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아

스텔라

루시엘






"하아...."

나는 현재 아무도 없는 한적한 장소에 와있었다.

그 이유는 '휴식'이라는 간단 명료한 목적.

그야... 어제 단 한숨도 수면을 취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점심 시간, 이리아는 점심을 먹으러 갔고 나는 허기 보다도 간절한 수면욕 탓에 식당이 아닌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으차... ㅡ"

나는 여러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버드나무에 등을 기대는데.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은 게임 속에서도 등장하는 평온의 장소,

하늘로 뻗은 버드나무와 아래로 자란 푹신한 풀들에 그 특유의 황홀하고도 몽환적인 매력이 특징인 곳이었다.

원작 내에 구현된 배경 음악도 차분하고 부드러워서 몇몇 유저들은 힐링을 찾아 이 곳에 방문하기도 한다.

"하암.."

그래서 나도 점심 대신 조금이라도 푹 자고 싶어, 이 나무 아래를 찾은 것인데.


"으으...."

하품만 하염 없이 푹푹 쉬어대며 무거워진 눈꺼풀을 드디어 감는다.

"윽..."

그런데 뭐랄까...


"으음...."

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은 ㅡ


"........."

분명 졸리고 피곤에 찌들어 있는데.. 막상 눈을 붙일려 하니 이상하리만큼 의식이 뚜렷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신은 피로한데 몸의 활력은 남아 있다고 해야 할지..

"으음..."

가끔씩 있는 현상이긴 한데..

정신을 차려야 할 땐 졸리고 막상 쉬려고 할 땐 집중이 잘 되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들은 언제 느껴도 불쾌했다.


"으윽....!"

결국 도저히 잘 수 없는 기분에 괜한 짜증을 섞으며 눈을 번쩍 뜬다.

"하아, 진짜.."

지친 마음에 모처럼 낮잠이나 잘까 생각하고 홀로 한적한 곳에 왔것만... 이래서야 원, 말짱 도루묵이네.


"...."

결국 자는건 포기하고 마음이라도 추스리고 일어나려던 그 때 ㅡ


"어머, 아논님?"

귓가에 드리우는 익숙한 목소리,

"스텔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우연이라는듯 신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게임 속의 주인공이 있었다.

"아논님... 여긴 무슨 일로."

나를 발견한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오는데.

"너야 말로 여기에는 어떻게.."

"아~ 저는 가끔씩 마음을 다스리러 와요, 그야 인적도 드물고 무엇보다 올곱게 솟은 이 나무와 풀잎들이 평화로운 기분을 주거든요."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목적으로 이 곳을 찾은듯 보였다.

"그래..? 나는 낮잠을 좀 자고 싶어서..."

나도 이 곳을 방문한 이유를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라,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그러자 스텔라는 내 얼굴을 스윽 살피더니, 눈가엔 걱정스러운 감정들이 들이웠고

"응... 세세하게 말하긴 곤란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어젯 밤에 잠을 못잤거든..."

"네엣?!"

이어지는 솔직한 이유에 큰 충격을 받은듯 쩍 벌어진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

이게 그렇게도 기겁할 일인가..?

"그렇다면..."

그러더니 스텔라는 이내 무언갈 결심한듯한 표정을 짓곤,

"아논님!"

정좌 자세로 고쳐 앉으며 자신의 무릎 부문을 탁탁 두드리더니,

"제가 무릎 베게 해드릴게요! 자, 여기서 편히 쉬세요..!"

이어서 황당한 말을 해버리고 만다.


"...엉?"

그 말이 순간 얼빠진 소리를 내뱉게 된다.


"아냐 아냐, 그 정돈 아니라서...."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피곤해 보인다며 똑같은 제안을 이리아에게 받은적이 있긴 있었다.

당연히 그런 권유는 단칼에 거절했었고,

"마음만 받을 테니까.. 그렇게 신경쓰지 마."

스텔라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공손히 거절하는데.

"하지만...! 아논님이 너무 힘겨워 보이시는 걸요?!"

그녀는 끈질기게도 자신의 무릎을 계속해서 내게 권해왔다.

"괜찮대도? 조금 쉬면 괜찮아."

스텔라 라는 캐릭터 이리도 의욕적이고 집요한 캐릭터 였던가...

"잠깐이면 되요..! 제가 아논님의 피로를 풀어드릴 방법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던와중 솔깃한 단어가 귀에 들어온다.

"..... 정말?"

피로 회복이라...

평소였다면 거들떠도 안봤을 테지만..

"네, 아주 잠깐이면 되요. 전해드린 대로 바로 일어나셔도 상관 없어요.

"....."

현재 너무 지쳐있는 나머지 그녀의 말에 점점 현혹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피로를 회복 할 방법이라...

그것도 아주 잠깐만 협조해 주면 된다 하고..

끝나면 바로 일어나도 상관 없다 하니까....


'.... 괜찮은데..?'

어느센가 나는.. 내 스스로를 합리하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고

"그...그럼.. 잠깐만 실례할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대게 되는데.

"......"

그러자 파도 처럼 밀고 들어오는 부끄러움.

'이거.. 상상이상으로 부끄럽네..."

'지금 우리 둘만있어서 다행이야...'

금방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아진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허나 그런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스텔라는 느긋하게 무언가를 준비해 나갔고


"만물의 생기를 불어 넣는 여신이시여.. 당신의 온기를 이 곳에 내려주소서, 마인드 힐."

이내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영창하더니 따스한 햇살 같은 빛이 손 끝에서 부터 쏟아져 나왔다.


"엇..."

그것과 동시에 정말로 안개가 걷히듯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는 지친 기분들 ㅡ



"저는 신성 마법의 재능이 있어서, 이런 계열로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도움을 드리는게 가능해요!"

아, 생각해보면 미래에 성녀가 될 스텔라는 그런 계열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

"으음.. 고마워 스텔라..."

잊고 있었는데 체감하고 나니 더욱 더 존재의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덕분에 뭔가... 마음이 편하네......"

나는 한껏 편해진 느낌에 스텔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평소에 신세지고 있으니 이 정도 쯤이야!"

'마음도 한껏 풀렸겠다.. 이제 일어나야지.'

한결 나아진 피로에 이제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ㅡ

'어라...'

'몸이 무거워...'

마음의 피로가 한껏 풀려서일까?

'긴장이 풀리니.. 밀어왔던 졸음이.... 막......'

아님 포근해진 마음에 방심해 버린 걸까.


"............"

곧 바로 일어나자는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스텔라의 무릎에 점점 더 의존해가기 시작했고

"........"

이내 저항감을 없애는 말 못할 편안함에, 그만 심연 속으로 의식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





"아.. 아논님...?"

무언가 고요한 이질감에 스텔라는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

하지만 돌아오는건 한껏 편해지고 규칙적인 조용한 숨 소리.

"잠든.. 건가요?"

이내 그녀는 미동도하지 않고 자신의 허벅지에 몸을 맡긴 남자의 머릿결을 어루만진다.

"많이 피곤하셨나보네요..."

남자가 정말로 잠든걸 확인하고 신기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 보는데.

"후훗, 이러니까 무언가 어린애 같기도 하고 귀엽네요...!"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그에겐 들리지 않을 감미로운 목소리를 속인다.

"부디.. 잠깐이지만 저에게 마음껏 기대주세요..!"

그리곤 자연스러운 미소를 피워내며 남자의 얼굴에 계속해서 시선을 빼앗기는데.


그러다 ㅡ


"그...그나저나..."

그의 얼굴을 한 참이나 들여다 보는 것도 잠시,

"아.. 아논님은 지금 깊게 잠이 드셨고.. 지금 이 곳엔 나 밖에 없으니까.."

스텔라의 얼굴엔 점점 붉은 열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ㅡ

"그, 그럼!! 제... 제 마음대로 해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

이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처럼 온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어지고 만다.


"아.. 아논..님..?"

그녀가 이렇게도 흥분한 이유는 스텔라 본인만이 알것이겠지.


허나 감히 예상해 본 다면....

"저.. 정말 잠드셨죠..? 그쵸....?"

아마 발칙한 상상들에 머릿 속이 꽃밭이 되어버려서가 아닐까 싶었다.

"장난이면 그만두시고... 대답 없으시면 저.. 여러 몹쓸짓을 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혹시나 모르는 마음에 의미 없는 경고라도 전했지만

"으음......"

당연하게도 그 경고는 남자에게 닿을리 없었다.

"저.. 전 말했다고요? 그럼..."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랬던가?

"....."

자기 스스로 그렇게 단정지어버린 여자는 점점 고개를 숙인다.

"끄읏..."

혹시나 자신의 머리카락 때문에 수면이 방해가 되진 않을까.


"아논님..."

혹은 자신의 목소리 탓에 흔치 않는 순간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진 않을까.


"조.. 조...!"

그녀는 남자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그가 들어주웠으면 하는 아이러니한 감정 속에 놓여있었다.

"좋아해요.....!"

그렇게.. 자신의 품고 있던 마음을 전하는데.


화악 ㅡ

"!!"

그 직후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 마냥 얼굴이 더욱 화끈해지며

"나 몰라...! 진짜 말해버렸어!"

누구에게도 전해지질 않을 혼잣말을 주구장창 늘어놓기 시작한다.

"어쩜 좋아?! 아논님 들으셨을라나? 으으.. 자고 있으니 분명 못 들으셨겠죠?"

"그런데.. 그러면 제 진심이 전해지지 못했다는건데, 그건 조금.."

"하..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들어버리 셨다면.. 저...!"

화끈 ㅡ

"...!"

"아아, 몰라요..! 나 이제 시집 못가...!"


"그래도 뭘까나.. 제 진심을 전해서 기쁘고 감동작이고 또.. 읏....."

그렇게 한참이나 혼잣말을 떠들어대던와중.


"하암..."

"헙 ㅡ?!"

뒤척거리며 하품질을 하는 아논의 잠꼬대에 순식간에 입을 틀어막고 만다.



"........."

한 순간에 다시 조용해진 장소.



두근 두근 두근 ㅡ

"아아.."

주변이 고요해지자, 스텔라는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귀가 먹먹해 진다.

"호.. 혹시 그럼.... 더 한 짓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다가도 더욱 더 과감해진 스텔라는 세상 모르고 고히 잠든 '피식자'를 바라보는데.

"예.. 예를 들면... 키, 키스라던가.."

옛날의 자신과 비교하면 말도 안되는 대범함을 내보였다.

"그.. 그래... 지금이라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 그치만 그건 정말 ㅡ"

그녀는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겉으론 곤란한 척 하지만은

"허나 아논님과의 입맞춤..."

몸은 본능에 충실하여, 솔직하게 움직였다.


"우.. 우우....."

다시금 가까워지는 두 얼굴,

이번엔 서로의 입술이 과감하게 좁혀진다.


'앞으로 조금...'

그녀의 숨결이 아논의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아논님과 이렇게 ㅡ'


그렇게.. 남몰래 금단의 선을 넘으려는 그 순간 ㅡ


"으으.. 역시 무리잇!!"


결국 마지막 이성에 브레이크 걸려, 완벽 범죄는 산산히 무상되고 만다.


"애, 애초에 이런건 상호간의 합의가 없으면 무의미하니까..."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에요."


그리하여 스텔라는 가까스로 스스로를 말릴 수 있었지만...


"그, 그렇담 이런건 어떨가요 ㅡ"

그 이후에도 한참을 망상 속에 허우적대다가 ㅡ








"하와와......."

결국 뇌에 과부하가 오게 되어 실이 끊긴 인형 마냥 축 늘어지고 말았다.











◇◇◇





"으윽.. 차~ 개운하다."

오후에는 스텔라의 도움으로 기대 이상의 휴식을 만끽 할 수 있었다.

"미안해, 스텔라. 내가 잠이 드는 바람에."

"뭣 하면 깨우지 그랬어?"

그녀의 마법도 마법이겠지만은 어떨결에 그녀의 무릎 위에서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짧으면서도 긴 안식을 느낄 수 있었다.

"네엣?!"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릎 베게인 체로 잠에 둘다니...


솔직히 둘만 있었던 장소라 너무너무나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그나저나...

"응? 뭐가 감사하다는건데?"

"..?!! 아.. 앗... 그.. 그러니까 제 말은!! 딱히 신경쓰지 말라는 거였어요!"

이 녀석... 무언가 상태가 이상하다.

"끄읏.."

필요 이상으로 반응이 예민하다고 해야 할지.

"으으...."

아까부터 나를 훔쳐 보듯 휠끔휠끔 보는 것도 모자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두 뺨이 붉게 물들여진다.


'점심에 뭐 잘 못 먹었나?'

그래도 큰 이상은 없어보여서 넘기려던 순간..


"와이~ 아논~!"

복도 끝에서부터 기운 찬 목서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아.."

그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리아,

뭔가 본능적인 느낌으론...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에? 뭐야.. 옆에는 스텔라?"

그럼 그렇지...

"왜 둘이 같이 있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옆의 존재를 확인하자 마자 곧 바로 잔뜩 화난 어투로 뺨에 불만을 불어넣는다.


"아, 지나가다 만나서.."

나는 그럴듯한 변명을 내놓았고,

"어엇.. 저, 전..!"

스텔라 역시도 얼굴을 잔뜩 붉히며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흐음~"

아직도 빨게진 스텔라의 얼굴을 확인한 이리아는..

"아논, 잠깐 따라와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 마냥 말을 준비하는 스텔라를 무시하고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


"잠깐만?"

저항하다가도 결국 얌전히 이리아를 따라가게 되며 스텔라와는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는데.



"잠깐 여기 서봐."

이리아가 내 팔짱을 억지로 끌고 온 곳은 인적이 드문 복도였다.


"실례 좀 할게."

"잠깐, 이리 ㅡ?!"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더니 대뜸 나를 벽으로 몰아세우곤 품에 안겨든다.

"스으.... ㅡ"

일말의 망설인도 없이 과감하게 가슴에 얼굴을 파묻곤... 곧 바로 크게 호흡울 시작하는 이리아.


"역시..."

이내 안 좋은 예감이 적중했다는듯 고약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친다.

"아논, 스텔라와 무슨 일이 있었어?"

그리곤 나를 심문하겠다는 것 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째려보는데.


"딱히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해버린다.

아니, 따지고보면 딱히 거짓말도 아니잖아?

스텔라의 무릎 위에서 잠들긴 했는데... 본인도 괜찮다고 하니 딱히 큰 일도 아니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며 굳게 믿고 나아가는데.


"그래? 하지만 방금 아논에게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났어."

"읏... 싫어."


그녀는 한 쪽 눈섭을 찌푸리며 자신의 몸을 딱 붙혀버린다.

"아논은 모를거야..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여인을 홀리고 다니는지."

그리곤 혼잣말인지 나한테 들으라고 한 소리인진 모르겠으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ㅡ

"그러니 다른 여자 냄새가 나는건 싫어..."

"아무리 내가 다른 여자들의 존재를 인정했었도 이건 절대로 용납 못해..."

"그러니 내 냄새로 덮을 때 까지 잠시 이러고 있어줘."

나를 부둥켜 안고는 좀 처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뭐랄까 이 이상한 분위기는...


"끄읏... 분명 약속했으면서 왜 계속..."

"아논은 정말이지.. 바람둥이야....."


나는 숨이 턱 막히는듯한 상황 속에.. 한 참이나 매달려야만 했다.






◇◇◇




시간이 흘러, 해가 서쪽으로 향하는 오후 수업 시간.

"하아.."

수업 하나가 끝나고, 잠시 숨 돌릴 틈이 찾아왔고

"......"


나는 머리 좀 식힐겸 홀로 복도로 나오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 이리아와 스텔라가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난리를 쳤지만

복잡해진 머릿 속은 혼자만의 시간으로 식혀야 된다고 개인적으론 생각하기에 그 둘을 겨우 말리고 혼자 빠져나오게 되었다.


시각은 대략 오후 2시, 앞으로 한 시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목적 없는 발걸음을 내딛던 그 순간 ㅡ

"이봐, 너."

뒤에서 누군가의 날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루시엘..?"

뒤를 돌아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루시엘.

모두에게 매정한 성격파탄자이자

어렸을 적 성희롱의 트라우마로 남자를 혐오하는 그녀가... 어쩐 일인지 나를 불러세웠다.

"자.. 잠깐.. 시간 좀 될까...?"

원래라면 남자를 거들떠 보지 않던 인물인데...

어째서인지 그녀가 먼저 말을 건내왔다.


"으으..."

하지만... 나는 그런 의외인 행동 보다도....

"무슨 일인데?"

"그...그게...."

"크흣..."

나는 그녀의 분위기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

뭐랄까... 저 애매한 표정은..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진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판단하자면.. 마치 자신이 꺼내려는 말에 치욕스러운 기분을 느끼는듯 했다.


"잠깐.. 서.. 손... 좀.. 빌릴 수 있을까?"

그러더니 갑자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해버리는 루시엘.

"뭐?"

"그....그러니까...!!"

다시 말하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는지.

"너.. ㅅ.. 손 좀... 빌리자고....."

수치스러운 기분에 얼굴이 새빨게 지더니 시선을 회피하면서까지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간다.


"...."

손을 빌리다니...

무언갈 도와달라는 건가?

"... 무슨 말이야, 도움이 필요한 거야?"

"으윽...! 그러니까 ㅡ!"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대차게 틀려 버린 건지.

"이렇게 ㅡ!"

그녀는 말 보다는 행동으로, 내가 수락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내 손 낚아채고 만다.


"손을 좀 잡아보자고..!"

이미 그렇게 해버리고선 뭘 세삼 묻는건지...

뭔가 오늘따라 메인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이상했다.


그런데...


"....헛..!"

그녀만 무언가를 느꼈는지, 이내 갑자기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말도 안돼... 어째서...."

마치 있을 순 없는 일을 목격한듯 경악에 찬 목소리를 내지른다.


"....?!"

그리곤...

"ㅁ.. 뭣..."

아까보다도 더욱 더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루시엘의 뺨.

"으아앗?!"

그러더니 이내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급하게 뿌리친다.

".....!"

손을 놓은 이후에도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ㄱ.. 그..! 착각하지마..!"


그러더니 이내 자기 혼자 멋대로 행동해 놓곤 험한 말은 나에게로 쏟아낸다.


"너.. 너가 좋다기보단... 그... 뭔가 확인하고 싶은에 있었으니까...!"


난 분명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럼 난.. 가.. 갈거야..!!"

그런데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래놓고 도망치듯 떠나버리다니..


".....?"

뭔가 내가 알던 험악한 분위기의 루시엘이 아니어서.. 되리어 위화감이 들 지경이었다. 


"뭐야 도대체..."




◇◇◇






나.. 뭐하는 짓 이야...

"허어.."

분명 남자는 나의 적인데...

"허어 ㅡ 허어.."

보는 사람들 마다 나를 노리려는 짐승들 밖에 없는데.

"하아.... 하아......"

어째서 먼저 다가갔던 거지?







"후우..."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도 없는 장소,

나도 모르게 전력질주로 도망친 건가...

아니.. 애초에 왜 도망친거지?

일단... 그보다도 ㅡ

"........"


나는 무릎에 손을 짚으며 거친 숨을 토해내다가도... 그 남자와 잡았던 손은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

아논 이라는 남자와 접촉했던 손을 자세히 들여다도 보고... 꼼지락 거리기도 했는데.


"... 어?"

없다.

"말도 안.. ㅡ"

전혀 없어.

그 남자를 향한 거부감이 ㅡ

전에 느꼈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

"...."

도대체 뭘까? 그 남자는...

분명... 그 역겨운 놈에게 당한 이후에는 그 누구라도 남자라는 이유라면 닿을 수 없었는데.

설령.. 만졌다 하더라도 손이 타들어가는 착각과 함께 발작이 일으키게 되는데.

"......"

아 물론... 아까 그에게 보인 행동은 내가 생각해도 발작 같아 보이지만...

그거는... 뭔가 달랐다.


뭐랄까... 부끄러움..?

그것도 단순한 부끄러움과 뭔가 달랐어.

부끄럽지만... 뭔가... 싫진 않았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논의 손을 만졌을 때 ㅡ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를 평온함을..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ㅡ


왜 인지는 몰라...

하지만 확실한건,

그의 손을 만졌을 때.. 쭉 잊고 있었던 평온한 기분이 들게 돼.

잠깐이었지만.. 이대로 라면 오랜 아픔을 지울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도 들고..


설마 이건....



"헛?! ㄴ.. 나..! 무슨 소리를?!"

하지만 어떠한 결과를 예측하려던 찰나, 순식간에 다시 현실을 마주 본다.

"하핫... 그럴리가 없잖아?"

그리곤 억지로 헛웃음을 짜내며 방금의 생각들을 부정하는데.


"그래... 아마 착각일거야.. 예외가 어디있겠어?"


"남자는.. 다 똑같은데.."


하지만


"으읏..."

어째서인지 ㅡ


"...."

그런 생각을 할 수록... 마음은 불편했다.

















그리고 그 날 밤... ㅡ

"......"

계속해서 아른거리는 남자의 얼굴에 줄곧 잠들기 힘들었지만...





".....엇?"

다음날... 개운한 기분과 함께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 말도 안돼...."


분명.. 어제 '불면증' 약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먹지 않았는대도..

설령 먹더라 하더라도 악몽 탓에 단 하루라도 편할 수 없었는데....


"......"


그저.. 단순히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을 뿐 인데 ㅡ


"대체 왜..."


그 날은... 유일하게 악몽을 꾸지 않는 날이 되었다.










이번편은 다른 히로인 분량 좀 챙겼어


루시엘은 츤데레 + 조금 다른 케이스의 의존증으로 이어갈려고


진짜 정신적으로 아논을 대체 할게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레 의지하게 되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