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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얀순이를 처음 만난 것은 201X년 대학교OT에서 였다. 당시에 비-코로나 시기여서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는 2월 중순즘 대학별 OT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학창시절 붙임성이 없어 집에서 며칠 쉬고싶었지만 대학교 첫 행사를 즐긴다는 차원으로 입학 전 같은과 오픈카톡방에서 친해진 동기들과 학교에 몰려갔다.


마침 같은 조에 고등학교 출신 선배들이 있어서  걱정과 달리 쉽게 대학 분위기에 어울릴 수 있었다. 학창시절 술담배에 입 한번 안댄 범생이였지만 술고래신 아버질 닮았는지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았다. 선배들이 괜찮은 교수님 수업, 아르바이트 자리, 자취방, 처세술 등 팁을 알려주기도 했다. 이튿날엔 날이 샐 때까지 술자리가 계속되었는데 새벽 늦게 얀순이가 다른 방 선배들과 함께 찾아왔다.


나는 그녀 이름을 동기 카톡방에서 몇 번 봤었지만 어떤 아이인지는 몰랐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남중, 남고를 나온 탓인지 이성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않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저런 주제를 떠들며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었는데 이번 주제는 연애사였다. 얀순이가 술에 취했는지 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했다. 얀순이는 '학기초 과CC는 흑역사가 된다고 그러는데 오래 이어지기만 하면 연애 중에서 가장 이상적이다'라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대충 뜻을 알 만 했다. 덧붙여 '캠퍼스 4년을 함께 보내고 결혼으로 이어져 평생을 함께하는 연애가 제일 로맨틱한건 사실이다'고 했다.


듣다가 나도 취기가 오른 김에 '야 괜히 학기 초 깨 볶고 장구치다가 2학기 전공수업 따로 앉는 남녀들이 한트럭이겠냐. 학기초면 서로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데 첫눈에 반해 만난 커플이 오래 사귀는건 비현실적인거 아니냐' 그랬던 기억이 난다. 얀순인 '니가 사랑에 대하여 뭘 아냐'고 했고 나는 '그런 너는 대단한 사랑이라도 하고 있냐. 너나 나나 스무살 어린 애들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얀순인 입을 다물고 내 눈을 응시하더니 옆으로 붙어와 갑작스레 입을 맞췄다. 순간 술자리엔 정적이 흘렀다. 당혹감에 얼어 있다 선배들의 환호소리에 정신이 들었고 둘이 나가 얘기하고 오라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얀순이는 내게 '지금까지 연애 해 본 적이 없는데 널 보자 심장이 꿰뚫린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애초에 인기있던 사람이 아니다. 물려주신 180이 넘는 키와 다부진 체형은 장점이었지만 특유의 찐스러움이 이성과의 인연에 장애 요소였다. 이렇게 적극적인 대시를 처음 받아본 탓인지 얀순이의 수려한 미모가 한 몫 했는지 '앞으로 잘 사귀어보자'라 답하고 새내기 1호 커플이 되었다.


신입생 첫 학기는 과에서 시간표를 짜줬다. A반인 나는 B반 얀순이와 다른 교양수업을 들었는데 조별과제로 다른 과 여자애와 연락 할 일이 있었다. 얀순이와 사귄 이후 붙어다니며 별 트러블이 없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크게 화냈다. 얀순인 '그냥 드랍하고 나중에 나랑 같은 수업 듣자' 라든지 '그년 죽여버릴거야' 라고 목소릴 높였다. 나는 '단순 과제때문이다. 그 여자애 친하지도 않고 다른 맘 있지도 않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얀순이의 화는 식을 줄 몰랐고 급기야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기까지 했다. 결국 내가 카톡을 차단하고 해당 수업을 드랍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처럼 남자인 동기들과 늦게까지 술을 먹거나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곤 했다. 그럴때마다 얀순이에게 메세지와 전화가 끝없이 왔다. 중간중간 친구들과의 사진을 찍어보내며 안심시켜도 얀순인 내가 자취방에 들어간 사진과 잘자라는 통화를 하기전까지 먼저 잠들지 않았다. 언제는 동기들과 술자리가 길어져 얀순이와 연락을 못한 적이 있었다. 술에 진창 취한 우리는 4차로 내 자취방에서 한 잔 더하기로 했고 근처 편의점에서 캔맥주 몇 캔과 안주거리들을 사들고 자취방에 도착했다. 도어락을 열자 눈에 들어온건 침대에 걸터 앉아 우리를 바라보는 얀순이였다. 친구들은 분위기를 읽더니 '얀붕아 푹 자고 다음에 보자'고 인사했고 나는 날이 샐 때 까지 얀순이를 달래주느랴 진땀을 빼야 했다.


이 날 이후로 얀순이의 집착은 심해졌다. 주말에 고향집에 가도, 시험기간 도서관에서도, 아르바이트 중에도 하루종일 핸드폰을 붙들어야 했다. 여자인 친구들은 애초에 없었고 남자인 친구들조차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잠을 자도자도 피곤했으며 학업은 물론 교내 카페 아르바이트에서도 엉망진창이었다. 눈 밑에는 다크 써클이 짙어지고 샤워를 하면 욕실배수구엔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뭉쳤 있었다. 얀순인 종종 내게 동거를 하자 권했는데 상상만으로도 숨통이 조여 이러저런 핑계를 대며 대화를 피했다.


그렇게 피폐한 시간을 보내며 1년이 지나가고 병무청에서 영장이 날라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친구들의 막막한 심정과 달리 나에겐 가뭄 속 단비 같았다. 이 모든 압박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남자친구라는 명목도 벗어버리고 입영열차에 올라 잠수타고픈 생각도 들었다. 며칠을 고심끝에 자취방 근처 카페에 얀순이를 불러 이별을 고했다. 얀순인 '장난이지?'라고 하며 믿지 못했다. 화를 내기도 하고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몇 시간 넘는 대화를 하고 나서야 제 풀에 지친듯 나자막한 목소리로 조심히 잘다녀오란 말을 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끝났다.


2년간 대한건아로서 의무를 마치고 몸 성히 전역을 했다. 고된 군생활 속에서도 휴가때 입대 안한 동기녀석들하고의 자리가 큰 휴식처가 되었다. 복학생 신분으로 수강신청을 하고 2월 말 OT에도 참석을 했다. 얀순이 걱정은 따로 하지 않았다. 취업준비 할 학년이기도 하고 친구 말로는 군대에 있었을때 고시 준비한다며 휴학계를 냈다는 소문이 들렸다했다.


3년전 두근대던 신입생 때를 떠올리며 버스에 탔다. 우리과는 매 해 같은 리조트로 오티를 갔다. 추억을 곱씹으며 안내 책자 프로그램을 보던 누군가 옆을 지나가며 어깨를 툭툭쳤다. 얀순이였다. 스스로 좋아했던 장발은 단발머리가 되어 있었고 한층 더 밝아진 분위기였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내게 얀순인 멋쩍게 웃다니 핸드폰을 가리키며 자기 자리로 갔다. 


심숭생숭 하던 중 얀순이에게 카톡이 왔다. '연락처 안바꿨네? 누가 잡아먹냐 새내기들이나 잘 놀아줘 선배님~' 하고 바뀐 말투였다. 읽을까말까 고민했지만 별 생각안키로 하고 '알겠어' 짧게 답했다.


OT는 생각보다 즐겁고 힘들었다. 같은 조 신입생들의 텐션을 따라가기 벅찼지만 착하고 재밌는 친구들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기 녀석들도 좋았다. 때때로 얀순이가 신경쓰였지만 별다른 접점은 없었다. 대학OT의 하이라이트인 이튿날 술자리가 되었다. 방을 섞어가며 마셔라부어라 하던 중 복도에서 얀순이와 마주쳤다. 얀순인 우리가 시작했던 3층 복도 끝 창가로 나를 불렀다. 잠시 할 얘기가 있다했다. 불편함이 들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빛엔 어떠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얀순인 오랜만에 만난 동기 느낌으로 말문을 열었다. 갑작스런 이별후 힘들었지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나도 알다시피 그녀는 좋지 못한 가정배경이 있었다. '고시준비 했다던거? 뻥이었지~ 사실 정신병원에 잠깐 가 있었어. 그리고 퇴원후 요양시설에서 봉사도하고. 다음 주말에도 가' 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2년간 군대에 가있던 사이 그녀는 애정결핍과 의부증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나에 대한 마음도 진작에 정리했다고 말했다. 이제 졸업할 날도 얼마 안남았는데 편한 동기 사이로 지내면 안되냐는 말에 선뜻 답하기 어려웠지만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과 아무 문제없이 의사소통  하는 그녀를 보고 걱정이 사라졌다. 


개강을 하고 같은 조 신입생 여후배에게 '선배님 밥사주세요'라고 연락이 왔다. 새내기들에게 처음 사주는 밥이라 들뜬 마음으로 일정을 조율했다. 당일 약속시간을 얼마 앞두고 '식사 괜찮습니다 선배. 앞으로 연락 안해주셨으면 해요' 라는 답장이 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연락했지만 차단음이 들렸다. 


혼자 학식을 때우려 학생회관 식당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얀순이였다. 얀순이도 혼밥을 하려던차 우리 둘은 자연스레 같이 먹게되었다. 식사를 하며 위 얘기를 들려주니 요즘 아이들 중 개념 없는 애들이 많다 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이게 무슨 이유였는지는 혼인신고 도장을 찍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되었다. 오늘날 유치원에 다니는 딸 얀진이도 틈만나면 '아빠 뭐해요?' '아빠보고싶어' '영상통화영사앙'하며 보챈다. 사랑스럽다. 얀순일 다시 만나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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