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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그녀를 찾아가 격려라도 해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찾아가서 무어라 말한단 말인가, 방해나 아니면 다행일텐데.


‘응원단장도 아니고 말이지’


애초에 기존의 귀족이였다면 후계 수업을 다 받아두고 회계같은 것은 당연히 할 줄 알 것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차남도 먹고 살지 않겠나.


잘못 걸려서. 시켜보니 못하면, 또 얼마나 덜떨어진 인간으로 볼지 생각하면 이것이 맞는 일이다.


‘한번 한심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면 끝이다.’


그래서 혼자서 조용히 책이나 읽고 있었더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하게 저물어 황혼녘의 노을이 보였다.


오랜 시간 혼자서 책을 읽느라 굳은 어깨와 목에 스트레칭을 해주던 차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어쩐일이시죠?”


-데미안님, 저녁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식당에 준비가 되었사오니…


“아, 지금 가죠.”

-알겠습니다. 


읽던 책들을 제자리에 정리한 후, 기다리던 시녀를 대동한 채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혹시 멜리사는 어디있나요?”

“지금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실겁니다.”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왜 벌써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혹여나 내가 너무 늦은 걸까?


“저, 이름이…, 방금 식사 준비 다 된 것 아닌가요?”

“네, 식사준비는 방금 다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어쩐지 후작님이 식사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계셨습니다. ”


그리고 그녀가 아. 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 이름은 이난나 입니다. 편할대로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싱긋 웃으며 한 줄로 땋은 밝은 갈색의 머릿결을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채 걷는 이난나는 멜리사처럼 사교계의 꽃 같은 화려한 아름다움은 아니더라도.


청초한 느낌이 감도는 이목구비와 차분함을 갖춘 기품있는 태도는 구태여 시녀를 하지 않더라도 제법 견실한 혼처를 찾아갈 수 있을 터였다.


“아, 네… 잘 부탁합니다.”

“너무 딱딱하게 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후작님의 남편 되시는 분이니. 저희에게도 존대도 하실 필요 없고요”


앞으로도 함께 지내는 동안 서로 간에 불편함이 없도록 사전에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어떻게 반말을 하냐고.’


내 나이 또래의 미녀와의 첫 대면부터 반말을 하다니. 생각만 해도, 내 속에 지금도 살아숨쉬는 K-유교맨의 자아가 발작을 할 것이다.


“아뇨, 그래도 전 존대가 편합니다. 편하다고 하대가 자연스러워지면.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존중하지 못할 지도 모르기에…”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자 이난나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어 입을 가린 채 웃으며 말했다.


“특이하신… 분이군요…”


반달처럼 눈꼬리가 곱게 휘어지며 웃는 이난나. 상급자로써 개념있는 상사라는 이미지가 박혀 소문으로라도 평가가 높기를 바라며 한 대화가 성공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식당으로 도착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정도로 갓 만들어진 자태를 뽐내는 음식들.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지만 고작 그녀와 둘 만의 만찬을 위한 음식이었다.


그 끝에는 상석에 앉은 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멜리사.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루비 빛깔의 눈동자.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 마치 관찰을 당하는 듯한 살피는 눈동자에 가까울 뿐.


“멜리사, 많이 기다렸지?”


자신이 말을 걸자 드디어 자신만의 공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


“앗, 아뇨! 저도 방금 왔답니다?”

“에이, 거짓말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다 들었거든. 먼저 먹고 있지… 미안하게…”


자신의 거짓말이 들킨게 조금 부끄러웠던 걸까. 새하얀 귀가 조금 붉어졌다.


“그게… 오늘 아침을 제외하곤 데미안을 못봐서… 저녁에라도 보고싶어서…”


귀여운 말을 해온다. 뿌듯함에 입가에 절로 걸리는 미소. 화만 나지 않으면 이렇게나 귀여운 그녀인데도 나는 독점할 수 없다. 욕심낼 수 없다. 나는 그저 2년 후 사라져줄 계약에 묶인 혼약자일 뿐이었다.


“에이… 못봤더라도 잘 때에는 볼 거 아냐?”

“……합방해도 괜찮아요?”


착각했었다. 부부니까 현대인의 감성으로 당연히 같은 방에서 잘 거라고 생각했다.


‘아 맞다. 여기 중세였지…’


귀족은 부부의 방이 따로다. 그저 날 맞춰서 부부관계의 날을 따로 정할 뿐. 금슬이 좋은 부부야 의미가 없겠지만. 이러한 정략혼의 경우 서로의 개인공간을 존중하는 편이다.


중세 귀족과는 다른, 현대에 맞춘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어… 응. 언제든 방문해도 괜찮은데?”

“어, 언제든요? 나, 낮에도? 합방을…?”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걸까. 아니면 왜 멜리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걸까.


달아오른 얼굴로 깨작깨작 음식을 씹고 있는 그녀는 어쩐지 기뻐 보였다.


‘뭐 어때 섹스만 안하면 되는 거 아냐?’


자신도 그녀를 안고 자면 오히려 기쁠 터였다. 그럴 심산으로 씹던 고기를 삼키고 말했다.


“그래 잠만 같이 자는 건 계약사항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도 웃으며 마주 확답을 해줬을 뿐인데. 멜리사의 미소에 금이 갔다.


‘…내가 또 말 실수했나?, 분명 계약범위 밖이니 상관없다라고 전달한 것 같았는데… 전달이 잘못된건가?’


“그으… 네… 그렇죠? 응…”


침울한 기색으로 내리깐 눈동자. 같이 잠을 자고 싶어서 합방을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설마.


‘에이 설마, 어제 처녀였던 사람이 무슨.’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가정에 실소를 머금었다. 무슨 처녀가 남자에게 안긴지 하루만에 섹스를 바라겠는가. 하물며 여기는 여성향 로판 세계였고. 자기들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알텐데 고증을 개판칠리가 없지않은가.


괜히 그런거 무시했다가 남자 작가로 낙인 찍히면 연독률이 나락가는거다.


‘미친년들… 작가의 성별이 무슨 죄가 있다고…’


어찌됐든 내 착각은 제쳐두고 그녀의 기분을 헤아릴 차례였다.


“멜리사.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좋아.”

“으응… 아니야, 그냥. 좀 입맛이 없네…”


부정하는 그녀였지만 애써 감추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참견하면 선 넘는게 아닐까?’


“그렇구나… 혹시라도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꼭 말해줬으면 좋겠어.”

“응… 미안한데, 나 먼저 일어나 볼게…”


나에게 감추는 것이면 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을 터다.



 먼저 일어난 그녀를 따라. 나도 빠르게 식사를 마무리하며. 그녀와 함께 지새울 밤을 기다렸다.


여자란 참으로 어려운 생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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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데미안은 눈치가 없어요!


이제 멜리사가 꾸민 계략을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