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이와 사귄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내가 과연 이런 사람과 사귀더라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선경이에게 감사할 뿐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행복할 기회를 줬으니까. 모두에게 실망만 시키던 나를, 단 한명만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도록 바꾸어준 사람이니까.

선경이와 사귀고나서, 나는 잃어버린 내 자존감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선경이에게 더욱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원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한번 연필을 손에 쥐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고, 저녁 이후로는 야간 대학을 다녔다. 새벽에 돌아오면 짧은 시간동안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공부를 하는 나날.

이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해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힘들었으나 선경이가 나를 뒷받침해주었다. 연상인 내가 챙겨주어도 모자랄 판에, 틈틈히 시간을 내서 나를 응원하러 와준다거나 도시락도 가져온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도 모든 것이 선경이의 덕분이다.

나는 자격증 공부를 하며 혼자 도서관에 박혀 있는 반면, 선경이는 성과가 인정받았는지 얼마 있지 않으면 승진을 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 소식을 듣는 나는 정말 기뻤다. 그렇게 상사에게 많이 혼났었는데 결과로 보여줬으니까.

근데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금 내가 열심히 자격증을 딴다하더라도 아직은 이룬 것이 없다. 그러는 와중에 선경이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너무 불안했다.

언젠가 선경이가 나를 떠나가지는 않을까. 물론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계속.. 계속 불안했다.

————

2년 만에 야간 대학의 졸업장을 수료하고는 곧바로 취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 공부를 하는 중간 중간에 자격증 공부도 미친 듯이 해서, 남들이 몇 년간 따야할 자격증들 또한 비교적 빠른 기간 안에 따낼 수 있었다.

공부를 하는 동안,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부모님은 왜 잘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냐고 성을 내셨고, 친척들 또한 나를 무시했다. 과연 니 까짓게 열심히 한다고 뭐가 되겠어. 그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으니까.

그런 것들이 나에게 자극이 되기도 했으나, 가장 큰 자극제는 앞서나가는 선경이었다. 최근에는 해외에도 연수를 받으러 떠난 선경이는 일이 끝날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게 너무나도 기쁘기도, 우울해지기도 했다.

‘미국인들이 뭐라 하는지 모르겠어 ㅋㅋ’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오빠. 보고 싶다.’
‘일은 비교적 할 만한데, 오빠가 없으니까 너무 힘들다 ㅜ.ㅜ’

분명히 자신도 힘들 텐데, 나를 배려해서 일부러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런 배려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내가 선경이를 기쁘게 해줘야할 차례다.

정장을 차려입고, 여태까지 준비해왔던 면접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긴다. 손은 나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반대손으로 잡아 떨림을 조절한다. 그리고 내 이름이 불렸을 때, 대기하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면접실로 향했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질문들이 나와서, 준비했던 대로 잘 대답했다.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 또한 잘 넘어갔다. 나름 어렵다고 생각했던 영어 면접을 잘 통과해서 기분이 좋았다.

면접이 끝날 때쯤, 면접관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이건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 질문이니 편하게 답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원자님보다 훨씬 뛰어난 지원자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그럼에도 딱 하나, 자신을 뽑아야할 이유가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질문을 들은 순간 확신이 들었다. 지금의 대답에 따라서 내가 꿈에 그리던 회사에 다닐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된다는 것을. 아까까지의 긴장은 긴장도 아니었는지 미친 듯이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내 입을 열릴 줄을 몰랐고, 1초가 마치 1시간만 같았다. 계속 가만히 있자 말을 하려는 면접관님을 보고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면접관님께서 말하신 것에는 틀린 점이 없습니다.’
‘분명히 저보다 능력이 뛰어난 지원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이 회사에 지원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 준비를 했다하더라도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서 열정만큼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서투른 저에게 있어서, 일어날 기회를 주었던 사람이 제가 깨우치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더 잘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제가 더 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회사가 최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회사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더 잘한다고 말한다면, 어떤 점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건가요?’

아까 입을 열려던 면접관이 내 말을 듣고는 다시금 질문했다.

‘면접관님께서 생각하시듯, 저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특출난 점이 없어보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었구요.’
‘하지만, 이 회사를 준비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다면 정말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이상으로 면접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는 문으로 안내하는 직원의 지시에 따라 오른쪽의 문으로 나갔다. 문을 나선 순간 여태까지 해왔던 고생들이 눈 앞을 스쳐가며 모든 긴장이 풀렸다.

결과는 예상을 할 수가 없다. 방금 마지막 질문에 제대로, 아니 좋은 대답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나의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과정에 충실했다. 방금의 면접을 위해 2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단 한 치의 후회조차 나에게 남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했다.

회사에서 나오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선경이었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선경이에게 국제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비용이 많이 든다고, 보이스톡을 하자고 했던 선경이지만, 지금만큼은 당장 전화가 하고 싶었다.

뚜루루- 뚜루루- 뚜뚜뚜뚜

그렇게 몇 번이고 수신음이 울리다가 끊어졌다.

선경이가 전화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했지만, 지금쯤 자고있을 선경이를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대충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탄 나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리고, 부모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2년간 공부하며 모든 학비와 식비는 내가 모아둔 돈으로 했지만, 그래도 전화를 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만 같아 전화를 드렸다.

뚜루루- 뚜둑

‘여보세요?’
‘엄마. 나 오늘 면접 봤어.’
‘뭐라고?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몇 번이고 나를 보기 위해 올라오셨었다. 내가 자격증도 여러 개 땄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응원해주셨었다.

‘아니, 괜히 걱정 끼치기 싫어서 일부러 말 안했어.’
‘그래서, 괜찮게 한 것 같니 아들?’
‘모르겠어. 결과는 정말 모르겠는데, 후회는 1도 없어.’
‘그래.. 그러면 됐지 아들. 시간 날때 집 한번 내려와. 아버지도 말만 그렇지, 너 엄청 보고 싶어하신단다.’
‘알았어요. 결과 발표나면 이야기해줄게요.’

전화를 끊고 집으로 들어가는 나. 2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도서관에 나가, 밤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이런 대낮에 집에 오는 것이 처음이라 집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한다. 정말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결과가 좋으면 더 좋겠지만, 떨어지더라도 후회는 없다.

노력하기 전에는 후회할 것이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노력하고 보니 나는 결과에 순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얻게 되었다. 그만큼 과정에 열중했으니까.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잠을 자지도 않고 그냥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 집에 있는 게 어색해서일까.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을 보고는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고 침대로 돌아가자,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이 시간에 연락 올 사람이라곤 선경이 말고는 없었다. 그녀의 출근 시간이었으니까.

‘오빠! 괜찮아?’
‘응? 뭐가?’
‘오빠 기분 괜찮냐구..’
‘기분이야 아무렇지도 않아. 그보다 면접은 안 물어봐?’
‘당연하지. 회사보다 나는 오빠가 더 중요한 걸.’
‘풉.. 덕분에 힘이 좀 나는 것 같네. 아무래도 낮에 집에 오니까 어색해 죽겠더라.’
‘집에 있는게? 오빠 정말 웃긴다.’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긴다. 자기 집이랑 어색한 사람이라니.’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컨디션부터, 면접 내용까지. 원래는 다른 이들에게 말해서는 안되는 내용이지만 선경이에게는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오빠, 정말 수고 많이 했어. 나 한국 돌아가면 꼭 안아줄게. 진짜.. 진짜 고생했어.’

대답이 나와야하는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그렇게 선경이가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뭔가가 벅차올랐다. 면접보다도 더욱 대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고, 결국은 눈물을 쏟아냈다.

‘선경아. 나 진짜. 노력했다? 나 너무 힘들었어.’
‘응 알아 오빠. 뚝 그쳐. 왜 오빠가 울어. 나도 눈물나게..’
‘나 공부하면서 나쁜 생각도 많이 했었다? 너만 앞서나가는 것 같아서 너한테 질투도 하고, 너가 나를 떠나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어.’
‘오빠, 내가 그럴 사람 아닌 거 알잖아.’
‘알지, 아는데도 너무 불안한 거 있지. 나 같은 한심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너를 쫒아갈 수는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오빠.. 오빠는’
‘근데 이제는 아니야. 내가 어떤 결과를 얻더라도 단 한가지만은 변치 않을게. 내가 못났든, 잘났든 네 옆에 항상 있을게.’

비록 같이 있지는 않지만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통화를 하며 울고 있던 것은 나에서 선경이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내가 오히려 선경이를 달랠 정도로 선경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좀 울음이 그쳐?’
‘오빠야 말로.... 나도 오빠 때문에 울었잖아.’
‘그래, 나는 이제 자야겠네, 과로하지 말고, 힘들면 쉬면서 해.’
‘응, 오빠.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갈게.’
‘사랑해.’
‘나도.’

전화가 끊어지고 흐뭇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면접을 마쳤을 때는 아무런 느낌 없었는데, 선경이와의 전화가 끝나자 드디어 2년간의 모든 고생이 보답 받는 것만 같았다.

————

일주일이 지나고 면접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결과가 발표되고도 5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결과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혀 결과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 확인 버튼을 보자 망설여졌다.

내 2년간의 노력은 보답 받을지, 보답 받지 못할지.






[확인] - 확인 버튼을 누를 시 귀하의 합격 여부가 공개됩니다.

딸칵-

마우스는 눌러졌고, 화면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제 정말로 눈만 뜨기만 하면 된다.

아까부터 떨리던 마우스를 잡은 손에 연달아, 눈꺼풀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결과를 확인했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이름 : 권진섭
면접 번호 : ABCD-1234


결과를 본 나는 가만히 눈만을 깜빡거렸다. 이게 정말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나의 눈은 지금 본 것이 사실인지 계속 화면만을 응시했고, 내 두뇌도 이게 정말인지 믿지 못했다.

정말 보고도 못 믿을 상황이었다. 친척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헛된 짓이라 무시받았지만 내가 해냈다. 내가 정말로 해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선경이의 생각도, 부모님의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뛰듯이 일어난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씨발!!!!! 씨바아아아아아아알!!”

어째선지 욕밖에 안 나왔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기 위한 보통의 욕설이 아닌 기쁨의 표현이었다.

“내가!!! 내가 해냈다아아아!!!!!”

지나가던 사람들은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봤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그래 오늘만큼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집에서부터 걸어서 30분은 걸리는 도서관까지 5분 만에 뛰어갔다.

이제는 집보다 익숙한 도서관의 모습이 보였고,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항상 아침마다 나를 맞이해주던 경비 아저씨가 거기 있었다.

“학생? 일주일 동안 안 오더니 뭔 일인가?”

“아저씨!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발바닥이 아파왔고, 도서관에 있던 사람들도 나를 쳐다봤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으잉? 학생 신발은 어디 갔는가?”

“아저씨! 저 합격했어요. 합격했다구요.”

선경이도 분명히 이 소식을 들으면 나보다도 좋아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당장 나와 기쁨을 공유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경비 아저씨.

“정말인가? 축하하네. 허허. 합격해도 이렇게 찾아오는 학생은 처음 봤네. 다들 부모님이나 친구들 보러가서 나는 뒷편이 되니까 말일세.”

사실 선경이가 한국에 있었다면 나도 경비 아저씨를 뒤로 했겠지만, 뭐 이건 비밀이다.

내가 합격해서 기쁘긴 하지만, 소음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경비아저씨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오셨다.

“잠시만 기다리게.”

그렇게 말한 아저씨는 금방 새 슬리퍼를 한 짝 들고 와서 내 발 부근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아무리 급해도, 신발은 신고 와야지. 학생.”

“아.. 죄송합니다.”

슬리퍼를 신자, 아까까지의 내 추태가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미쳤다. 미쳤다. 나도 미쳤고, 회사도 미쳤다. 나를 뽑아줬다고? 정말로?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고 경비 아저씨께 휴대전화를 잠시 빌려주겠냐고 물어보자 흔쾌히 휴대전화를 내주시는 아저씨.

나에게는 익숙하지만 어려운 번호를 입력한다.

뚜루루- 뚜루-

‘여보세요.‘

‘아빠.’

‘..... 웬일이냐.’

‘나 합격했어.’

‘.....’

‘나 Y 회사에 합격했다고!!’

내가 합격을 했음을 알려도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나도 침착하게 되었다.

‘아빠?’

‘정말 수고 많았다. 아들. 아비가 너를 믿고 도와줬어야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

원망스럽지 않았다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원망스러웠다. 그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버지에게서 나한테는 하나의 도움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했고, 결과까지 성취해냈다.

‘아비가.. 정말 미안하구나. 우리 아들 내가 아니면 누가 믿어준다고...’

아버지가 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나도 그에 대답한다.

‘아빠, 오늘은 기쁜 날이잖아. 내일 오랜만에 내려갈게요.’

‘오냐, 내일은 외식을 가자꾸나..’

오랜만에 대화를 하더라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나름대로도 많은 고민이 있었겠지.

더 이상의 고민을 하면 시간만 지체될 것 같아, 경비 아저씨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고 잡담을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슬리퍼를 돌려주고 가려했지만, 경비아저씨가 마지막 선물이라며 그냥 주셨다.

슬리퍼를 대충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원래는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가 이상하게도 짧게만 느껴졌다. 들뜬 마음을 잠재우지 못하는 것인지 콧노래도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집의 문 앞까지 도착하자, 평소와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옆집’

그렇다. 옆집의 문이 열려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옆집에 신경을 쓰느냐면 기분이 좋아서 무시할 법도 했지만, 옆집은 뭔가 꺼름칙하다.

처음 내가 아파트로 이사를 왔을 때,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인지 떡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첫번째 타자가 옆집이었다. 하지만 문을 두드려도, 초인종을 울려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집에 없는 건가 싶어서 다른 분들께 먼저 떡을 돌렸다.

옆집을 제외한 곳에 떡을 다 돌리고는 다시 옆집을 찾았다.

쿵쿵-

‘저기요, 안계세요? 바로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 잠시 문 좀 열어주실래요? 떡 돌리러 왔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것인지 반응이 없었고, 아쉽긴 했지만 문을 열고 내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옆집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옆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떡을 들고 있던 나는 뒤로 넘어졌다.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얼굴이 머리카락으로 가려져서 마치 귀신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으악!’

하필이면 넘어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떡조차 놓쳐서,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검은 머리의 여성은 앞이 보이는 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계속 쳐다본 것만 같다.

‘아.. 그.... 죄송합니다. 제가 민폐를 끼쳤네요. 제가 먹을 떡 남은 게 있는데 그거라도 가져다 드릴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실은 그 당시 자리를 어떻게든 비우고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도망친 것이었다.

진정이 된 후,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마지막 떡을 가져와 옆집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머리는 감지도 않았는지 푸석푸석해보였고, 옷도 주름진 채있었다. 아무래도 집에서 나오지 않는 모양. 쉽게 말하자면 히키코모리로 보였다.

“......”

“네? 뭐라구요?”

분명히 뭐라고 말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고마워요.. 맛있게 먹을게요.”

그 말만을 남긴 채 옆집의 문은 닫혔다.

근데 이게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집을 들락날락거릴 때, 긴머리 여자는 집에서 나온 흔적조차도 없었다. 어쩌다가 옆집에 사람이 갈 때가 있는데, 그것도 마트에서 주문한 것이 배달 왔을 때 뿐이었다.

문은 또 얼마나 빠르게 닫는지, 맨 얼굴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문이 열려있었다. 소심하게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안 좀 보세요 하는 것처럼 활짝 열려져 있었다.

내 집으로 가기 위해선 어쩔 수없이 옆집을 지나가야했기에 최대한 옆집을 쳐다보지 않으며 걸어갔다.

좋은 이웃이라면 가능한 친해지고 싶기는 했지만, 방에 박혀서 절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과는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열린 문을 다 지나갈 때쯤

“저기요.”

“으아악!!!”

또 나왔다. 앞머리를 길게 내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옆집 그 사람이. 머리는 오랜만에 봤음에도 여전히 퍼석퍼석했다. 설마 2년 넘는 기간 동안 머리를 감지않은 것은 아닐까.

불쾌한 기색을 숨기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라해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먼저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자기 나타나셔서 좀 놀란 것 같아요.”

“괜찮아요. 보통 다 그러니까요.”

“....”

“....”

이 상황이 너무나도 거북하다. 지금 왜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는 뭔가요?”

“아까.. 욕을 하면서 집을 나가시길래 뭔가 안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요...”

아무래도 합격을 보고 눈이 돌아간 내가 욕을 하며 집을 나간 일을 말할 것이다. 즉 지금 옆집 사람이 문을 열게 된 이유는 나라는 것이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뭔가 나쁜 일이 있어서 욕을 했다기보다는, 너무 좋은 일이 있어서..”

“.....”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예상도 못하겠다.

“회사에 붙으신 건가요?”

어? 내가 회사에 붙은 건 어떻게 알았지? 순간적으로 위화감이 든다. 나는 뛰어나가면서 욕설과 해냈다라는 말밖에 하지않았을 텐데..

“네. 어떻게 열심히 하다보니까 결과가 좋게 따라왔네요.”

“....”

일방적으로 물어보고, 나한테서 대답이 돌아오면 다시 꾹 입을 닫는다.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대화였다. 그래도 이웃인데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근황을 물었다.

“그.. 밖에는 잘 안 나가시는 거예요?”

“....”

먼저 질문을 해도 답이 없는 건가..

“아뇨.. 지금 나왔잖아요.”

“네?”

“밖에 안 나가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설마 지금 문에서 한발짝 나왔다고 밖에 나왔다는 말인가? 엄연히 말하자면 맞는 말인데..

“아하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소음 안 일으키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만..”

왠지 모를 두려움에 이 자리를 회피하려했다.

“죄송한데..”

아직도 궁금한 게 끝이 나지 않았는지 다시 입을 여는 여자. 아니 입을 열기는 했을까? 입이 안보여서 모르겠다.

“어떻게 ‘나온 거’에요?”

나왔다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저도 나가보려고 했는데..”

“죄송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조금 자세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질문의 의도를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취직도 축하드리구요.”

그 말과 함께 옆집 사람은 문 안으로 사라지고, 문도 그에 따라 닫혔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밤이 되었고, 선경이에게는 아침이 되는 시간. 선경이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오늘은 나 잘때라도 괜찮으니까 전화하라고 했잖아!’

‘미안해, 그래도 너 자는 거 괜히 깨우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평소같았다면 나의 상태부터 확인할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선경이라고 해도 합격 여부만큼은 궁금했다보다.

‘어떻게 됐게.’

‘오빠!!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빨리!!’

‘합격했지. 당연히’

그렇게 행복에 겨운 통화를 30분쯤 하다가 마쳤다. 이번엔 내가 울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슬픈지 먼저 우는 선경이.

드디어 내가 선경이를 기쁘게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여태까지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알았다. 나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일은 부모님 댁, 다음주가 되면 선경이도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갔다.

————

정말 모든 것이 보기 싫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비롯해, 같은 나이대라는 공통점으로 모인 사람들. 모두가 싫다.

하지만 의무교육이라는 것은 나를 학교에 가도록 강제했다. 부모님은 나를 원치 않았고, 학급의 아이들 또한 나와 친해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아이, 그게 나 우예은이다.

말 그대로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 또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무관심, 가정부의 방관은 나를 무감정하게 만들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깨달은 것 아닐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그래. 뭐라도 와야 내가 뭘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그 기초적인 사랑도, 관심도, 케어도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에서는 다른 학생들과의 차이점을 알았다. 나는 그들처럼 밝게 웃을 수 없었고, 그들처럼 좋은 부모님을 가지지 못했다.

자연스레 왕따가 된 나는, 혼자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이 무관심이라는 지옥속에서 누군가 구해준다면 좋을 텐데..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랬다. 왕자님이든 공주님이든 상관없었다. 나를 구해주기만 한다면.

그런 생각만을 하며 학창생활을 했다. 혼자 깨어나, 혼자 학교를 다니고, 혼자 집에 들어와, 혼자 잠에 든다.

원래부터 그렇게 살았으니 언젠가는 익숙해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외로움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부모님께 말했다. 어디든 좋으니 혼자서 살 곳을 달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은 돈 하나는 많았다. 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 살 수는 있을 정도로.

그래서 나는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집을 떠났다. 집... 과연 그 곳을 집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사는 생활은 별 다른 점이 없었다.

원래도 혼자 살았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내가 환청을 듣는 것인가 싶어서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러자 아까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는 듯, 이번에는 초인종이 울렸다.

‘~~~$%#@’

하도 집에 혼자만 있다 보니 말도 잘 못 알아듣겠다. 아니 내가 말을 제대로 할 수는 있을까? 시험삼아 혼자 목소리를 내보니 갈라진 듯한 흉측한 목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아.... 아아...”

목소리조차 이렇게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내가 과연 나가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문을 두들기던 사람도 지쳤는지 떠났다.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눈물은 흘리지 않게 된지 오래였지만, 이 찐득하고도 가라앉는 듯한 기분만큼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날 찾아온 사람이었다. 근데도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다.

구제 못할 쓰레기, 병신, 낙오자, 히키코모리, 폐인, 오물, 바이러스, 민폐

이 모든 것을 합치면 나라는 존재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사는 이유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이렇게 외롭게 죽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서 살아간다.

하지만.

샤워는 먹던 음식이 몸에 실수로 떨어질 때만 하는 더러운 사람이 나였다.

머리를 깎는 것은 나만의 집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없었던 지저분한 사람이 나였다.

그렇게 집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지내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 나였다.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까?

언제나 하던 지독한 자기혐오를 끝낼 때쯤, 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가야겠다.. 그래 이번만 나가보는 거야...

문을 천천 열었다.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본 것일까? 발걸음이 내 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이게 얼마 만에 만나는 사람인가. 아니 대화는 할 수 있는 것일까?

문으로 다가온 사람은 안에 있던 나를 보고선 뒤로 넘어졌다. 덩달아 손에 있던 떡도 떨어졌고.

‘으악!’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도 놀랐다. 뭐 때문에 이렇게 놀랐.. 아.

지금 나는 머리카락을 앞으로 내린 상태였다. 나야 익숙해져서 앞이 보였으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낮에 귀신을 본 기분일까.

‘아.. 그.... 죄송합니다. 제가 민폐를 끼쳤네요. 제가 먹을 떡 남은 게 있는데 그거라도 가져다 드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당황한 기색의 남자는 빠르게 옆집으로 들어가 새로운 떡을 가져왔다. 옆집에 이사를 와서 떡을 주러 온 모양이다.

“고마워요”

“네? 뭐라구요?”

내 말이 잘 들리지 않은 것일까.

‘고마워요.. 맛있게 먹을게요.’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떡을 보았다. 아직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아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일까.

항상 식은 국과 식은 밥만을 먹던 나에게 따뜻한 음식이란 굉장히 접하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오히려 따뜻한 음식이 어색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너무나도 오랜만에 본 따뜻한 음식이라 그런지 손이 저절로 움직여서 투명한 포장을 벗겨내었다.

그러자 손에 올려져 있는 것은 팥이 가득한 시루떡이었다.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지긴 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청소는 하지 않으니. 그리고 집에 불 또한 키지 않았기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벌레야 뭐 생기는 즉시 죽이면 그만...

한 손으로 떡의 끝부분을 떼어내 입으로 가져간다. 처음에 느껴지는 것은 팥의 달고도 부드러운 식감. 그 다음은 떡의 쫀득쫀득함. 왜일까. 그냥 이사 온 참에 돌린 떡일 텐데...

왜 이렇게 맛있을까.

한 손으로 떼어먹던 떡을 어느새 나는 입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입에 넣지 않으면 혹시라도 사라질까봐. 이 온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싶어서.

떡을 다 먹고 나자, 다시 미칠 것 같은 자기혐오가 나를 찾아왔다. 고작 떡 하나로 이렇게 기뻐하는 병신년이라며 내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것만 같다.

손도 씻지 않은 채, 다시 침대로 가서 몸을 눕힌다. 잘 때만큼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

이러다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둡고 더러운 방에 죽어있는 나. 어울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를테니까, 한 달마다 오던 배달원이 신고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이 방에서 내 시체는 썩어갈까?

침대에서 뒤척거리고 있자 벽을 통해서 소리가 들려온다.

“하.. 힘드네..”

아까 나에게 떡을 주고 간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사이의 벽이 얇게 시공된 것인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공감하는 나. 나도 내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한다. 근데 기묘하게도 남자에게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날부터, 매일같이 옆방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아침에 깰 때는 끄으응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피며, 밥을 차릴 때 은근히 콧노래를 부르는 것도 알게 되었다. 술을 마시고 온 날에는 푸념을 하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그 또한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내뱉는 말들이 내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나는 왜 사는 걸까.”
“나같은 쓰레기가 살 가치가 있는 걸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내 옆방에 나와 동류인 사람이 산다는 것이.

하지만 그는 돈은 많이 없었는지 평일마다 일을 하러 나갔다. 나도 그가 일을 하러나가는 동안은 멍하니 벽을 쳐다보거나 보지도 않는 TV를 틀어놓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그가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그의 목소리가 언제쯤 들릴까 기대한다.

신발을 벗는 소리가 날 때는 그가 현관에, 옷을 벗는 소리가 날 때는 부끄럽지만 거실에 있는 듯했다.

그가 목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주의 깊게 들으면 들리는 주변의 소리 덕분에 그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침대가 있는 방은 내가 누워있는 방과 붙어있는지, 잘 때는 마치 그가 내 옆에서 자는 것만 같은데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었다.

건너편을 통해서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소리.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그가 여자를 데려와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나와 동류인 사람이?

하지만 금방 알아챘다. 매트리스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거칠어진 숨소리가 그가 자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장난이었다. 옆집의 남자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집에 돌아올 때면 마치 그가 옆에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어느 날은 그가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최대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그의 목소리가 낯선 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커텐을 살짝 올려 바깥의 벤치를 보자 어떤 여자와 옆방의 남자가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의 옆에 있어야하는 건 난데. 나여야 하는데. 나여야 한다고. 분노로 머리가 가득해졌지만 내 몸은 그 광경을 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와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한 번만 그럴 줄 알았는데, 가끔씩 남자가 방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꼭 저기서 여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 마지막 보루를 빼앗아가지 말아줘.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이야. 나 이제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 저 남자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 내 작은 인연을 앗아가지 말아줘.

제발!!!!!

오늘은,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벤치에도 여자와 남자가 없다. 저녁 때, 여자를 차에 태운채 남자는 떠났으니까.

나는 버려진 걸까? 나 이제는 싫어. 더 이상은 싫단 말이야. 제발 나를 좀 구해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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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어낸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가 우예은인 듯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