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이야기
아무리 죽어도 죽을 수가 없다.
죽으면 또 다른 세계에서 환생한다.
이제 질렸다.
살고 싶지 않다.



*



"나... 보여?"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녀가 핀잔을 주었다.


그래.


핀잔을 주었다.


내 터무니 없는 말에 핀잔을 주었다.


내 터무니 없는 말을 듣고, 똑똑히 듣고, 그 답변을 주었다.



"정말 보인단 말야...?"


"그렇다니까!"



있을 수 없는 일.



"내 얼굴이 보인다고? 몸도 보이고? 칼... 칼도 보여?"


"흔한 얼굴상이네. 옛날 사무라이 옷 같은 거 입고 있고. 잘만 보이는데."



있을 리 없는 일.



"따, 따라해봐. 간장공장공장장은 강공장장."


"간장공장공장장은 강공장장."



그러나 항상 바라왔던 일.



"된장공장... 공장장, 은..."


"된장공장공장장은...?"



차마

말을 선명히 할 수 없었다.


몇천번의 환생 끝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마주' 했다.


같은 공간에 서 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지쳐 우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누군가와 '마주' 했다.



"아, 아흑... 아, 으으 흐윽...!"



심장에서부터

어쩌면 더 깊은 곳에서부터 비명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비명.

누구의 것인가.

필히 내 것일 테다.


무엇이 부끄러웠던 건지 입을 막았던 손은

무엇에 밀린 건지 지면으로 떨어져나갔다.



"아, 크흡... 아으, 흑... 아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우스꽝스러운 울음이었다.

스승님이 보셨다면 적어도 인간 비스무리한 소리로 지르라 성을 내셨을 테지.


따지자면 개.

한 마리의 개.

나는 개가 되어 울었다.

개처럼 울었다.



"얘... 얘!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얘!"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녀는 내가 진정되길 기다려주었다.


괜찮다며, 뚝 그치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어린애 달래는 느낌으로 해주지 않았나 싶다.



"흡, 크흐윽..."



칠천 년 짜리 울음이었다.

중간부터 세는 걸 포기했으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농축된 눈물에,

썩 시큼털털한 눈물에 질식되어

울음이 끝날 즈음 나는 지쳐서 잠에 들었다.



"그래 그래, 착하지. 울지 말고."



'착하지' 라.

얼마만에 듣는 말이던가.


태생을 생각하면

그녀의 품이 과연 얼마나 따뜻했을까 싶지만

적어도 그날 내겐, 그녀의 체온이 포근하고 또 안락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환생 중 쬐었던 그 어느 담요나

지금까지의 환생 중 쬐었던 그 어느 모닥불보다.




*




"여긴...?"


"내 집이야."



붉고 긴 머리카락에 아담한 체형.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방금 날 토닥이던 여자였다.



그녀의 집은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았는데

위생관리는 잘 되어있었지만 어딘가 좁고 부실해보였다.



"누추하지만 있을 건 다 있어.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


"... 정말로 누추하네."


"... 너 참 직설적인 성격이구나?"



그녀에게 주워진 이래로 나눈 첫 대화였다.




한동안은 회복에 전념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라고 했던가.


거꾸로도 적용이 되는 줄은 몰랐기에

당시 내 몸은 정신상태를 따라서 상당히 피폐해져 있었다.



"난 세이코야. 세이라고 불러. 넌 이름이 뭐야?"


"이름..."


"이름이 '이름' 이야? 독특하네."


"까먹었어. 기억이 안 나..."



이름마저 잊어버렸을 정도로

나는 망가져있었다.



"여자친구는 '리' 라고 불렀던 거 같아."


"애인이 있었다고? 그럼 그 사람은 어쩌고? 혹시..."



이때는

'혹시' 다음에 올 단어가

'먹었니' 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녀, 세이는 날 오니로 여겼고

난 그것을 몰랐기에.



"사별했어. 오래전에"


"... 미안해, 괜한 걸 물어봤네."



죽은 건 여자친구가 아닌 나였지만

거짓은 아닌 셈이었다.


별 수 있나.

전부 밝히기엔 진실은 너무나 길고 황당한데.


쓰라리기도 하고.



"내 옷은?"


"갑자기 울면서 쓰러지길래 몸에 이상이 있나 보느라고 벗겨놨어. 너 몸 좋더라?"


"다행히 아랫도리는 안 벗겨놨네."


"... 너 변태야?"



고백하자면

그 사이에 이런저런 일도 많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남녀관계로써의 이런저런 일 말이다.



"아~."


"됐어 혼자 먹을게."


"그 몸으로 혼자 먹긴 뭘 혼자 먹어, 입이나 빨리 벌려."



긴장이 풀린 이후로 아예 몸져누운 나였기에

거친 간병 같은 것도 받고.



"오늘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


"풀떼기 아닌 거."


"... 요새 배가 불렀구나?"



거처에서 함께 지내다보니

동거 연인 느낌도 났고.




조금은 명랑하고

조금은 장난끼 있고


조금은 짓궂고

조금은 귀엽고


조금은 상냥하고

조금은 오지랖이 넓고


그리고 조금은... 사랑스럽고.


세이에 대해 당시 내가 내렸던 평가였다.



어쩌면 단순하게

오랜만에 만나게 된 대화상대라 끌렸던 걸지도 모른다.


세이는 대단한 미인상은 아니었으니 그럴 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은 착각일 뿐,

외로움이 사라진 기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이었든

누더기처럼 구멍났던 내 가슴을

새옷처럼 뽀송뽀송하게 만든 건

그녀였다.


내는 법조차 잊어가던 목소리에

'목소리 멋지다' 는 칭찬을 덮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한 것도

그녀였다.


그녀가 좋았다.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갔다 올게."


"어디 가?"


"밥 구하러."


"이제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 아직 아프잖아. 환자가 뭘 그렇게 싸돌아다녀."



몇천년간 쓸 일도 없이 짱박혀 있던 힘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든 건

그녀였다.


이것만큼은

그럴 일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지만.



"크윽..."


"... 1형, 부지화不知火."



행복의 종식을 알리는 씨앗은 이때 뿌려진 것이리라.



남자가 보였다.


특별한 무늬 없는 검은 상의와 통이 큰 검은 바지.


흰색 허리띠 옆에는 칼집이 달려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성은 외날검을 그녀에게 휘두르려 했고

그것을 발견한 나는 멀리서부터 달려와 막았다.



"그만."


'챙'


"?!"



내가 도착했을 때는 피투성이가 된 세이의 목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세이는 놀란 눈치였다.



"너, 집 안에 있으라니까...!"


"다 나았어, 이제."


"이게 무슨..."



나의 칼에 막힌 채로 남자의 칼은 허공에 멈춰섰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분명 아무 것도... 어떻게 이런... 설마 혈귀술의..."



놀라 어안이 벙벙해진 걸까.


듣는 사람이 다 답답해질 정도로

남자는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지 못했다.


파래진 얼굴로 잠시 단어만 몇개 뱉을 뿐.


돌이켜보면 이때 눈치를 챘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 남자의 표정에는 내 모든게 담겨있었지만 당시의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뿌득'


"돌아가. 안 죽일 테니까."



알아채지 못했다면

차라리 죽이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전의를 상실한 틈에 나는 남자의 칼만을 부러뜨렸고

세이는 그런 남자를 돌려보낼 뿐이었다.


후일 세이가

'구해준 모습이 멋있었다' 고 평했던 이 사건은

내게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 그토록 서둘러 끝낸 것이 아니었나 싶다.


자신의 비밀만이 아니라

내 비밀도 숨겨주기 위해서.






세이를 공격한 검은 옷의 검사.


원작과 한없이 닮아있는 그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그를 귀살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귀살대와 비교했을 때, 그는 어딘가 달랐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딘가가 달랐다...



여하간 그후로도 간간히 다른 검사들이 세이의 목숨을 위협하며 나타났는데,

세이에게 그들은 힘겨운 상대였으나 내게 그들은 약한 상대였기에

나는 호위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곁을 자주 지켰다.


물론 실상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었으나

좌우지간 일손이 늘어 좋다면서

그녀는 내게 일을 거들게 시켰다.



"이렇게 생긴 풀. 비슷한 생김새가 많으니까 꼭 나한테 확인받고, 뽑을 때는 뿌리가-."


"이거?"


"-상하지 않게 하라니까..."



사실 도움은 별로 안 됐던 것 같다.


내 실력은 서투르기만 했으니까.


그래도 세이는 군소리 없이 내 삽질을 받아주곤 했다.



"이 풀 어디에 쓴다고 했지?"


"약 만들거야. 꼭 필요한 약이 있거든."


"무슨 약?"


"... 글쎄."



하늘의 별처럼

명랑하게 반짝거리던 세이의 목소리는

약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조용히 자취를 감추곤 했다.


불만을 품은 내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입을 닫을 뿐이었다.


항상 밝게 빛나던 세이가 유일하게 어두워지는 포인트.


약이었다.


그것이.



"이건 그러니까... 착해지는 약이야."


"누구한테 쓰려고?"


"나한테."


"세이는 충분히 착하잖아. 생판남인 나도 밤낮으로 간호해주고."


"..."



가끔은 그녀도 대답해줄 때가 있었지만

간간히 던지는 힌트도 하나같이 확실한 것은 없고

늘 알쏭달쏭한, 그러니까 고대 신화의 예언 비슷한 것들 뿐이었다.



"리. 할 말이 있어."


"뭔데?"



하루는 세이가 약초를 뽑다말고 날 조용히 부른 적이 있었다.



"리는 나 좋아해?"


"... 어."



진작에 그녀가 알아챘다는 점에서 부끄러웠다.


동시에 그녀가 알아챘다는 점에서 기대되었다.



이런 행동을 하면 혹자는 스승님과의 첫사랑은 어디로 팔아먹었냐며 매도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끝났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수십번 울었다. 그 순간이 돌아오길 바라며.

수백번 한탄했다. 스승님과 함께하게 해달라며.

수천년이 지났다. 그제서야 겨우 깨달았다.


우리는 끝나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다시는.



"세이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리고

세이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녀의 행동 하나에 가슴이 뛰었다.


몇천년의 고독도 그녀의 앞에선 여름날 눈사람처럼 녹았다.


그게 세이였다.



"리는 내가 아주 나쁜 여자라도 사랑할 수 있어?"



세이가 숨기던 두가지 비밀.


세이에 관한 것과 나에 관한 것.


그 중 세이에 관한 비밀.


이 즈음의 나는

세이 몸의 문제를 어렴풋이 짐작해냈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단순히 연심 때문에 그리한 거였지만

내 몸에 생긴 문제를 고려한다면

훌륭한 조치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 예전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녔-."


"응. 그래도 사랑할 수 있어."


"... 그래?"



의미심장한 문답이었다.


폭풍전야의 으스스한 한때를 예상케하는 문답이었다.


아니, 다음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폭풍전야가 맞았나.



"그래... 그렇구나..."



아무 말도 않은 채

세이는 그날 하루종일 침묵을 지켰다.


곧 벌어질 불행을 예견한 듯한

불길한 행동이었다.




다음날엔

한명의 소녀가 찾아왔다.


어딘가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였다.


그전까지 손님이라곤

검은 옷을 입은 검객들, 그 불청객들뿐이었던 지라 의아했다.


세이의 이름을 대서 금세 경계는 풀어버렸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



저번에 쓴 거 후속.

앞으로 순서는 귀살대 계급 돌아가듯이 될 듯.

癸-壬-辛-庚-己 식으로.

다음주는 일요일에 나오거나 휴재하거나...
요새 시간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