??"

"....에??"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던 이름인 탓에, 나는 그만 제자리에 벙찐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결코 잊지 않은, 잊지 못하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기에.


부쩍 자란 길쭉한 신장과 강인한 눈빛.

분명 내가 알고있던 그녀가 맞았지만 동시에 아니기도 했다.

조금은 건들거리는, 자신만만한 포즈로 코트 위에 우뚝 선 아이자와의 모습을 보니 절로 감탄이 새어나왔다.


그건 그렇고 국가 대표라니. 선수들의 최종 목표가 아닌가.

지난 고교 3년 동안 계속 말해왔던 대로, 정말 일본 최고의 위치에 오르고 만 아이자와.

그런 그녀를 보고있자니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아이자와, 완벽한 스파이크입니다!]


[10점차를 단번에 좁히며 역전을 이루어내는 아이자와 선수!]

[이쯤되면 정말 10년. 아니,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인 것 같은데요?]


아이자와의 기량은 몰라볼 정도로 상승해 있었다.

십여 전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하늘을 웅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꽤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피를 깎는 노력을 했을까.

저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던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 마지막 기억.

비록 그녀의 잘못이 있었다고 할 지언정 그토록 매정하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뭐, 지금와서 이러니 다소 주책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과거 연인이자 친한 친구였던 입장에서 감회가 새롭지 않다는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이. 너무 빤히 보는거 아냐?"


"어,어어? 방금 뭐라ㄱ"


"너무 빤히 보는거 아니냐구~ 지금 나 늙었다고 꼽주는거야 뭐야~"

"나도 전성기 시절에는 저 정도 했거든??"


"그,그러니까 오해라니까아~~"


"아앙~? 뭐하고 변명 좀 해 보시지이? 이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말이야~ 어~?"

"나 좋다고 덤벼들때는 언제고, 아내를 두고 한 눈 팔지 말지어다! 이 화상아!"


"악...아악!! 미,미안해요 누니이임...!!!"


아내가 나를 풀어준 시점은 등에 커다란 스파이크 자국이 찍히고 난 다음이었다.


***


[...아쉽게도 우리 대표팀의 여정은 여기서 마무리가 되었지만, 정말로 승리보다 값진 패배였습니다.]


[역사와 전통의 강호인 브라질을 꺾고 4강에 진출한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지금까지 열심히 수고해준 우리 대표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머릿속에서 몇 주 전 보았던 경기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오랜 시간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의 근황을 알게 된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일 터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특히나 아이자와의 경기를 보았던 그 날 이후, 계속해서 과거 시절의 꿈을 꾸느라 잠도 설치는 상황.


어째서일까. 그녀에 대한 미련은 이미 모두 정리했을 터.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어디까지나 저는 공격수, 제가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팀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저는 제가 팀 전력의 전부라는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 성과를 제가 아닌 제 팀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TV속의 아이자와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쭉 펴진 허리와 벌어진 어깨. 그리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까지.


'제발... 제발 내 곁에 남아 있어줘... 제발... 흐으윽... 부탁이야... 부탁이니까아...!!'

'흐윽, 흐으윽...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


과거 내게 그토록 처절하게 집착했던 여자라기엔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철의 여인 아이자와의 이면을.

이렇게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남자에게 그토록 집착했다는 사실을.

아마 아이자와 본인도 그날의 일은 두고두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겠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깔끔하게 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선택을 후회했고, 나는 그녀를 매달려오는 그녀를 과감히 털어냈으니까.

미련 따위 전혀 남지 않았을터이다. 그랬을 터인데.


어째 앞 뒤가 바뀐 느낌이었다.

분명 처음 이별의 원인을 제공한것도 그녀였고 이별 이야기를 꺼낸것도 그녀였는데.

왠지 내가 차버린것 같고 내가 나쁜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죄책감? 미안함? 그게 아니라면 질투?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와 견딜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치 며칠전의 아침처럼.


"어디가?"


"어,그게... 잠시 뭐좀 사오려고."


"그래? 생각해보니 안주도 다 떨어졌는데 오는길에 사와!"


아내의 배웅을 받고 나오는 길.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시원한 바람과는 다르게 내 머릿속은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내 머릿속을 해집어놓는 그녀에 대한 사념을.

그녀에 대한 상념을 말이다.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 속의 맥주가 유독 예뻐 보였기에 몇개를 집었다.

아내가 말한 안줏거리도 잊지 않았다. 특별히 와사비 김부각으로 선별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장바구니는 가득 차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합 1400엔 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결제를 마치고 나오는 길.

저 멀리 도로 끝의 어둠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째선지 문득 저 멀리 암흑속을 홀로 걷고싶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절대 분노한 아내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왠지 걷지 않으면 안 될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 아주 잠시동안 주변을 거닐기로 했다.

아내도 유도리가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 사소한 일탈은 용서해 주겠지.


얼마나 걸었을까, 이미 집은 한참전에 지나친지 오래. 방향도 반대였다.

대낮처럼 밝던 불빛은 점차 사그러들었고 어둠은 마치 장막처럼 내 주변을 서서히 감싸왔다.

하지만 난 걷는걸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 그대로였기에.


그리고 설마 길을 잃어버리겠어?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니 어둠속에서 거대한 형상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놀라 제자리에 멈춘 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고만걸까.

하지만 길을 잃었을때 익히 느껴지는 위화감은 딱히 들지 않았다.


"여긴..."

"...그 갈림길이잖아?"


그도 그럴것이, 내가 도착한 곳은 내게 있어 한 없이 익숙한 장소였으니까.

과거 내가 살던곳이자 내 학창시절 청춘의 기억이 서려있는 추억의 장소, 추억의 성지.

이젠 헛웃음만 나왔다. 또 이곳이라니?


정말 운명이라는것이 존재하는걸까.

예전부터 그랬다. 무슨 고민이나 사정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힐 일이 있다면 나는 항상 발 가는데로 몸을 맡겼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면 도착한 곳은 항상 이 곳, 이 장소, 이 갈림길이었다.

마치 실처럼 팽팽한 무언가에 이끌려가듯이 말이다.


근 20여년의 시간이 지났던 탓일까, 골목은 이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부모님께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신 이후 찾을 이유가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좁디 좁던 길폭은 자동차가 서너대는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고 보도는 새로 공사를 하였는지 알록달록한 블럭들이 채우고 있었다.

아이자와와 처음 만나도 이별을 한, 그리고 선배와의 인연이 시작된 파르페 카페도 다른 상점으로 대체된지 오래인듯 했다.


나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주변을 거닐었다.

이제 더 이상 기억속의 그 장소가 아니었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비록 형태는 그때 그 시절 그대로가 아닐지언정 추억만은 그대로였으니까.


어느덧 손목시계의 바늘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 밖에 오래 있었다간 아내가 걱정할게 분명했으니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내가 이 길을 왔었나...??"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계속 똑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만, 정말로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낭패였다.


이 나이를 먹고 길을 잃다니,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던 그때.

저 멀리 골목 끝 가로등의 불빛 아래 무언가가 아른거리는 것 처럼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사람이었다.


솔직히 이상하긴 하지만, 물 불 가릴 사정이 없던 나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도움을 청했다.


"저,저기요!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요 혹시 어디로가야 대로가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반대로 도셔서 그 길 그대로 쭉 가시면 될거에요!"


"아...! 감사합니다...!!"


친절한 목소리의 주인은 여성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저 여성분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이곳에 갇힐 판이었으니.

은인을 두고 그냥 떠나기는 뭐했기에 나는 장바구니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저,저기...!"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사례를 좀 하고 싶은데..."


"예??"


여성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짓을 한거람?

어두컴컴한 밤에 사레를 하겟다며 접근을 종용하다니, 완전 불순해보이잖아.


"아...아...!!"

"죄,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때, 여성이 멀리서 허리를 조심스래 숙이며 말했다.


"...그거 아사히에요?"


"ㄴ,네? 이거요?"

"네... 아사힌데요...?"


"슈퍼드라이?"


"슈퍼드라이..."


"...그럼 하나만 받을게요."


의외의 반응이었다.

신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화는 낼 줄 알았건만.

큰일로 번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성은 다소 이질적인 외형을 하고 있었다.

푹 눌러쓴 모자에 검은색 마스크, 거의 2미터는 되어보이는 신장까지.

단숨에 기선이 제압됨을 느낀 나는 말없이 맥주 한 캔을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여성은 받질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성은 당황이라도 한 듯,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야?"

"네,네가 왜 여깄어...??"


"ㄴ...네? 절 아세요?"


여성은 말없이 모자를 벗더니 마스크를 내렸다.

이윽고 여성의 얼굴을 감싸던 허물이 모두 벗겨지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여성은 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여성을 알고 있었다.



"나야... 아이자와... 아이자와 하나에..."


"....아,아이자...와...?"


***


"네가 왜 여기에..."


"...너야말로 왜 여기있는건데?"


"그러게...? 난 그냥 주변을 걷다보니 여기로..."


"걷다보니 여기였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재회를 이렇게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하다니...

여성. 아니, 아이자와는 곤란한듯 주변을 살피더니 어색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


"아까 아사히 준다고..."


"아... 그랬었지. 자, 여기."


나는 손에 들고있던 맥주를 그녀에게 건냈다.


이렇게 가까이서 아이자와를 보는게 얼마만인지.

겨진 다크서클과 푸석푸석한 머릿결을 보니 그동안 그녀가 지나왔던 길이 보이는 듯 했다.


"고마워... 진짜 줄 줄은 몰랐는데."


"...그럼 가볼게. 길 알려줘서 고마ㅇ..."


"간다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부라도 알려 주고 가."


"그,그럴까?"


나는 아이자와의 손에 이끌려 근처에 있던 평상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자와는 분위기도 그렇고, 상당히 달라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부쩍 커진 키와 체격은 그렇다치더라도 뭐랄까, 인상이 다른 사람 처럼 변했다고 해야하나.

분위기가 어색해진건 덤이었다.


아이자와는 자리를 잡고 앉더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캔을 따 마시기 시작했다.

숨조차 쉬지 않은 채로 한 캔을 순식간에 다 비운 그녀는 한 손으로 캔을 찌그려트린 뒤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크으... 이 맛이지..."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료스케."


"오랜만이야 아이자와."

"맥주, 잘 마시네."


"응? 헤헤... 그럴 수 밖에 없지."

"선수인탓에 이거 말곤 달리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거든."

"....나도 참. 예전에 파르페만 먹으며 어떻게 버텼나 몰라."


이어지는 정적.

너무 오랜만에 만난 탓일까.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아니면 싸인이라도 해달라고?

혼자서 속으로 고심하고 있는 동안, 먼저 이야기의 시작을 끊은것은 아이자와였다.


"저기,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 난 그냥 뭐 평범하게 직장 하나 잡아서 연명하고 있지."


"그래? 그렇구나... 그럼 꿈을 이룬거네?"

"예전부터 넌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어떤 의미에선 정말 너 다운 삶이네. 후훗."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게 너무 오래되서일까.

평소엔 잘만 움직이던 두 입술이 그 날따라 긴장 때문에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아이자와도 마찬가지인듯했다.

나는 경직된 분위기를 만회하고자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널 이렇게 막 불러도 되는거야?"

"방송계에서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너를..."


"하하...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난 그냥 나야. 너가 알고있는 아이자와라고."

"철의 여인같은 거창한 타이틀이 붙었다고 해서 내 본질이 달라지는건 아니니까."

"그러니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 너무 긴장한 것 같다 야."


아이자와는 웃으며 내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분명 살살 때린것일테지만 누가 배구 선수 아니랄까봐 아픈건 매한가지였다.


"아악!!"


"어??"

"아,아팠어...?? 미안... 단순히 장난을 친다는게..."


"아,아냐... 괜찮아..."


비록 등의 감각을 잃었지만, 그제서야 거리감이 조금은 완화되는 느낌이었다.

아이자와의 말처럼,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자와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나는 걱정하는 아이자와를 애써 만류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언제 온거야? 올림픽 끝난지 얼마 안된걸로 아는데."


"어? 너도 그 경기 봤어? 의외네."

"...그게, 사실 오늘 귀국했어."


"뭐? 그런데도 도쿄에서 여기까지 온거야? 힘들진 않았어?"


"물론 힘들지. 팔 다리가 모두 끊어질거 같아..."

"...그런데도 왠지 여기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왔어."

"뭔가 이끌리는 느낌이었다고 해야되나. 헤헷."


아이자와는 환하게 웃었다. 십여 년 전의 그 순간 처럼.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맥주만을 들이킬 뿐이었다.


한 번 말문이 트이고 나니 그 이후는 거침이 없었다.

처음의 어색함은 뒤로 하고, 나와 아이자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니 정말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연애 초의 그 알콩달콩하던 순간으로.

함께 웃고 떠들기만 해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던 그 시절.

그 시절에는 정말 모든게 행복했었는데 말이지.


이별의 아픔도, 실연의 고통도. 

긴 시간이 흐른 지금은 단순한 안주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취기가 슬슬 올라왔는지, 아이자와는 불현듯 평상 위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하~ 좋다..."


"뭐가?"


"응? 이렇게 아무런 생각도 않고 걱정없이 살아본게 워낙 오랜만이라서..."

"그동안은 계속 일에 치이듯 살아왔거든, 나."


툭 던지듯 내뱉는 그녀의 한 마디.

단순하기 그지 없는 말이었지만 그 단순함이 내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일상이 비일상이 될 정도로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최고라는 타이틀에 집착하게끔 만든 것 일까.

남몰래 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그때, 아이자와가 내게 말했다.


"...료스케."


"응?"


"넌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거야?"


"내가? 왜?"


"그냥, 네 앞이면 뭔가 굉장히 편해지는 것 같아서."

"남들 앞에서는 절대 이런 모습 못 보여주거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있으니까."

"그런데 너는, 너는 달라. 네 앞이라면 맘 편히 있을수가 있어."


말을 끝낸 아이자와는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방금 한 말은 자신도 오글거리니 잊어달라나 뭐라나.


정말이지,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래 오해하여 혼자 겁먹었던 아까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남은 맥주를 모두 비운 뒤 그녀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축하해."


"뭐를?"


"정말 바라던대로 일본 최고가 되었잖아."

"국내 최고의 선수들만 모이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담당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일본 최고라고 해도 더 이상 과언이 아니잖아?"


그러자 아이자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 당황하고 있던 그때, 아이자와가 내게 바싹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뭐야... 그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고마워라... 헤헤..."


"...물론."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네 앞이라서 하는 얘기인데."

"이거 어디가서, 딸꾹. 말하면 절대 안돼. 알겠지?"


"응... 그럴게."


"나... 은퇴할까봐."


"푸우우우웁."

"ㅁ,뭐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청천벽력같은 폭탄 선언에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수면 위 처럼 한없이 차분할 뿐 이었다.


"말 그대로, 은퇴하려고."


"왜...? 지금이 네 최전성기 아니야?"

"기량도 최고점일테고... 돈도 많이 벌테고..."


"돈은 많이 벌지. 하지만 기량은... 아니야."

"사실 요즘 점차 힘에 부치는걸 느껴. 스파이크도 예전처럼 잘 때려지지도 않고..."

"이게 다 무리하게 포지션을 전환한 탓이겠지 뭐. 헤헤..."


그 누구보다 배구를 사랑하고, 배구만을 생각해왔던 아이자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그녀 자신의 입으로 은퇴를 꺼낼 정도라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걸까.


"...사실 다 핑계고 부담스럽고 허전해서 그래."


"...뭐가?"


"그렇게나 바라고 원하던 정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얻는건 이름뿐인 명예 밖에 없더라고..."

"항상 나에게만 이목이 몰리고, 나만 모든걸 차지하는 기분이었다고 해야하나. 그게 정말 부담스러웠어."

"최고는 쓸쓸하다는 말이 있잖아? 그 말이 딱 맞더라. 허전하고... 쓸쓸해..."


"아이자와..."

"아쉽지는 않아? 은퇴를 하면 모두 내려놓아야할건데..."


"뭐, 지금까지 노력한게 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히려 좋아. 그동안 날 계속 얽매던 최고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게..."


진심을 털어놓는 그녀의 목소리는 털털했지만 씁쓸함 또한 느껴졌다.

TV에서 봐오던 모습과는 또 다른, 남들에게는 말 못할 스타의 이면이었다.


"잠깐 걸을래? 분위기도 환기할 겸."


"...이제 들어가봐야하지 않겠어? 주변에서 널 찾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에이, 뭐 어때. 이해 해주겠지 뭐."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이데 이야기나 나누자고. 자, 어서!"


아이자와는 넉살좋게 웃으며 나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시간이 점차 늦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힘에 달리 저항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잠자코 끌려갈 뿐이었다.


***


"...생각해보니까 얼마나 지났지?"


"뭐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음..."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두 번째."


"그때가 15살이었으니까... 17년 정도?"


아이자와는 난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린거야...?"


"뭐? 하하... 아니. 내가 너한테 왜 화를 내..."


"굳이 두 번째를 강조한걸 보니 삐진것 같은데."


"아,아니야아~! 무슨... 삐지긴 왜 삐져..."


"17년..."

"오래 되었네... 시간이 정말 빠르구나."


아이자와는 씁쓸하게 웃으며 혀를 찼다.

17년. 분명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


지나가버린 시간은 두 번 다시 되돌아 오지 않는다.

과거 파릇파릇했던 시절은 이미 기억속의 전유물이 되어버린지 오래.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 대로의 아쉬움이 남은 듯 했다.


"아까 한 은퇴이야기, 진심이야?"


"응? 진심인데?"

"최고라고 해봤자 좋은거 하나도 없더라... 이젠 배구도 더 이상 즐겁지 않고..."

"차라리 예전 배구부 시절이 내 입장에선 더 나았던 것 같아. 말했잖아 쓸쓸하다고."


"그래도 지금껏 노력한게 있는데,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울거 아냐."


"아쉬울게 어딨어. 이미 모든걸 다 이루었는데."

"...딱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있어."


"...뭔데?"


"...남들처럼 살지 못했다는거."

"남들처럼 연애도 하고... 대학도 다니고... 여러가지 해보고 싶은게 많았거든."

"뭐, 그런것들을 포기한 덕분의 지금의 내 위치가 있는거지만."


아이자와는 문득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후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도."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꼭 최고가 아니더라도 좋았을거 같아."


나는 말없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이후로도 나와 아이자와는 한참을 더 걸었다.


학교 앞을 방문하고 과거 카페가 있던 장소를 지나 두 갈래 갈림길까지.

이윽고 도착한 약속의 장소 앞에서, 아이자와는 말했다.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던 그 순간..."


"...응. 기억하다마다."


"...다행이네."

"료스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아?"


"...모르겠는데."


"너."

"료스케, 바로 너였어..."


"..."

"그렇구나."


"료스케..."


아이자와는 천천히 다가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금방이라도 흘러  넘칠 것 처럼, 눈가에 잔뜩 고인 눈물과 함께.


"ㅈ,잠깐... 아이자와..."

"이..일단 이것좀 놓고 이야기 하자..."


안 그래도 깨질것같던 머리가 그 순간을 기점으로 더욱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러는걸까. 머릿속 어딘가가 고장나고야 만걸까.


"있지, 그동안 계속 생각해 봤어..."

"내가 놓친게 무엇인지... 내가 잊고 지내던게 무언인지..."


"..."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나는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어."

"...바로 진심. 너를 향한 진심말이야..."


나는 아이자와를 넌지시 밀어내고자 했지만, 그녀는 내 소매를 붙잡은 채 놔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마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 처럼...


"15년... 그 날 이후 15년을 그리워했어... 15년을 기다렸다고..."

"너에게 그렇게 차이고도... 바보같이 널 잊지 못했단 말이야..."

"훌쩍... 있지,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료스케."


"아이자와, 잠ㄲ..."


"내가 배구선수가 된것도... 최고라는 자리에 그토록 집착한것도 다... 널 위해서였다고."

"그러니까 료스케... 너무 늦어버렸지만 우리, 다시 시작할 순 없을까...?"


이어지는 정적.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녀와 해어졌던 그날, 나는 내심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과거가 무색하게 내게 매달리는 그녀를, 속으로는 굉장히 쌤통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울먹이며 진심을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냥 도망쳤다.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로.


아마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이따금씩 머리가 종종 깨질듯이 아파오기 시작한게.


그리고 지금. 

또다시 그녀가 만남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지지도 않았다.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이자와."


"너도 나도... 모두 꿈과 목표를 이루었잖아? 이제 더 이상 방해될게 뭐가 있다고 그래..."

"난... 난 너에게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어... 그러니까...."


"미안. 난 그럴 수 없어..."


"..."

"...왜냐고... 물어봐도 될까?"


아이자와는 꽤나 덤덤한 어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왼손을 들어 올려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약지에는 달빛을 받아 소박하게 빛나는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하긴, 이게 정상인데 말이야."

"너도 나이가 있을텐데... 결혼도 아예 불가능한건 아니지... 그치..."


"...미안. 아이자와, 나ㄴ..."


"아니, 아니... 너가 왜 미안해?"

"괜찮아. 이런걸로 미안해 하지마... 난 진짜 괜찮으니까..."

"단지... 단지 그게 진심이었다고만 해줘..."


"...응."


"그래... 그럼 다행이네..."

"...아니야! 우는거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린 채, 이따금씩 몸을 움찔거릴 뿐.

잠시 뒤, 심호흡을 크게 한 아이자와는 차분하지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그럼, 들어가."

"만나서 즐거웠어... 정말로..."


"응... 나도."


어색한 침묵.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들려오던 차 소리도 점차 잦아들 시점.

나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서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빈 캔과 장바구니 봉투를 양 손에 든 채, 아이자와의 배웅을 받으며.


하지만 잠시 뒤.

등 뒤에서 아이자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료스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

"으응."


"...만약 내가 배구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다시금 배구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지 않았더라면..."

"그랬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이자와."

"난 말이지... 널 정말 사랑했어."

"어쩌면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


"하지만 그래서 두려웠어."

"널 다시 만난다고 할지라도, 이전처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고마워, 아이자와. 날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행복해야해."


나는 뒤돌아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알려준 길을 따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걷고, 또 걸었다.


"...흐윽.... 흑..."

"훌쩍... 윽.... 흐으윽..." 


길은 점차 밝아지고 고요함의 결계도 점차 바스라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목소리도 소음에 묻혀 들려오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


"여,여보...!!!!"


"어? 어어... 다녀왔...으아아아아악!!!!"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이 등 위에 느껴졌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나는 들고 있던 장바구니까지 바닥에 떨어트린 채 쓰러지고야 말았다.

한창 바닥을 구르고 있던 나를, 아내가 끌어 올리며 성난듯이 쏘아붙였다.


"대체... 대체 어디까지 다녀온거야...!!! 왜 이렇게 늦어...!!!"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알아?? 새벽 1시야 1시...!!! 말도 없이 어딜 그렇게 다녀온거야!!"


"여,여보... 그게..."


"...이 냄새는 또 뭐야...? 술 마셨어?"


"어? 그,그게..."

"아주 조금...? 한 캔 정도..."


"으이구우...!!!! 이 화상아...!!!"

"누가 안주 사오랬지 길바닥에서 술이나 퍼마시랬어??


열이 단단히 뻗쳤는지, 아내는 내 품에 안긴 채 가슴팍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한 방 한 방의 충격이 묵직하게 전달되어 왔지만, 죄인인 내가 달리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충격의 세기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여...여보...?"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어떻게 연락도 하나 없고... 정말로오...!!!"

"흐윽... 정말로오오... 훌쩍, 흐아아아앙...."


그제서야 나는 집을 나서며 전화기를 두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울부짖으며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는 아내에게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여보..."


"몰라몰라...!! 미안하면 애초에 미안할 일을 하지 마...!!"


나는 말없이 아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손길을,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걷어내며 말했다.


"...앞으로 10시 이후 통행 금지야."


"켁...! 그,그건 좀 너무 가혹한데..."


"그럼 11시! 더 이상은 안돼!"


"아...알겠ㅇ... ㅈ,잠깐...!! 숨막혀 숨...!!"

"여,여보...!!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것 좀 풀어ㅈ..."


나의 외침이 무색하게, 아내는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훌쩍, 앞으로 그러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말을 해... 오늘처럼 혼자 속으로 썩히고 그러지 말란 말이야..."


"여보..."


"나도 있으니까. 네 고민 따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으니까..."

"힘들땐 고민하지 말고 내게 안겨. 알겠어...?"


"..."

"...응. 알았어." 


이후로도 한참동안 아내는 내 품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아내를 끌어안았다. 


보드라운 감촉과 안심되는 기분.

정감가면서도 눅눅한 향이 옷 너머로 솔솔 피어올랐다.

어느덧 울음을 그친 아내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늦었으니까 먼저 자. 난 집안일이 아직 남아서."


"아니, 나도 도울게!"


"피곤할텐데 어서 자... 후회하지 말고."


"사랑하는 아내를 돕는 일인데, 후회할 거리가 어딨다고 그래?"

"미안해서 그래... 여보를 걱정시킨 만큼 뭐라도 해야지..."


내 진정성이 닿았는지, 그게 아니라면 땡잡았다고 생각한건지.

아내는 마지못해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럼 저쪽 접시 가져오는것좀 도와줄래? 설거지는 내가 할게."

"...뭐야, 왜 그렇게 처다봐?"



"..그냥."

"오늘따라 유독 예쁜 것 같아서..."


"어이구, 염병..."

"이 사람봐라... 취했어?"


"응? 아니? 나 완전 멀쩡한데??"


"취했네 취했어... 으이그..."


말은 그렇게 했어도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지고 있었다.

잠시 뒤, 아내는 고무 장갑을 벗더니 불현듯 내 엉덩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얼얼한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여,여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지금 기력이 남아 도나봐? 후훗..."


"...에? 아...아아아아니야..!!!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그런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선ㅂ... 아니, 여보!!"


"선배...? 어이구, 이젠 시간대도 햇갈리셔요? 그땐 우리 둘 다 미성년자일 때 인데요?"

"그거 다 정리하고 안방으로 와요? 알겠죠 서방님? 후후..."


전신에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도축을 기다리는 어린양의 기분이 이런걸까.

아무리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고 책망하여도 예정된 종말은 천천히 다가오는 법.

세상이 무너진것만 같았다. 둘째는 안되는데...


하지만 뭐랄까.

싫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

.

.


정말 이상하게도, 그 날 이후 과거에 관한 꿈을 꾸는 일은 없었다.

머리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 갈림길이 떠오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 두통과 쓰라림이 뭐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솔직히 말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혹시나 큰 병의 징조는 아닐까 했기에.

하지만 건강검진 결과도 괜찮았고, 딱히 몸에 이상이 있는것도 아니었는지라 일단은 넘기기로 했다.


아이자와는 결국 예정대로 은퇴를 거행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발표였기에 세간은 큰 충격에 빠졌지만 이내 서서히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로 굳어졌다.


그날 심야의 마지막 만남 이후, 나는 단 한번도 아이자와를 만날 수 없었다.

사실 해어지면서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딱히 아쉽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아이자와는 항상 '인연'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인연은 갑작스레 찾아오고, 그 인연이 맺어준 사람들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된다더라...와 같은 소리를 종종 내게 해줬던걸로 기억한다.

그때만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인연일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렇다고 인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건 또 아니었다.

내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고, 갈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다시 만난 사람이 단 한 명 존재했으니까.


"...보."

"여보! 뭐해? 출발해야지!"


"어,어어? 으응...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다들 준비됐니?"


"네에~!!"


"아빠최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하는 내 두 딸들.

그리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의 사랑하는 아내까지.

모두가 인연이고 내게 과분한 축복이었다.


"애들도 바다가 좋은가봐? 저렇게 기뻐하는건 또 처음보네.."


"여름인데 바다를 한 번도 안 가는건 말이 안 되잖아! 음!"

"자, 그럼 출발한다? 다들 안전벨트 꽉 매고...!!"


물론 지금도 내심 아이자와가 했던 말이 신경쓰이긴 한다.

전세계적인 클래스의 탑급 유명인사에게서 그렇게 열성적인 구애를 받는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니까.

그게 아니면 한때 그녀를 열성적으로 사랑했던 입장으로써, 어느 정도 미련이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 순간으로 다시금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나는 몇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인연이고.


그것이 나의 진심이었으니까.


***


예. 뭐.

끝났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쓰려고 마음 먹었을 땐 이렇게 길어질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래도 어찌저찌 끝까지 쓸 수 있어서 넘 다행이라고 생각함.


본래 이 글은 '그 장르' 복수물로 기획했던 글임.

그런데 쓰다보니 캐릭터에 정감도 가고, 무엇보다 '그 장르' 가 개연성이 너무 없다보니

여기다 살을 붙여서 새로 쓰면 어떨까. 해서 쓴 글인데 결과는 뭐... 그럭저럭이었던것 같음.

재미로 치면 차라리 그때가 더 한 수 위였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쨋든.


작중에서 풀지 않은 떡밥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선배의 성씨.

다들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길래 설명하자면...


선배의 성씨인 "모토츠마" 는 특정 한자를 훈독으로 읽은걸 썼음.

그리고 그 한자는 정실부인을 뜻하는 "본처" 였고... 따지고보면 처음부터 스포를 한 샘인데 아무도 모르더라...

어차피 몰라도 글 읽는데는 지장 없을테니 안심하시길.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처음 쓴 글인데 예상외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고 또 기대를 해줘서 놀랐음.

중간에 접고 날리고픈 마음도 여러번 먹었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던건 아마 이 글을 기대해준 독자분들 덕분이 아닐까 싶음...

만일 차기작으로 돌아온다고 하면 그놈의 연재 주기부터 어떻게든 줄이던지 할게...


그동안 보잘것 없는 글 읽느라 고생 많았음.

모두 좋은 시간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