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팬을 잡고 요리조리 움직여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지금 이 말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갓 우린 커피는 순수하고 생그럽지만, 동시에 혀세포의 미각을 죽여버리는 살인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기품있는 자들은 날것 그대로를 음미하지 않는다. 설탕으로 윤색되지 않은 맛은 오히려 마시는 의미를 퇴색시키기 때문이다. 정신을 콕 집어 깨우는 것이 아닌, 창대를 그대로 꽂아 버려 도무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나무에서 근무하는, 특히 그 중에서도 회색 망토를 두르고 안경을 쓴 이 자는 달랐다.

그는 앉은 키를 보았을 때도 길이가 짧다는 것이 느껴졌다. 의자에 정자세로 반듯하게 앉아 있을 때 두 발은 땅으로부터의 높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도로만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쉴 틈도 없이 써내려가고 있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쳐 지나가며 속삭인다.


“뭐 하는 거래?

“아마 촉구문이겠지. 이번엔 얼마나 터무니없는 내용을 써서 바칠 지 궁금하네. 만약 이번에도 허당이면 정말 무사하지 못할 지도.”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휙 돌리더니 반대편 방향으로 뜀박질했다. 그 긴박함은 마치 역병을 피하려는 시민의 모습으로 착각할 정도로 부산스러움을 노출했다. 

그러나 그 회색의 해진 망토를 두르고 있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의 오른손이 붙잡아 들고 있는 만년필에선 잉크가 흘러나와 누런색 종이를 수놓았다. 문장 하나를 완성하면 위로 들려서 잉크병에 가득 담겼다가 다시 빠져나와 그 규칙적인 행위의 완성을 고대했다. 급하게, 긴박하게. 하지만 동시에 누구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정제되고 곧게 선 굴곡. 편지를 정말 잘 쓴다면 어지간한 말보다도 더 효과적인 설득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진실이 되는 건 아마도 여기에 한해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무모한 짓이 왜 성공할 거라고 믿는 거냐?’

그의 마음속에서 누군가 답답한 듯 물었다.

“아니, 당신은 틀렸어. 믿지 않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는 거야.”

 

그는 마음 속으로 각오를 남모르게 다졌다. 신하의 목숨을 건 충언을 무시하고, 짓밟았던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건, 이전에 보았던 것과 지금 맞닥뜨린 위기는 서로 너무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나온 건지도 모를 문건을 근거로 원정사령관을 파면한다. 흔한 무능함의 흔적 중 하나였다. 물론 시시콜콜하게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집정대신, 호민관, 그리고 군부의 핵심 인사들이 일거에 탄핵당했고, 그들은 일괄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당연하지만 혐의는 반역죄였다. 이들의 목이 잘려나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혐의자들을 신문하고 자백을 받아내는 일은 끊이지 않았고, 쇠창살 뒤에서 수감자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권력의 피비린내가 땅 밑동까지 하강하자 민심이 요동쳤다. 처음에는 작은 불만으로 시작했던 그 폭동은 끝끝내 거대한 불덩어리로 번지고야 말았다. 폭동의 주모자들은 지식의 나무에 불을 지르려고 시도했다. 자기들이 한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의 진원지가 될 지 상상도 하지 못한 그들도 역시 처형대에 피의 제물로 바쳐졌다. 

국경을 둘러싼 그림자보다 더 무거운 것이 모든 것을 짓눌렀다. 올바른 말을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 이제 황제는 그러운 거추장스러운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손에 잡히는 데로 정적들을 제거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반란 진압과 사회 안정, 두 구실을 손에 넣은 그는 이제 두려움을 잃어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역시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사람이 아닌, 겁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 살아남은 각료들은 속으로 되내었다. 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어 광기에 맞설 용기는 없었던 모양세였다. 그저 조용히, 얌전하게 황명을 전달하는 집정대신의 발 밑에서 조아리고 받들 뿐이었다. 


그의 만년필을 쥔 손이 움직이는 빈도가 느려지더니 이내 멈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이 쓴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펜을 움직여 글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스 케이안. 익일 대회의장 본회의실로 전송 요망.

황력 1017년 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