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도 오랜만에 쓴다....

그런데 키무라야 픽업에서 천장치는게 정상적인 게임이냐?








예를 들어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경우가 있다고 하자.

이를 노력과 훈련의 결과로 극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더 훌룡하고, 무엇을 고평가 해야하는가?

메흐멧(Mehmed)은 재능을 타고나진 않았으나 이를 기수의 훈련으로 극복하며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말이었다.







메흐멧의 품종은 하노버리안이다.


이름 그대로 독일 하노버의 고유품종을 조지 2세가 만든 국영스터드에서 개량해서 군마와 역용마로 써먹다 현재는 주로 승마에서 써먹고 있다.

독일의 웜블러드들 중 개채수가 가장 많은데다 여러말을 섞어서 개량을 했다보니 품종개량 과정의 성과들을 다른 품종에서 써먹기도 한다.


지금은 좀 완화되었지만 저 수많은 품종을 섞은 역사가 있다보니다른 품종의 말들이 번식면허 따는 테스트 기간이 100일인데,

얘넨 300일을 그니까 약 1년 가깝게 테스트를 보는 등 다른 품종들 이상으로 더 빡세게 품종심사를 거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페르디난드. 1941~1970. 하노버리안 종마로 28세때 모습.)

아무튼 1961년 슈타데 인근에 위치한 하인리히 파페의 목장에서 하노버리안 페르디난드(Ferdinand)와 알테리베(Altliebe)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마인 페르디난드는 주로 장애물 비월에서 활약하는 자마들을 배출했다.






(좌측부터 순서대로 미티어, 한라[메롱], 페르들. 1960년 로마.)

대표적으로 60년 로마 하계올림픽 장애물 비월 단체 금메달을 딴 페르들페르디난드의 자마로, 

주로 장애물 비월 쪽에서 두드러지는 말들을 배출한 계통이었다.


비록 종마테스트는 얄짤없이 탈락했지만 이 망아지는 체격만 보면 분명 장애물 비월에서 나름대로 가망이 있어보이는 17h의 말로 자랐으나...



그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같은 부마를 둔 말들과 달리 겁이 너무 많아 장애물을 넘을 수도 없었다.


마장마술? 엉덩이는 세모나고 두 다리간의 간격은 멀었으며 목은 길었다.

체형의 문제로 마장마술 동작을 따라하는 것도 벅차했다.



당연히 기수들은 거들떠도 안봤고 그렇게 목장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지내던 1967년. 

그 운명의 전환점이 될 기수 라이너 클림케(Reiner Klimke, 1936~1999)를 만나게 되었다.






(언젠가의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나 서울올림픽 당시 독일 깃발을 든 대표선수가 클림케다.)


라이너 클림케...말붕이들에겐 아마 1988 서울 하계올림픽의 한국 국가대표였던 서정균의 스승으로 더 친숙할 이름일 것이다.


이 기수를 그냥 1줄로 간단 요약하라면 생전에 독일 승마연맹에서 마장마술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상은 다 받은 기수로,

20세기 최고의 마장마술 기수를 10명 거론하라하면 알로이스 포드하이스키와 더불어 고정적으로 1자리는 차지하는 기수다.


아버지는 에센 대학의 정신과 및 신경과 교수로 나름 중산층 집안이었으나 고향인 뮌스터에 폭격이 떨어진데다 아버지가 동부전선의 장교로서 차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고 클림케는 폭격에서 안전한 인근의 농촌에서 형과 같이 살았다.





(구스타브 라우와 토라[Tora] 그 당시 홀슈타인 다운 체구인데, 토라는 라우가 따로 교배시킨 암말이자 베를린 올림픽 장애물 비월 은메달을 땄다.)


농촌답게 학교나 교회를 갈때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야 했는데, 클림케는 이때 조랑말을 타면서 기수로서 첫 걸음을 땠고,

2차 대전이 종전 된 이후인 1948년에 베스트팔렌의 승마학교에서 기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독일 승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구스타브 라우의 눈에 들어 기초적인 지도 및 그 연줄로 다른 기수들에게 배웠다.





(티에데만 역시 구스타브 라우에게 짧지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고, 따로 친분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약 1년간 구스타브의 추천을 받아 주기적이진 못했지만 미티어의 기수인 프리츠 티에데만의 지도를 받았고, 동시에 미티어에게 차일뻔한(...)경험까지 해봤으나....

티에데만의 자서전이나 클림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클림케는 장애물 비월에 그렇게까지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테에데만이 미티어의 괴팍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기수로서의 마음가짐과 말과 기수의 교감을 늘리는 주관적 경험 등을 더 흥미롭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장애물에 관심도 없으면 종합마술은 어떻겠냐며 티에데만은 자신의 스승인 펠릭스 및 구스타브 라우와 친분이 있던 독일의 전설적인 조교사 윌리 슐테이츠에게 그를 보냈다.

(윌리가 더 잘 가르치기도 했고 당시 티에데만은 미티어와 같이 해외대회들을 뛸 예정이었던지라 누구 하나를 붙잡고 가르칠 여력이 없었다고.)




(1957년의 라이너 클림케. 아직까진 종합마술 기수다.)


1955년 베스트팔렌 빌헬름스 대학에 입학하면서 승마를 배우는 워렌도르프와 대학이 있는 뮌스터까지 약 50km를 자전거와 기차로 왕복하는 와중에도 승마는 계속했다.




20대에 독일 승마 종합마술 대표팀에 속해있었고,

유럽 챔피언십 1957 단체 은메달, 1959 단체 금메달 그리고 1960년 독일 챔피언십 금메달을 따기까지 했다.


클림케를 가르치던 윌리는 그 재능에 놀랐지만 클림케는 이 때 종합마술이 아닌 마장마술에 크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처음엔 윌리의 조언에서 시작했으나 마장마술 훈련으로 말이 개선되며 그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더불어 과거 마장마술 명인들의 저서를 읽고 마장마술에 큰 흥미를 느끼고 기수로서의 진로를 그쪽으로 잡았다고 한다.






(1960 로마 올림픽 종합마술. 라이너 클림케)


나중에 유럽에서 배우고 있던 그래스호퍼의 기수 마이클 페이지와 만났을때 마장마술은 말의 모든것을 향상시키며, 자신은 최고의 마장마술 기수가 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았으니 이미 대표팀에 내정되어 있음에도 마음을 굳혔던걸로 보인다.


일단 종합마술 커리어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종합마술이 끝이다.









(1964년 도쿄. 덕스[Dux 1952~1973]와 클림케.)




(1968년 멕시코 시티. 좌측부터 순서대로 마리아노-요제프, 이고르-키지모프, 덕스-클림케)


이후 요제프 네커만, 해리 볼트, 리셀로트 린센호프의 권유를 받아 마장마술 기수로 전환했고,

덕스와 함께 1966년 월드 챔피언십 개인 동메달, 단체 금메달. 1967년 유럽 챔피언십 개인, 단체 금메달 등을 수상,

1964년 도쿄 마장마술 단체 금메달, 1968년 멕시코시티 마장마술 개인 동메달, 단체 금메달을 수상받아 그 재능을 입증한 앞날 창창한 기수였는데....


일단 클림케는 요제프나 리셀로트처럼 자금이 따로 있는것도, 

그렇다고 미국팀처럼 대표팀 차원에서 서러브레드 시장을 이잡듯 뒤지는 등 그런 경우는 아니었다.


또한 기수란 말의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신념하에 훈련을 통해 훌룡한 말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당장 덕스만 하더라도 자질만 있었던 말을 뒤셀도르프의 법원에서 변호사 연수를 하는 와중에 훈련시켜 그 수준까지 끌어올린 경우였다.

....이 초인은 69년을 끝으로 은퇴할 덕스의 후임을 아내 루스와 함께 찾고 있었는데 마침 하노버리안 경매의 부설시장에 터무니 없이 싼 값에 나온 말을 발견했다.


비록 체형상 마장마술엔 적합하지 않더라도 저 체고면 큰 움직임을 보일거라며 나름 좋게 보았다고 한다.


클림케는 왜 이렇게 싼지 질문했고 하인리히는 앞서말했듯이 

혈통은 괜찮지만 장애물 비월은 겁이 너무 많고 마장마술은 체형때문에 꿈도 못꾼다며 승마장이라도 가면 다행이라며 말을 그 앞에서 까내렸다.


비록 싼 가격도 있었지만 클림케는 저 하인리히의 견해를 부정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무리 재능이 없는 말이라도 그 능력을 키우는 것은 과거 명인들의 주장처럼 기수의 몫임을, 

자신의 신념을 입증하겠다는 심산으로 말을 사들이고 메흐멧이라는 이름을 붙혔다.








그리고 메흐멧의 첫 커리어는...음....

68년 국내대회 6~7개 우승뒤 한동안 아무것도 없다..


일단 덕스는 69년에 은퇴할 예정이었던데다 멕시코시티 하계 올림픽까지 있었고,

클림케의 본업이 변호사와 공증인이라 메흐멧 하나만 붙잡고 훈련시킬 시간이 부족했음을 감안하더라도 성장이 매우 느렸다.


지금까지 소개한 마장마술 말들이 1~2년 만에 국제대회 수준으로 두각을 드러냈거나,

기수가 올림픽이 끝나고 1년만에 본격적으로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일거다.


심지어 국제대회 7세 데뷔도 아닌데다 미국처럼 벽지도 아니고 중심지인 독일임에도 이랬으니... 

메흐멧은 올림피언의 새로운 말이라고 평가받긴 커녕 1년 만에 버려질 말 취급을 받았다.


메흐멧의 기초훈련을 담당했던 그의 아내인 루스 클림케는 초창기의 메흐멧은 듀스보다 더 재능이 없고 너무나 민감했다 평했음을 감안하면 알만할것이다.


그나마 다행이게도 잔꾀따위 안부리고 성실하게 훈련을 받아들였다는거?




(피아프와 그의 기수 리셀로트 린센호프)


다른 문제로는 69년만 하더라도 도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출전했던 말.

앙투아네트, 마리아노, 피아프, 페펠, 이고르 등이 아직 멀쩡히 있었다.




(좌측부터 레무스-라이너 클림케, 스테판-루스 클림케. 1971)


덕스의 은퇴후 잠시동안 클림케는 다른 말을 타기도 했는데,


64년 도쿄 하계올림픽 마장마술 개인 은메달단체 금메달 레무스.

64년 도쿄 하계올림픽 마장마술 단체 은메달, 68년 멕시코시티 하계 올림픽 마장마술 단체 동메달의 스테판.


둘 다 클림케가 소유한 말은 아니었지만 각 기수들과의 인연덕에 클림케가 빌려왔고, 

클림케는 덕스를 포함한 이 세마리를 메흐멧을 위한 초호화 시범단으로 써먹기도 했다.


다만 요제프나 리셀로트 심지어 해리까지 클림케 같은 전도유망한 기수가 재능없는 말한테 세월을 낭비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후술하겠지만 마장마술의 모순되는 성격으로 벌어진 일인데....'


아무튼 클림케는 주변에서-심지어 부인까지-우려해도 메흐멧은 더 나아질것이란 믿음과 신뢰로 훈련을 이어갔으며,

3년 간의 일관되고 체계적인 훈련끝에 다듬어진 근육이 몸에 자리잡고 숙달된 마장마술 기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1970년 메흐멧과 클림케)


그렇게 1970년 그니까 클림케와 만나고 3년. 

첫 국제대회인 함부르크 마장마술 더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아헨에도 출전하는 쾌거를 이뤘으나 관계자들과 대중의 평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훌룡한 마장마술이나 마체가 마장마술과 거리가 먼데 이것을 마장마술로 인정해야 하는가?

타고난 재능과 적합한 외형인가? 극복하는 훈련과 정확한 기술인가?

(구스타브 라우의 경우는 후자의 이유로 네로와 알로이스에게 점수를 줬다.)


메흐멧이 받은 평가는 마장마술의 두가지 성격의 대립이었으며,

커리어 내내 충돌되는 평가을 달고 살아야만 했으며, 어떤 경우는 야유를 듣기까지 했다.




(1971년. 베네치아와 요제프. 클림케)


클림케와 친분이 있던 요제프는 메흐멧을 곱게 보진 않았다고 한다.


메흐멧은 최고의 기수와 최고의 말들의 도움을 받을 자격도 없는 평범한 말인데, 

그 도움을 받고도 겨우겨우 그 수준에 도달했으니 상당히 거슬렸던걸로 보인다.


어느날 클림케과 메흐멧이 훈련하는 도중에 요제프가 찾아와서 자신이 말을 새로 하나 구해줄테니 저 가망이 없는 말은 지금이라도 버리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클림케는 말이 못알아듣더라도 그 말을 대상으로 한 폭언을 그 앞에서는 안하는 기수가 요제프라는데 이 일화만 보면 뭐....


다른 기수들 역시 요제프 정도는 아니더라도 클림케가 재능과 세월을 낭비한다며 안타까워 했고,

클림케는 그저 메흐멧을 믿고 훈련을 이어나감과 동시에 대회를 출전했다.




(1971년 유럽 챔피언십. 메흐멧과 클림케)


1971년은 마장마술의 세대교체가 점차 이루어지던 시기로 마리아노, 압생트, 앙투아네트, 듀스, 왈드, 스테판, 울프디트리히 같은 이전의 강호들 대부분이 은퇴하고,

멕시코시티로 대표되는 페펠, 이고르, 피아프 같은 일부가 남아있는 과도기였다.


이 시기는 메흐멧에게 기회였고 체계적이고 꾸준한 훈련을 받은 결과 추진은 강해졌고, 처음의 불균형했던 모습은 점차 개선되어 갔다.

71년에 함부르크와 뮌스터 그리고 로테르담의 국제마장마술 대회 및 네이션스컵들을 비롯해 71년 유럽 챔피언십 개인 5위 단체 금메달을 따냈다.




(1972년. 가장 안쪽이 요제프와 베네치아. 가장 바깥이 클림케와 메흐멧, 그 옆은 카린과 리오스트로)


그러나 클림케와 메흐멧은 72년 뮌헨 올림픽의 출전선수가 아닌 예비선수로 끝났다.

3번의 선발시험동안 메흐멧의 부족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심판들의 논의 대상이었다.


결국 요제프와 리셀로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메흐멧과 클림케가 아닌, 

바댄대상의 우승마 데어 뢰베의 자마인 리오스트로와 그의 기수 카린 슐뤼테르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리셀로트 여사와 요제프 옹은 리오스트로는 분명 더 아름다우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카린은 미숙한 반면,

메흐멧은 덜 아름다울지언정 믿을 수 있고 클림케는 매우 노련했기 때문에 클림케가 뽑혀야 했다며 예상외의 결과에 실망을 표했다.








대충 알고 있겠지만 고인물 둘의 불안은 그대로 적중했다.


페펠과 이고르의 기수였던 엘레나 여사와 키지모프 옹은 클림케가 없으니 단체 금메달도 꿈은 아니라는 인식이었고,

리오스트로가 카린의 지시 일부를 씹어먹으며 러시아(구 소련)팀에게 단체 금메달을 헌납해버렸다.

(그 덕에 클림케가 다른 말을 타고 왔다면 72년 뮌헨 하계올림픽 마장마술의 결과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라는 평을 받지만...)


클림케는 1960~68년까지 출전했던 올림픽 기록이 끊겼으나, 그럼에도 메흐멧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메흐멧이 더 높은 경지로 성장할 여지가 있다 여겨 훈련을 이어나갔고 메흐멧은 그 기대에 부흥하듯이 느리지만 성장을 해나갔다.







(1973년 유럽 챔피언십)


(1973년 유럽 챔피언십. 메흐멧-클림케, 피아프-리셀로트)


(1973년 유럽챔피언십. 맨 바깥 리본이 없는 말이 리오스트로와 카린)


실내 마장마술 대회중 독일에서 가장 권위 높은 베를린과 도르트문트에서 리오스트로를 상대로 이긴 것은 그 전조 였을지 모르며,

73년 유럽 챔피언십, 74년 월드 챔피언십 개인, 단체 금메달을 석권하며 메흐멧은 클림케의 믿음과 신뢰에 보답했다.


앞서 말했듯이 상반된 평가를 받았지만 메흐멧은 클림케가 정성을 다해 다듬어낸 조각(Skulptur)으로 불렸고 그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비록 페펠과 피아프의 나이를 감안할지라도 전년도 올림픽의 금메달과 은메달을 차지한 말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세대교체의 전조였다.










하지만 73년부터 새로 떠오른 루키이자 한 시대의 전설이 메흐멧을 무섭게 따라잡고 있었다.





(이쪽도 이면에는 만만치 않은 훈련과 노력이 있었다.)


석류석 혹은 그라니.

그라나트 그리고 그의 기수 크리스틴 스튜켈버거.


그들은 74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네이션스컵에서 메흐메드를 고작 8점차로 따라잡았고, 얼마안가 로테르담과 제네바에서 그들을 꺾었다.

75년 아헨의 네이션스컵? 독일 관중들이 대놓고 샴페인 한박스를 그라나트의 우승에 걸었다.


그나마 메흐메드와 클림케가 가진 우위는 경험의 차이 그리고 기수의 천재성과 노련함 정도였다.


비록 75년은 클림케가 변호사와 공증인 업무로 바쁜터라 독일 국내의 국제대회에만 출전했지만,

그라나트에 묻힐 뿐 다른 여러 말들도 등장하며 메흐멧은 승산이 없다는 평을 들어야만 했으며 승산이 있다면 그라나트를 비롯한 말들을 함부르크 경마장으로 끌고가서 경주로 승부치는거 라는 신랄한 평가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우려를 불식하듯 72년과 반대로 리오스트로를 후보로 끌어내리며 올림픽 출전을 준비했다.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


금과 은은 그라나트와 크리스틴, 보이체크와 해리 볼트 두 쌍중 하나로 점쳐졌고 마장마술은 동메달 결정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기수를 제외하면 메흐멧을 동메달 후보로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클림케가 타고 있다 한들 1년간 커리어도 없고 원래부터 재능 없던 16세의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대회 당일.

클림케의 평을 빌리면 지금까지의 대회들 중 가장 최고의 마장마술을 선보였다고 한다.

비록 체형의 불리함으로 수축은 불완전했으나, 완벽한 균형, 강한추진, 이상적인 프레임, 흠잡을 수 없는 기술.






(맨 왼쪽은 해리와 보이체크)


마장마술 개인 동메달, 단체 금메달.


의심없이 말의 가능성을, 기수의 훈련을 믿고 걸어나간 길은 정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둘의 노력, 훈련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클림케는 메흐멧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 증명할 것도 없고 마침 후임도 있으니 77년 아헨 네이션스컵에서 메흐멧의 은퇴를 선언했다.

77년 은퇴당시 독일의 마장마술 말들중 수득 상금이 1위였고 32~33개의 국제대회를 우승했다.


그리고 은퇴하고 정말 아무일도 안하고 살았다.


보통 은퇴해도 다른 기수들을 훈련시키거나 국내대회를 뛰도록 빌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메흐멧은 자신의 후임을 훈련시킬때 교보재로 참가하는거 빼면 정말 아무것도 안시키는 소위 말하는 연금수령자로서 대우를 받았다.


클림케의 마구간에서 그는 관리사들뿐만이 아닌 다른 말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말로서 10년간 살았고, 

1986년 26세의 나이에 뇌종양 진단을 받고 안락사로 눈을 감았다.







마장마술의 목적을 개인적인 명예와 성공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닌 말을 더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것으로 본다면, 

메흐멧과 클림케의 이야기는 이를 긍정하는 증거로서 남아있다.




기수는 말을 훈련시킬때 말을 인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쇼 오브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을 체계적으로 훈련해 타고난 능력을 기르고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합니다.

<라이너 클림케(Reiner Klimke, 1936~1999)-젊은 승용마의 기본 훈련中>




ps. 앞서 말했듯이 메흐멧의 평은 갈렸고, 클림케의 팬이었던 어느 목장주는 메흐멧 같은 평범한 말이 클림케의 재능을 탕진한다며,


1975년 후임후보를 찾던 클림케를 초대해서 자기 목장의 4세마를 보여주며 이 말이야 말로 클림케를 위해 태어난 말이라며 그가 이 말을 사도록 설득했다.



(....89년 사진인데 너무 순한 이미지를 고른건가......)


그리고 이 말이 바로 훗날의 알레리히.

클림케에게 개인 금메달을 안겨준 말이자 비범한 출생의 걸작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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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네로(Nero, 서러브레드, 마장마술-오스트리아)

제니 캠프(Jenny Camp, 서러브레드계, 종합마술-미국)


1940~1960

쥬빌리(Jubilee, 올덴부르크, 마장마술-덴마크)


폭스헌터(Foxhunter, 서러브레드계, 장애물 비월-영국)

한라(Halla, 스탠다드브레드, 장애물 비월-독일)

미티어(Meteor, 홀슈타인, 장애물 비월-독일)


1960~1970

압생트(Absent, 아할 테케, 마장마술-러시아[구 소련])

페펠(Pepel, 트라케너, 마장마술-러시아[구소련])

이고르(Ikhor, 우크라이나 말, 마장마술-러시아[구소련])

뵈어만(Woermann, 스웨덴 웜블러드, 마장마술-스위스)

앙투아네트(Antoinette, 홀슈타인, 마장마술-독일)


루터 B(Lutteur B, 앵글로 노르만, 장애물 비월-프랑스)

스노우바운드(Snowbound, 서러브레드, 장애물 비월-미국)

스트롤러(Stroller, 크로스드포니, 장애물 비월-영국)


볼드 민스트렐(Bold Minstrel, 서러브레드계, 종합마술~장애물비월-미국)

그래스호퍼(Grasshopper, 크로스드포니, 종합마술-미국)


1970~1980

그라나트(Granat, 홀슈타인, 마장마술-스위스)

킨(Keen, 서러브레드, 마장마술-미국)



1980

고갱 드 륄리(Gauguin de Lully, 스웨덴 웜블러드, 마장마술-스위스)

콜랜더스(Corlandus, 홀슈타인, 마장마술-프랑스)


터치 오브 클래스/압둘라(Touch of Class/Abdullah, 서러브레드/트라케너, 장애물 비월-미국)


카리스마(Charisma, 서러브레드계, 종합마술-뉴질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