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일 후, 마왕 성의 지하로 내려와 잊고 있었던 무구들을 찾았다. 오랫동안 찾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라일라가 잘 관리해준 덕에 검날은 전보다 더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고 먼지투성이였던 방패도 깨끗하게 되어있었다. 

" 여기에 와서 이것저것 신세만 지고 있네... " 

검을 여러 번 휘둘러보며 몸을 풀자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조금 놀라게 되었다. 아마 보유한 성력에 따라 신체가 강화되는 이 [ 요정의 안식 ] 때문이겠지만 이 정도로 확실한 성능일 줄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가슴이 조금 커져 버린 건 불편했지만, 데미안에게 더 사랑 받을 수 있으니 단점이라고 보긴 애매하지... 

" 으...♡ 안돼, 지금 또 데미안을 생각해버리면... " 

남자였던 나 스스로가 부끄럽지만, 데미안의 얼굴과 목소리, 그의 모든 감촉을 느끼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라 수치심에 빠져들게 된다. 

거기에 지난 일주일 동안 미약 때문에 침대를 두 번이나 부숴버렸던 것 때문에 알몸인 상태로 라일리에게 개목걸이가 채워졌던 걸 생각하면... 

" 아아--! 정신 차리자 제온... 아니 제니스-! " 

부끄러운 과거를 잊기 위해 벽에 머리를 박으며 다시 가슴을 압박하며 갑주를 갈아입는다. 어째서인지 하체가 반바지 타입이었던 것이 미니스커트 타입으로 바뀌었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분명 나는 마왕... 데미안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곳에 온 거였지만 어느새 라일라와 더불어 셋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나 혼자만 느끼는 걸지 모르지만 나를 그저 전쟁 병기로밖에 보지 않았던 아트리아 왕국의 인간들과는 달리 이 두 사람은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나는 그 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방패를 등에 메고 검과 창을 하나씩 쥔 채 마왕 성을 빠져나왔다. 

이번엔 용사로서 마왕을 토벌하기 위함이 아닌, 내 소중한 가족인 데미안과 라일라를 침입자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

..

.

육중한 방패를 든 두 명의 사내가 쓰러졌다. 그들은 분명 숙련된 성기사들이었지만 용사인 내겐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 어... 어째서 당신이 마왕의 편을 드는 거야-! " 

사제로 보이는 흑발의 여성이 법구를 높이 든 채 절망에 가득 찬 표정을 보였다. 그래, 절망할 수밖에 없겠지. 

함께 온 레인져 두 명은 내게 목이 달아나버렸고 마법사는 내가 던진 창에 머리가 꿰뚫려 나무에 처박혀버렸으며 방금 언급한 방패를 든 기사 둘은 사제인 그녀를 지키려다 한꺼번에 두 동강이 나 그 유명을 달리했으니까. 

" 난 분명 너희들에게 경고했었어. 이건 내 경고를 무시한 대가다. 알고 있겠지? " 

주저앉은 사제의 가랑이 사이에 검을 내려찍으며 조용히 내뱉자 두려움에 가득 찬 사제는 결국 누런 소변을 지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난 죽기 싫어-! 제발... 제발 살려줘... " 

예전의 나... 남자였던 용사 제온은 이런 나약한 여성의 눈물에 약했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가장 신뢰했던 여성에게 배신당하고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겠지... 

하지만 이젠 아니다. 비록 여성인 제니스가 되었을 땐 성관계도 해보지 못한 채 죽었던 걸 후회하고 비참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난 어리석은 용사 제온이 아니다. 

" 널 살려주면 펠크스와 엘루아... 그 빌어먹을 년, 놈들이 더 많은 토벌대를 보내겠지? 이번엔 내 목까지 노리고 말이야... 그때처럼... " 

지면에 꽂은 검을 빼 들은 나는 절망에 가득 찬 사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일말의 망설임 없이 힘껏 검을 휘둘렀다. 

" 꺄아아악-! " 

이놈이 마지막이다. 이놈만 처리하면 한동안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지... 맞다, 이놈들의 목을 전부 가져간다면 데미안에게 칭찬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럼 오늘 밤엔 더 격렬하게 엉망진창 사정 당해서 반드시 데미안의 아이를...♡ 

[ 카아앙--! ] 

눈을 감은 채 데미안에게 칭찬받는 모습을 상상하자 사제의 목을 향하던 검이 무언가에 잡혀 움직임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는 느낌에 검을 놓친 채 서둘러 거리를 벌리고 눈을 뜨자 그곳엔 예상 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얼핏 보면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보이지만 옷을 풀어 헤쳐 근육질의 가슴팍을 노출하고 있고 검붉은 빛의 건틀릿을 착용한 듯이 변형시킨 오른팔엔 내가 침입자들을 처리할 때 썼던 검을 쥐고 있는 남성.

그를 본 순간 나는 왼팔에 쥐고 있던 방패도 내던지고 그를 향해 팔을 쫙 벌리며 온 힘을 다해 몸을 내던졌다. 

" 데미안~♡ "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줬던 나의 마왕님♡ 

" 무슨 소란 인가했는데 벌써 끝나버렸군... 조금 아쉽지만 수고했어 제니스. " 

데미안이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내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자 몸이 경련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음부의 문양이 밝은 빛을 내며 가랑이 사이에 액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 으읏...♡ 아, 아쉬우면 그 불만 나한테 풀어줘...♡ " 

데미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소짓는 내가 착용하고 있던 갑옷의 미니스커트 자락을 슬쩍 올려 그 안쪽을 보이며 속삭이자 그는 나를 떼어놓더니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 나도 지금 하고 싶긴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지 " 

" 우우-! 너무해! " 

볼을 부풀린 내가 데미안에게 불평했지만, 그는 웃어넘기며 실신해버린 사제에게 다가가더니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다. 

" 데미안... 지금 뭐 하는 거야...? " 

" 이 여자로 시험해보고 싶은 게 생겨서 말이야. " 

심장이 차가워지는 이 감각... 데미안이 품에 안긴 사제를 바라보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시커먼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다. 

물론 전 남이었던 내가 봐도 이 사제는 미인이지만 설마 데미안이 이 여자에게 관심이...? 

" 데미안, 그 계집년에게 반한 거야? " 

" 음? " 

"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데미안, 이 계집년에게 관심이 생긴 거야? " 

" 무... 무슨 소리를... " 

나는 당황해하는 데미안의 앞에 서서 가슴을 압박하고 있던 갑주를 벗고 소리쳤다. 

" 내가 이딴 호박보다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똑똑히 봐! 저런 빨래판 가슴이 뭐가 좋다고 그 계집년을 감싸는 건데-! 네가 좋아하는 가슴은 여기 있다고? 그동안 쥐어뜯고 빨아대던 가슴이 여기- " 

" 지... 진정하라고 제니스!? 오래가있나 본데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

" 그럼 뭔데! 내가 납득할만한 근거를 내놔보라고-! " 

데미안에게 검을 겨누며 울먹이자 그는 서둘러 안고 있던 사제를 내던지더니 검을 치우며 내 몸을 힘껏 껴안아 주었다. 

" 진정하라고 우리 용사 아가씨? 네가 있는데 내가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릴 리가 없잖아? " 

" 그럼 저 여자는 왜 데려가려 하는 건데-! 고작 인간일 뿐이라고? 가슴도 없는 거나 다름없는 빨래판인데 저딴걸 왜! " 

" ...큭! " 

" 그건 살아있는 인간이 필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아무튼! 나한텐 제니스 너 밖에 없어! 혹시 날 못 믿는 거야? " 

신경 쓰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듯했지만 절실한 얼굴로 호소하는 데미안의 모습이 너무 멋진 탓에 눈부셔 검을 내려놓으며 더 깊게 포옹하였다. 

" 좋아, 믿을게. 하지만 오늘 밤에 각오하라고...♡ " 

" 아아, 그건 기대되는군... 그런데 신경 쓰이는게 하나 있는데 " 

" 움? " 

몸을 떼어놓은 데미안은 내 치맛자락을 들치더니 그의 손가락으로 내 가랑이 사이를 찌르며 말했다. 

" 침입자들을 처리하러 온 듯한데... 왜 팬티는 안 입고 나온 거지? 그렇게 급한 일이었나? " 

" 읏♡ 아니, 그게 있지... 이 벌레들 다 처리하면 바로 데미안에게 가서 상을 받으려고...♡ " 

" 그게 팬티 안 입은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완전 변녀가 되어버렸군. 우리 용사 아가씨는... " 

" 벼...변녀!? 그 정돈 아니라고! 고작 팬티 하나 안 입었다고 변태로 몰아? 이따 돌아가면 가만 안 둘 거야-! " 

" 호오... 매일 밤 그렇게 교성을 울려대면서 오늘은 꽤 자신이 있나 보지? " 

" 두고 보라고!? 오늘은 꼭 한 방울도 안 남기고 쥐어 짜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해-! " 

" 좋아 좋아, 일단 해도 저물고 있으니 성으로 돌아가자고. 라일라가 네게 해야 할 말도 있다고 했으니까. " 

" 라일라가? 후움~ 알았어. " 

그렇게 검과 창, 방패를 회수한 나는 사제를 어깨에 짊어진 데미안과 함께 마왕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팔짱을 끼며 웃음을 보이자 데미안과 했던 계약이 떠올라 조금 우울해졌다. 

만약 데미안이 나와의 성관계 도중에 내게 항복을 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데미안이 사라지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피니스의 인격이 되살아난다면? 안돼... 그것만은 절대 안 돼... 

" 무슨 일이 있나 제니스? " 

" 응? 아니야... 아무것도... " 

불안이 피어오른 것을 눈치챈 데미안이 내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이렇게 상냥하고 강한 사내인 마왕에게 나는 언제든 항복을 선언하고 그의 부인이 되어줄 수 있지만 쉬운 여자로 보이기 싫다는 마음 때문인지 아직까진 이 계약을 유지하고 싶다. 

그러니까 만약 초조해져도 참고 기다려주세요?

내 미래의 서. 방.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