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풍경이 달라졌다.

처음 보는 자명종, 평소 쓰던 최신형 휴대폰이 아닌 액정 깨진 스마트폰, 퀴퀴한 냄새가나는 좁디 좁은 원룸.

모두 처음 보는 것들 뿐이다.

 

“헐. X발.”

 

하지만 방구석의 유일한 작은 창문 사이로 교복을 입은 여자가 드래곤을 타고 유유히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꿈이 아니라면…!

 

“빙의 됐다. X발.”

 

불길한 예측이 맞아떨어진 듯 내 시야에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지독한 사랑뿐인 얀데레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에서 살아남으세요!>

 

실패 시 : 완전한 죽음

성공 시 : 원래 세계로의 무사귀환!♡

 

“니미…. 누굴 놀리나….”

 

씁쓸한 욕이 허무하게 튀어나왔다….

 

 

 

*******

 

 

 

<지독한 사랑뿐인 얀데레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얀데레 소설은 599화에서 달랑 1화를 남겨두고 완결예정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놀라고 전 세계가 경악한 완벽한 소설이다!

 

당당한 포부를 가지고 기나긴 습작 기간을 거쳐 이제 정식연재할 생각이었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내 재능을 너무 시샘했나.’

 

마지막 화를 쓰다가 갑자기 블랙아웃이 되더니 지금은 입학식에서 지각한 유일한 학생이 되어버렸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언 몇 년이 지났는데 이제 고등학교 입학이라니… 새롭긴 새롭네.’

 

지랄 맞은 빙의 때문에 잠이 덜 깬건지 머리가 아프고 하품이 나오려 한다.

그렇게 강당 맨 뒷좌석에서 하품을 하면서 내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 김진우

직업 : 미정

능력치 : 체력 : 1 힘 : 1 민첩 : 기 : 1 마나 : 1 마력 : 1 정신력 : 1 행운 : 1 

스킬 : 없음

고유 스킬 : 설정안 Lv.1

 

<설정안>

 

대상 캐릭의 설정을 엿볼 수 있다.

 

“노답이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퇴학당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만든 캐릭은 맞는 것 같다.”

 

하드한 얀데레를 목표로 했기에 학원 생활을 하면서 생사가 오고 갈 수도 있다는 설정이 내 소설의 기본 골자다.

그렇기에 여기 들어온 백 명이 훌쩍 넘는 신입생들은 기본적으로 각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가만히 있다간 그냥 퇴학당하겠는데…?”

 

학원은 거대한 도시다.

도시는 이능 학원을 위해 지어졌고 학생들에겐 많은 특혜가 주어진다.(이것도 등급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선택받은 학생들인 만큼 그 특혜를 포기하려면 이 도시의 어마어마한 물가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학원 밖은 위험해. 깡패들이랑 부랑자들이 넘친다는 설정이니깐. 적어도 힘을 키울려면 이곳 학원에서 버텨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쯤.

터벅터벅.

신입생 대표이자 이번 기수의 수석 아니, 전 기수를 통틀어 제일의 재능으로 평가받는 이세은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찰랑이며 강당으로 올라갔다.

 

“와…! 지,진짜 이쁘다.”

“나 이 학원에 입학하길 잘한 것 같아.”

“나도나도. 흑흑!”

 

학원이 입학하기 전에도 이 도시의 장안의 화제였던 이세은은 이미 팬클럽이 형성됐을 정도로 누구에게나 주목받는 기대주.

내가 만든 반응이지만 실제로 더 웅성거리고 다른 말들도 새롭게 들려오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렇게 모두 이세은을 향한 동경으로 웅성거리고 있을 때.

나는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주인공인 김세현은 안 보이는 거야? 차석이니깐 뒤에서 박수셔틀 해야 하는데?’

 

올라오겠지. 올라오겠지. 주문 외우듯 간절히 기다렸지만 올라오지 않았다.

강당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던 아찔한 타이츠의 갈색 곱슬머리인 젊은 교장 최정은이 말했다.

 

“알다시피 이번 기수에서 차석은 없습니다. 수석과 2등 간의 차이가 워낙 벌어져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세은양. 신입생 대표 인사를.”

“네!”

 

이세은이 당차게 외치며 단상에 스려고 할 때!

다다다다다다다다.

쾅!

 

“죄,죄송합니다!”

 

더벅 머리를 한 여학생이 강당문을 세차게 열며 무릎을 잡고 호흡을 골랐다.

나 말고 또 지각하는 애가 있었다고?

누군데?

이름표를 보자 얼빠진 말이 튀어 나왔다.

 

“헐…. 김세현이다.”

 

근데 왜 치마를 입고 있는 거야?

헐.

헐….

말, 말도 안 돼.

너 TS 된 거야!?

 

“후우. 늦잠 자버렸네. 옆 자리 앉아도 되지?”

“어? 으응.”

 

김세현이 향긋한 살내음을 풍겨졌다.

여자가 된 주인공이라…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

 

 

 

입학식이 끝나고 잠깐의 여유 시간.

나는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김세현이 여자가 됐을 줄이야. 원래라면 여기 얀데레 히로인들에게 잔뜩 사랑받아야 할 운명인데.”

나에게 살아남으라는 퀘스트가 떴을 때.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다행스럽다고 생각한 부분은 있었다.

그래도 남자 주인공이 따로 있으니깐. 얀데레녀들만 내가 잘 피해만 다니면 그 부분은 안다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후 스토리도 바뀌겠는데…. 일단 성별이 바뀐 거 말고 또 바뀐 게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

 

그렇게 다시 김세현을 찾아다녔다.

김세현은 자판기를 발로 쾅쾅 차고 있었다.

 

“내 돈! 내 돈 내놔! 돈만 먹고 음료수를 안 주면 어떻게 해!”

‘흙수저인 설정은 여전하구나. 다행이다.’

 

설정이 다 바뀌어버리면 나도 대응하기가 곤란하다.

 

나는 옆 자판기에서 동전을 넣고 녹차를 뽑아 김세현에게 건넸다.

 

“이거 마시려고 했지? 너 줄게.”

“어? 고,고마워. 근데 녹차 마시려고 한 건 어떻게 안 거야?”

“……큼. 녹차를 누르는 손을 내가 봐,봤거든. 그거 고장난 거니깐 당분간 쓰지마.”

“아. 응. 알았어. 너도 나랑 같은 신입생인데 되게 여유 있어 보여서 되게 좋다. 후후.”

 

배시시 웃는 김세현.

나에게 호의를 가진 미소녀의 웃음은 눈앞에서 처음 봤기 때문에 심장이 순간 벌렁벌렁 뛰었다.

 

“……잠깐 벤치에 앉아서 대화할래? 어때?”

“응! 좋아!”

 

그렇게 내가 마실 음료수도 뽑고 아까 앉았던 벤치에 앉았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눈이 조금씩 우리에게 닿았다.

입학 첫 날에 여자와 남자가 앉아있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인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그냥 평범하디 평범한 인상일 뿐이니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한 거겠지.

나는 두손 모아 녹차를 마시는 김세현을 보며 <설정안>을 발동시켰다.

 

<김세현>

 

성별이 여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실전에 매우 약한 설정으로 바뀌었습니다.

??????

??????

……

설정안의 레벨이 낮아 더 열람할 수 없습니다.(현재 3%)

 

“…….”

 

모든 설정을 다 알고 있는 내게 왜 이런 고유 스킬이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이해가 간다.

소설이 바뀌었다.

아마 내 생각으론 김세현뿐만은 아닐 것이다.

 

‘리메이크가 됐다고? 완벽한 소설이었잖아! 내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왜,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거야?”

 

김세현이 짐짓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아냐. 혹시나 해서 묻는데 혹시 입학 시험 때 긴장 많이 했어?”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직감이야. 왜냐하면 너 정도 되는 재능이 차석도 아니라니 말도 안되잖아.”

 

김세현은 전형적인 주인공이다.

그 재능은 훗날 꽃피우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자 김세현은 싱긋 웃었다.

 

“후후. 칭찬은 나쁘지 않은 걸? 하지만 난 실수투성이야. 이상하게 시험이나 대회 때 손이 오들오들 떨려. 필기 시험때도 한 칸 밀려쓴 걸 끝까지 몰랐지 뭐야? 그래서 아마 뒤에서 2등으로 입학한 걸로 아는데…. 아, 꼴등이 누구였더라? 김진우?”

“…나야.”

 

아무리 퇴학당할 운명의 캐릭이어도 필기를 밀려쓴 애한테 밀려 꼴등이라니.

진짜 내가 답도 없게 만들었구나. 진우야….

 

“아! 그럼 이 학원의 뒤에서 수석과 차석이 이렇게 우연히 만난 거네! 후후후. 반가워. 난 김세현이라 해.”

“응. 난 김진우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렇게 보드라운 손을 서로 맞잡으며 나는 딴 생각을 했다.

 

‘슬슬 실력지상주의의 회장에게 찍힐 타이밍인데…….’

 

나는 학생회실에서 일어날 일을 지금쯤 떠올렸다.

 

 

 

********

 

 

 

“이번 학기에서 매우 우수한 인재들이 많습니다. 특히…”

“알고 있어요. 이세은은 차기 회장으로 낙점해두고 있으니깐요.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네요.”

 

부회장 김단우가 무서운 듯 몸을 짐짓 떨었다.

회장인 임서윤이 무슨 말을 할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긴 흑발을 뒤로 넘기며 리스트의 맨 뒤에 있는 남자를 지목했다.

 

“김진우. 이런 하등생물이 왜 우리 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거죠?”

“…필기도, 실기도 모두 엉망이지만 이상하게 시스템에 오류가 난 건지 입학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장 퇴학시키세요.”

 

임서윤은 혐오에 가득찬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

 

“아니. 정정하죠. 예의와 명분을 갖추고 다음 중간 고사 때부터 하위 3%는 퇴학시키겠습니다. 아셨죠? 부회장.”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다음 날 게시판에서는 갑작스러운 규칙 제정에 신입생에겐 너무 가혹하다는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학생회의 회장은 교장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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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소재가 번뜩 떠올라서 한 편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