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https://arca.live/b/yandere/21187594

2화: https://arca.live/b/yandere/21285211?target=all&keyword=%EB%A0%88%EC%A6%88&p=1

3화: https://arca.live/b/yandere/21334637?target=all&keyword=%EB%A0%88%EC%A6%88&p=1



그날 이후로, 얀순이는 우리 집에 살게 되었다.


여름방학 동안 얀순이는 내 방 맞은편에 있는 어두컴컴한 창고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샤워하고 나서 나와 마주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더 이상 그녀는 내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어딘가 부서진 것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 요즘 이상해."


여름방학이 끝나기 사흘 전이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내게 말을 건냈다.

그 날은 하필 부모님께서 자리를 비우는 날이었기에, 얀순이와 나는 부엌의 큰 식탁에 앉아 저녁식사를 한 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뭐가?"

"왜 날 가만히 두는 거야?"

"그냥."


내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얀순이는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뭔가를 세기 시작한다. 잠시 동안 그러던 그녀는, 시야를 아래쪽으로 떨구며 힘없이 중얼거린다.


"넌 역시, 정말로 지독한 멍청이야."


스마트폰을 놓고 놀란 표정으로 시야를 돌리자,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얀순이의 얼굴에서는 기분 나쁠 정도로 우울하고 자학적인 기색이 돋보였지만, 그 안에는 일종의 퇴폐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꿈틀거리며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식탁 위에 양 팔로 턱을 괸 후,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늦여름의 습하고 끈적끈적한 공기 사이에 녹아드는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코 끝을 간질이자, 골반 깊숙한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충동이 치솟는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올까?"

그것을 억누르며, 나는 그녀에게 태연하게 말을 건낸다.


"그래. 너 치고는 상냥한 마음씨네."

"뭘로 먹고 싶은데?"

"아무거나."

"그럼 가장 비싼 걸로 사온다?"

내가 킥킥거리며 말하자, 얀순이 역시 약간은 밝게 미소짓는다.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등받이에 기대자 한달 사이에 유난히 성숙해진 육체가 약간 땀에 젖은 하얀 와이셔츠 너머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시 한번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걸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는다. 그리고 풀린 운동화 끈을 묶을 때쯤,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구역질을 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부엌 쪽을 바라보자, 싱크대에서 몸을 숙이고 마구 헛구역질을 하는 얀순이의 모습이 보였다.


"너 몸 안좋냐? 감기라도 걸렸어?"

"아, 아니야...아무런 문제도 없어.....난 괜찮으니까......."

얀순이는 뭔가를 감추려는 듯이 허겁지겁 나를 향해 돌아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안색은 평소에 비해 유난히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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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나는 거의 그녀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개학이 되고 학교에 나갔어도, 얀순이는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더욱 우울해진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는 친구들 사이에 제대로 끼어들어갈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못생겼더라면 조금은 더 나았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던 얀순이는 같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외면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쉬는 시간에,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어딘가에서 꺼낸 아동용 동화책이나 아기들의 심리에 대해서 다룬 책만을 읽었다.

나 역시, 한동안은 그녀에 대해 거의 관심을 끊고 살다시피 했다.


"저기, 그.......그, 그동안 계속 너를 좋아했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갈 때쯤, 교정 안쪽의 단풍나무 아래에서 처음으로 고백을 받았다.


얀진이. 얀순이와는 정반대로 활발하고 화사한 매력이 있는 순수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두 눈을 꼬옥 감으며, 내가 하교할 시간에 갑자기 나무 아래에서 튀어나와 러브레터가 묵인 하트 모양의 상자를 내밀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독일산 초콜릿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체인점까지 있는 대형 레스토랑 주인의 딸이었다. 얀진이는 그런 점까지 얀순이와 정반대인 소녀였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마침 몇 달 동안 마음대로 섹스를 해보지 못해서 쌓여있던 참이었다.

어차피 얀순이와는 흐지부지 끝난 사이나 다름없었고, 어차피 그녀가 날 좋아할 리는 없었기에 한 선택이었다.


"아흣....흐으으......야, 얀붕아....사랑해!! 하아아...!! 아흐으으으!! 사, 사랑해...사랑해.....얀붕아.....♡"

얀진이가 몸을 허락한 것은 고작 사귄지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맹렬하게 헐떡거리며 올라타서 허리를 흔드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부모님이 이 모습을 본다면 반응이 어떨지에 대한 궁금증밖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즐거웠어! 정말로 사랑해!!"

관계가 끝난 후, 모텔 앞 거리에서 그녀는 나에게 달라붙으며 애정을 표시했다. 얀진이의 얼굴은 여전히 녹아내린 것처럼 붉었고, 그녀의 다리는 그 사이에서 흘러내린 하얀 액체로 끈적거렸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묘하게 꺼림직한 감각에 나는 별다른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얀진이의 몸은 처음 했을 때의 얀순이와는 반응이 상당히 달랐다. 직감적으로 그 이유를 짐작해낸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얀붕아.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어?"

"없어."


'하긴, 나도 그동안 많이 해왔는데 상대라고 다르다는 법은 없겠지.'

속으로만 혀를 차며, 나는 겉으로는 뻔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먼저 돌려보낸 후, 나는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둑어둑한 밤거리 중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욱 어두운 한쪽 구석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자 하나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의 사각지대라서 제대로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창백한 눈동자 두개가 못이 박힌 듯이 나를 분명하게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우리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기분이 나쁠 정도로 서늘하고 날카로운 감각이 등골을 타고 내달렸다.


그녀를 무시한 채로, 나는 최대한 빨리 내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내 걸음에 맞춰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불안감에 조깅하듯이 뛰기 시작하자 역시 그것에 맞춘 템포로 또각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진다. 발걸음을 멈추자, 마찬가지로 따라오던 발소리 역시 멈춰 버린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경련하며 피를 온 몸의 구석구석으로 펌프질한다. 마음속으로 온갖 욕을 지껄이던 나는, 스스로 셋을 센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아가리를 벌린 밤거리에는 쥐새끼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가 더이상 따라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머리 바로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얀붕아, 여기서 뭐해?"


급하게 뒤로 돌아서자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얀순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오른손에 무언가 식재료같은 것이 잔뜩 담긴, 검정색 비닐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아주머니께서 심부름을 시키셔서, 마트에서 음식 재료를 조금 샀어. 내일 아침에 맛있는거 만들어 줄게." 얀순이는 나를 바라보며, 특유의 퇴폐적이고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 때문에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아까 전부터 이상한 여자가 따라와서, 잔뜩 진장하고 있었는데....."

"그랬어?"

"그래.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였어."

"흐음, 그렇구나..."

얀순이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어딘가 소름끼치게 느껴져서, 나는 말하는 것을 그만뒀다.


그 순간, 나는 얀순이 역시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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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가 와서 한동안 아예 못쓰다가 퀄리티 ㅆㅎㅌㅊ로 써버렸다. 자꾸 질질 끌어서 미안하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