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또 지끈거려온다. 그 어두침침한 마왕성에 있을 때나 가끔 느껴지던 두통이 요즘 들어서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두통의 원인인 이 여자는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듯 해바라기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왕좌의 팔걸이에 올라타 앉아있다. 팔로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밀어내려고 해도 오히려 엉덩이에 힘을 준 채 슬금슬금 내 팔에 엉덩이를 붙여오길래 아예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앉았다. 


'이제 슬슬 허리가 아픈데.' 


"플로리에."


"응? 왜애?"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비단 같은 금빛 머리카락이 파도치듯 출렁거린다.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듬뿍 묻어나오는 애정은 남성을 녹여내릴 것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지나친 달콤함이 되려 문제를 불러일으키듯, 그녀의 애정 담긴 눈빛이 두통을 더욱 악화시킨다. 


"보고 시간이지 않나. 네 자리로 가도록."


"나는 군단장이 아닌데? 마계 공작도 아니고."


"적어도 왕좌의 오른쪽 팔걸이가 네 자리는 아니지 않나."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위대한 드래곤 로드라고. 내가 앉고 싶은 데에 앉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녀의 자긍심 섞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드래곤 로드 따위 때려친 지 오래 아니더냐. 용족을 배반하고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며."


"그렇지. 그 말대로 나는 '네' 밑인거지, 마왕군 소속은 아니라니까."


단상 밑에 부복해 있는 부하들로 시선을 옮겼다. 이쯤 되면 누구든지 '저희는 괜찮습니다~'라든지, '플로리에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라는 말을 할 법한데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꼴이라니.


'하기는. 그리 데였으면 나라도 몸을 사리겠지.'


플로리에가 항복한 직후 있었던 회의에서 플로리에의 태도를 지적했던 3군단장이 종이접기처럼 아주 예쁘장하게 접혔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이런 태도가 이해가 되기는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왕군의 군단장들이 이토록 몸을 사려서야.'


그 덕분에 주군인 내가 덤터기를 쓰고 앉았는데 말이지.


"..1군단장부터 보고하라."


"옛!"


드디어 이 불편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덕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낸 1군단장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걸 신경쓰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회의에서만큼은 플로리에가 깽판을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염원이었으니까.


"흐으음..."


그리고 다행히 모두의 염원은 잘 이루어진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플로리에는 가벼운 추임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참견을 하지 않았으니까.


'다행이군.'


아무리 플로리에가 항복했다고 해도 그녀가 가진 힘이 어디 간 것은 아니다. 그녀를 살해하기 위해서 마왕군의 2개 군단 규모의 병력을 '소모'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을 정도니까.


그리고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회의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땡깡을 피운다? 그런 끔찍한 일을 몇 번 경험해본 사람으로서는 그런 땡깡 없이 일이 잘 지나간다는 데에 감사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땡깡을 피운다면.


'폴이 왜 그런 변방까지 가는데! 나랑 같이 있겠다며! 또 그 여자 만나러 가는거야? 나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너를 위해서 나는 내 종족도 버리고 몸까지 바쳤는데! 내가 너를 위해 찢어 죽인 인간이 몇 명인지 알기는 해?'


'그게 아니다, 플로리에. 전쟁이 끝났고 최전방에서 마왕군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격려하러-'


'그게 그 말이잖아!'


오싹-


그 때의 추억이 떠올라 다시금 등에 소름이 돋는다.


저렇게 말하고는 전력을 다해 내 다리를 잘라내서 어디도 가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지. 군단장과 마계 공작들이 모여있던 덕에 제압하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회의를 하다가 다리가 잘릴 뻔한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는 그리 즐거운 추억은 아니다.


"...이상입니다."


"좋다. 8군단장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라."


"존명!"


콩-


'...여전히 충성도가 과하구만.'


8군단장, 흡혈귀 이소벨. 마왕군에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했으며 가장 어리지만 그 일신의 무력만으로 군단장에 올라선 인재. 


내가 직접 그녀를 찾아가 영입을 제안한 탓인지 나에 대한 충성도가 과한 면이 없지않아 있다. 그래도 뱀파이어 로드 주제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의기소침하던 때보다는 보기 좋지만, 때로는 군단장에 걸맞는 모습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무릎 정도를 꿇고 있던 다른 군단장들과 다르게 8군단장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내 격려에 더욱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 탓에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는 '콩' 소리가 작게 들리긴 했지만 모두 그녀의 체면을 위해 못 들은 척을 해...


"푸흡."


"으음."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또 시작이군.'


"8군단장은 여전히 바닥에 기어다니는 게 바퀴벌레 같네. 그렇지 않아, 폴?"


"플로리에. 말을 조심하라."


"앗, 생각해보니 바퀴벌레보다 흉악하잖아. 적어도 바퀴벌레는 마왕의 피를 축내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플로리에."


나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으르렁거렸다. 플로리에도 자신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비아냥대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8군단장, 심려치 마라. 나는 늘 8군단장을 믿고 아끼고 있으니."


"걱, 걱정하지 않아주셔도 됩니다."


8군단장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있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기분 나빠하는 표정은 아니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어차피 마왕님 곁을 맴도는 개새끼가 짖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마왕님의 말씀 외에는 들리지 않으니까요."


"...뭐?"


그야 바로 플로리에에게 시비를 걸었으니까.


"개새끼라고? 한낱 흡혈귀 주제에 위대한 골드 드래곤이자 드래곤 로드인 나에게 개새끼라고 한 거냐, 네년?"


"주인은 마음도 없는데 곁을 맴돌며 사랑받을 기회만 엿보는 골든 리트리버가 또 짖는군요. 멍멍, 멍멍멍."


"...둘 다, 경거망동하지 말라."


몸 깊은 곳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린다. 거대해진 존재감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대로 얼어붙는다.


"이소벨, 플로리에. 회의가 끝난 이후 남도록. 나머지는 해산이다."


"존명!"


"수고하셨슴다~"


'...4군단장은 여전히 위기감이 없구만.'


학교 수업이 끝난 것처럼 기지개를 쭉 피며 어슬렁어슬렁 대전을 나서는 4군단장을 한 번 노려봐주었다. 대체 누가 회의장에 크롭티에 줄무늬 스커트를 입고 오고, 회의 끝났다고 마왕한테 다 보이게 담배를 꺼내서 꼬나무냐는 말이다.


지난 주에 태도를 지적했지만 회의 중에 태연하게,


'그럼 저기 용가리처럼 몸으로 찍어눌러서 '교육'하시면 되지 않슴까. 마왕님이라면 제 처음도 내어드릴 수 있는데 말임다.'


라며 말하길래 그 다음부터는 태도를 지적할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일부러 도발하는 게 너무 눈에 보여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마왕님."


"폴."


아차.


플로리에와 이소벨이 텅 빈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4군단장 같은 스타일이 좋으신 건가요?"


"저 바퀴벌레 같은 여자랑 근육뇌 말고 또 손을 대려고?"


"이소벨, 오해다. 플로리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손을 댄 적이 없으며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다."


일단 이 위기를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다.


*


결론만 말하자면 '교육'은 꽤나 잘 흘러갔다.


애정결핍을 호소하는 둘에게 최근에 내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잘 생각해보면 해달라는 것들을 다 해줬다는 걸 상기시켜준 덕에 다들 합죽이가 되어버렸으니까.


이번 회의의 중요도라든가, 인간과 엘프, 드워프, 용족에 대한 지배 체제를 확고히하는 것의 중요성을 들어 조목조목 이야기해주니 당사자인 8군단장은 물론이고 한 때 용족의 지배자였던 플로리에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마왕, 어디를 보는 것이지."


"어디를 보기는. 잠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천장을?"


제인은 내 말에 천장에 무언가 있는지 고개를 들어 확인해봤지만 뭔가가 있을리 만무했다. 당연하지. 나는 오늘따라 유독 지랄맞은 마신한테 욕을 박고 있었으니까.


'원하는 대로 세계 멸망시켰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일을 꼬아대는 겁니까.'


"내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음, 그런가. 아마 마족과 인간이 보는 게 다르겠지. 네 신과 나의 신이 다르듯."


"글쎄. 나는 신을 버린지 오랜데 말이지. 네-"


"내 것이 된 이후로, 말이지."


그녀는 말을 끊었다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을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이 기쁘다는 듯 즐거움이 가득 담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인 디아나. 지금은 멸망한 왕국의 왕녀이자 이번 대의 용사.


자신의 손으로 양부인 국왕의 목을 벤 패륜아, 왕국을 무너뜨린 인간의 배신자.


"그나저나, 제인."


"왜 그래, 폴?"


"슬슬 무릎에서 비켜주지 않겠나."


그런 그녀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내 오른쪽 허벅지에 걸터앉은 상태다. 피 묻은 갑옷은 신경쓰이지 않는다만 그녀의 등 뒤에 대각선으로 메인 성검이 자꾸 무릎에 딱, 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게 여간 따가운 게 아니었다.


"성검이 자꾸 무릎이랑 부딪혀서 말이지."


"빛을 잃은 쇳덩어리 따위가 당신에게 해를 끼칠리가 없잖아. 그게 아니라면.."


제인은 눈을 슬며시 찌푸리며 내 눈을 쳐다보기 시작한다. 


"내가 무거워?"


꿀꺽-


자고로 여자란 몇 살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상관없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지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이다. 드래곤 로드인 플로리에가 나이가 지뢰라면 용사답게 근육이 훌륭한 제인은 몸무게겠지. 


'안 그래도 자신이 '여성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전혀. 무겁다면 반대쪽에 앉아있는 플로리에가 무겁겠지?"


"부우~ 나는 왜 갑자기 끌어들여."


"사실 아닌가. 키도 나보다 크고."


"내가 무거운 건 가슴 탓이 제일 크거든?"


왼쪽 허벅지를 차지하고 있던 플로리에는 스스로를 뽐내듯 허리를 세우며 가슴을 내밀었다. 아랫쪽을 받쳐주는 드레스가 가슴 윗쪽을 가려주는 역할은 포기해버린 탓에 그녀의 움직임에 가슴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출렁인다. 


'골드 드래곤이니까 G컵'.


꿀꺽-


마법사이며 폴리모프한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부드러운 육체가 그려내는 곡선미에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간다.


"크흠."


"...."


어찌 제일 큰 지뢰는 피했지만, 그 옆에 있던 지뢰를 밟아버린 것 같군.


"제인,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가슴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를 좋아하니까 말이지."


"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는걸까? 혹시 은연중에 내 가슴이 작다고 생각하고 있던걸까?"


"전혀."


등에서 슬슬 식은땀이 나려고 한다. 제인이 용사일 적에 내 목을 따겠다고 마왕성에 쳐들어왔을 때에도 이렇게 위기감을 느낀 적이 없는데 말이지.


"가슴이 작다고 해도 여자다운 정도는 있지 않나. 이소벨보다 크고."


"...푸핫.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양쪽 허벅지를 내준 대신 내 뒤에 달라붙어 목에서 피를 빨던 이소벨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반사적으로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이런.'


"이소벨,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아닙니다, 마왕님. 제 가슴이 크지 못한 탓에 마왕님께 심려를-"


"가슴 이야기는 그만하자."


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탁- 탁-


허벅지 위에 앉은 제인이 다리를 흔드는 탓에 성검이 자꾸 무릎에 부딪힌다. 플로리에는 나보다 큰 키와 나만큼 나가는 몸무게를 생각하지도 않는지 내 몸에 자신의 체중을 온전히 실은 채 기대온다. 이소벨은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며 팔을 목에 휘감으며 다시 피를 빨기 시작한다.


'다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언젠가 한 번 홀로 여행이라도 떠나야겠다.  


폴은 그리 홀로 다짐했다.


*


'오늘은 두통이 심해서 말이지. 조금 자리를 비워주겠나.'


폴이 결국 축객령 아닌 축객령을 내린 이후로 여자 세 명은 복도를 털레털레 걸어가고 있었다. 디아나 왕국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탓에 빛의 신을 묘사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알록달록한 빛이 복도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핏덩이, 장막."


"여전히 말버릇이 고약하네."


제인의 말에 마왕 앞에서 보이던 가냘픈 소녀의 모습은 어디갔는지 나른한 색기를 흘리기 시작한 이소벨이 손을 한 번 가볍게 휘둘렀다.


촤악-


그 손놀림 한 번에 빛의 신의 모습을 담고 있던 스테인드글라스가 새빨갛게 피로 물들었다. 수백명의 피를 모아 신의 형상에 흩뿌리는 그 모습은 신성모독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요사스럽고 사이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던 아름다운 빛은 글라스를 가린 질척질척한 피에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됐어."


의기소침하던 소녀는 어디 가고 피로 물든 여인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소벨은 수백명 분의 피를 손짓 한 번에 흩뿌렸음에도 바다에서 물 한 컵을 퍼낸 것만 마냥 태연했고, 제인과 플로리에는 그녀가 순식간에 피를 흩뿌려냈음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볼 때마다 괴이하네."


"칭찬 고마워..."


전혀 성의가 담기지 않은 감사 인사에 플로리에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런 걸로 농담을 하고 놀만한 사이는 아니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하고 있어? 아직도 다음대 용사니 뭐니 그러고 있어?"


"이번에 죽였지. 살려둘까 생각도 했는데 여간 귀찮은게 아니라서 말이지."


제인은 플로리에의 물음에 '산책 나간 김에 장을 봐왔어' 같은 어투로 가볍게 말했다. 플로리에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이소벨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는 듯 피로 물든 스테인드 글라스를 감상하고 있었다.


"4군단장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따끔하게 교육을 시켜줘야지."


이번에는 플로리에가 제인의 질문에 날카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셋만 해도 과한데, 하나 더 끼어드는 건 내가 용서를 못하거든."


"동의하는 부분이다."


"흐응.. 모처럼 다들 마음이 맞네."


이소벨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려 다른 둘을 바라봤다. 순간 여자 셋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흐른다.


"다들 명심하고 있지? 폴이 한 명을 고르는 순간 이 동맹은 끝이라는 거."


"노처녀라 그런가, 기억력이 안 좋나 보네."


이소벨의 적나라한 도발에도 플로리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 주인 앞에서 보이는 얌전한 고양이 같은 모습과 달리 이쪽이 진짜라는 것은 그녀와 제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애송이 같은 몸보다는 여자 같은 몸이 낫지 않나."


제인이 지원사격에 나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까 분명히 폴의 뒤에 선 채로 목의 피를 빨 때 자꾸만 그의 가슴으로 향하는 이소벨의 손을 제인이 쳐낸 게 한두번이 아니기도 했고.


"글쎄? 폴도 자신보다 근육질인 여자를 안고 싶을까? 오히려 나 같은 풋내기를 깔아 눕히는 쪽이 남자로서 우월감이 들지 않을까."


그럼에도 살길을 찾아 나가는 이소벨의 말에 적잖은 내상을 입은 제인은 입을 꾹 다물었고, 플로리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도움이 안 되네.'


무력은 분명히 마왕인 폴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지만 왕가에 입양되기 전까지 농가에서 자라 순박한 그녀는 이소벨에게 놀아나곤 했다. 동맹을 맺기에는 부족한 상대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점이 오히려 안심되지만.'


동맹은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상대에게 제안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우위에 있음을 자각한 순간 주도권이 상대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플로리에는 이소벨과 달리 제인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내팽겨칠 수 있는 바보같은 여자니까.'


폴의 가장 원대한 꿈인 세계 정복.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 그를 사모하는 셋이 서로 다투지 않기로 약속을 맺은 것이 동맹의 시초였다. 그 이후 누군가가 선을 넘으려고 할 때마다 제약을 늘려온 탓에 지금 제약은 마계의 대법전 한 쪽을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제약은 폴이 누군가를 선택하는 날 효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의 날.'


플로리에는 여기 있는 둘 모두 아무 생각이 없어보이지만 음흉하기 그지없이 뒤로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완숙한 뱀파이어 로드의 경지에 오른 이소벨은 폴의 피를 마시는 척하며 그의 안에 자신의 피를 조금씩 섞어놓고 있었다. 폴이 요즘 두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생긴 것도 그의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탓이었다.


그리고 용사, 제인 디아나는 자신의 용사시절 동료를 타락시키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처럼 마왕을 따르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폴과 마왕군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일회용 폭탄으로 만들기 위해서. 개인의 무력으로는 자신과 이소벨은 물론이고 마왕인 폴 이상인 그녀답게 기회만 생긴다면 그를 무력으로 납치할 수 있다는 판단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다 쓸모없는 일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괴롭히던 위기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어떤 걱정거리도 안겨주지 못한다. 


'봉인마법을 완성시키길 잘했어.'


플로리에는 이소벨이나 제인에 비해서 그 날에 대한 준비가 모자른 탓에 골머리를 썩혀왔다. 둘은 마왕에게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원정을 나가 계획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자신은 폴에게서 떨어지는 게 싫어서 왕성을 나간 적이 없는 탓이었다.


대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자 지혜로운 골드 드래곤 로드인 그녀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물리적인 수단이 아니라 마법을 활용해 그를 봉인시키고 들고 튀기로.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차원문 정도는 지금도 열 수 있으니까. 차원을 넘어서 도망치면 그걸로 끝.'


낯선 차원, 낯선 언어, 낯선 환경. 결단력 있고 멋있지만 조금 허술한 부분이 있는 폴은 분명 실수를 하며 허둥지둥거릴 것이고, 자신은 그런 폴을 곁에서 도와주고 지켜준다. 그렇게 폴은 자신에게 의지하기 시작하고, 둘은 그대로 이세계에서 혼인을-


"우훗."


플로리에는 그만 행복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실 웃음을 흘렸지만 제인이나 이소벨은 그리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로 범벅이 된 왕성에서 농밀하게 뒤엉켜 매일매일을 보내는 상상이라든지, 용사로 뽑히기 전에 일하던 농가로 돌아가 소박한 부부의 삶을 꿈꾸는 상상을.


그리고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모략과 암약을 눈치채지 못한 폴은 집무실에서 자꾸만 드는 오한에 옷을 한 벌 더 겹쳐입을 수 밖에 없었다. 


"에취! 쓰흡... 감기인가."


언제 한 번 의료진에게 진료를 받아봐야겠군.


그런 별 도움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