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하는 이내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은 무기력감에 온 몸을 지배당해,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버리려 욕조에 머리를 담궜다.


신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일본인들이 신사라는 곳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신들을 모셔 두고 참배를 하는 모습을 유경하는 본 적이 있었다. 그 신들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지는 알 바가 없었다.


언젠가 일본 신화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 신불분리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신불습합이 되어, 비로자나불의 현신으로서 간주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테라스와 비로자나불은 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였는데 인간들이 마음대로 합친 것인지, 아니면 같았던 존재를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 분리되었던 것인지는 누가 알고 있을까. 어쩌면 신과 부처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과 환각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가정... 가정을 담당하는 신이 있었나?"


유경하는 머리를 욕조에서 빼내고선 중얼거렸다. 이제 방금 전의, 쓸모없는 옛 기억과 생각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 말은 어디까지나 쓸데없는 생각들이 전부 처리되어 나온 부산물 같은 것이었고, 경하가 그것을 내뱉음으로서 이제 그 기억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경하는 욕조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조 밖으로 나온 뒤 세면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 바로 앞의 벽에는 녹이 전혀 슬지 않은, 매끄럽고 둥근 거울 하나가 달려 있었다. 


거울은 물에 젖은 듯 축 처진 짧은 흑발을 하고, 햇빛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어 보이는 흰 피부를 가진, 이제 겨우 만으로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이 거울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과 같다. 유경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 검푸른 눈동자로 비추어 본 유경하는, 이런 모습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내 경하는 몸을 돌려 벽장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고선, 흰 내의를 몸에 걸치고 욕조의 마개를 뽑은 후 욕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욕실의 불을 끄고 나가자, 이제 욕실에는 배수구로 목욕물이 흘러 내려가는 소리 말고는무엇 하나 들리지 않았다.


“홍차, 홍차가 어디 있었지...?”


몸 안이 차가워서 잠이 제대로 올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아, 유경하는 우선 따뜻한 차 같은 것을 마신 뒤에 잠을 청하기로 했다. 


‘이게 영국에서 들어온 홍차야. 가끔씩 한 잔씩 하면 맛이 좋거든.’


경하의 누나는 항상 그렇게 말하며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홍차를 마셨다. 그것을 가끔씩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지만, 맛이 좋고 몸이 따뜻해지는 감각과 사실만큼은 거짓이 없었기에 경하는 누나처럼 홍차를 마셨다.


이미 조선에서 보낸 짐들이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전부 정리해 둔, 깔끔한 서양풍 주방의 찬장에서 비스킷과 홍차 병, 도자기로 된 주전자와 찻잔을 꺼냈다. 


누나가 평소에 즐겼던 품종의 브랜드사인 트와이닝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쓰여진 그 병을 열고 티스푼을 꺼내, 경하는 도자기로 된 주전자에 물을 담은 후 그것을 몇 번 퍼내 넣고 불을 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거... 기문을 가공했던 거였나?”


기문(祁門)이라는 것은, 지나 동부의 안후이 성 황산의 기문 현에서 생산되는 홍차의 품종이었다. 밝고 투명하면서도 짙은 홍색을 띄는 그 아름다운 색상과 부드럽게 떠오르는 향 덕에 경하는 여러 가지 홍차의 품종 중에서도 그것을 가장 좋아했다.


지나의 국민당이 안후이 성에서까지 패배하고 밀려난다면 저 홍차는 두 번 다시 못 마시게 되는 것일까, 하고 경하가 문득 생각했을 즈음에 홍차는 완전히 우려져 김이 나고 있었고, 경하는 그것을 보고 불을 껐다.


경하는 주전자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 맑고 투명하며 짙은 붉은색을 띄는, 지나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이곳에까지 도착한 홍차를 찻잔에 담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차와 비스킷을 쟁반에 담고, 경하는 주방의 불을 끄고 나온 뒤 복도와 계단을 거쳐 그것을 자신의 방까지 들고 올라갔다. 복도의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다시피 하는 창문 밑으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맞다, 미나모토한테 답장 써야지...”


그 쟁반을 방의 책상 위에 올려 둘 때쯤, 경하는 그 일본에서 조선으로 왔던 편지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가방을 뒤져 미나모토 카나코가 보낸 편지를 찾아낸 뒤, 책상에 앉아 조용히 홍차를 음미하면서 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야나기에게.


이번 달 29일에 조선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어쩌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쯤에는 이미 도착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에 기차로 도쿄까지 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여객선을 타고 도쿄로 간다고 했었죠? 이틀은 넘게 걸릴 텐데 지루할 것 같아서 이번 편지는 조금 길게 써 봤어요.’


사실 경성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기차 안 객실에서도, 부산에서 도쿄로 가는 여객선의 선실 안에서도 경하는 미나모토가 보낸 편지의 존재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마음이 복잡해 거의 앉거나 누워 있기만 했었다.


그것을 겨우 다시 떠올린 것이 도쿄에 도착하기 직전이었지만 역시 도착 수속 도중에 열어보는 것이 번거롭기도 해서, 결국 편지는 며칠 만에 개봉되어 경하에게 읽히게 되었다.


‘내가 도쿄 하라주쿠에서 살고 있다는 건 처음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부터 말했었죠. 처음에는 지금까지 당신이 도쿄로 유학을 온다는 사실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서, 조금 놀랐었어요. 야나기가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온다는 게.


니시카타에서 하라주쿠까지는 7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으니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편지로만 이름과 나이를 알고 있을 뿐이지 서로 얼굴도, 목소리도 알지 못하잖아요?’


경성의 집에서 수신자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그 편지를 받았을 때, 미나모토는 자신에 대해 경하와 같은 나이의 일본에서 사는 평범한 여자 중학생이라고 썼었다. 그런 우연으로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지 경하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만약에 그 사람을 만난다면 경하는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같은 평범하고 시시한 말로 그런 신기한 관계의 발전을 대변하기에는 너무나도 성의 없어 보였다.


‘전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전보라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제 같이 일본에서 살고 있으니 최소한 거리는 가까워졌으니까.


그리고... 그 유학을 왔던 이유를 들었을 때, 조금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책임감이 강한 것 같다고 느꼈어요. 야나기는. 저는 오빠가 죽었을 때도 그저 슬퍼하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게... 조금 부끄러웠기도 하고. 


길게 쓴다고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벼렸어요.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나중에 더 써서 보낼게요.


언젠가 직접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아무 탈 없이 도착하실 수 있기를.


-미나모토 카나코가.’


미나모토가 경하에게 보낸 편지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난초를 연상시키는 홍차의 향과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미각이 입 안에서 옅어져 갈 때 쯤, 경하는 홍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편지지와 펜을 꺼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미나모토 양에게.


받았던 편지는 전부 잘 읽었어요. 급한 일이 있었던 건지는 제가 어떻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편지가 짧아도, 길어도 그저 연락을 계속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상관 없으니까요.


제가 관부연락선을 타지 않았던 건... 뭔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예요. 너무 빨리 도쿄에 도착해 버리면 뭔가 허무해져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편지는 조선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받았지만 준비하느라 조금 바빴고, 경성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서도, 객실 안에서도 마음이 복잡해져서 뜯어 보지 못하다가 도착한 지금에야 확인하고 답장을 쓰고 있답니다. 


누나는 생전에 몇 번이고, ‘일본에 유학을 가 보고 싶다’ 는 말을 자주 했었어요. 하지만 갑작스럽고 안타깝게 생을 다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죠. 


지금도 저는 생각해요. 어쩌면 저 자신이 누나의 목을 매달아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죄책감이랑 슬픔이 지금은 3년 전에 비하면 많이 옅어졌지만, 지금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마음이 심란했던 건 그것 때문이예요. 저는 그 누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왔지만 정작 나는 누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니까, 누나의 소원을 더럽혀 버린 게 아닐까 싶다는 마음도 들었고요.


그래도, 그래도.... 이걸로 누나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면 저는 이 생에 남은 한이 더는 없을 거예요. 그게 제가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니까요.


미나모토 양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소중한 가족이 떠나 버릴 때의 슬픔은 제가 잘 알고 있고 그건 당연한 것이니까요. 


제가 그 분의 심상을 어찌 파악할 방도는 없지만...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미나모토 양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실 수 있었다면, 분명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라셨을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잘못인 사람은 없다고, 저희 누나도 말했으니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해 버렸다면 죄송해요. 만약에 언젠가 때가 되면... 그 때는 미나모토 양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답장 기다릴게요, 아무 탈 없이 도착했으니 걱정 마시길.


-야나기 케이나츠가.’


"이 근방에 우체통이 있었나...?"


마침내 차를 전부 다 마실 때쯤에야 경하는 편지를 전부 다 쓰고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잉크가 착색되고 문자의 형태를 띈 그 종이를 몇 번 접은 뒤 경하는 그것을 편지 봉투 안에 넣고, 주소지를 쓴 뒤 우표를 붙였다.


그리고 경하는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걸치고, 편지를 든 채 우체통을 찾으러 천천히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미나모토와 처음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은 2년 전, 1936년 초에 영국에서 에드워드 8세가 국왕으로 즉위할 무렵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처럼도 보이는 그 수신자가 없는 편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경하의 집 주소가 장난인 듯이 적었던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맞추어 경하의 집 우편함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은 그다지 어린아이가 쓴 것 같지 않았다. 일단 미나모토 본인이 경하와 같은 나이라고 적었던 것은 물론이었고 글씨와 문장의 형식에서도 어린아이가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글이 완성되어 있었다.

경하는 호기심을 느꼈다. 만약 이것을 받은 사람에게 답장을 해 달라는 그녀의 무책임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면과, 한편으로는 수준 높은 글의 솜씨를 보았을 때도 참 알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경하는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차츰차츰 서로에 대한 것을 알아 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자살한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도, 도쿄의 여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과 그녀의 오빠가 숨을 거두었을 때 경하의 누나와 나이가 같았다는 점까지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경하는 미나모토 카나코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다. 어쩌면 그 이름과 나이도 가명과 거짓으로 쓴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경하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 여기 있다.”


경하는 평년보다 조금 쌀쌀한 봄의 공기를 맞으며 가로등 불이 켜진 길가를 걷던 도중, 붉은색의 우체통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 그 구멍 안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넣었고, 그와 동시에 다시금 경하는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와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그녀가 편지에 적었던 자신에 대한 정보들이 전부 거짓 없는 사실이라면...


그 때도, 경하는 아직도 처음으로 무슨 말을 하면 괜찮을지 알아내지 못한 채였다. 무슨 말을 해도 그런 관계의 발전에 걸맞는 문구라고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아, 피곤해... 자러 가야지.”


하아암, 하고 하품을 하며 유경하는 집 안의 불들을 다시 끄기 시작했다. 1층부터, 계단에서, 복도까지 천천히 불이 꺼지며, 집 안에는 어둠이 드리우고 은은한 달빛만이 복도와 방들을 비추고 있었다.


 마침내 유경하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문을 닫고 불을 껐다. 이제 니시키타 5초메 15번지의 집에 불이 켜진 곳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잘 자..."


그 말을 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문구도 없이 유경하는 조용히 읇조리고선 스위치를 끈 후, 침대에 누웠다. 배게에 머리가 닿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유경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니시카타 5초메 15번지의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며, 마토이 아이코는 자신의 방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히로는 나지막이 -냐아, 하고 울음 소리를 내었다. 묘한 적막과 분위기를 깨뜨리는 그 고양이의 울음 소리와 함께, 도쿄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잠드는 침묵의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