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이는 이틀째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어.


언제 얀순이한테 착정당해 쥐어짜일지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 얀붕이가 숨어 있는 건 '생존 욕구' 때문이기도 했어.


이틀 전 얀진 교수가 자신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며 슬쩍 들러붙는 걸 떼어냈지만, 하필이면 그 광경을 얀순이가 봐 버린 거였지.



"ㅇ... 얀붕아? 너 지금 무슨 짓을..."



"그게 아니야! 교수님께서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시길래 거절하는 중이었어!"



하지만 얀진 교수는 얀붕이의 노력을 우그러뜨렸지.



"어머, 거절한 생각이었나요 얀붕 학생? 석박사 통합으로 오면 아주 '잘' 대.해.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일부러 특정 부분을 끊어 말하는 얀진 교수를 본 얀순이는 분노가 폭발했어. 얀붕이가 뭐라고 말릴 틈도 없이 얀순이는 무기를 꺼내들었지.



"해충 구제를 해야겠어... 박멸이 필요해!"



'현대총검술의 이해' 과목에서 A+을 받은 얀순이답게 총검술은 아주 훌륭했어. 하지만 얀진 교수 역시 교수 직함을 고스톱으로 딴 건 아니었기에 얀순이에게 밀리지 않았지.



"이런, 이번 시험에서 D+를 줘야겠군요!"



"교수 자리가 하나 빌 예정이겠지!"



살벌한 싸움판을 뒤로 하고 도망치라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 얀붕이는 최선을 다해 도망쳤어. 얀순이가 잡히면 콘돔 두 상자 분량을 짜내주겠다고 소리 질렀으나, 얀진 교수의 뒤돌려차기에 말이 끊겼지.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얀붕이는 이틀째 방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어. 자기 방이었지만 얀순이가 전에 찾아왔을 때 들어올 수 있는 방문과 창문은 모조리 봉쇄해 둔 뒤라 밖을 볼 수는 없었고, 휴대폰도 얀순이의 추적을 우려해 꺼둔 상태였지.



이틀째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얀순이의 화도 가라앉았을 테고, 이제 나가서 살려달라고 빌기만 하면 콘돔 한 박스로 봐주지 않을까하는 고민도 들었어. 하지만 얀붕이가 얀순이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상태라, 어쩌면 얀순이가 자신을 잡으려고 미끼를 놓은 게 아닌가 의심도 들었지.



"어느 쪽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네... 이걸 어쩌냐."



얀순이와 함께하면서 익숙해졌다고 자신했던 과거의 얀붕이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어. 그렇다고 계속 여기서 짱박혀있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얀붕이는 정액을 주고 목숨을 살리기로 결정했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목숨을 보전할 확률을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하던 얀붕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냉장고를 열고 소주를 깠지.



안주도 없이 병째로 깡소주를 하니 목이 아팠지만,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취기가 정신을 몽롱하게 하자 얀붕이는 한치 앞도 모를 불안감으로 찬 이 순간을 잊게 해주어서 기분이 좋았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스스로에게 되뇌인 후, 알콜에게 빌린 용기로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지.



"후... 얀붕아~?"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얀순이었어. 말라붙은 피가 검붉게 얼굴에 들러붙은 모습 그대로 살벌한 미소를 짓자, 얀붕이는 다시 방에 들어가야하나 고민했어.



하지만 얀순이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지. 얀순이는 얀붕이의 목을 붙잡은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어.



"내가 저 암캐년을 찢어버리는 동안 얀붕이는 여기서 편하게 쉬고 있었네?"



"그, 그... 그게 아니라 너를 기다ㄹ..."



두려움에 익사할 것 같은 얀붕이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문을 열었지만, 얀순이는 싱긋 웃으며 칼로 얀붕이의 오른쪽 허벅지를 내려찍었어.




"끄아아아악!!!"




얀붕이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얀순이는 칼을 내려 얀붕이의 살을 찢었어.




"내가 이겨서 망정이지, 그 암퇘지년이 왔으면 그 쪽에 꼬리쳤겠네?




누군가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만큼 중죄는 없어. 특히 그것이 사랑일 경우에는, 더더욱."




이가 빠져 너덜너덜해지기 직전의 사시미였지만 얀붕이의 허벅지를 자르는데는 충분했어. 얀순이는 찢어진 근육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지.




"끄어 흡...?!"



"득츠고 읐으.(닥치고 있어.)"




얀붕이의 비명을 입술로 틀어막고, 손을 더듬어 허벅지 안의 동맥을 잡은 얀순이는 황홀한 표정으로 웃었어. 저녁 노을 같은 미소는 안식이 아니라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지.




"탱탱하고 따뜻한 이 동맥의 촉감... 이걸 찢어버린 뒤 내 피를 수혈해주면, 얀붕이 안에 내가 살아가는 거네?"




광기에 물든 얀순이의 행동에 얀붕이는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어. 100% 확률로 죽거나 불구가 되어 얀순이에게 평생 잡혀살 거라는 예측만이 떠올랐지.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얀순이는 동맥을 꽉 쥐었어. 얀붕이는 뭔가 싶었지만, 1분이 지나자 막힌 혈액 공급과 함께 뇌에 공급되는 산소가 부족해져 의식이 흐려져 갔지.




"네가 살아서 날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나만 보게 만들 거야. 걱정 마, 식물인간이 되거나 바보가 되면 내가 평생 돌봐줄 테니까♡"




"야... ㄴ...."




그렇게 얀붕이는 정신을 잃었어.









다시 눈을 떴을 때, 얀붕이는 침대에 누워있었어. 급히 몸을 더듬었지만, 얀순이가 찌른 상처는 사라져있었어.

자신이 환각을 보는가 싶어 뺨까지 때렸지만 볼이 얼얼하자 얀붕이는 어디까지가 환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됐어.




"일어났느냐? 나를 보거라."




혼란스러운 얀붕이의 귀에, 근엄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어.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서 있었지.




얀순이와 어딘가 닮았지만, 핏기 없이 하얀 얼굴이 묘하게 섬뜩한 여성은 높지만 묵직한 어조로 말했어.




"너는 인생의 회귀를 믿느냐?"




"예?!"




난데없는 질문에 얀붕이는 당황해서 되물었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인생이 회귀한다는 걸 믿냐는 질문이라니, 얀붕이는 자기가 뭔 소설 주인공도 아니고 지금 무슨 일을 겪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얀붕이가 그러든 말든, 얀순이를 닮은 여성은 다시 질문을 던졌어.




"너에게 다시 묻겠다. 인생의 회귀를 믿느냐?"




잠시 고민하던 얀붕이는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간 얀순이와의 대화를 떠올리고는 답했어.




"아니, 우리는 딱 1번 밖에 살 수 없어. 때문에 우리의 삶이 아주 가벼운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이 너의 답이냐?"




얀붕이의 대답을 들은 여성은 달이 노을에 물드는 것마냥 엷지만, 확실한 미소를 보여주더니 얀붕이의 옆에 앉았어.




"기억하는 모양이군.


맞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설은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찰나에 지나지 않네. 리허설이 없는 1번 뿐인 삶이기에 가볍고, 책임질 일도 없고, 이 선택이 옳았는지도 알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지.



니체의 영원회귀설처럼 우리의 삶이 무한 반복된다면 삶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어려운 숙제로 느껴지겠지만, 단 한 번 뿐인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네."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어째서 무한한 반복을 가능한 삶이 더 무거운 거지?



삶이 회귀하면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수 있기에 선택 하나하나가 가벼워지고, 삶이 한 번이기에 더 신중한 선택을 하는 거 아닌가?"




얀붕이의 질문을 들은 얀순이를 닮은 여성은, 손바닥으로 얀붕이의 허벅지를 문질렀어.




그러자 그 위에 종이컵이 나타났어. 얀붕이는 대체 이 상황이 뭘 의미하는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어. 얀순이를 닮은 그녀는 종이컵을 들더니 물었지.




"너에게 이 종이컵은 소중한가?"




"어? 음.... 글쎄."




얀순이를 닮은 그녀는 종이컵을 손으로 두 번 문지르더니 얀붕이에게 건넸어. 어느새 그 안에는 잘 끓여진 라면이 들어있었지.




"먹어라."




차가운 말투로 뜨거운 라면을 먹기 좋게 식혀준 그녀의 호의에 따라, 얀붕이는 종이컵째로 라면을 마셨어. 종이컵 한 개 분량의 미지근한 라면은 1분도 안 되어 사라졌지.




"다 먹었느냐?"




"어..."




"이제 그 종이컵을 어쩔 건가?"




"당연히 썼으니 버려야..... 아!"




무심히 말하다가 무언가 번뜩 깨달은 얀붕이는 탄성을 지르며 얀순이를 닮은 여성을 바라봤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어.




"그렇지. 그 종이컵은 버려질 걸세. 1번 썼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 컵이 머그컵이라면? 넌 그게 깨진 게 아닌 이상 다시 썼을 거야. 종이컵과는 다르게, 계속 쓸 수 있을 테니.




이것이 바로 1번 뿐인 인생이 가벼운 이유일세. 우리는 1번 뿐이라는 인생이라고 책임을 지지 않는 거지.




너, 나, 우리에게 있어 인생은 종이컵과 별반 다르지 않네. 실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이니까."




"하지만 종이컵도 다시 쓸 수 있지 않아? 그 종이컵이 누군가의 소중한 선물이라면, 계속 쓰면서 아낄 것 같은데?"




얀붕이의 반문을 들은 그녀는 아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넌 머리가 기름친 맷돌처럼 잘 돌아가는군.



그렇지. 인생이란 가벼운 거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무거운 존재를 만날 수 있네."




"예를 들면?"




"넌 인력을 믿는가?"




"...?"




"인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것. 우리는 그것에 이끌려 이곳에 있는 것일세."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얀붕이는 속으로 침착하게 생각했어.




'진정해, 소수를 세자. 


2, 3, 5, 7, 11, 13, 17, 19, 23, 29, 31, 37, 41, 43, 47, 53, 59, 61....


소수는 1과 자기 자신으로 밖에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수, 내게 용기를 주지.'




당혹감으로 요동치던 심장이 진정하자 얀붕이는 다시 얀순이를 닮은 그녀에게 물었어.




"인간이 삶에서 무거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그녀는 허공에 손을 휘두르더니, 빈 공간에서 떨어진 책을 집어들어 얀붕이에게 건네며 말했어.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은 걸 기억하나? 모리 슈워츠는 이렇게 말했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파멸할 걸세.'



다시 말해, 사랑이야 말로 가벼운 우리의 삶에 무게를 부여해주는 걸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과 사람 간의 인력을 믿어야 하는 거지."




"그렇네. 이제야 뭔지 이해가 돼..."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린 얀붕이는 다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어.




"이처럼 존재의 가벼움이란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네. 하지만, 사랑이 충분한 무거움을 갖지 않는다면 어떨까?"




얀순이를 닮은 여성은 얀붕이의 손을 쥐더니 만지작거렸어. 그녀의 손이 치워지자 자신의 손에 쥐어진 책을 본 얀붕이는 이제 놀랄 기색도 없다는 듯이 제목을 읽었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거 영화 아니야?"




"영화로도 나온 거지, 소설이 원작일세.



한 번 내용을 볼까? 이 책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보여주네. 4명의 등장인물은 전부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응하지.




여주인공인 테레자는 무거움을 뜻하네. 어머니의 육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혼을 탐색하고 싶어하는 그녀는 독서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구별짓지. 



남주인공인 토마시를 운명 공동체로 여기게 된 것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 그런 거니, 그녀에게 독서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인력'인 셈이지.



그러나 가벼움에 대응하는 토마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평생 질투심에 시달리네. 자신을 특별할 것 없는 몸뚱아리로 취급하는 어머니의 말에 반하여 토마시를 통해 자신만의 특별함, 즉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었으나 자신의 육체를 다른 여자들의 육체와 동일하게 대하는 토마시로부터 상처를 입게 되지.



마지막에는 자신의 질투심 때문에 토마시의 삶을 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걸 보면,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어느 정도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네."




"이거 어째 남 이야기 같지가 않은데..."




테레자에게서 얀순이를 겹쳐본 얀붕이는 몸에 돋는 소름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어.




"뭐, 테레자가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나간 것처럼 토마시도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바뀌었으니까.



관계의 가벼움을 즐기는 토마시지만, 한없이 무거운 테레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우연에 불과한 일이라고 생각한 테레자와의 만남도 무거운 관계로 가라앉았지.



인생 말미에는 테레자와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지내고 테레자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무거운 사랑을 하게 되는 걸 보면 역시 사랑은 주고 받는 거야."


얀붕이의 말에 그녀는 작게 소리내어 웃더니 말을 이어 받았어.




"사랑을 하며, 인간은 강해지는 인력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무거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달리 말하면 사랑 없이는 관계의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이를 반증하는 등장인물이 가장 가벼움을 보여주는 사비나네. 



그녀는 대열에 합류해서 살아가기보다는 끝없이 배신하며, 미지의 세계를 탐색해나가는 걸 추구하는 인물이네. 



배신이라니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사비나가 좇는 배신은 허울 뿐인 편견 같은 걸 탈피하는 것이네. 즉, 타인의 시선 앞에 있을 때의 내 모습은 진실이 아니며 인간은 자신만의 은밀한 사적 공간에서의 비밀을 누릴 때 비로소 진실한 존재가 된다고 믿는 거지."


"그런 사비나와 정반대 되는 무거움을 보여주는 이가 프란츠지.



결혼한 상태에서 사비나와 사랑에 빠지기는 했지만, '정조'를 최상의 가치라고 여기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 사비나에게도 이혼 후 자신의 정조를 바치려고 했으나, 그런 격식적인 관계에 종속되는 걸 혐오한, 다시 말해 한없이 가벼운 사비나는 이러한 그로부터 인사도 없이 도망가지.



프란츠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분은 사라져야 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진실하기 위해서는 비밀 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믿어. 사비나와 모든 면에서 정반대된다고 할 수 있지."




"그 점이 재밌는 부분이네. 서로 정반대되는 성향의 이들이 이끌린다는 점, 이것이 인력이 아니겠나?"



"확실히, 그렇게 볼 여지도 충분하지. 실제로도 사람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가진 상대에게 끌린다는 이론도 있으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보네. 너에게는 없는 사랑의 기술, 그걸 가진 얀순이에게 인력이 작용해 끌린 것이지 않나?"



얀순이를 닮은 그녀의 말에 얀붕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어. 얀붕이가 얀순이에게 끌린 점이 자신에게 없는 활발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난 그게 사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게 사랑이니까."



"너는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느냐? 이 책에는 등장인물 외에 카레닌이라는 강아지 한 마리가 더 나오지.



테레자는 자신과 토마시의 사랑보다 자신과 카레닌의 사랑이 더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네. 카레닌과의 관계에서는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며, 자신을 위해 타인이 자신의 모습을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존재 그 자체로서 서로가 의미를 가지기에 가장 숭고한 사랑인 셈인거지.



너는 너와 얀순이의 관계도 카레닌처럼 서로 주고 받는 관계이기를 원하는 것이냐?"



"당연하지! 그게 내가 바라는 거라고."



얀순이를 닮은 여성은 혀를 쯧쯧 차더니 말을 이었어.



"너는 토마시, 얀순이는 테레자다. 너와의 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무거운 사랑을 하는 것이 얀순이인데, 너는 가벼운 사랑을 위해 도망치고 있구나."



"하, 그건 사랑이 아니야."



기가 차다는 투로 말하는 얀붕이에게 다가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맞댄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어.



"얀순이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네 존재의 가벼움을."



그 말을 마치자 마자, 그녀는 얀붕이의 허벅지에 칼을 꽂아넣었어.



"끄아아아아악!!!"



기겁한 얀붕이가 그녀를 밀쳤지만, 되려 그가 튕겨나가 나동그라졌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얀붕이에게 그녀가 말했어.



"아픈가?"



"그야 당연히! 아.... 안 아프네?"



칼이 꽂힌 자리에서 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고 통증도 느껴지지 않자 얀붕이는 당황을 숨길 수 없었어. 누가 봐도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걸 이제 알겠나? 난 그저 너의 일부분이지만, 반드시 기억해라.



얀순이가 네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음을."




그 말과 동시에 얀붕이의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어. 시야와 함께 어두워져가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끝내 얀붕이는 정신을 잃고 말았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얀붕이 자신의 방이었어. 욱신거리는 허벅지의 통증이 이번에는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지.



"이런 젠장..."




일어나야한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지만,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이 묶인 걸 깨닫고 말았어.




"얀붕아... 어디 가려고?


또 얀진이 그 년 만나러 가는 거야? 교수 자리가 그렇게 좋았어? 책상 아래에서 물고 빨고 다 해주려고 했네? 널 혼자 둔 내 잘못이지, 지금이라도 내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도록 1주일간 이 상태로 계속..."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얀순이가 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왔어. 말라붙어 적갈색이 된 피가 묻은 칼을 얀붕이의 목에 들이밀며 속사포로 내뱉는 말을 듣던 얀붕이는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지.




그리고 생각했어. 이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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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더 철학적인 내용인데, 인간의 행복에 관한 부분까지 쓰면 너무 방대해질까봐 삭제했어. 


얀이 충분히 들어갔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