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



 '저딴 범죄를 저지르고도... 고작 징역 1년?'

 

 이런 말들이 계속 반복되자 정부에서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정부는 국민들이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판사들의 역할을 줄이고, 대신에 재판 당사자와 증인의 재판 참여율을 늘릴 방책을 고안하였다. 그것은 '제러미식 재판'이다.


 정부는 제러미 벤담의 사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법부와 함께 법원을 '일반 법원'과 '제러미 법원'으로 분리하였다. 기존 법원에서는 기존 방식대로, 제러미 법원에서는 공리주의적인 방향으로 재판이 이뤄진다. 또한 제러미식 형사 재판의 경우에는 검사와 변호사가 없어지고, 대신 피해자와 가해자, 쌍방인 경우에는 가해자들끼리 자웅을 겨루게 된다.


 여기 재판 기록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한 번 살펴보자.


<20XX고합1748>


 남자 둘이 각각 오른쪽 문과 왼쪽 문에서 들어온다. 오른쪽에서 온 남자는 자신에 가득차 있다는 표정을 지었고, 반대쪽 남자는 허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 앉자 판사가 발언을 시작한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안내를 받으셨겠지만 다시 한 번 재판 방식에 대하여 소개하겠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여기 앉아 계신 두 분은 점수를 부여받으실 것입니다. 이 점수란 재판 당사자 두 분께서 서로에게 얼마나 물질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두 분이 사회 공익과 주변 인물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줬고, 또 앞으로도 얼마나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두 분 중 점수가 높으신 분께서는 덜 도덕적인, 다시 말하자면 최대 다수의 쾌락 추구에 더 방해가 되는 사람으로 판단되어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분 중에서 만약 한 분이라도 지금이라도 일반 재판으로 바꾸고 싶다면 이야기하십시오."


 오른쪽 남자부터 판사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이의 없습니다."


 왼쪽 남자는 자기 무릎을 보고 이야기한다.


 "저도, 이의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판사는 리모컨을 사용하여 영상을 튼다. 영상 속에서 두 사람이 편의점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다 둘 중 술을 마시던 남자가 일어나서 오른쪽으로 간 후 꿇어앉는다. 그러고 손을 모으고 사정을 하는데, 그것을 듣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어두어진다. 듣고 있던 남자는 거기에 대해 화를 내면서 안 된다고 소리친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더니 머리에 주먹을 날리고, 여기에 대응하여 반대쪽 남자도 주먹을 날린다. 그 순간 판사는 영상을 멈춘다.


 "정확한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지금 왼쪽에서 재판 받으시는 김상훈 씨, 맞은편에 있던 사람은 오른쪽에 앉아계신 박민석 씨입니다. 제가 영상을 끝까지 보여들이지 않았지만, 방금은 김상훈 씨가 박민석 씨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주먹을 날렸고, 이에 대응하여 박민석 씨도 주먹을 날려 쌍방폭행이 된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판사가 왼쪽에서 점수판을 지키고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


 "여기 있으신 분은 계산원입니다. 이분은 여러분이 받은 점수를 전자식 점수판에 나타내실 겁니다. 정당한 사유로 인해 계산원을 바꿔야 한다면 이야기 하십시오."


 둘 다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싸움의 책임과 과실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김 씨가 싸움을 걸었기 때문에 제러미식 법률 3조 8항에 의거하여 20점을 부여하겠습니다. 또한 김 씨는 이때 술을 마시고 있었기에 여기에 추가로 3조 12항에 따라 10점을 부과하겠습니다. 

 박 씨는 이에 대응하여 주먹을 날렸지만 이는 정당방위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3조 9항에 의해 15점을 부여하겠습니다."


 김 씨는 본인의 점수가 2배 많자 이에 초조함을 느낀다. 그리고 무언가 좋은게 떠올랐는지 입술에 웃음이 아주 약간 감돈 채로 일어나 판사를 보고 말한다.


 "저, 존경하는 재판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마시던 술의 도수는 3도입니다. 술 중에서는 많이 약한 편이지요. 또 저는 그 술이 담긴 캔을 반 정도 마셨습니다. 그러니 술은 저의 폭행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판사가 화면에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발언을 시작한다.


 "이것은 현장 사진입니다. 테이블 밑에 당신이 마시던 것과 똑같은 술이 7캔 더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캔을 잡는 부분에는 당신의 지문이, 음용구에는 당신의 타액만이 발견됐습니다. 아무리 도수가 약한 술이라도 그 정도 마신다면 충분히 만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면 당신, 마치 그 술 반 캔만을 마신 것처럼 얘기를 하는군요. 그런 것과는 관련해서 절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재판관 기만으로 점수를 더욱 부과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술을 마신 것도 모자라 당신이 경찰서에 가서도 경찰들에게 술주정을 부렸다더군요. 그래서 이에 대한 점수 10점을 추가로 부여하겠습니다."


 "재판장님, 죄, 죄송합니다."


 김 씨는 오히려 점수를 더 얻자 주눅든 상태로 자리에 앉는다. 판사는 김 씨가 앉은 후에 스크린에 사진을 띄우고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감정에 대한 평가를 통해 점수를 매기겠습니다. 여기 사진이 보이나요? 수사팀에서 얼굴 표정 분석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영상의 매 프래임마다 여러분의 얼굴 표정을 분석하였고, 여러 얼굴 표정들 중에서 기쁨의 점수들을 합하여 여러분이 싸움 순간 중에 느낀 행복, 아니 희열의 총량을 구했습니다."


<사건과 무관한 예시>


 "그 결과 김 씨의 희열의 총량은 1245.3, 박 씨의 총량은 2015.2입니다. 연구 결과, 싸움에서 희열을 더 느끼는 사람이 가학적이고 뻔뻔하며,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기질이 강해질수록 반사회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반사회적인 행동은 다수의 불행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해 법률 20조 6항에 따라 반사회성 점수 20점을 부여합니다."


 이에 박 씨는 발끈하여 일어서서 얘기한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고작 싸움에서 느낀 희열로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말을 하긴 부끄럽지만, 제가 희열의 총량이 김 씨보다 큰 이유는 제가 더 많이 그를 때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점수를 철회하십시오."


 판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에 대해 반박을 시작한다.


 "아까 본인이 잘 싸워서 희열을 느낀 것 같다고 했지 않습니까?"

 

 "예."


 "하지만 연구 결과, 싸움을 리드하는 사람의 희열의 양이 리드 당하는 사람보다 적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


 "또한, 아까 이런 걸로 점수 줘도 되냐고 물어보셨잖습니까? 이거 다 연구 결과로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까 발생한 피해'만' 가지고 점수를 매긴다고 한 적 없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사회 공익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가에도 평가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제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재판 기록관에게 가서 확인하셔도 됩니다. 이상입니다."


"알겠습니다."


 박 씨가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그가 앉고 나서 판사는 이번에 의료 기록 차트를 스크린에 보여준다.


 "이번에는 양측의 피해 정도에 대한 점수를 부여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두 남자는 서로 짠 것처럼 동시에 자신의 몸에 차고 있던 깁스며 붕대며, 목발을 판사에게 보여주며 내가 더 다쳤느니, 내가 훨씬 많이 맞았느니라며 아우성쳤다. 판사는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헛기침을 크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조용해졌다.


 "다시 재판을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김 씨가 박 씨에게 입은 피해에 대한 점수를 계산하겠습니다. 김 씨는 '눈 주위 타박상으로 인한 멍', '왼쪽 위팔뼈 금', 그리고 '4번 갈비뼈 골절'이라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타박상의 경우에는 원래 5점입니다. 하지만 얼굴에 생긴 멍, 흉터 등의 경우에는 개인의 사회적 생활에 추가적인 불이익을 줄 수 있으므로 이 멍에 대하여 10점을 부여하겠습니다. 위팔뼈 금의 경우, 박 씨가 한동안 팔을 쓰게 되는 것이 불편하게 되었으므로 10점, 하지만 박 씨는 오른손잡이이므로 '손잡이의 법칙'에 의거하여 5점을 빼 5점을 부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갈비뼈 골절의 경우에는 갈비뼈 5점에 골절 10점을 합하여 15점을 주겠습니다. 따라서 김 씨의 피해에 대하여 박 씨에게는 30점을 부과합니다.

 박 씨는 김 씨에게 '무릎 타박상', '턱 뼈 골절'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릎 타박상에는 5점을, 턱 뼈 골절에는 턱 10점, 골절 10점을 합한 20점을 부여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김 씨에게 25점을 부과합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점수가 65 대 65로 동점이 되었다. 그러자 박 씨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사실상 피해자인데. 이러다 지는거 아닌가. 뭐 방법이 없을까. 음, 그래. 좀 억지스럽지만 이 말이 통한다면 저 술주정뱅이 김상훈이에게 더 점수를 줄 수 있겠어."


 박 씨는 일어나 얘기를 시작한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여길 보십시오. 눈 밑 다크서클이 보입니까?"


 "보입니다."


 "제가 김상훈이에게 폭행을 당하고 며칠동안 너무 괴로워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이것때문에 저는 회사 계약 등에서 피로한 인상을 보여 불리함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사서 영 불편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인해 행복량이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김 씨에게 점수 부여가 가능합니까?"


 퍈사는 사환을 부르더니 귀에 속삭이고 뭐라 하였다. 사환은 컴퓨터를 꺼내어 무언가 열심히 찾았다. 판사는 사환이 찾은 것을 스크린에 띄웠다.


 "여러분, 여기서 박 씨가 지금까지 하였던 게임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쪽에 8시간 전이라고 적힌 것이 보입니까? 지금이 오후 12시 반인데, 8시간 전이면 새벽 4시 반이지요. 또한 그 8시간 전 기록의 앞 뒤에도 게임 기록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어제나 그저께, 그리고 더  앞에 날을 보아도 비슷한 게임 시간 패턴이 발견됩니다. 박민석 씨, 당신은 정작 재판 당일까지 게임을 하고 왔으면서, 다크서클의 책임을 김 씨에게 돌리고 있군요. 따라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이고, 이게 안 먹히네.'


 "재판이 길어졌으니 잠시 휴정하고, 좀 있다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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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시간 뒤, 모든 사람들이 다시 재판장으로 들어온다. 모든 사람들이 들어오고 자리에 앉자 판사는 다시 스크린을 킨다. 스크린에서는 화상 회의 프로그램 Room이 켜져 있었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점점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이 화상 통화에 참여하자, 판사는 재판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증인 질답이 있겠습니다. 먼저 대기하고 있는 모든 증인께서는 선서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모든 증인들이 증인 선서문을 읽는다.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OOO."


 판사가 사환에게 시켜 화상 회의 속 증인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그리고나서 판사는 다시 발언을 시작한다.


 "먼저 증인들을 각각 김상훈 씨와 관련된 증인, 박민석 씨와 관련된 증인으로 두 부류로 나눴습니다. 박 씨 증인, 김 씨 증인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증언을 할 것입니다. 저희가 번호표를 나눠드렸고, 1번부터 발표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1번은 김 씨 측 증인입니다. 증인분들은 발언할 때 일단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피고와 어떤 관계인지를 알린 후, 객관적인 평가를 하여 점수를 부여하십시오. ."


 판사의 말이 끝나고, 옷에 1이라 적힌 스티커를 붙힌 여성부터 발언을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지윤이고, 김상훈 씨의 옆집에 삽니다. 상훈씨가요, 제가 바빠서 집에 일찍 오지 못할 때, 저 대신 얘들도 챙겨주고, 밥도 해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상훈 씨 점수를 깎아주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아 참, 제가 깜빡했군요. 점수 부여는 -5에서 플러스 20까지 가능합니다."


 "그러면 -5점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분 발언 하시지요."


 이번에는 중년의 남성이 통쾌하다는 듯이 박 씨를 쳐다보며 얘기한다.


 "제 이름은 최석영입니다. 저는 박 씨의 아랫집 주민이고 발언 시작합니다."


  박 씨는 순간 뭐가 생각났는지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어이, 박 씨. 당신이 맨날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새벽에 왜 이렇게 쿵쿵대는 거야? 당신 때문에 우리 아들이 새벽에 잠을 못 자잖아. 여기 우리 애, 다크서클 안 보여?"


"죄, 죄송합니다. 저 그런ㄷ.."


 "어디서 핑계를 대려고. 당신, 내가 몇 번을 찾아가가지고 조용히 하라고 했어, 안했어. 내가 마음 같아서는 그냥 20점 콱 박아버리고 싶은데, 그건 좀 너무한 것 같아서 10점만 주겠어. 고마운줄 아슈."


 "저, 화난건 이해합니다만 진정 좀 하시죠."


 "아, 판사님,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박 씨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대로 가다간 어떻게 될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분명 선빵은 저 놈이 쳤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심란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판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노령의 여성이 발언을 시작한다.


 "제 이름은 허복자이고, 김상훈이 애미되는 사람이올씨다. 저희 아들이 술을 좀 많이 마시는건 알았지만 술을 마시고 사고까지 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이놈을 고치기 위해 제발 사람들이 벌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못난 아들래미 사람새끼 만들려고 20점을 주겠습니다."


 이번에는 방청객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자기 아들한테 점수를 저렇게 주냐며 저게 부모냐는 말도 있었고,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었으면 저러냐면서 이해된다고 하는 소리도 들려 왔다. 판사가 모두 정숙하라고 하니까 재판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그 다음 사람을 부른다. 그러자 그 사람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민석의 전 부인인 오희정입니다. 박민석과 저는 성격 차이로 10년 만에 이혼했습니다. 이혼 과정에서, 아이는 저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집은 민석 씨가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민석 씨가 저에게 매달 아이 양육비를 보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집을 들고 간 것은 이해합니다. 민석 씨가 그 집을 구매할 때 80%의 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제가 키우기 때문에 매달 양육비를 제게 주기로 하였던 것인데, 민석 씨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전화도 해보고, 집에도 찾아갔지만 결국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한 번, 딸하고 직접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만나면 제가 양육비를 달라고 할 것을 알고 몇 번 오고 말았습니다. 이런 점들을 토대로 저는 박민석 씨에게 20점을 부과하겠습니다."


 방청객이 또다시 술렁거렸다. 박 씨는 숨고 싶어졌지만 숨을 데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판사는 다시 사람들에게 정숙하라고 소리쳤다.

 정적. 얼마 후 다음 사람이 발표를 시작한다.


 "저는 김상훈의 친구 이지용입니다.  제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녀석이 돈을 빌렸줬건만, 정작 본인이 돈이 궁해서 이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도움을 어느 정도 받았기에 10점 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 분 발언을 시작하시죠."


 그리고 마지막 증인의 발언이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민석의 여자친구 서하윤입니다. 오빠가 이혼남인건 알고 사귀었고, 오빠가 제게 굉장히 잘해줬으니까, 전 부인에게도 알아서 하려니 하고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런 쓰레기 짓을 할 줄은 몰랐네요. 아 맞다, 근데 오빠, 왜 내가 데이트 하자고, 어디 놀러가자고 했는데 왜 안 해줘?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원래 오빠한테 -5점 주려고 했거든, 근데 안 되겠어. 오빠는 벌 받아야겠어. 10점."


 "하, 하윤아, 오빠 좀 살려줘라. 오빠 벌 받기 싫어, 너무 무서워."


 "싫어."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네가 -5점 준다면 내가 나가서 너 좋아하는 데도 같이 산책하고, 니가 제일 좋아하는 떡볶이도 맨날,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나가서 먹고 할게, 제발, 부탁이야.."


 "판사님, 빨리 판결 내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점수는 김상훈 씨와 박민석 씨가 각각 90:105이므로 박민석 씨가 김민석 씨보다 주변 사람과 사회 공익에 더 많은 피해를 주었고, 앞으로도 더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박민석 씨의 증인분들께서는 박민석 씨에게 어떤 형별을 내릴지를 결정해 주십시오."


 박민석의 이웃 최석영, 전 부인 오희정, 여자친구 서하윤은 이내 회의에 돌입했다. 징역이나 가택연금은 어떤지, '무기징역은 너무 긴가'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곧, 그들은 형별을 결정하였고, 오희정이 대표로 발언하였다.


 "저희들은 얘기를 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바로 박민석 씨의 발이 문제란 것을 말입니다. 최석영 씨는 그가 맨날 쿵쿵거리는 소리 때문에 본인과 아이들이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제가 양육비를 받으로 집으로 갈 때마다 그가 본인의 발을 이용해 도망갔었고, 아이를 위해서 제 발로 제 집에 온 적도 없었습니다. 서하윤 씨는 그가 맨날 귀찮다며 밖으로 걸어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를 같이 먹으러 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박민석 씨의 양쪽 발목을 절단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우리의 결론입니다."


 판사가 망치를 들고 판결을 시작한다.


 "그러면 판결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 박민석에게 증인들의 의사에 따라 발목 절단형을 선고한ㄷ..."


 박 씨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안돼애애! 어이 판사, 나는 제러미식 재판에서는 판사의 주관이 거의 안 들어간다고 하길래 그걸 믿고 있었거든? 근데 이건 당신 주관이 너무 들어간거 아니야? 아까 사이코패스 기질 판단이며 뭐 그런 것들 있잖아."


 "저는 오로지 주어진 데이터만 받고 그 데이터에 상응하는 점수를 합산하여 당신에게 부과했습니다."


 "그러면, 증인들은? 증인들을 나에게 너무 불리하게 편파적으로 한 것 아니냐고."


 "증인들은 인간 관계 분석 알고리즘을 통하여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 세 명을 선별한 것입니다. 김상훈 씨도 마찬가지이고요."


 "아이,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왜, 그러는 건데? 왜 그러는 거냐고 진짜!"


 "박민석 씨 조용히 하세요. 아직 남은 게 있습니다."


 박민석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기에 쒸익쒸익 거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판사사는 판결을 내렸다. 김상훈은 박민석을 웃으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판사가 목을 가다듬고 발언을 시작했다.


 "원래는 나중에 하는 것이었지만 절차상 간소화를 위하여 이렇게 바꼈는데, 박민석씨, 항소 하시겠습니까?"


 박 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박민석 씨가 재판을 더 받을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수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방청객들의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투표 결과, 아무도 그의 항소를 찬성하지 않았다. 박 씨는 발악을 시작하였다.


 "난 받아들일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박민석 씨, 조용히 하세요."


 박 씨는 김 씨를 보며 이야기한다.


 "씨발, 받아들일 수 없다니까! 돈 빌려달라고 한 놈도 저놈, 먼저 친 놈도 저놈인데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하냐니까?"


 "저기 간호사 분들, 박민석 씨에게 일단 진정제를 투여해 주세요. 그리고 저쪽 방에 마취제랑 붕대, 작두를 준비해 주십시오."


 "안됀다고, 안돼, 안돼, 씨발, 안.. ㄷ.. 으억."


 민석은 휠체어에 앉혀져 방으로 끌려갔다.


좀 진부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