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늦은 오후, 강남의 한 카페

 

"으음......"


나는 지금 카페의 자리에 앉아 얀순을 기다리고 있다.

 

코트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약속 시간까지는 대략 10여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음. 이 정도면 상관 없겠지.

 

나는 휴대폰의 잠금을 풀고, 오늘 그녀와 상의해야 할 내용을 정리한 메모를 켰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인방에 그런 준비까지 하느냐고 학을 떼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서 내 나름 주도적으로 방송을 이끌어나가야만 한다.

 

그녀의 겉절이 정도로 인식되면서 시청자 수를 늘리는 것은 길게보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니까.

 

다시금 적어둔 내용을 점검하고 해야 할 말을 머리 속으로 가다듬었다.

 

일단 스오히 말고 다른 게임도 해볼 수 있으면 좋을거고....

 

얀순과 친한 다른 스트리머들과도 만난다면 그것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으음.....

 

음.....

 

 

"저기요...?"


내용에 몰입하고 있던 사이, 익숙한 하이톤 목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고개를 들자 컴퓨터 모니터로만 봐왔던, 고양이를 닮은 얀순의 얼굴이 내 눈 앞에 있었다.

 

"아. 얀순님 안녕하세요."

 

"붕얀님 맞구나. 안녕하세요."


얀순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어요?"

 

입가에 완만한 호선을 띄고, 그녀는 내게 질문했다.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한, 유리 구슬 같은 눈

 

꾸민듯 꾸미지 않은 절묘하고 알맞은 옷차림과 옅은 화장

 

잠깐이지만, 해야 할 대답보다는 그녀가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다.

 

그 얼굴을 봐서라도 왠지, 솔직해지고 싶지 않았다.

 

하꼬 스트리머가 자기 반성이라니. 업계에서 탑을 달리는 대기업 스트리머가 보면 얼마나 가소롭게 생각 할까.

 

"그냥 웹툰 보고 있었는데, 조금 몰입했나 보네요. 하하"

 

휴대폰 가장자리를 눌러 작업 관리자에 남아있던 보다만 웹툰 창을 켜고는 살짝 앞으로 폰을 기울여 화면을 보여주었다.


"어? 이 웹툰 붕얀님도 보세요? 저도 잘 보고 있는데."

 

그 화면을 흘깃 본 얀순이 반갑다는 듯 말하자, 나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대충 넘어가려고 한 거짓말로 갑자기 대화가 진행되면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그 웹툰의 독자인건 사실이기 때문에 같이 떠드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공통적으로 좋아하는게 있다면 서로 간의 간격을 좁히기 편하다.

 

"네, 저는 이런 로맨스물 같은걸 좋아해서요."

 

"로맨스는 인정이죠. 흐흐“

 

웹툰으로 시작한 말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대화로 이어졌다.

 

나도 나름 떠들기 좋아하는 성격이고, 그녀도 스트리머이니만큼 수다에는 일가견이 있다.


”요즘 소설들은 다 뭐 이상한 양판소 밖에 없다니까요...“

 

”그러게요, 근본이 없어요 근본이 ㅋㅋ “



그렇게 이야기는 멈출 줄 모르고 이어져, 어느새 1시간이라는 시간이 가 있었다.

 

저번에도 생각한건데, 말을 참 잘한단 말이지.

 

그래도, 만난 목적은 달성해야지

 

“큼. 큼. 벌써 1시간이나 갔네요.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해보시죠.”

 

이야기를 닫되, 듣는 사람이 불쾌하지 않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으음.... 그럼 나중에 계속 이야기 하시죠.”

 

다행히 그녀는 순순히 이야기를 닫는데에 호응해줬다.

 

“일단은, 토요일에는 스오히 위주로 하실건가요?”

 

나는 머릿속에 넣어둔 메모의 내용을 떠올려가며, 그녀에게 물었다.


“네. 스오히는 기본으로 깔고 가고,... 그거만 하면 좀 심심한데... 토요일은 시간도

많으니까, 2부도 하실래요?.‘

 

독심술이라도 쓴 것처럼 그녀는 족집게처럼 정확히 내가 원한 부분을 짚었다.

 

”오.... 그러면 저야 좋죠“

 

당연히 내게는 이득이 되는 이야기니까, 거절할 리 없다.


너무 이야기가 잘 흘러가는데?

 

순간, 그 생각을 계기로 한 가지 의문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어쩌다 운이 좋아서 처음 만나 통화한 그 순간부터 마음 속 깊이 잠들어 있던 의문.

 

내가 얻은 게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묻어둔 의문,

 

갑과 을의 관계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의문.

 

한번 싹 틔운 생각은 깨끗한 물에 푼 먹물처럼 삽시간에 번져, 미처 걷어내기도 전에 머리 속을 장악했다.

 

물어볼까? 기껏 띄운 분위기를 망치는게 아닐까? 아니 아무 이유 없으면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지도? 아니면 날 이상하게 보려나?

 

”붕얀님? 무슨 생각해요?“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건지, 그녀가 눈치채고야 말았다.

 

”아아. 아니에요,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

 

초등학생이 와서 봐도 티날 수준의 거짓말이였다.

 

”흐음....? 뭐 있는거 같은데에?“

 

당연히 이런 거짓말이라는 말도 아까운 궁색한 변명을 그녀가 꿰뚫지 못할리 없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캐치했다는 듯 소악마 같은 웃음과 함꼐 내게 얼굴을 들이 밀었다.

 

다 들통났는데 질질 끄는 것도 추한 일이다.

 

”..... 티 났나요?“

 

사고를 친 아이처럼 눈치를 보며 나는 말했다.

 

”네 ㅋㅋ 무슨 생각하세요?“

 

”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네.네. 빨리 말해주세요.“

 

이상한 변명을 지어낼 수도 없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그게.... 얀순님. 얀순님은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건가요?"


말을 들은 순간.


얀순의 입가에 맴돌고 있던 은은한 미소가 걷히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누가봐도 불쾌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표정을 짓자 내 등에서는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뭐 어떻게든 둘러댈걸.


"아니... 그게..."

 

나는 황급하게 말을 덧대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뚫린 댐에 나무 판자를 덧대는 수준이지만, 이거라도 해야한다.

 

"크.....큼.... 아하하하하하!"

 

갑자기 그녀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 아!, 그런거였어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한참을 큰 소리로 웃어댔다.

 

뭐지? 잘됀건가?

 

방금 전까지는 돌덩이 같은 딱딱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미친듯이 웃어대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까.

 

심지어는 저 웃음이 정말로 웃겨서 웃는 것인지, 혹은 실망으로 인한 체념의 웃음인지도 알 수 없었다.

 

"딱히 이유라고 하면, 그냥 얀붕님이 마음에 든거 뿐이에요. 아하하하."

 

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이 찔끔 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다행히 전자의 경우였던 모양이다.


"마음에 들었다니, 제 어디가요?"

 

당황한 티를 숨기고, 다시 붙임성 좋은 미소를 장착한 내가 물었다.

 

"음..... 붕얀님이 맘에 드는 점이라.... 첫번째는 귀여움?"

 

??? 뭔 귀여움?

 

그녀의 묵직한 철퇴 한방에 접대용 미소가 산산히 박살났다.

 

"귀여움이요?"

 

"네, 방금처럼 붕얀님은 반응이 참 귀엽고 재밌어요. 작위적이지도 않고 진짜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느낌이 든달까."

 

"에.... 네..."

 

"그 다음.. 두번째는 섬세함?"

 

"섬세함이요?"

 

이것 역시 내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요소 중 하나인데, 대기업의 눈은 뭔가 다른걸까?

 

"저번에 강의 방송하실떄, 엄청 자세하게 잘 설명해주시더라고요."

 

"음.... 네."

 

"그리고 얼굴도 꽤 잘생기셨고 목소리도 좋으시고!"

 

"흐음...... 네에..."

 

이거 뭐라 반응해야할까.

 

정말로 미묘했다.

 

놀라기에는 내 일이고, 그렇다고 긍정하자니 나르시스트 같고.

 

그렇다고 말을 끊고 다른 대화로 전환시킬만한 주제도 없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진짜 괜히 말해서. 김얀붕 병신새끼

 

수능칠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두뇌가 회전했다.

 

지금까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해왔던 수많은 대처의 기록들이 홍수처럼 머리 속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도움될만한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꼬르륵~

 

영원 같은 찰나의 정적을 깨는 맥빠지는 소리.

 

아마도 얀순의 배에서 나온 소리일 것이다.

 

평소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그냥 웃고 넘어가지만 지금의 내게는 구원을 위해 강림한 천사의 나팔소리 같았다.

 

대충 뭐 먹자고 둘러대고, 빠져나가자. 도저히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 얀순님, 저희 자리 옮길까요?"


"......... 그러죠."

 

귀 끝까지 완전히 새빨개진 얀순이 개미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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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추워라."


밖에 나가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계절은 겨울, 하늘은 자신이 겨울임을 알리기로 작정하기로 한듯 거센 바람을 불어댔다.

 

저녁을 먹을 장소는 얀순이 추천한 곳으로 가기로 했으니 택시만 타면 됐다.

 

도로변으로 걸어가서 지나가는 택시는 없는지 도로를 한번 훑어 봤고, 곧 주황색 택시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 코트에서 휴대폰을 쥔 오른손을 꺼내 택시를 향해 크게 흔들어 줬다.

 

곧바로 택시가 이쪽으로 방향을 꺾는게 보였고, 나는 뒤처져있는 얀순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얀순은 조금 급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금방 오겠거니. 생각하며 난 한번 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 어어어?"

 

그때. 갑자기 뒤에서 충격이 전해져왔다.

 

얀순이 내게 거의 다 왔을때쯤, 갑작스럽게 발이 걸려 얀순이 넘어진 것이다.

 

다행히도 나까지 넘어져서 둘 다 다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놓쳐 버렸다.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핸드폰은 그대로 바로 앞 차도로 다이빙했고,

 

뽀각!

 

나와 얀순을 향해 다가오던 택시 바퀴에 찍혀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

 

"어?...."

 

"붕얀님 괜찮으세....."

 

그 광경을 본 나와 얀순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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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글 망한거 같다.

 

좆망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