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히 몇시간 전만 해도 자신은 빈민가에서 전전긍긍하던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황궁으로 와서 시종들이 몸단장을 해주고 있으니.

"저... 제가 여기에 왜 온 거죠?"

그러나 시중들은 작당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몸단장이 다 끝나고, 시종들은 소녀를 한 방으로 인도했다.

시종 중 한 명이 말했다.

"황태녀 전하, 명하신대로 소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했어. 난 이 소녀와 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이만 물러가."

"알겠습니다. 전하."

이윽고, 방에는 황태녀와 소녀 두 명만 남게 됐다.

"너, 이름이 뭐야?"

"아... 저 그게... 제겐 이름이...."

"뭐야? 너 이름도 없어?"

"애초에 전 부모도 없는 걸요..."

"좋아. 그럼 내가 지어줄게. 네 이름은 이제부터 '얀진'이야.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전하."

"참고로 내 이름은 '얀순'이야. 앞으로 단 둘이 있을 때에는 이름으로 불러줘."

"아... 안됩니다. 천한 제가 어찌 전하를 이름으로..."

얀순은 쾅! 하고 책상을 손으로 쳤다.

"내가 허락할게. 뭐가 문제야?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갈 예정인 내가 허락하는데,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얀순 전...."

"'전하'는 빼."

"알겠습니다. 얀순, 님."

"그래 좋아. '님'자 붙이는 건 허락할게."

"저... 얀순 님. 어째서 절 여기에..."

"넌 일평생 거울도 안 보고 살아왔어?"

"아... 제가 떠돌아 다녀가지고..."

"이리와봐."

얀순은 얀진과 함께 거울에 나란히 섰다.

"봐, 우리 둘. 똑같이 생겼지?"

"정말... 그렇네요."

"이게 내가 널 데려온 이유야.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니, 흥미롭지 않겠어?"

"어떻게... 저희들은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걸까요?"

"음, 글쎄? 나도 몰라. 하지만 그건 상관없지. 지금 이 순간에, 나와 너가 똑같이 생겼다는 건 사실이니까."

"전... 여기서 뭘 하면 될까요?"

"표면적으로, 넌 내 전속 시녀야. 앞으로 활동할 때에는 시녀복을 입고 내 옆을 따라다니면 돼. 물론, 이면적으로는, 넌 내 말동무가 될 거야. 황궁은 네 생각보다 꽤 심심하고 숨막히는 곳이니까."

"그거면 될까요?"

"응, 그거면 돼. 그냥 넌 앞으로 나랑 단 둘이 있을 때에는 날 친구처럼 여기면 돼. 쉽지?"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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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네가 지낼 방이다."

시종장은 허름한 방을 얀진에게 주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아침 7시에 일어나시니, 넌 더 일찍 일어나서 시간에 맞춰 전하를 깨우면 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얀진은 시종 교육을 받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시종이기에 교육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얀순의 일과를 외우고, 그에 맞춰서 행동하라는 교육을 받았다.

또한 얀순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 얀순에 관한 사소한 모든 것들을 외웠다.

"오늘은 첫날이니, 전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수발을 들면 된다."

"알겠습니다. 시종장 님."

시종장과 얀진은 문을 열고 황태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종 교육을 모두 마쳤습니다."

"벌써? 꽤 빠르네."

"생각보다 이 소녀가 빨리 외웠습니다."

"흠... 좋아. 이만 물러가봐."

"알겠습니다. 전하."

시종장이 방에서 나가자 마자, 얀순은 얀진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동안 심심했지? 얀진아."

"아... 아닙니다. 얀순 님. 얀순 님 옆에 있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흐, 진짜 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어. 왤까? 나랑 똑같이 생겨서 그런 건가?"

"저도... 전하가, 아니 얀순 님이 마음에 듭니다."

"아... 마음 같아선 널 시종으로 두지 않고 그냥 어디에 땅 하나 줘서 거기서 귀족 행세하게 하고 싶은데... 그러면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겠지?"

"전 괜찮습니다. 얀순 님 옆에 있는 것만으로 전 만족스럽습니다."

"진짜 맘에 든다. 신하들은 맨날 내가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합니까?"

"뭐 맨날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라느니, 세금 좀 낮추라느니, 알게 뭐야? 벌레들의 목숨 따위, 날 위한 거름일 뿐인데."

"저..."

"아 맞다 맞다. 너도 '백성들' 중 한 명이었지? 넌 예외야. 내 친구니까. 날 이해해 줄, 유일한 친구."

"..."

"에이, 미안해. 난 네 목숨값을 내 목숨값이랑 같은 것으로 여기니까, 너무 실망치 마."

"주제넘은 말이지만, 백성들을 보살펴줄 수는 없나요?"

"너까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소리 마. 난 나랑 너 우리 둘만 신경 쓰고 나머지 사람들은 신경 안 쓸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너도 우리 둘만 신경 쓰겠다고 약속해."

빈민가에서 살아왔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도탄에 빠졌는지를 아는 얀진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담겨 있는 속마음의 뜻을 안 얀진이는 거짓으로라도 맹세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저와 얀순 님, 둘만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맹세했으니까, 그 말 꼭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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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녀 전하! 제발 백성들을 살펴주시옵소서!"

신하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어느날 황제가 병에 걸리자, 황위를 물려 받을 얀순이 어쩔 수 없이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폭군이었던 황제를 닮아서 그런지 그녀도 폭군의 기질을 타고나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특히나,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 자체를 귀찮게 여겼다.

긴 회의가 이어졌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말은 무의미했고, 얀순이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는다는 것은 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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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진아. 우리 한 번 역할을 바꿔볼래?"

밤이 되자, 얀순이 얀진에게 제안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인지..."

"내일 하루만, 넌 내가 되고, 반대로 난 너가 되어볼게. 오늘 자기 전에 옷을 바꿔 입고, 넌 여기서 자고 난 네가 자는 방에서 잘게."

"안됩니다! 제가 자는 방은 환경이 별로 안 좋아서..."

"뭐라고? 환경이 안좋다고?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가장 좋은 방으로 배정해달라고 했는데... 시종장을 교체해야겠군."

얀순은 황궁을 지키던 병사 몇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시종장을 처형시키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종장을 앉혀라. 죄목은, 황명을 어긴 죄로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아무렇지도 않게, 황태녀는 사람의 목숨을 날려버렸다.

"이거 하나만 알아둬.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야. 그러니까 네 주변 환경이 안좋거나, 혹은 너한테 함부로 대하는 이가 있으면 나에게 즉각 말해라. 바로 해결해줄테니."

"얀순 님은, 어째서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있잖아. 형제자매는 서로 닮잖아? 같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니."

"그렇죠?"

"그런데 말이야. 난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내 형제자매들이랑 서로 싸우고, 축출시켰어. 빌어먹을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서로 싸우라고 시켰지. 그 결과 내가 다음 황제 자리에 앉을 권한을 얻게 됐고 나만 살아남았어. 내 형제자매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었지. 뭐 이제와서 그걸 후회하진 않지만."

"하지만, 이런 나도 때로는 형제자매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거 아냐? 그런데 환경 때문에 그러지를 못했으니, 나와 닮은 너라도 소중히 대하는 거지."

"정말, 각박한 삶을 살으셨군요."

"너보다 더할까? 넌 빈민가에서 살았으니."

"빈민가에선 적어도 발이 빠르기만 해도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황궁에선 더 복잡한 요인들이 많았을 테니."

"우리 얀진이, 이젠 내 걱정도 하는 거야? 사랑스러워라."

"읏. 그나저나 어쩌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샜습니까?"

"그러게, 우리 분명 내일 역할 바꾸자는 얘기를 했는데. 아무튼, 내일 한 번 서로 바꿔보자. 꽤 진귀한 경험이 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둘은 곧바로 옷을 벗었다.

"이제 보니, 우리 둘이 몸도 꽤 비슷하네? 물론 너가 약간 빈약하긴 하지만."

"읏, 얀순 님..."

"왜, 뭐가 어때서?"

"얀순 님 눈빛이, 마치 알몸의 여자를 보는 남자의 눈빛이었습니다."

"푸하하! 나한테 알몸을 보인게 그렇게 쑥스러운 거야?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인데, 뭐가 부끄러워? 그리고, 나도 알몸이잖아?"

"농은 그만두십시오!"

"그래그래 그럼. 옷을 바꿔 입자."

이 순간, 둘은 서로 바뀌게 됐다.

"그럼, 잘 부탁할게. '얀순 님'."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