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느닷없는 추격의 시간.



무당 여인은 잠시 달리더니 발랑 드러누웠다.



"아유! 다리 저려!"



임신한 몸으로 뛰는 건 버겁겠지.


체면도 없이 맨땅에 누운 무당 여인의 배가 유독 도드라졌다.



"꼭 잡아야 하오?"


"그래! 그러니 빨리 달리거라!"


"실례하겠소."



앞서 달리는 나리에게서 댕기를 슬쩍.


나리의 머리카락이 풀렸다.


어쩐지 젖비린내가 났다.



"뭐하는 짓이더냐?"


"보고나 있으시오."



댕기의 한쪽 끝을 잡고 다른 한쪽 끝을 내던졌다.



"변해라!"



그러자 댕기가 길고 튼튼한 밧줄이 되었다.


밧줄은 추적 대상에게 날아가 대상을 옭아맸다.



"으럇."



밧줄의 한쪽, 내가 쥔 쪽을 잡아당겼다.


파란 머리 여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왐마. 이게 이 뭐다냐!"


"잘했구나, 아주 잘했어!" 



나리는 기뻐했다.



"이 노옴! 어찌 어르신 하는 말을 듣고 외려 달아나느냐!"



어르신?


머리를 푼 적발 꼬맹이가 성을 냈다.


어째 나리는 만날 성만 내는 것 같담.



"뭐시여 이게. 도술이여?

일전에 번개맨치로?"


"도술이오.

번개는 사정이 다르고."


"어매 시상에, 나 잡갔다고 도사를 둘이나 고용을 혀?

앵간이 할 짓들이 없었구만."



도주를 실패했다고 도발로 넘어간 건가?


나리는 푸른 머리 여인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이실직고하거라. 여기 적힌 게 네놈 이름이 맞지?"



나리가 종이 한장을 꺼내서 그녀의 총총한 푸른 눈앞에 흔들었다.


칙서와는 다른 종이였다.


그녀의 앉은 키가 나리의 선 키와 비슷하니, 제3 자 입장에선 하잘 것 없는 으름장이었다.


'하아' 라며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기여. 내 이름이 '김 치찌개' 여.

김해김씨 녹사공파, 수로 58대 손.

인자 굽던가 삶던가 맘대로 혀!"



아니 사람 이름이 어떻게 '김 치찌개' .


이 동네 유행 같은 건가?



"'굽던 삶던' 이랬지? 내 일 좀 돕거라.

죽여야 할 요괴가 있으니."


"요괴? 날 잡아가는 게 아녀?"


"내가 포졸도 아닌데 왜 네놈을 잡아가느냐."


"그라믄 요괴 땜시로 왔단 말여?

어디, 한양서부터?"


"어명이니라."



아이고! 익숙한 오해인데.


뜨끔해하는 거 보니 쟤도 약이라도 팔았나?


까닭 없이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런 거였으믄 그런 거라고 말을 혔어야지. 혼자 괜스레 전전긍긍혔구만."


"말하기도 전에 도망갔잖소."


"이쪽은 내가 손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도사이니라.

이 친구랑 무당이랑 나로, 지금까진 세명이 다녔느니라."


"무당은 하늘로 날아가부렀소? 혼자만 안 보이는디."


"힘들다고 길에 엎어졌소."


"아아, 그 괴물?"


"해서 도울 테냐, 말테냐?

긴 여정이 될 수도 있는데."



하라고 강권해놓고서 양심적으로 한번은 다시 물어보는구나.


나리는 참 사소한 곳에서 양심적이었다.


이 마을 원님이 보면 새삼 억울해할 양심이었다.



"하갔소. 어채피 요괴 퇴치래도 우리 모시리에 있는 놈 아니여?"


"모시리?"


"한양 알덜은 이래 말하믄 모르는가? 마을 말여 마을."


"그렇다고만 보기 뭐하고... 다른 요괴가 있다면 더 멀리 갈 수도 있느니라."


"뭐시여? 그라믄 됐소. 나는 안 혀. 안 가."



이런.


저항인가.



"안 간다고?"


"딴 사람 알아보소. 내는 엄니랑 막내 돌봐야 하니께."



나리가 칙서를 꺼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협력자가 있으면 3년간 세금 면제는 기본에, 큰 상을 준다고 하셨느니라."


"면세? 나는 그런 얘기 못 들었소!"


"자넨 약팔이가 세금 면제된대도 의미가 있겠나.

농사꾼도 아니고."


"하긴 그야 그렇... 약팔이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 했잖소!"


"상은 뭔 놈의 상 말여."


"청에 따라 다르겠지만

땅이나 벼슬을 내려줄까도 염두에 두신다 하셨느니라."



벼슬까지 줄 수 있다고?



"실세 없는 벼슬이지만 어디 가서 양반 소린 들을 수 있지."



이 코인, 타길 잘했다...!



"그, 그려? 그라믄 나도 쬐끔 마음이 동하는디."


"들어오면 네놈의 요 몇년간 행적에 대해서도 눈 감아주겠다 하셨느니라."


"요 몇년... 시방 고걸 댁이 우째 알았소?"


"그야 주상께서 비밀리에 일러주셨는 걸."


"으으으...."


"총도 총이고.

산포수 흉내를 낼 거면 조총을 들고 다녔어야지 않겠느냐."



'눈으로 보고 조총인지 아닌지 감별하는 미친 놈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 라는 내용으로 벽안의 여인이 꿍얼거렸다.


따라가지 못하겠어 나리에게 물었다.



"요 몇년이 어쨌단 게요?

도둑질이라도 했소?"


"빗대자면 탈영을 한 게니라.

이 놈 착호갑사거든."



나리가 총을 가리켰다.



"유심히 보면 조총이랑은 조금 다르잖느냐?

천보총이란 것이니라."


"나리, 천보총은 훨씬 크지 않소?

소문으로 그렇게 들었는데, 이건 길쭉하긴 해도 가볍고 작잖소."


"개량형이니라.

선왕께서 분부해 만든 건데 아직 많지는 않지.

시범적으로 갑사들한테만 몇개 나눠줬다 알고 있느니라."


"그럼 이 파란 머리 여인이 갑사였다, 이 말이오?"


"그렇대도. 원."



갑옷도 안 입었는데?


갑사의 갑은 갑옷 갑甲 아니었어?



"아무리 착호갑사래도 그렇게 긴 시간 지방에 잠적하면 아니 되지.

아무런 보고도 없이."


"그라믄 내 다 까발리갔소?

가스나 돼부러서 쪽팔려가 못 나가긌다고?"



아하.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착호갑사였던 '김 치찌개' 가

방금 봤던 그... 딸 같은 아들래미네 집안의 둘째고,

어느날 여자가 된 탓에 고향에 은둔을 해버렸다.


고향에선 산포수 흉내를 내며

갑사 시절 받았던 무기를 사용해 끼니를 벌었다.


조정에서 딱히 신경써서 찾진 않았지만

지방에 이런 실력자가 잠적하고 있단 걸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서

마침 이 마을로 올 일이 있던 어사 나리가

이 자의 손을 빌리는 걸로 하기로 했다.


절차상 귀찮기도 했을 테고,

사고로 인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도 판단하여,

협력 조건 중 하나로 탈영 면죄를 내걸어주었다.


....

어렵군.


총잡이 여인은 쉽게 포상에 굴복하였다.



"협력하갔소.

그 포상이란 놈을 하나 빠짐 없이 기억할 텡께

난중에 두고 보소."


"요괴말인데, 네놈도 이 마을에 몇년 지냈으면 뭔가 들은 소문이 없느냐?"


"여자만 골라묵는단 요괴말여?"



얘는 왜 자꾸 반말이랑 존댓말을 왔다갔다한담.


한마디 하려다 나리를 보고 참았다.


그래, 나도 파티장이 나리면 반말하지.


지금도 반말하고 있으니.



"남자를 여자로 변화시키는 요괴말이니라.

네놈 모에게 들으니, 그게 요괴의 짓이라던데."


"둘이가 똑같은 요괴여."



벽안 여인이 이야기해주었다.


요괴는 동굴이나 그 근처에 사는 걸로 추정 중이다.


밤에 나와선 남자를 여자로 바꿔왔다.


마을 내 대부분의 남자가 여자로 변한 지금은, 마을의 여자들을 동굴로 끌고 가는 듯 하다.


낮에 찾아가면 인근에선 뼈만 나오니, 아마 먹힌 게 틀림없다.



"매일 밤 그런단 말이냐?

허어, 마을 사람들이 전멸하지 않은 게 용하구나."


"매일은 아니고 달에 한번이래요.

마침 슬슬 주기라고 하고요."



온화한 목소리에 자애로운 말씨.


누군고 하니 무당 여인이었다.



"어서 오시오. 다리저림은 다 나았소?"


"어디서 들었느냐? 그 얘기를."


"끄으으음, 이 여자 또 번개 쏘는 거 아녀?"


"이젠 괜찮아요.

시장에서 듣고 왔죠.

그럴 일 없어요. 그땐 실수였다고요."



나리와 나와 총잡이의 질문에 무당 여인이 한번에 대답하였다.


참 편리한 재주도 다 있다.



"시장엔 왜?"


"그, 그게... 갑자기 국수가 너무 당겨서요."



무당 여인이 볼을 붉혔다.



"제, 제가 아니고 아기가!

아기가! 먹고 싶어했다고요!

저 그렇게 식탐 부리는 사람 아니에요!"


"결국 그 동굴의 요괴를 퇴치하긴 해야 한단 게구나."


"그외에 다른 정보는 더 없소?

요괴가 뭐에 약하다거나 하는."


"요괴는 아니고

마을에서 최초로 여자가 되었다는 '김 치국' 에 관한 정보만 있어요."



이미 TS가 역병에서 기인한게 아닌, 요괴에서 기인한 거란 걸 알아버렸다.


최초 피해자는 더는 큰 의미가 없을 거 같은데....


어째선지 곁에 있던 총잡이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선은 읊어보시오."


"본래 몸이 건장하던 장정이었다고 해요.

옆 마을을 갔다와서 여자가 됐는데, 이때 머리색 일부가 백색이었다네요."


"그건 진작 들었던 사실 아니오."


"그후 마을에 있던 소녀 하나를 꾀어 동굴로 끌고 갔다고 해요."


"불순함이 엿보이는 꾐이로구나."



'아조씨랑 비밀친구할래' 잖아. 그거.



"그후는 어떻게 됐소?"


"소녀는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돌아왔다고 해요.

내용을 물으려 해도 말을 않고."



꽤나 사디스트스러운 비밀친구였나보네.


범죄잖아. 그거.



"'김 치국' 본인은?"


"여기까지가 마지막 목격정보라는데요.

소녀에게 손을 대려다 요괴한테 먹힌 것 아니냐고들 추측하더라고요."


"그 소녀의 집은 어디더냐.

생환자라면 요괴를 직접 봤겠지."


"운이 좋으면 요괴의 약점 따윌 알아챘을 수도 있겠구려."


"요 길로 쭈욱 가믄 있어야."



여인이 뚱하니 서 있다가 한마디하였다.


여인의 푸른 눈이 특정하는 방향을 보니, 과연 작은 초가가 있었다.


마을에서 봤던 초가 중 제일 작았다.



"불면 날아가겠구나."



초가의 앞에 서서 나리가 감탄하였다.


과장하기는.



"해도 져가니 여기서 밥을 얻어먹자구나."



나리가 말했다.


거지 다 됐군.



"사례만 하면 불만도 없겠지."



다행이었다.


거지는 거지여도 돈 있는 거지였다.


상위 1퍼센트 정도의 거지가 아닐까?



"새삼 자긍심이 솟는구려."


"응?"


"아무것도 아니오."



*



"요괴의 약점이요. 뭐 아는 거 없으세요?"



초가에는 피해자였다는 어린 딸아이가 있었다.


... 설마 이번엔 딸 맞겠지.


무당 여인이 대표로 물었다.


마당을 보며 앉아있던 아이가 도리질을 쳤다.



"알려주면 안 되겠느냐?"



더 거센 도리질만 돌아왔다.



"매운 맛을 봐야 실토하겠느냐?"



나리의 장난기가 또 도졌다.


방해되는고로, 나리는 집주인인 아이 부모에게 인사나 하고 있으라 전했다.


벽안 여인은 애들이 싫은 건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이러면 나랑 무당 여인 밖에 없군.


무당 여인이 애를 끌어안았다.



"말해주세요. 저흰 그 요괴를 퇴치하려는 거니까."



안는대도 무당 여인의 부푼 배 때문에

암벽 위에 널려 말려지는 세탁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이가 너무 깡마른 체구인 탓도 있었다.


아이가 빤히 총잡이 여인을 보았다.


총잡이는 입을 씰룩거리다가 힘겹게 뱉었다.



"... 미안타."



불쾌한 과거를 구태여 건드려서 미안하단 뜻일까.


아이가 또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아이가 나뭇가지로 뭐라 땅에 글자를 적었다.



[날개요. 날개가 약할 거에요.]



웬 필담?


머리를 갸웃.


아이가 다시금 나뭇가지를 움직였다.



[전 말 못해요.]



벙어리로구나.


마침 멀찍이 집주인이 훌쩍거리는 게 들렸다.


마저 물었다.



"날개가 있단 것이오?"


[괴조니까요. 한쌍 있어요.

오른 날개의 뿌리 부분이 약해요.]


"더 없소?"


[그외에는....]


"사람 눈엔 빛도 잘 안 드는 동굴에서, 약점도 날개 밖에 없는 괴물과 싸워야 된단 게로군.

어허, 난감하구려."


[동굴은 아니에요. 동굴 근처 숲에 둥지가 있었어요.]



희소식이로군.


아이가 절찬 벌레 씹은 얼굴 중이던 총잡이를 손가락질했다.



[저 분이 김 치국 언니의 동생분이시죠?]


"아니, 저 자는 김 치찌개란 사람... 앗!"



김 치국!

김 치찌개!

삼형제!

첫째는 고인!


어떻게 눈치를 못 챘지?



"이보쇼, 총잡이 양반.

'김 치국' 이 당신네 형... 아니 오빠, 아니 언니... 아니 누나? 맞소?"


"헛, 참. 말 한번 겁나게 꼬여부렀구만. 기여. 내 형이여."



그러니까 미수로 끝났다지만

가해자 동생과 피해자가 조우한 건가.


심란하겠군.


그래서 그리 뚱했나. 총잡이 양반은.



[맞군요. 김 치국 언니네 동생분. 설마했는데.]



아이는 쓴 낯을 지었다.


의아하게도 고통스럽다는 감정보단 미안함의 감정이 많이 실린 낯빛이었다.


아이가 가슴을 쥐고 머뭇거렸다.



[가져가주세요.]



아이가 곱게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편지였다.



[제가 봤던 건 다 적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만 봐주세요.]



파란 머리 여인은 떨떠름해하면서 받았다.


피해자가 다음으로 쓴 문장은 썩 찜찜한 내용이었다.



[미안해요.

계속 전하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못했어요.]



피해자가 가해자 가족에게 미안한 일이란 게 뭔가?


무당 여인도 나도, 심지어 총잡이 여인조차도 까닭을 모른 채,

멍하니 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


백업이고, 원본은 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