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dcinside.com/board/genrenovel/3900563


소녀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환절기의 날씨 탓에 감기에 걸려버린 소년의 방에서 그렇게 물었다.


이마에 놓인 수건을 새로운 수건으로 갈아주며, 그 찬란한 금발을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쓰다듬으며.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소년은 자신은 돌봐주다 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여인에게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니, 갑자기 그렇게 물어봐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뇨, 그냥··· 그 많은 시녀들 중에 왜 저를 전속시녀로 고르셨나 해서요."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용기가 없던 소녀는 그 순진무구한 시선을 피하고는 둘러댔다.



"음, 그거야··· 워낙에 익숙하니까? 하하, 잘 모르겠네. 그래도 억지로나마 말을 해보자면···."



소년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소녀를 위해, 감기로 인해 몽롱한 머리를 쥐어짜 내어 말을 정리했다.



"난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눈치가 빨랐잖아. 그러다 보니, 다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보다는 하인으로서의 의무감? 그런 걸로 대하는 게 느껴져서 많이 불편했거든."



사실 이것은 다른 하인들의 잘못이 아니긴 하다.


그야 아무리 귀족가의 도련님이라 하더라도, 사춘기조차 되지 않은 소년에게 어찌 진실된 감정을 갖겠는가.


끽해야 귀여운 아이, 딱 그 정도의 감상을 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독 엘리스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게 느껴졌거든.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다른 하인들은 '자신이 혼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드는 게 보이는데, 엘리스는 정말 진심으로 '내가 괜찮을까.'를 먼저 생각해줬으니까."



그것이 엘리스를 전속시녀로 삼은 이유였다.


나름 말썽을 부리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가장 잘 돌봐주었으니.


부모님이나 형들이 워낙 바쁜 탓에, 가족으로서의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온 소년이 엘리스를 친누나처럼 생각하는 이유기도 했다.



"이유라면 그게 이유인데··· 만족할만한 대답이 됐을까?"



소년은, 자신의 이마에 놓인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무슨 불안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을 떨어대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던 터라 안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이지 소녀에게 있어서는 그 마음이 다르게 해석됐던 터라.



"하아, 하아··· 도련님···."


"어, 어···? 엘리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소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소년의 얼굴 앞으로 움직였다.


그 얼굴에 자리 잡은 표정은, 예전 가정교사가 주의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던 '몽마'라는 것이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로 음란해서.



"이건, 몰라요,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안 그래도 참고 있는데, 도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제 손을 꽉 잡아버리시면···."


"읏···! 엘리스, 나, 아파···!"



소녀의 손이 거칠게 소년의 어깨를 붙잡았다.


반항하고 싶어도, 며칠간 앓아누운 탓에 힘이 잔뜩 빠져버린 소년의 몸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잘못이에요··· 흐읏, 하아··· 저는, 저는 최대한 참으려고 했어요···."



지리멸렬한 변명을 내뱉으며 소녀는 소년의 입술을 훔쳤고.


잠시 후, 소년과 소녀의 몸이, 커다란 침대 위에서 겹쳐졌다.




*****




"아, 아아···."



일방적인 희롱이었다.


소년은 소녀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소녀는 소년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너무도 오래 참아왔으니.



성숙해질 대로 성숙한 소녀의 몸과 달리, 아직 그 내면은 미숙하기만 했기에 결국 소녀는 선을 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기나긴 정사의 끝에 참아왔던 욕구가 해소되고, 몸을 지배하던 본능이 이성으로 바뀌어 정상적인 상태가 된 지금의 소녀는.



"아, 아니에요··· 이러려던 게, 그런, 그런 표정을 짓게 하려던 게···."



소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물기 어린 눈빛에 담긴 경멸이, 원망이, 배신감이, 슬픔이, 증오가, 그것이 모두 진심임을 알 수 있었고.


그 탓에, 미쳐버릴 것 같은 자괴감이 덮쳐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나, 가···."



소년은 꼴사납게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자신의 시녀에게 고했다.



"다시는, 우리, 영지에, 발도 들이지 말고··· 이대로 사라져."



당장 자신의 몸을 희롱하던 사지를 뽑아내어 짐승들의 먹이로 줘도 모자라겠으나··· 그 어릴 때의 추억이, 자신을 돌봐주던 상냥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라서.


귀족 자제를 겁탈한 소녀의 입장에서는 가볍다 못해 솜방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처벌을 내렸다.



그것이 소녀의 죄책감을 더욱 자극했다.



"···네, 죄송, 아니, 아, 윽··· 아, 도련, 님··· 으, 으아···."



그 고요한 분노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마치 도망가 듯 비틀 거리는 발걸음으로 사라졌고.


그렇게, 엘리스란 이름을 가진 시녀는 저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소년의 방.


그때의 기억 탓에 매일 악몽을 꾸고 있는 소년은, 오늘도 어김없이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눈을 뜬 상태였다.



"···목, 말라."



수분이 땀으로 배출된 만큼 목이 말랐기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에 놓인 물을 마시려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방 안 구석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오랜만이에요, 도련님."


"너, 어떻게···?"



매일 밤 꿈에 나타나 자신을 희롱하던 소녀가, 그 모습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밖에 누구··· 읍!"


"소리는, 지르면 안 돼요."



위험하단 생각에 내지르려던 소리는, 알 수 없는 힘에 막혀 무력화되었고, 그 탓에 저번처럼 그저 쳐다만 볼 수 있게 된 소년은.


···소녀의 이마에 생겨난 뿔과, 등 뒤로 고이 접힌 날개, 그리고 아래쪽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네, 도련님 짐작이 맞아요. 저, 몽마랑 계약했어요."



소녀는 처량한 미소와 함께 소년의 의문을 긍정해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은 소년을 사랑했을 뿐이었는데.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신분의 격차가 있다 하더라도, 소년이라면 자신을 받아줄 거라 믿었는데.



"···도련님을 다치게 하기 싫어요. 실망시켜 드리기 싫어요.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게, 참을 수 없이 아파요."



사실이었다.


지금도 소년이 공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인식하니, 당장에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도련님을 겁탈한 그날··· 제가 너무 혐오스러워서, 호수에 몸을 던지려 했어요. 살아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토록 사랑하던 도련님에게 실수를 저지르고도, 제가 살아있을 가치가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런데···."



그때, 한 마리의 몽마가 소녀에게 다가왔다.



"도련님을, 가지고 싶지 않녜요··· 방법이 어찌 되었든, 도련님이 너의 밑에서 쾌락에 물들어가는 표정이 보고 싶지 않녜요··· 제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인형으로 만들어 너의 성욕을 채우고 싶지 않녜요···."



소녀는 앞으로 걸어가, 소년을 끌어안았다.


소년은 소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숨조차 쉴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 그 가녀린 몸을 한껏 떨고 있었다.



"···순간 혹해버렸어요. 이러면 안 됐던 건데, 지금도 도련님에게 저지를 짓을 생각하면, 심장이 쥐어 뜯겨서 무너질 것만 같은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도, 이미 몽마와 계약해버린 소녀의 몸은.



"그런 와중에도, 도련님을 보자마자 젖어가는 제가 있어요. 도련님이 저에게 깔려 애교를 피우는 모습을 상상하는 제가 있어요. 제가 벗으라면 벗고, 짖으라면 짖는 도련님의 모습에 벌써부터 욕정 하는 제가 있어요···."



소녀의 눈에서, 티 없이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없이 음란한 애액이 아래에서 흘러내리고도 있었다.



그것은 소녀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 같았고, 그 이중적인 소녀는 다시 한번 침대에 소년을 조심스레 눕히며.



"그러니까, 이해해주세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소녀가, 한 달 전의 악몽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
필력 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