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네온사인 사이로 보슬비가 내린다.

아니 그 반대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두운 빛에 다채롭게 물든다.

 

비가 싫었다.

비가 내리는 나날은 좋아하지 못했다.

그날은 해를 볼 수 없었다.

무기질적인 단색광으로 세상을 바라만 봐야 했다.

 

“배고파아.”

 

멀리서 들리는 것일까.

힘이 없어 큰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아이의 외침이 조용히 들려온다.

 

걸어가는 길.

발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지만, 그늘진 골목길에 장막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발걸음을 뗄 때였다.

 

“흐에에, 배고픈데. 언제쯤 오는 거야아.”

 

조금 전보다 소리는 작아졌지만, 조금 더 감정이 실린 말이었다.

 

“에이씨.”

 

호주머니를 뒤져 나온 카드 위로 떠 오르는 잔고로도 작은 길거리 음식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었다.

왜 이런 상황을 넘어갈 수 없는 걸까.

이런 일을 하더라도 내게 돌아오는 건 내일부터는 하루 한 끼의 다이어트라는 희망찬 계획만이 생겨날 뿐이다.

계획이 아닌가.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테니 필연적으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발소리가 빗소리를 덮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뒤에서 비치는 빛이 점점 줄어들며 들어가도 들어가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라도 들렸던 것일까.

이제는 무시하고 싶었다.

앞에는 벽이 보였다.

그 옆으로 꺾인 길이 있기야 하지만,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배고파아아,”

 

훨씬 더 선명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있었다. 저 길모퉁이 너머에 있었다.

 

발소리가 빨라졌다.

 

왜 나는 조금 전보다 빠르게 걸어가는가.

그 앞에 도달해 옆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금발의 소녀가 쪼그려 앉아있다.

어느 가게의 뒤편인지 쌓여있는 박스 위로, 무릎을 모아 감싸고 앉아있다.

 

“저기, 배고프니?”

“배? 고프지. 배고프다고 한참을 노래 불렀고. 너도 그걸 듣고 왔잖아.”

 

나의 물음에 나를 향해 쳐다보더니, 두 다리를 펴고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소녀가 일어나려 움직이는 동안. 깔린 종이박스는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런데도 여의치 않고 몸을 움직이며 중심을 잡았다.

비어있는 듯 보였지만 착각이겠지.

 

“아저씨가 먹을 거 줄까?”

“어? 줄 수 있는 거야?”

 

조금 전까지 오만하고 건방져 보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흥미와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나 보다.

 

“그럼 가까이 와줘.”

 

그 말에 약간의 의문이 들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의 주변에는 우산이 없었다.

우산을 씌워 달라는 의미겠지.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서 우산의 각도를 틀며 그녀에게 방울진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게.

 

“고마워!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그대로 나에게 안겼다.

고개를 목에 파묻으며.

 

그리고 나의 기억은 끊겼다.

 

*****

 

 

“어라? 일어나셨습니까?”

 

눈을 뜨고서 보인 건 뭔지 모를 흑색의 거한이었다.

얼굴을 들이밀자 시야의 대부분을 가리는 덩치의 근육질에서 존댓말이라니.

심지어는 방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특이한 느낌이다.

 

“아앗, 움직이지 마세요. 몸이 아직 잘 안 움직여지실 거예요.”

“여긴 어디...”

 

목소리가 이상했다.

원래의 내 목소리가 아니다.

손을 움직여 목을 만져도 거친 피부도 돌출된 목젖도 없다.

오히려 목을 향해가던 손을 막아선 약간의 둔덕이 흉부에 있었을 뿐이다.

 

“뭐야? 꿈이야?”

“꿈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요즘 꿈은 꿈이 아니라 주장하기도 하는구나.

목을 짚은 손을 옆으로 움직여 뺨을 꼬집어 보았다.

 

“으에.”

 

평소의 내와는 다른 귀여운 소리. 하지만 통증은 귀엽지 않았다.

늘어나는 볼살이 가져다주는 통증이 꿈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진짜 아니네.”

“그럼 이제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 행동을 기다려 주고는 말을 시작했다.

 

“흡혈귀입니다.”

“예?”

“흡혈귀 아십니까?”

 

과학의 시대에 이게 무슨 소리일까.

먼 옛날의 전설을 읊는 것일까.

가끔 읽을 수 있었던 책에서 몇 번 봤을 뿐인 상상 속의 괴물이라고.

 

“모르시나요?”

“그... 피를 빨아먹는 괴물 말하는 거지?”

“네. 잘 알고 계시네요. 요즘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겁니다.”

“뭐가.”

 

어지러웠다.

그저 아무런 맥락도 없이 이야기 속에나 나오던 괴물이 대화에서 나온다.

지금 상황을 설명해주겠다 하더니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만약 나가게 된다면 뇌 검사라도 받아야 하는 걸까.

 

“잘 이해가 안 가시는 것 같아 죄송하군요. 그때 당신이 대화하셨던 분이 흡혈귀셨습니다. 상당히 짜증이 나셨던 건지 오해와 착각으로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물어버려서.”

 

물었다는 건 내가 지금 흡혈귀라는 의미일까.

무는 거로 감염되면 실수로라도 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갑자기 나에게 없던 분노도 차금차금 쌓여 올라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 설명해주는 동안 여기 없다는 사실조차, 그녀가 미웠다.

 

“그녀는 어디에 있어?”

 

목을 긁는 거친 소리에 나 자신도 놀랐다.

나의 감정이 생각보다 흥분한 상태였다.

 

“제 잘못입니다. 빗물 탓에 거기 갇힌지라. 연락받고 달려가던 도중 사달이 나버렸더군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진심이었고, 어째서인지 궁금했다.

왜 그렇게 열심인지.

 

“무슨 관계인데?”

“네?”

“너랑 걔랑.”

“아. 제가 피 주머니 같은 겁니다. 그분은 제게 의식주를 보장해주고 전 필요할 때 밥이 되는 그런 관계요.”

 

밥?

그러면서 자기 몸이나 팔등의 잇자국을 보여줬다.

감염은 안 되는 거야?

 

“아! 그 흡혈귀가 되는 게 무슨 체질 같은 게 있다더라고요. 그래서 대부분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그렇다 보니 그냥 물어버린 거라. 죄송하게 됐습니다.”

 

콰앙

 

문이 열리고 졸린 눈의 소녀가 방안으로 걸어들어온다.

그때 그녀였다.

그대로 내 앞의 남자에게 걸어가 팔을 물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듯이 무시하며.

그 또한 익숙하다는 듯이 팔을 내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스칼렛님.”

“흐에?”

“앞에.”

“흐걋.”

 

날 쳐다보더니. 당황해 팔에서 입을 떼어내다.

방금까지 이가 박혀있었다는 듯한 자국에서 피가 점점 방울져 흘러나온다.

그녀 또한 입가를 훔치며 입꼬리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닦아낸다.

그녀가 작은 꼬마여서일까 그런 작은 행동은 그저 귀엽게 보였다.

 

“미안해.”

 

몸을 고쳐 다시 바로 서고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럴 줄 몰랐어. 워낙 희귀한 경우니 요즘 생각을 배제하고 지냈어. 요즘은 이 녀석의 피만 먹고 살아왔고, 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그녀의 큼지막한 눈망울이 흔들리며 나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며 용서를 구하는듯한 그녀의 모습은 작은 소동물 같았다.

 

“저기 몇 살이신가요?”

“으겍... 굳이 알고 싶냐?”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그녀는 갑자기 굳어서는 나에게 물어왔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입은 미소짓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장난이라는 듯.

 

“어... 정확히는 나도 잘 몰라. 그래도 역사에 있던 일들은 어느 정도 경험해 봤지.”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진 건 그저 영생을 산다는 기억이 들었기에 그녀의 귀여운 척이 아양이 아닐까 의심되어서였다.

그리고 의심은 맞았다.

 

“죽지만 않는다면 영원을 누릴 수 있어. 물론, 이건 인간이 결국엔 쟁취해낸 별이고, 나 같은 것의 전유물이 이젠 아니지만.”

“그러면 방금까지는 장난인가요?”

“아냐 아냐. 나도 미안해하고는 있어. 그러나 그걸 티를 내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지. 널 이런 신세로 만든 것도, 전부 내 잘못이잖아.”

 

그러는 붉은 눈동자가 텅 비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허무만이 담겨있었다.

어린 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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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를 낭비했다. 필력을 갖고싶다.

부러지지 않을 펜을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