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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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0.


녀석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이미 저녁 식사 계산을 끝내놓은 나는, 일부러 계산 안 한 척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솔직히 오늘이 아니면, 승부만 걸리면 속을 알 수 없는듯한 이상한 녀석이 그렇게까지 허둥대면서 당황하는 꼴을 언제 보겠어?


그래서 언제, 어떻게, 녀석에게 오픈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 좋을까?


오늘 곱게 집에 간 다음, 다시 접점을 만들어서 다음번에 터트린다?

의심을 안 받고 다시 접점을 만들 방법이 크게 떠오르지 않으니까 일단 아웃.

그리고 만약에, 다음에 접점을 기껏 만들어놨는데 원래대로 돌아와 버리면 말짱 꽝이 아닌가?


그렇다고 막 모텔까지 들어가서 끝까지 달린 다음 깐다?

한도윤 그 녀석이랑 모텔 같은 방에? 상상하기도 싫다.

잠깐 술을 마시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금도 상상만으로 거부감이 세게 오는데.. 술에 취하면 술병으로 머리를 후려치거나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성공하면, 내가 드는 거부감만큼이나 확실히 녀석한테 직구로 크게 꽂을 수 있을 테니까, 

가능성이 있다고 치고 만약의 가정을 해봤다.

혼자서는 휴대폰이나 보고 있는 거 말고는 딱히 할 게 없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거부감이나, 취기로 인한 부정적인 돌발 행동 같은 게 전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어떻게 같이 술을 마신 다음, 녀석은 반 정도는 정신줄을 잡고 있었는데, 나 혼자 그냥 술에 진탕 꼴아서,

그냥 일방적으로 사고를 대뜸 친 다음, 다음날 침대에서 깬다면..?


그 상황에서 녀석을 놀려댈 정신이 남아있기는커녕, 창문 열고 뛰어내리지 않을까?

'동정이지만 처녀는 아니다.' 라니, 무슨 남성향 BL만화같은 상황도 아니고.. 싫다.

내가 녀석을 놀리기보다는 역으로 평생 놀림당할만한 약점이잖아 그거.

괜히 오늘 하루 내내 잘해놓고 마지막을 그렇게 조지고 싶지는 않다.


만약에 술에 취한 내가, 취하기 전 의도 그대로 놀려먹으면서,

약점을 잡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대승리를 거둔다 쳐도,

필름이 끊겨서 승리의 순간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대가만 치르게 된다.

최상의 사례만을 가정해도 최악의 결과로 떨어진다니...


결과적으로는 논할 가치가 없던 아이디어였지만, 무료함을 달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괜히 욕심내다가 자폭하는 거보다는 그냥 무난하게 적당히 터트리는 게 좋겠다.


그건 그렇고, 녀석은 손 씻으러 간다더니 비누를 만들어서 손을 씻나..

이미 계산도 끝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녀석을, 나는 자리에 앉은 채 잠시 기다렸다.

시간은 6시를 훌쩍 넘겨 본격적인 저녁 시간에 접어들었으나, 손님은 의외로 별로 오지 않았다.

다들 먼저 들렀던 집들에 줄을 선 게 아닐까..?


마음같아서는 가만히 앉아서, 계산대 앞에서 놀라는 녀석을 직관하고 싶지만,

너무 오래 걸린다면 그냥 가게 밖에서 먼저 계산했다고 툭 던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손님이 별로 안 오더라도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좀 그러니까.


역시..  집에 가기 직전에 잠깐 둘만 남는 시간을 만들어서, 슬쩍 털어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집에서 카톡 같은 걸로 휙 던지는 건, 안전하긴 할지 몰라도.. 표정을 눈앞에서 볼 수 없으니까..?


그 외에도, 만약에 내가 녀석을 너무 잘 속여넘긴 탓에, 녀석이 내 이야기를 하나도 안 믿는다면... 

차분히 설명하려면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자리가 딱 맞다.


그래서 일부러, 간단한 설명으로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은 절친 셋 중에서 고른 거긴 한데..

역시 이런 어이없는 일에 대한 설명을, 사람 많은 데서 떠들어대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을 피할지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두고 싶었는데, 녀석이 화장실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녀석을 가볍게 쳐다본 다음 살짝 손을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 계산대로 향했다.

여러 생각에 빠져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한참 걸린 것 같았는데, 시간을 보니 10분 정도의 시간만 흘러있었다.


"제가 사겠습니다. 혹시나 마음에 걸리시면, 나중에 시현씨 몫은 연우한테 물리겠습니다." 

녀석은 미리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내둔 지갑에서 카드를 뽑으며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이미 결제가 되어있다는 상황도, 녀석의 말도 조금 웃겨서 웃음을 참았다.


계산대의 여직원이 카드를 뽑는 녀석을 쳐다보고 살짝 미소 짓더니 대답했다.

"옆에 여친분께서 미리 계산해두셨어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미간을 잠깐동안 살짝 찌푸렸다가, 녀석을 의식해서 다시 풀었다.

애인으로 보일 만큼 가까워 보였나.. 직원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옆의 여자분'이나 '일행분' 정도면 괜찮지 않았을까?


혹시나 미간이 구겨진 걸 녀석이 본 게 아닐까 걱정도 잠깐 했는데, 

녀석은 어쩡쩡한 자세로 머뭇거리면서 지갑을 다시 집어넣느라 못 본 것 같다.


괜히 미안해하는 녀석과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가 아무 말 없이 살짝 웃어 보였다.

식사 한 끼 정도야 뭘, 패밀리 레스토랑처럼 허리 부러지는 가격도 아니니까.

주머니가 빈곤의 끝을 달리는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어차피 PSVR이랑 PS4 안사서 돈 좀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다.


직원의 여자친구 취급은 조금 불쾌하긴 했지만, 카드를 집어넣을 때의 녀석의 당황한 표정이 일품이기도 했으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쫌생이처럼 괜히 소리 지르는 건 조금 깨니까, 어차피 곧 즐거워질 텐데 사소한 일로 화내는 건 피하는 게 좋겠다.

어차피 내가 녀석의 여자친구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 취급 하나로 뒤집히는 건 아니기도 하고..?


가게를 나서며 녀석은 '규카츠값은 나중에 연우를 통해서 보내겠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 규카츠값을 받을 후배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데..

하지만 여기서 그걸 말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알겠다고 적당히 대답했다.


어차피 나중에 사실을 밝히고 나면, 돈을 받기는 어렵겠지.

게다가, 돈을 받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럴 생각으로 낸 것도 아니고.

점심 햄버거값 원래 내기로 한 걸 안 냈으니까 그거 대신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면서 어떻게 둘만 남길까에 대해 고민해보았지만, 딱히 명확한 해결안은 나오지 않았다.


7시에 가까운 시간에, 복합상가 1층 유리문을 열고 밖에 나왔다.

1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에 문을 밀고 들어갔으니까, 생각보다 오래 건물에 있었던 것 같다.


겨울답게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음에도 이미 해가 져서 하늘이 좀 많이 어두웠다.

건물에 들어갈 때랑 비교해서 얼굴 피부로 느끼는 공기는 조금 더 찼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이대로 기회를 잡지 못하면, 시시하게 집에서 음성 채팅 따위로 놀리게 될 거 같은데.. 역시 뭐 좋은 수가 없으려나..


우리는 집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녀석은 전철역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전철을 타면 바로 집에 갈 수 있는데도, 굳이 버스정류장까지 날 따라왔다.

이대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건 역시 별로 재미없는데.

도저히 괜찮은 아이디어가 생각이 안 나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집에는 무슨 버스를 타고 가십니까?"


"아, 여기 파란색 버스 하나 있는 거 타면 집 근처에서 내릴 수 있어요."

녀석의 별 의미 없는 질문에, 나는 자취방에 갈 때 탈 수 있는 버스를 짚어서 대답했다.

순간 아차 싶기는 했는데, 어디서 내리는지는 말 안 했으니까 괜찮겠지.


"저기 멀리 교차로 신호등에 걸려서 서 있는 거 말하는거 맞으시죠?"

이야기를 듣고 녀석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쳐다보니까 정말로 집에 가는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서 신호에 걸려있었다.

조금만 일찍 나왔으면 그대로 버스에 실려서 집에 갈 뻔했네..


전광판을 보자 다음 버스가 오는 데는 15분이나 걸린다고 적혀있었다.

그 15분 내로 어떻게 구실을 생각해내야..


잠깐 머리를 쓰면서 어떻게든 구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있는 내게 녀석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시현씨, 잠깐 괜찮으십니까."


"네?"


"그.. 혹시 괜찮다면, 시간을 조금만 더 내서.. 잠깐 같이... 걸을까요?"


녀석은 아까 영화관 화장실 앞에서처럼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면서 내게 물었다.

좀 머뭇거리는 느낌이기도 했지만, 안경 뒤의 눈에서는 살짝 진지한 느낌도 들고..

확실히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은 평소에는 거의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

혼자 보기 아쉬운 즐거운 모습이지만, 좀 미안해지기도 하고..


녀석이 보여준 휴대폰 화면에는 지도 앱이 떠있었는데, 

골목길을 통해 주택가를 살짝 지나서, 공원을 가로질러가는 경로가 지도 위에 그려져 있었다.

도착지는 공원 건너편에 있는, 지금 있는 곳과 비슷한 느낌의 전철역 앞이었다.


저녁시간대 주택가와 공원이라..  그래, 이거다.

이거라면 확실히 인파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좋은 방법이 생각이 안 나서 고민이었는데, 스스로 의도치 않게 판을 깔아준다니.


이정도면 공포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의 만회는 된 게 아닌가 싶다.


"아, 무례한 부탁이라는 건 압니다. 싫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오늘 저녁은 조금 기름졌으니까 운동도 되고 좋겠네요.  가요."


그냥 집에 가기 뭐했는데, 녀석을 놀려먹을 판을 스스로 짜준다는데 뭐하러 마다하겠는가?

나는 녀석을 따라 걸으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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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 들어선 우리는 천천히 주택가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걷는 동안 길었던 일주일을 회상했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걷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월요일 아침에는 솔직히 엄청나게 놀랐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내 취향이던 여자가 되어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여자가 내 침대 옆에 누워있어도 믿기지 않는 일인데, TS라니 참..


그래도 어차피 무슨 사유가 있어서 변한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처음 변한거처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까지는 멘탈이 박살 나지는 않았다.


해결 못 하는 일에 괜히 고민하면서 힘 빼는 건 시간 낭비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벼운 걸 하나둘씩 즐겼다.


노래의 원음 톤에 맞춰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옷걸이가 괜찮아서 새로 산 옷이 대부분 잘 어울렸던 것도 기분 좋았다.

거기에, 녀석을 속여서 골려줄 계획도 이제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중간에 살짝 곤란하긴 했지만, 친구들 앞에서 흔들어댈 포토티켓도 확실히 찍었으니까..


물론, 속옷을 사러 갔을 때는 좀 많이 부끄럽기도 했고,

옷을 사는데 과하게 돈을 쓴 탓에 PSVR이랑 PS4를 포기한데다,

기대했던 영화에 괜히 겁을 먹어서 영화를 즐기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그 정도는 성공적인 장난을 위한 '부수적인 피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침에 괜히 여대생을 마주쳐서 피곤해진 일이랑, 영화를 제대로 못 본 거 말고는 크게 일이 안 풀린 것도 없었다.

마지막에 딱히 판을 깔만한 구실이 없어서 고민하던 참에 마침 녀석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판을 대신 깔아주기도 했고..

나쁘지 않은 한 주였다.  일이 착착 잘 풀릴 때는 기분 좋다.


만족스러운 기분에 취해있던 내 머릿속에, 월요일에 햄버거 내기했을 때 게임 결과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냉병기 구식병력 상대로 고화력 전열보병 중심으로 병력을 짜서 힘 싸움을 하려고 했더니, 수를 완전히 읽힌거처럼 기병 날빌당해서 털렸었지..

그래, 그때도 처음에는 일이 잘 풀리는거처럼 보였다. 너무 잘 풀려서 오히려 기병날빌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지.


잠깐만, 그러면 설마 처음부터 녀석한테 수를 읽힌 게 아닐까..?

근데 내가 아는 녀석이라면..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 

중간에 '장난은 끝이다!' 같은 느낌으로 역으로 찌르지 않을까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니면 설마 나랑 똑같이 적당한 타이밍에 떠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거나..

그래도 확실히 한도윤 그 녀석의 반응은 그런 거랑은 거리가 먼 거 같긴 했으니까 아니겠지 뭐..


그렇지만 한번 생겨난 의심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법, 한번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까 마음 한편에 살짝 불안감이 들었다.

마치, 마술사 양에게 한번씩 패배를 경험해서, 계속 경계하면서 의심하게 된 은하제국군 제독들이랑 똑같은 꼴이 아닌가.

이래서야 진짜로 녀석이 내기에서 이긴 다음 자기를 '기적의 양'이라고 장난삼아 말하던 거에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주택가를 지나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녀석은 잠깐 나를 돌아서 쳐다봤다가, 공원에 걸어 들어가면서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공원 입구 쪽에서 본 공원은 가로등이 켜져 있긴 했지만, 딱히 사람이 돌아다니는 기색은 없어서 조용하기도 했고, 조금은 무서웠다.  살짝?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괜히 친구 녀석 대신 나온 건데, 너무 오래 끌고 다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밥도 맛있는 거 먹고, 저도 즐거웠는걸요."


"뭐랄까 저도 지금 상황 자체가 믿기질 않습니다. 진짜 무슨 꿈이나, 아니면 녀석이 괜히 골탕먹인다고 짠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요.  아, 방금은 실례했습니다."


그렇지, 나도 이런 외모의 후배랑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 너라고 뭐 다르겠냐.. 거꾸로 생각해도 안 믿기겠지.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까 말했듯 시현씨는 대하는 게 크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연우 녀석 후배라더니, 진짜로 좀 많이 닮았거든요."


"교수님께도 그런 이야기 자주 들었어요.  음..  그래서 얼마나 닮았어요..?"


"그..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엄청 닮았습니다. 마치 어느날 녀석이 갑자기 여자가 되었다고 나타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공원 산책로 위에 멈춰 섰다. 크게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진짜로 녀석이 이미 모든 일을 간파했고, 나는 그저 늘 그렇듯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뿐이었나..

이렇게 완벽한,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기회를 잡고도, 나는 그 기회조차 날려버리고 만 것일까?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승리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패배하고 만걸까..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

만약에 진짜 녀석이 손바닥 위에서 날 갖고 논거라면 완벽에 가까운 기습이 아닌가 싶다.

머릿속이 띵 하고 얼어붙는 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농담입니다. 재미없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ㄷ... ?"

자신의 뒤를 걸어오던 인기척이 멀어진 걸 눈치챈 것인지, 녀석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녀석의 얼굴에는, 처음에는 실없는 농담을 잘못 뱉었나 싶은 미안함이 떠올랐다가,

그다음에는 확신과 의심이 뒤섞인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동안 녀석은 고민하는듯하더니, 몸을 전부 돌려서 멀어졌던 거리를 다시 좁혀왔다.

무슨 꿍꿍이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맞다, 시현씨."


"ㄴ..네..?"


"오늘 연우 녀석이 뭐 때문에 대신 나와달라고 했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친척 결혼식에 끌려갔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러면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결혼식은 이미 식후 피로연 뷔페까지 전부 끝났겠죠?"


"아마도요...?"


어떻게 머리를 쥐어짜내면서 대답을 내뱉었다.

확실히 시간이 늦었으니까, 결혼식은 끝날만 한 시간이긴 했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부탁해도 됩니까..?. 시현씨 휴대폰으로 연우 그 녀석한테 전화 한 통만 빌릴 수 있습니까..? 아쉽게도 보조배터리가 없어서 전화기가 꺼져버렸지 뭡니까.."

그 말을 끝내면서 녀석은 늘 그랬듯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휴대폰으로, 내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서, 제 3자로 밀어뒀던 '약속을 펑크낸 친구 강연우'와의 통화라니, 그런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거기에 오늘 낮 내내 녀석은 괜찮게 행동했으니까, 딱히 부탁을 거절할만한 합리적인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떼쓰면서 거절해봐야 다음에는 더 비참한 공격이 날아들 거 같기도 하고..


"전화.. 빌려주실거죠?"

녀석은 동시에 가볍게 왼손을 내밀어서 전화기를 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나는 굳어버린 머리로는 스스로 굴러떨어진 함정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서,

승리가 눈앞에 보였던 상황에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아른거리던 승리는 신기루 비슷한 허상이었지만.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아까 버스나 기다리다 집에 갈 걸 그랬다.

그랬으면 최소한 이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입에서는 살짝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러니까.. 그.....   아니다 됐다..  오늘 일은 미안해.."

나는 아쉬움이 남기라도 한 것인지 변명을 늘어놓아 보려다가, 결국 접고 녀석에게 사과했다.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어서,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고 가만히 서서 신고 있던 신발만 쳐다봤다.


"자세한 이야기는 어디 벤치에 앉아서라도 하자.. 말이 길어질 거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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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7자..?


죄송합니다..
연재 초반부에 한번 2주남짓 펑크내고 다시는 지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확실하게 주를 넘겨 지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약 27시간정도.

좀만 더 잠을 줄였더라면, 지난주에 게임을 아예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아예 제 능력이 좀 더 출중했다면, 지난주 일요일 내로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면목없습니다.
일일연재도 아닌데 뭐 이렇게 어려운걸까요..

좋게 보면, 만약에 지금 올리는 '지난주 분량'을 오늘 올리고 나서, '원래 이번주 분량'을 일요일 내로 올린다면
주간 연재인 제 입장에서는 유사 연참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하고 되지 않을까하고 합리화해봅니다.

아, 그래도 너무 늘어져서 평범한 여주물 같던 파트가 거의 끝나서 다행이에요.
평생 12월 20일에 갇혀서 엔드리스 에이트 찍을것도 아니고.. 슬슬 진도 빼야죠...
사심담아서 쓰면서 즐거웠지만, 지금 보면 조금은 무리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역시 제목은 너무 성급히 지은거 같아서, 기회가 되면 바꿔달고 싶습니다.


솔직히 2번이나 연재주기를 어겨버리고 나니까, 연재주기를 지킬거라고 확실하게 확언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머릿속에 들어있는 장면들을 글로 풀어서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은 진심입니다.
되도록이면 이번 주 일요일 넘어가기전에 하나 더 올리고 싶은데, 노력하겠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연중만큼은 계획에 없습니다.
제대로 결말을 내고 싶습니다.
연재 주기도 다시 정상화하는게 목표입니다..
저는 타니가와 나가루가 아니니까, 9년 연중같은건 피하는게 좋겠죠.
팔이 부러지거나 하는게 아니라면, 휴재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쉬었다가, 빠른 시일 내로 다음 화도 들고오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