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이세계, 라는 말이 있다. 


한 200년 전으로만 가도 우리가 아는 상식 따위 통하지 않고, 다른 상식과 이념과 종교를 신봉하며 다른 생활양식에 따라 살아간다고. 


과거와 단절된 우리 같은 경우 차라리 영국인이나 서유럽 엘리트와 더 말이 통할 수도 있다지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그쪽도 대중적인 유희가 사형 집행인 별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약 90년 전의 시티 역시 게임이라곤 (도박을 제하면) 십자말풀이가 전부인 이세카이다. 


왜 이세계 전생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전생치트 따위는 (은수저 신분 빼면) 없었고, 부모님도 일찍 여의어 비교적 자유가 보장된 것과 만능 메이드씨가 있는 것 빼면 특별한 점은 없었다. 


영국에 크게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제력이 부여된 미션도 없고 집안의 부가 식민지와 연계된 것도 아니니- 곧 다가올 유럽의 집단적 자살에서 피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신문을 흝어보며 미국런각을 재고, 자극적이고 저질스러운 소설을 보고, 내킬 때 먹고, 내킬 때 자고, 공부는 게을리했다. 


붙여준 가정교사? 


내가 가주라 이 시대 트렌드인 폭력 훈육을 긍정하는 윗사람이 없는데 어찌 매를 들 수 있겠는가. 


성질 못이겨 그만두든 나하고 입을 맞춰 적당히 설렁설렁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교육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나한테는) 귀족 흉내(=교양)이 대부분이지 사업체를 경영한다든가 따로 전문직을 갖는 것과 하등 상관없는 것들 뿐이었기에, 배울 필요도 없는 것들 같았고. 


뭐, 원래 이런 교양을 쌓고 동류들과 친목질하는 게 높으신 분들의 일이 맞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정말 실용적인 교육이긴 하다. 


하지만 곧 콧수염이 머잖아 독일 휘어잡고 유럽을 불태울 것이고, 영국의 중상류층은 또 전쟁터에서 떼죽음을 당할 것이며, 하필 그 즈음이면 나는 징병 연령에 들어간다. 


그러니 방탕한 아싸로 짜져 지내면서 메이드 마망에게 일 처리를 맡기고, 뉴딜이 도전받게 되면서 살인적인 세금이 조금 낮아질 즈음 미국으로 도망치는 게 맞다. 


이것이 나의 도주경로이자 활로이자 인생계획이었다. 


물론 대충 지껄인 헛소리도 일단 수용하고 각종 부동산 자산을 처분해주는 메이드씨 없었으면 이렇게 순조로운 런각을 잡긴 어려웠겠지만, 아무려나. 


일가친지 없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세상물정 모르는 꼬맹이를 여태껏 잘 뒷바라지한 메이드씨를 못믿으면 누굴 믿을까. 


올해 서른 다섯이나 되는데 이 시대에 이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은 건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미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나한테는 그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로 동안인 미인이 나만 바라봐주는 것 같아 다소 저열한 만족감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행복한 일탈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별로 관심 없는 것처럼 해야한다고요?"

"뭐... 너 정도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걔하곤 펜팔 중이라며. 조금 밀어주기도 해야지."


그날도 평소처럼 이제는 친해진 가정교사 형하고 수다나 떨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야 말았다. 


차갑고 싸늘한, 붉고 멍청한 얼굴을 한 가정교사와 대비되는, 만능 노처녀 메이드씨였다. 


"...오늘은 몸이 조금 안좋으신 것 같군요. 돌아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어! ...예에. 약간 몸 상태가 이상하네요. 이거 약국에라도 들려야 하나...."


영국 남자 평균 그 자체인 가정교사는 갑자기 난입한 메이드씨에게 다소 발끈했지만, 술기운과 함께 용기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땅딸막한 편이라 5피트 남짓인 샌님에게 알콜은 용기를 주었지만, 아직 덜 취한 정신은 메이드씨가 6피트의 거인이라는 걸 뒤늦게나마 일깨운 탓이었다. 


그래서 가정교사는 한심하게 휘파람이나 불며 헐레벌떡 나갔고, 공부방에는 거대한 메이드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후우... 겨우 그까짓 것 때문에 처분을 결정하신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탄. 


펜팔 중인 미국 여자한테 홀딱 빠져서 넘어가려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미국 여자들은 정숙하지도 않다, 물정모르는 멍청한 남자들 속이는 여우들은 넘쳐난다... 


그 외에 공부는 제대로 해야지 자신이 유모로서 매를 들어야 정신을 차릴 거냐 등등-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듯 하다 수미상관 기법인지 다시 방탕하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는 한탄으로 끝났다. 


평소에도 잔소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간만에 오랫동안 이런 얘기를 들으니, 솔직히 좀 꼴받았다. 


은수저 고아답게 자유분방하게 커 이 시대 애들처럼 강제로나마 인내심이 길러지지도 않았고, 이 메이드는 유모였기도 해 내게 무척 친숙하기도 했다. 


그래서 딱히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지금 메이드씨가 거슬려하는 것 같은 부분을 찔렀다. 


"응, 맞아. 누구하고는 다르게 엄청 재밌고 예뻐서 결혼하고 싶어. 내 첫사랑이야!"


솔직히, 그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소녀의 풋풋한 아름다움이 있긴 한데 원숙한 메이드씨에 미치진 못했고, 지금 썸에 가깝기는 해도 결혼할 상대인지 친구로 갈지는 애매했다. 


그러나 메이드씨를 도발하고 싶은 반항심이 불쑥 솟았고, 노처녀 메이드씨가 아들같은 녀석의 일탈에 어찌 반응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해서 여자 문제라고 밝혔고, 결혼까지 입에 담아보였다. 


"흠... 뭐, 네. 알겠습니다. 정녕 그러시다면 제가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죠."


결과는 보다시피 이렇게 재미없는 대답이었지만. 


"그래? 그럼 이만..."

"하지만, 도련님께서 학습을 게을리하시는 것은 제 불찰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 그럼 다음에...."

"허니 오늘부터, 제가 직접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인 학습으로 이어졌지만-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데 누굴 탓할까. 


손도 안닿는 곳에 놓여진 책을 꺼내들고 추가 수업을 진행한다고 하니 그러려니 해야지. 


"조금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지만, 도련님의 학업 의욕 고취를 위한 것이니 집중해주십시오."

"그치만, 저 기괴한 제목을 보니 도망치고 싶어지는데...."


아, 이건 아니다.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이거 정신 비틀린 전범국 놈들의 철학책이잖아!


열두 살 꼬맹이는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고 대학생한테도 쌉소리로 들린다고!


"도련님 수준에 맞게, 학업 의욕 증진 목적으로 조금 맛보기만 들어갈 겁니다.... 내내 놀고 계신 도련님이 이걸 완독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그정도로 기대치를 낮출 줄은 몰랐는데."

"호오. 그럼, 올려드릴까요?"


나는 격렬히 부정했고, 메이드씨는 내가 세차게 도리도리하는 모습을 보고 살포시 웃더니- 책을 넘겼다. 


첫 부분은 아니고 중간 즈음으로 넘기더니, 책갈피를 끼우곤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이 우유를 드셔보시죠. 조금 식긴 했지만, 맛있을 겁니다."


메이드가 처음 여기 들이닥칠 적 들고 온 쟁반에 놓인 우유. 


나는 평소처럼 유리잔을 가져갔고, 여느 때처럼 달큰하고 부드러운 무채색 음료수를 목 너머로 넘겼다. 


그러자 메이드는 평소처럼 손수건을 꺼낸 뒤, 내 입가에 묻은 흔적을 닦아냈다. 


"도련님께서 우유를 마시면, 우유가 위장으로 들어가 도련님의 갈증을 달래줍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우유를 마신 탓에, 이 컵의 우유는 반절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한번의 행동이 우유잔과 도련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 겁니다."


메이드씨는 오래 말하다 보니 목이 마른 것인지 내가 마셨던 컵을 들어 나머지를 비우고, 말을 이어겄다. 


"또, 저는 도련님의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았죠. 이렇듯, 만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서로 계속 변하게 만듭니다. 


당연히 이건 단순히 물리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세상 전반에 걸쳐 통용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꾸고 자연이 자연에 영향을 끼치고 인간과 자연이 상호작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역사라 일컫습니다.


논리학에서는 변증법이라 하죠."


유물론적 변증법이라니!


메이드씨 교양이 보통이 아닌 건 역시 빨갱이였기 때문이었던 걸까 싶다. 


그치만 난 지금 12쨜 애기 얀붕, 그런 거 몰라. 


내면은 30대 아재여도 몸은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나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으니 실제로 예시를 들어줘도 몰?루라고 땡깡필 수 있다. 


그래서 불퉁한 태도를 취하려는데...


"도련님께서 고려하셔야 할 부분은, 주종관계에서도 그렇다는 점입니다."

"응? 무슨 소리야?"


메이드씨는 어딘가 서늘한, 노기가 느껴지는 웃음을 띈 채 내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언뜻, 주인이 노예를 멋대로 부리며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긴 하죠. 그러나 역으로 보면, 이건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을 수행하는 것은 노예이므로 여기서 주인은 예속됩니다. 

하여 노예가 주인이 되고, 주인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내 코앞까지 다가와 그녀의 억센 팔이 나를 붙들자, 광기어린 눈빛과 마주하고 말았다. 


나는 왠지 거부감이 들고 불쾌해, 악을 썼다. 


"무슨 헛소리야! 주인은 주인이고 노예는 노예지! 갑자기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하!"

"그 웃음은 또 뭐야!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이거 놔!"


그렇지만, 메이드는 아랑곳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언뜻 주인은 맘대로 부려먹을 수 있고,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된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과 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도련님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치워드리고, 자산 관리도 도맡고, 이제 미국행 배편까지 알아봐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없으면 숨쉬는 것조차 제대로 못할 도련님께서 자주적인 인간, 주인이 맞을까요? 오히려- 제가 도련님의 주인에 걸맞습니다. 종속시켰으니까요. 


뭐, 저는 그동안 충실히 도련님께 봉사해왔고 지금도 책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모든 것을 제게 맡기고 탱자탱자 놀고 계실 때, 저는 땀흘려 일하며 살아갔습니다.


허나 음탕하고 아름다운 당신께서 여기저기 꼬리치며 내키는대로 사는 모습을 볼 때면, 왜 당신은 그럴 수 있고 저는 왜 제가 가지지 못할 수컷에 봉사해야 하는 것인지 회의가 찾아오길 마련입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자유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며, 결국 노동으로서 오롯이 세상을 마주했다는 것을 자각한 메이드는 곧 주인인 자신과 마주합니다. 


이것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이 수캐 자식아."




* * *



어리고 무능한 지대수급자의 발버둥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무자각적 플러팅은 주종관계에 영향을 끼쳤고, 서로의 운명을 역전시켰다. 


그리하여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자유의 땅에 당도한 한쌍의 남녀는 매년마다 아이를 낳으며 원 역사엔 없던 집성촌을 이루니-


소소한 대체역사를 이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