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흔히 듣던 말로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때’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자유가 없을 때’가 되겠다.

 

하루 종일 먹고 자더라도, 빈둥빈둥 니트처럼 살지라도,

 

자유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감옥에 갇혀 살더라도

 

미래에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무기징역이나 사형 같은 경우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런 것들은 어찌 되든 좋다 쳐도,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나는 지금 ‘자유가 없어질’ 상황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 있는 그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나의 악몽이자 죽음이

 

“자, 아가야.”

 

손을 뻗으며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런 비극이 시작되었더라.

 

그녀가 나타났던 몇 주전 부터일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계획되었던 음모일까.

 

 

 

2

 

나는 남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살지 못한 것 같다.

 

엄마는 바람피워서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아빠는 괴로움 가운데 나를 키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셨다.

 

형편이 너무나 어렵던 탓에 집에서 아빠를 마주한 적이 별로 없지만,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주셨다는 것 만은 확실히 안다.

 

스스로 집안일을 하고 변변치 않은 음식을 혼자 해 먹다 보니 몸은 언제나 저체중이었고,

 

키는 남자치고도 작은 편이 되었다.

 

주변으로부터 동정의 시선을 받은 적이 많았고 들리는 말로는

 

‘가여운’ 남자가 되어있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어찌 되든 좋은 것이었다.

 

어서 빨리 한 사람분의 어른이 되어서 아빠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 되고,

 

아늑한 집이 있는 생활을 바랬을 뿐이다.

 

내가 벽람항로에 오게 된 것도 단순한 우연.

 

군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진행한 후 하루는 어디론가 불려 나가서 이름 모를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 편지에 담겨온 내용에는 ‘큐브 적성자’라는 말과 함께

 

벽람항로에 근무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세상이 전쟁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도

 

자세한 부분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이름만 알고 있던 벽람항로이다.

 

인터넷에서는 ‘벽람 근무 개꿀아님?’,

 

‘함선들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 부럽다.’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근데 전투 중 죽는 지휘관도 많다고 함’.

 

‘엄연히 전쟁하는 곳인데, 군대 비슷하게 나름 헬무지’라는 평이 있는 등 복잡한 의견이 있었다.

 

내 몸무게와 키로 현역이 될 수 있을까 아슬아슬한 상황인데,

 

이런 곳에서 근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고,

 

이는 벽람항로 상층부도 똑같이 생각했던 것 같다.

 

만 열여덞밖에 안 되고 신체도 좋지 못한 나를 최전방에 보내기에는 미안했는지 

 

동남아의 보급기지 겸 요양기지의 지휘관으로 보내주었다.

 

아빠에게 축하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앞으로 생활비를 보내줄 터이니

 

혼자서 더욱 여유롭게 지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머나먼 이국땅으로 가야 했다.

 

말도 안 통하는 이국에서 타국 지휘관과 함선들은 어떻게 상대하냐는 질문에

 

큐브 기술이라는 좋은 기술이 있어 문제가 없다고 한다.

 

별의별 놀라운 기술들을 들을수 있을 정도로 납득 당한 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출국당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도 나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

 

최전방의 상남자 형씨처럼 승승장구하거나,

 

적색중축과 세이렌의 뺨을 후려갈길 전략가가 되어서 상층부의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닌,

 

현란한 말솜씨와 빠른 눈치로 타 세력을 설득하는 협상가나,

 

카리스마 있고 대인배 같은 행동으로 함선들의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닌,

 

벽람항로의 한 톱니바퀴가 되어서 이름도 형태도 없지만

 

묵묵하게 할 일을 하는 그런 지휘관이 되고 싶다.

 

나는 그런 것으로 만족했었다.

 

‘동남 보급 기지’

 

“흐아아~암.”

 

아침에도 졸릴 정도로 따뜻한 날씨에 하는 일이 없어 보일지라도,

 

나는 이 기지의 엄연한 지휘관이다.

 

‘동남 호텔 기지’, ‘바캉스 기지’ 등 우스갯소리를 듣지만,

 

많은 지휘관과 함선들이 신세를 졌던 곳이기에 나름 인정받는 곳이다.

 

물론 함선들은 전방에 활약하느라 바쁘기에

 

이 기지의 함선은 공작함 ‘베스탈’과 몇 구축함밖에 없었다.

 

‘없었다’의 말은 그 함선들마저도 최근 대형작전에 지원을 나가게 되어서

 

쿨하게 인사하고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들이 있기 전에도 그랬지만, 만쥬들과 나만 있는 기지가 되고

 

나는 만쥬들의 지휘관이 된다.

 

엄마에 대한 안 좋은 기억으로

 

여자와 함선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나에게는 정말로 다행인 환경이지만,

 

벽람항로의 다른 이들은 이런 나의 환경을 매우 딱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매우 딱해 보이는 환경에서 불만 없이 척척 일을 해내는데,

 

상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다.

 

의외로 세상은 날먹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니까.

 

 

 

 

3

 

‘삐잉~! 삐잉~!’

 

늦은 밤 좋게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알림벨이 울린다.

 

함선들이 인근 해역에서 작전 도중 중상을 입어

 

이곳으로 응급 이송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이런 알림은 익숙하다.

 

다만 새벽 3시 넘어서 갑자기 울리니 상당히 피곤한 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당직을 서던 만쥬의 알림벨에 일어나 옆 업무실로 간다.

 

도착한 메일에는 예상대로 ‘긴급’ 사항의 통보서.

 

하품을 찢어지게 하면서 내용을 읽다가 한 문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적색중축 함선의 응급 이송 및 치료 요청’

 

적대세력인 적색중축과 연합작전을 진행하는 해역이 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이곳까지도 그 영향을 받는 것인가.

 

거품처럼 불어나는 의문에 상부 연락을 하고픈 마음이 넘쳤지만,

 

상부에서도 판단이 다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에 참기로 하였다.

 

벽람항로 일원이라면 이곳의 사용법을 알기 때문에

 

비상 운용을 만쥬에게 명령하고 다시 들어가 자면 되겠지만,

 

적색중축 같은 외부인이라면 말이 다르다.

 

기밀 사항 같은 건 별로 없지만, 보안 사항도 나름 주의해야 하고,

 

처음 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들에게 인사라도 하지 않으면 실례이다.

 

괜히 이곳에서 잘못했다가 적색중축에게 분쟁의 소재를 주기는 싫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벽람항로에 근무하는 프로답게 움직여보기로 한다.

 

“비상 운용 전환, 응급 호송에는 나도 같이 나갈 테니 준비하자.”

 

기합 있게 반응하는 만쥬를 보내고 주섬주섬 정복으로 갈아입는다.

 

밤중에 이런 일을 해야 하나 한숨을 쉬면서도 일이니까 해야지.

 

투덜투덜 거리면서 나가려 하니

 

‘쏴아아아아’

 

비까지 온다.

 

투덜거림이 두 배로 늘어나면서도 우의를 걸치며 만쥬들과 함께 항구로 나간다.

 

항구에서 나름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멀리서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모습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니 나름 심하게 당한 것 같다.

 

비까지 와서 젖은 모습은 적군의 입장이어도 안쓰러운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했고,

 

서둘러 회복실로 옮겨주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저...저기-”

 

4명의 함선이 도착했을 때 나는 그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대접을 해줄 뿐이다.

 

“인사는 괜찮습니다! 서둘러서 회복실로 옮기시지요!”

 

만쥬들이 능숙하게 부상자를 들것에 실으니 그녀들도 말할 여유가 없는 듯했다.

 

“회복실로 옮기고, 안내 책자와 기본 보급품을 전달해줘.”

 

일사불란한 만쥬들의 움직임으로 옮겨져 가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나는 끝났다며 서둘러 업무실로 들어간다.

 

의식이 나름 멀쩡했으면 간단한 인사와 대화가 오가겠지만,

 

이렇게 지친 상대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더욱 편했다.

 

적색중축의 함선을 모르기에 그녀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일부터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녀들을 보낼 때까지 정체를 모른다 하여도

 

나에게는 상관없을 것이다.

 

 

 

 

4

 

밤 중에 깨워진 영향이 있는지 아침은 꽤 늦게 일어났다.

 

늦잠 잔다고 하여도 만쥬끼리 아침 만들어 먹고 일과를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는 나름 편하다.

 

어제 옮겨졌던 인원을 확인할 겸 배를 채우려 식당으로 움직인다.

 

아침 식사 이후로 정리하는 만쥬들 중 하나에게 교대 근무하는 만쥬를 묻는다.

 

만쥬끼리는 구분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찾고 싶은 만쥬가 있다면 직접 물어서 찾아가야 한다.

 

만쥬 지휘관 생활 1년이면 자연스럽게 익히는 기술이다.

 

비상식량을 우물우물 씹으며 교대 근무 만쥬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읽자니

 

기지에서 듣기 힘든 대화 소리가 들린다.

 

피곤했을 텐데 벌써 일어난 것은 어지간히 체력이 좋은 것인가.

 

적색중축의 함선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 지내는지 궁금하지만,

 

이 호기심이 개인적으로, 공식적으로 독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회복실 안에서 들리는 이야기 소리에

 

아직 방 밖으로 나오기 귀찮아하는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그곳을 떠난다.

 

아마 오후면 슬금슬금 밖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에,

 

오후에 있을 일들을 미리 만쥬들에게 알려주고

 

나는 하루 종일 그녀들을 피하는 방향으로 있어야겠다.

 

함선, 그녀들은 언제나 봐도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배부른 기운에 다시 낮잠에 들고 일어났을 때는 오후 2시가 넘었다.

 

저녁때까지 조금 참기로 하면서 지금 일손이 부족한 창고 정리를 위해 걸음을 옮긴다.

 

만쥬들은 아침부터 배의 수복과 그녀들의 요양을 위해 힘쓰고 있을 테니

 

자연스럽게 일손이 비는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하는 것이다.

 

그녀들이 얼마나 머물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내 일을 하면서 굳이 얼굴을 내비치지 않을 것이다.

 

적색중축이라서 그런지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이 있을 것 같지만,

 

결국 이 작은 기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다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짬이 있다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가자.

 

그렇게 걱정거리를 한쪽에 몰아넣고

 

창고에서 몇 만쥬들과 이리저리 일하고 있었을 때,

 

한 만쥬가 밖에서 들어오더니 나를 찾는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끄덕거리며 긍정하는 만쥬의 모습에 시간을 보니 오후 4시 조금 지난 때.

 

티타임을 가진다면 적당한 때이며, 그녀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지휘관에게 정식적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따로 시간을 정하기보다는 지금 가는 게 낫겠지.”

 

‘지휘관을 만날 시간을 알려달라’고 말 할 그녀들이겠지만,

 

중요한 일은 바로바로 해두는 것을 좋아하기에

 

작업을 잠깐 멈추고 가기로 했다.

 

더욱 그녀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큰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미루기 싫은 이유도 있다.

 

식당 가는 길에 업무실을 들를 수 있으므로

 

옷을 갈아입고 가기로 하며 말을 전해준 만쥬를 데리고 나간다.

 

 

 

 

5

 

“엇?!”

 

내가 식당에 들어서자 4명의 그녀들은 깜짝 놀란 것 같다.

 

만남 시간 약속을 잡아서 돌아올 만쥬를 기대했지만,

 

내가 직접 와버렸으니 놀랄 만 하다.

 

테이블을 둘러싼 4명의 그녀들은 움직임이 멈췄다.

 

거북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테이블로 다가가 내 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이 기지의 지휘관입니다.

 

어제는 상황이 급했더라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다른 분들이 치료받고 쉴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기 때문에,

 

사양 말고 자유롭게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휘관님. 저희에게 이 곳을 흔쾌히 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철혈해군의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셰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이름은 체펠린. 반갑다....”

 

“아.... 내-내이름은 어드미럴 히퍼.... 잘 부탁드립니다.”

 

“패터 슈트라서입니다. 반갑습니다.”

 

원래 이곳에 방문하는 함선들의 이름도 만만치 않기에 대비는 했지만,

 

역시나 어려운 이름들이다.

 

각각의 자기소개를 들은 후 나는 계속 서 있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옆의 의자를 가져오며 만쥬에게 음료를 주문한다.

 

“티타임을 가지고 계셨나 보군요. 저기, 나는 코코아로.”

 

히퍼라 했던 금발 함선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다.

 

아까부터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에서 신경 쓰이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내 음료 선택까지 완전 어린애 같다는 생각은 알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떻하나.

 

커피같이 쓴 건 싫고 차보다 달달한 코코아가 훨씬 취향이란 말이다.

 

만쥬가 내 주문을 듣고 음료를 만드는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온다.

 

괜히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후회가 밀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능숙하게 말을 꺼낼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기에,

 

이런 자리를 꺼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침묵에 더불어 나를 꿰뚫어 보는 네 쌍의 눈.

 

적대적인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고 호기심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느낌이지만,

 

나로부터 시선에 거두어지지 않는다.

 

특히 프리드리히로 기억하는 흑발의 그녀는

 

나에게서 무언가 흥미로웠는지 그윽한 눈빛으로 보고 있다.

 

잠깐만, 왜 그녀의 모습에서 무언가 떠오를 것만 같지?

 

이유 모를 불안감과 공포가 올라오지만 애써 참는다.

 

“아.... 방은 괜찮았는지요? 어제 오는 길도 험했을 텐데, 편히 쉬셨을지 모르겠네요.”

 

이 이상의 침묵은 버티기 힘들 것 같아 먼저 흔히 하는 말을 꺼내본다.

 

물론 실제적으론 10초 밖에 안 되는 침묵이었지만,

 

그사이에 내 정신력을 다 소모해버린 것 같아 버틸 수가 없었다.

 

“물론, 마련해주신 곳은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진득한 눈빛을 유지한 채 대답해주는 프리드리히.

 

“허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혹시 이곳에 다른 함선 분들은 안 계시는 것일까요?”

 

“아, 원래는 있지만 최근 대형 작전에 지원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머무시는 동안은 계속 나가 있을 것이니

 

크게 신경 쓰시지 말고 편히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느덧 만쥬가 코코아를 가지고 내 옆으로 왔고, 무거운 분위기에 나는 급히 마신다.

 

“아뜨!”

 

“풋-! 잠깐, 정말 당신 지휘관이 맞-”

 

“실례다 어드미럴 히퍼. 시간 낭비하지 말도록”

 

페터라고 했던 그녀의 꾸짖음.

 

어드미럴 히퍼는 기가 센 편인지 지지 않고 말한다.

 

“그래도 이렇게 어린 지휘관이 있다고? 엉터리 아니야?”

 

대상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대담하다고 할까, 주의가 없다고 할까.

 

물론 나는 이렇게 당당한 평가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식은땀이 나고 있다.

 

"죄-죄송합니다. 제가 꽤 어린 나이에 들어오게 되어서요. 하하......"

 

분명 나는 이 기지의 지휘관일 텐데, 이상하게 움츠러들게 된다.

 

솔직히 이거 실례 아닌가?

 

화를 내도 될 법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기에 내가 항복하는 것으로 한다.

 

"그래도 말이야, 이렇게 여린 몸으로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래?

 

망치질이라도 할 수 있는 거야?“

 

"아, 그런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만, 상대 지휘관 앞에 실례다.“

 

그라프라고 들은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실례라고. 어드미럴씨.

 

당황하여 코코아만 계속 마시지만, 뜨거운 것을 더욱 마시니 더욱 더워진다.

 

"죄송합니다. 지휘관님. 그녀는 단지 지휘관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프리드리히씨가 여유로운 웃음으로 말하지만,

 

그 끈적해 보이는 눈빛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가-감사합니다. 하하......“

 

누가봐도 연기인 억지웃음을 짓는다.

 

다른 지휘관 혹은 상부 인원이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

 

아니 그들이라면 이런 대우를 받을 일도 없을까.

 

결국 내가 이런 모양이라서 이렇게 된 것인데, 이번에 운동해서 몸이라도 키울까.

 

"그렇지만“

 

혼자만의 망상으로 도피하려던 때에 프리드리히씨가 다시 말을 꺼내온다.

 

"지휘관님은 확실히 사랑스러우시네요. '아가' 지휘관님?"

 

"아...... 네.“

 

살짝 웃음 짓는 모습에 농담으로 말한 느낌이 전해져오지만,

 

'아가'라는 말에 이상한 반응이 느껴진다.

 

뭐랄까. 이는 '분노'가 아니다.

 

굳이 정하자면, '공포'를 느끼고 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시선은 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식당에서 만쥬들의 저녁 준비 소리가 들려온다.

 

딱 좋을 때에 주의를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저는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그녀들의 반응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나가던 만쥬에게 잔을 돌려주고 서둘러 식당에서 걸어 나온다.

 

그녀들은 내 등 뒤로 있을 터이지만,

 

보이지 않는 기운이 뒤로부터 나를 삼키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함선들을 상대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녀들은 이상하다.

 

아니, 위험하다.

 

오로지 업무실만을 바라보면서 빨리 돌아가려고 걸음을 재촉한다.

 

 

 

 

6

 

기억이 난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셰였던가?

 

그녀의 시선과 말투. 그리고 왠지 거부감이 드는 반응의 이유.

 

그녀는 내 엄마를 닮았다.

 

프리드리히 그녀를 보고 나서야 흐릿했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말하는 방식과 성격, 그 분위기가 너무나 닮았다.

 

‘아가 지휘관’

 

나를 귀여운 장난감 취급하며, 흥미가 떨어졌을 땐 미련 없이 버리던 사람.

 

아빠와 나의 원수이면서도, 인간적으로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유형.

 

비록 그녀 입장에서 엄마를 겹쳐 보는 것이 억울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내 감정은 도저히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허억... 허억....“

 

업무실로 급히 들어와 의자에 쓰러져 앉는다.

 

별로 격하게 움직이지 않았어도, 긴장 때문에 숨이 차오른다.

 

무엇 때문에 엄마를, 그녀를 두려워했는가.

 

그렇군. 실컷 가지고 놀면서 믿게끔 만들다가

 

배신당한 고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이 정리되자 공포가 분노로 변한다.

 

"하하.... 이것 참......“

 

엄마랑 관련 없는 타인인데,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 이성은 그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피하는 수밖에 없다.

 

오래 볼 사이가 아니기에,

 

불필요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력 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내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업무실 농성으로 그녀들이 떠나가기를 계획하고 있을 때

 

상부로부터 메일이 도착한다.

 

'철혈로부터의 글. 신세 지고 있는 기지 지휘관에게’

 

내 메일 주소로 온 것으로 보아 한 번 검열을 거친 것 같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내용이 머릿속을 흘러 나간 느낌이지만,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이쪽 함선들이 신세를 지는 만큼 정말 감사하다.

 

-함선들이 회복되는 대로 귀환할 예정이기에 체류 기간은 최대 1주.

 

-개성 강한 함선들이지만, 본성은 좋은 그녀들이니 양해 바란다.

 

-벽람항로와 적색중축의 협력이 기대되는 만큼 이 기회가 서로에게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정도가 되겠다.

 

상부에서도 큰 영향이 없어 보인다고 판단했기에 나에게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최대 1주의 체류를 알았으니 나름 소득이 있다.

 

1주일만 업무실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이 상황도 끝이다.

 

조금 답답하겠지만, 만쥬들의 도움을 받으면 문제없으니 안심.

 

무언가 계획이 잡히고 안전을 보장받으니 한결 나아졌다.

 

오늘 저녁은 만쥬에게 간단히 가져달라고 하고 일찍 잠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일주일 동안 히키니트 지휘관이 되겠습니다~“

 

혼잣말과 함께 기분을 새롭게 한다.

 

 

 

 

7

 

계획은 순조로웠다. 하루 이틀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3일부터는 그녀들로부터 티타임의 초대가 있었지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마지막 밤이 되었다.

 

이 밤만 지나면 그녀들도 떠나고 이 기지도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만쥬들에게 내일 그녀들의 전송 준비를 지시한 뒤 일찍 잠들려고 침대에 누웠다.

 

너무나 조용한 밤인데, 이렇게 조용하게만 지나간다면 무사할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조용한 것이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 든다.

 

괜한 생각으로 일을 만들지 말자며 의식이 흐려질 때 즈음.

 

‘똑똑똑’

 

업무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난다.

 

함선이 상주하는 기지인 만큼 문 자체는 쉽게 부술 수 없게 되어있는데,

 

침실까지 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강하게 두드린 것 같다.

 

아니, 잠깐.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지?

 

만쥬들이라면 신호를 보내거나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저 문밖에는 철혈의 그녀들 중 하나가 있다는 것.

 

마지막 밤이라고 기어코 찾아온 것 같은데,

 

이대로 조용히 있으면 알아서 물러갈 것이다.

 

갑자기 긴장되는 몸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기다린다.

 

제발 좀 돌아가라. 돌아가.

 

'똑똑똑—똑!‘

 

내 기대와는 다르게 쉽게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노크 소리.

 

심장의 두근거림이 커지며 졸음이 다 깨버린다.

 

저 밖에 있는 사람이 돌아간다 해도 진정시킬 때까지는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지휘관?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열어줄 수 있나요?“

 

프리드리히.

 

제일 보고 싶지 않았던 함선.

 

저 목소리를 들으니 분명 속셈이 있는 것이기에 절대 있는 척할 수 없다.

 

적색중축에게 민폐라 생각될 수 있어도, 고집을 부려보겠다.

 

"이상하군요. 분명 만쥬들은 지휘관이 업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사까지 다 한 것인가!

 

저 치밀함에 다시금 긴장된다.

 

"안에 계신 것 다 알고 있답니다? 어서 열어주지 않겠나요?“

 

왜? 왜? 왜?

 

왜 만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는 것이지?

 

상대 지휘관에게 밉보이면 안 되니까 화해하려고 발악하는 건가?

 

그럴 수 있다 쳐도, 나는 상대 세력 소속이니까

 

남은 일은 상부에 다 떠넘기고 가도 되지 않는가?

 

물론, 첫 티타임 때 그녀들이 기분 나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사과받으려면 상대 입장에 맞추어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게 하는 것이지?

 

나에게 용서받으러 온 것일까? 아니면 적대 지휘관을 인질로 잡으려고?

 

어떤 생각이든 간에, 저건 확실히 비정상이다.

 

잘못되었다고!

 

"지금 듣고 있을 텐데, 혹시 여성을 밖에 기다리게 하는 취미?“

 

말만 듣는 것으로 심리전에서 밀리는 것 같다.

 

뭐라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다.

 

"곤란하네요... 이곳에서는 거친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데.“

 

라며 수상한 말을 하더니, 수상한 금속음이 들린다.

 

잠깐, 저거 의장 소리 아니야?!

 

그냥 문 좀 두들기다가 물러설 줄 알았는데,

 

방을 부숴버리면 이래저래 어렵게 된다.

 

적대 세력 안에서 의장 사용을 한다면 그쪽도 골치 아플 텐데?

 

적어도 내가 보호받을 장소가 부서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저렇게 일을 만드는 함선이라면, 상대하지 않고는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다.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후훗......“

 

수상한 웃음소리를 듣자니,

 

이 문을 여는 순간 큰 위험이 있을 것 같다는 걱정이 된다.

 

그래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이 한 몸 던져줄 수밖에 없다.

 

'끼이익’

 

나름 튼튼하면서 심리적 방어벽이 되었던 문을 열으니

 

바로 앞에는 예상했던 그녀가 있었다.

 

이전의 복장과 비슷하지만,

 

흰색으로 밝은 느낌이 더해진 화려한 옷을 입고 왔다.

 

이곳저곳 체형이 보여서 이전 옷과는 달리

 

느낌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물론, 무서운 본질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경계도 만 더욱 올라갈 뿐이다.

 

"실례합니다. 잠깐 대화할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요.“

 

실례라고 생각되면 하지를 말라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려다 애써 참고

 

다른 말로 거절하는 입장을 전한다.

 

"방금까지 자고 있었는데, 피곤하네요. 다음에 해도 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제 무릎베개에 잠들어도 괜찮답니다?“

 

"방금,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나요?“

 

"사정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요.“

 

안 되겠어. 이 함선 말이 안 통해.

 

차라리 밖의 현지인하고 말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의미를 알 수 없다.

 

"지금까지 계속 서 있었는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 들어오시지요.“

 

안 열어주었다면 강행 돌파했었을 것이면서, 이제와서 허락받기?

 

 

 

 

8

 

업무실에 들어올 때 그녀는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다.

 

작은 쟁반에 음료가 든 컵 두 개.

 

하나는 커피에, 하나는 코코아.

 

내가 좋아하는 음료를 기억하고 일부러 가져온 것 같다.

 

테이블과 음료를 사이에 두고 둘 사이에는 거북한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애초부터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시선은 컵에 고정한 채 있다.

 

"마시지 않는 것인가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가져왔는데.“

 

내가 프리드리히라고 기억하는 그녀는 아쉬운 척 나에게 물어본다.

 

애초에, 이 코코아에 약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위화감 때문에

 

섣불리 입에 댈 수 없었다.

 

"양치질 하고 자려던 참이어서, 딱히 마실 생각이 들지 않네요.“

 

"잠들기 전에 양치질은 꼭 하는군요. 귀여우셔라~“

 

어떻게 생각하면 저런 방식으로 결론이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생각하지 못한 반격에 당황한다.

 

진정하려고 컵에 손을 대려다가 굳는다.

 

정말로 '약' 넣었을지도 모르잖아?

 

"아, 혹시 제가 음료에 무언가를 했을까 의심이 드는군요?“

 

부자연스러운 나의 움직임을 보던 그녀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렇게 의심되신다면, 이렇게.“

 

내 컵에 손을 뻗은 그녀는 집어서 한번 마신다.

 

"제가 마셔도 멀쩡한 만큼 맛있는 코코아입니다?“

 

상쾌하게 웃는 모습에 남자라면 반할지 모르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의 이상함에 엮이고 있는 나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로부터 컵을 받아 나도 마셔본다.

 

남이 마시던 것이기에 거부감이 조금 들지만,

 

그녀의 뚫어지는 시선 때문에 얌전히 마셔야 했다.

 

만쥬들이 만들어 주었는지, 언제나 마시던 코코아의 맛.

 

"하아아....."

 

기분 좋은 단맛에 나는 긴장이 풀렸는지 무심코 한숨을 흘려버린다.

 

"괜찮은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잠깐의 평화도 무자비하게 깨버리는 그녀의 발언.

 

"한가지 질문으로, 왜 그동안 저희를 피했는지?“

 

그리고 예고 없이 들어오는 그녀의 돌직구.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아는가?'라고 말할 뻔한 것을

 

애써 참고 말을 가다듬는다.

 

"어... 그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거짓말로 돌리는 게 좋을까.

 

"만쥬들에게 들었듯이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바빴습니다.

 

지금 기지에는 저를 도와줄 함선이 없다 보니까 저도 빠짐없이 도와주어야 하거든요.“

 

그리고는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가요......“

 

거짓을 구분하려는지 내 눈에서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까.

 

애초에 이것은 대화가 맞는 것일까. 오히려 심문에 가깝다.

 

"그런 것 치고는 밖에서 일하고 있는 지휘관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네요.“

 

"실내에서 일하거나 하루 종일 있을-“

 

"기지의 이곳저곳을 다 다녀보았는데, 지휘관은 어디에도 없었는데요?“

 

아......

 

내가 없을 동안 기지를 전부 뒤져본 것인가.

 

이런 경우는 정말 몰랐다.

 

아니, 정상적인 함선이라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할 말이 없어지자 괜히 컵을 들어서 홀짝여본다.

 

영상에서 보던 거짓말 할 때의 '어색한 반응'을 내가 하고 있다.

 

멍청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

 

맛을 음미하면서 시간을 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 저를 보지 못한 것은 아마 제가 업무실에 있었을 때라서

 

우연히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변명을 해버렸다.

 

심문받는 죄인처럼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나와 시선이 맞은 그녀는 미소를 머금더니

 

"그렇지만, 일주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어찌 됨인지.“

 

'짤그락!’

 

실수로 컵을 책상에 부딪쳤다.

 

'일주일 동안' 이라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다.

 

"아하하... 그동안 많이 돌아다니셨나 보네요.

 

아마 제 방을 계속 보고 있지는 않았을-“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예?“

 

"계속 보고있었다고요.“

 

"......“

 

"......“

 

제정신인가.

 

저 말이 진짜라 해도, 정말 미쳤다.

 

무어라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그녀의 덫에 빠져가는 것 같다.

 

"왜 피하는 건가요?“

 

그녀의 눈에 살기가 담기는 것 같다.

 

"왜... 왜 저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이제는 겉치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직구로 물어볼 뿐.

 

"후훗... 겁먹해 했군요.“

 

"프리드......“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서 섣불리 부를 수가 없었다.

 

"으음? 왜 이름을 부르다가 멈추는지?“

 

"이름... 뭐였는지.....“

 

"흐음... 오래동안 만나지 않으니 잊는 것. 내 이름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러면 앞으로는 그로세라고 부르겠-“

 

"엄마라고 부르렴.“

 

"네?“

 

"엄.마. 라고 불러보렴?“

 

진심인 것이냐.

 

어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엄마랑 똑같아 역겨운 모습이다.

 

"제가 왜-“

 

내가 입을 열자 그녀는 빠르게 테이블 위로 몸을 가까이하더니

 

손가락으로 내 턱을 받친다.

 

"엄.마.“

 

"미쳤어...“

 

'꽈악'

 

나는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뒤로 젖히려 하는데,

 

그녀의 다른 손이 내 어깨를 쥐고 놓지 않는다.

 

"이거 놔!“

 

'콰당탕!‘

 

팔을 강하게 휘저으며 그녀를 떼어내지만, 반동으로 의자와 같이 뒤로 넘어진다.

 

"무슨 생각이야? 나는 엄연히 벽람항로의 지휘관이라고! 그런 일을 하고도-“

 

"미안하구나. 겁줄 생각은 없었는데...“

 

안타까운 표정이지만, 이제와서 그녀의 모든 행동은 믿을 수 없다.

 

"적색중축에서는 이런 게 당연할지 몰라도

 

여기는, 아니 나한테는 당연하지 않아. 적어도 순서라는 게 있지 않나?“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니 그녀는 자리에 계속 있지만,

 

나는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서 서 있는 상태.

 

입장이 거꾸로 된 것 같다.

 

"그리고, 너의 말하는 방식은 무언가...... 불쾌하단 말이다.“

 

"어머나. 그렇군......“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수긍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련?“

 

그리고는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온다.

 

"뭐... 뭐야!“

 

아득히 커 보이는 그녀의 키. 그리고 그녀의 분위기에 압박당한다.

 

"어째서 아가가 나를 불쾌하게 생각할까나?“

 

"오지 마...“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고, 나는 한 걸음씩 물러난다.

 

"아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꿀 테니 말해주지 않으련?“

 

"오지 말라고......“

 

등에 무언가 느껴졌을 때 이미 나는 벽을 등지고 서 있게 되었고

 

'쾅!‘

 

그녀는 한 팔로 내 옆의 벽을 치며 가로막았다.

 

"어찌하면 내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안심하렴. 아가. 해치는 게 아니란다.“

 

옆으로 빠져나가려 할 때 그녀의 남은 손이 다시 내 턱을 받치더니

 

'쭙'

 

"흡......!“

 

갑자기 그녀의 입이 내 입을 막는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그녀의 혀는 내 입으로 저항 없이 들어오고,

 

내 혀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처음 맛보는 타인의 달콤함.

 

처음 느끼는 혀의 감촉에 몸이 저릿저릿 흥분하면서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서 혀를 이리저리 피하지만

 

"으으으움....“

 

결국 그녀의 혀를 이리저리 문지르는 꼴이 되어 그녀와의 감각을 더욱 자극한다.

 

입맞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키스.

 

처음 경험하는 느낌에 배덕감을 느끼면서도

 

의식의 한 구석에서는 경보를 울린다.

 

'으읏.... 위험해!‘

 

입안의 감촉에 잠깐 정신이 빼앗겼었지만, 아직 몸은 저항할 수 있다.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피할 곳을 알아보고 있을 때

 

앞에는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금빛 눈동자가 있었다.

 

"푸하- 안 되지, 아가. 다른 생각 하면 안 된다?“

 

"으으으웁!!"

 

잠깐 얼굴이 멀어진 틈을 타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녀의 양팔이 나름 감싸 들어 올리니 그녀에게 매달린 모습이 된다.

 

도망도 못 가는 때에 한 손이 내 뒷머리를 받치고

 

다시금 그녀의 입술이 맞닿았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허공에서 바둥바둥거리고,

 

갈 곳 잃은 양 팔은 헤엄치는 것처럼 허우적거린다.

 

그리고 틈 없이 내 혀와 입을 유린해오는 그녀.

 

거칠어진 그녀의 호흡.

 

상체에 밀어붙이고 있는 그녀의 풍만한 육체.

 

옷 너머 가슴의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

 

사방에서 조여오는 그녀의 몸,

 

입으로 전해져오는 끈척하고 부드러운 느낌.

 

여성의 향기와 키스 동안의 농밀한 소리.

 

나를 요구하며 달라붙어 있는 여성.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강하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아...... 잠깐. 이거......‘

 

자극을 받아들인 몸은 거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떨어지지 않으면!‘

 

부끄럽게도 하체 쪽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으웁! 으으으으으으웁!“

 

내가 전력으로 몸을 휘저어도, 그녀의 무게중심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저항하다 보니 부푼 곳이 그녀의 몸을 찌르게 되었고

 

"으음?“

 

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야릇한 눈웃음과 함께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다.

 

축축한 입은 떨어지지 않은 채

 

그녀의 한 손이 스멀스멀 내 복부를 기어 내려간다.

 

’이러다가 잡아 먹힌다!‘

 

처음 맛보는 여성의 쾌감에 해롱해롱한 상태에서도

 

절대 선을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이 솟는다.

 

그녀의 '장난감'이 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우우웁! 으으으우우우우우우웁!“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온 힘으로 민다.

 

힘쓰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입에도 힘이 들어가

 

그녀의 혀를 살짝 깨무는 모양이 되자

 

"푸하- 아직은 이를려나? 후훗...... 미안하구나. 아가."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만족했다는 듯이 나를 내려준다.

 

’츄르릅‘

 

입에 남은 끈적한 흔적을 혀로 핥는 모습이 끓어오른 몸을 더욱 자극했지만,

 

’나중에 꼭 먹어주마‘

 

라고 말하는 듯한 노골적인 눈을 보니 한순간에 몸이 차게 식는 것 같다.

 

"다-당신 제정신이야?“

 

내 입 주변에 흘러넘치는 침을 닦으며, 그녀에게 항의해본다.

 

잘 생각해보니 이거 여자가 당한 후의 모습과 같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건데?“

 

"아가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던 것뿐.“

 

그녀는 쓰러진 내 의자를 줍고 앉더니

 

"이걸로 설명이 안 될까?“

 

뻔뻔하게 변명하고 앉아있다.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한다 해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에?!“

 

그녀는 생각보다 상식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아...... 지친다. 이제 돌아가 주지 않을래요?"

 

"아직 돌아가지 않을 거란다?"

 

"무얼 더 원하시길래 남아있겠다는 겁니까."

 

"아까 전, 아가가 불쾌해했던 이유."

 

"으윽......"

 

"들려주지 않으련?"

 

"하아......"

 

아까 전의 교류 때문이었는지, 무력감이 내 머리에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

 

그녀에게 지고 있다는 것이 분하지만,

 

피로감과 무력감 때문에 조금이나마 경계심을 푸는 내 모습이 있다.

 

'위험하다'에서 '수상하다'로 낮아졌을까나.

 

조금 과격한 함선이구나 라는 것으로 멋대로 납득하고

 

그녀의 고집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빨리 돌려보내고 잠들고 싶을 뿐이다.

 

"조금이라면 들려드리지요."

 

나는 남은 의자에 걸어가면서 앉으려 하는데,

 

'탁'

 

그녀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팡팡'

 

그녀의 앉은 허벅지 위를 두들긴다.

 

나보고 저기 앉으라고?!

 

"앉으렴?"

 

"그...그건-"

 

"앉.으.렴?"

 

그녀의 얼굴 하나 바뀌지 않은 압박감에 나는 항복하기로 한다.

 

아까보다는 매우 싼 대가이다. 이왕 어울려주는 것 그냥 다 해주자.

 

그녀는 가볍게 나를 들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다.

 

그녀의 신장이 확실히 큰 게, 앉은 상태로 내 머리가 그녀의 턱에 닿는 수준이다.

 

거꾸로 말하면

 

'스윽'

 

"흠흠~"

 

그녀가 나를 인형 껴안듯이 안을 수 있는 크기가 돼버린다.

 

양팔이 나를 감싸고 배 앞으로 손을 포개 잡는다.

 

완전히 그녀에게 포박당했다.

 

"자, 한번 말해주렴. 아가의 이야기를."

 

그녀가 팔을 꽉 조이면서 내 등이 그녀의 부푼 곳에 닿는다.

 

푹신한 감촉이 소파와는 다른데,

 

이걸 신경 쓰기 시작하니 여러모로 위험하다.

 

반응하려는 몸을 진정시키면서 빠르게 상황을 끝내기 위해

 

그녀의 고집을 들어주기로 했다.

 

"조금만 말하겠습니다......"

 

 

 

 

9

 

"하아아아...... 피곤하다."

 

그녀를 업무실에서 떠나보낸 직후, 처음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

 

시계를 보니 1시간 정도 그녀와 있었던 것 같다.

 

1시간 동안에 얼마나 강렬했는지 밤이 지나 새벽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로세......"

 

다행이도 그녀는 그 후로 내 이야기를 얌전히 들어줬다.

 

그녀 나름 만족했었는지 나를 안고서 허튼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내 엄마의 이야기와 그녀에 대한 느낌.

 

이런 것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녀가 나에 대해서 혹은 내 엄마에 대해서 화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감정이 격해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워 보이는 모습과 말투로 내 과거를 인정해주었다.

 

'나는 아가의 모든 것을 품어줄 수 있단다.'

 

그녀의 말에 안심하는 나였지만, 그녀의 접근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러니 괴로울 때는 나에게 오지 않으련?'

 

무언가 계속 접점을 만들려 한다. 세력이라는 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접근은 노골적이다.

 

'만약, 잠이 안 온다면 자장가를 연주해줄게.'

 

그리고 계속 아기 취급한다.

 

"젠장......"

 

사람을 안심시키는 모습과 동시에 아기 취급하는 모습.

 

자기가 무슨 성모냐고.

 

또 언제부터 그녀와 나의 상하관계가 뒤바뀌었을까.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고칠 필요가 있을까.

 

이래 저래도 결국 내일 그녀들을 떠나보낸다면 다 끝날 것이기에

 

괜한 걱정은 그만하고 잠들기로 한다.

 

 

< 시간 경과 >

 

 

다음 날 아침.

 

언제나처럼 업무실의 아침은 조용했고

 

그녀들을 보내기 위해 나갈 준비를 한다.

 

오랜만에 업무실 밖으로 나와본다.

 

어젯밤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무엇 하나 바뀌지 않고 바쁘게 돌아가는 기지.

 

이 기지의 불순물처럼 느껴지는 그녀들만 보낸다면,

 

이 장소는 다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기지 일 말고도 개인적인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었네요.”

 

항구에서 나가는 그녀들에게 성의 없이 전한 거짓말.

 

어차피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기에 미련도, 죄책감도 없다.

 

그녀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지

 

가볍게 인사하고 하나둘 바다로 내딛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문제의 그녀.

 

저번보다는 확실히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나를 지나간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아가야.”

 

나를 지나쳐갈 때 이런 말을 남기고는

 

그녀들을 따라 기지를 떠난다.

 

“뭐가 다음이냐. 다음은 없어......”

 

그녀들을 속 시원하게 보내며 기지개를 핀다.

 

그녀와의 일은 한밤의 악몽일 뿐이다.

 

앞으로는 없던 것으로 변하겠지.

 

그래. 이걸로 끝이다.

 

 

< 2주 후 >

 

 

적색중축에 대한 보고와

 

내가 당했던 일들을 적당히 순화시켜서 전달시킨 후

 

만쥬들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고 있었을 때,

 

상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나는 파견을 나갔던 함선들이 곧 돌아오리라는 것.

 

도착 예정 시간은 약 9일.

 

이건 알겠으니까 패스.

 

두 번째는 이전에 신세를 졌던 적색중축 함선이

 

이 기지를 휴가지로 휴가를 신청했다고 한다.

 

이 문구를 읽자마자 책상을 강하게 쳐서 책상을 부술 뻔했다.

 

하달 문서 특성상 자세한 사항은 생략되어있고,

 

나는 이 사태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 다짜고짜 상부에 전화를 건다.

 

 

< 10분 후 통화 종료 >

 

 

'툭'

 

"하아아아아......"

 

든든했던 벽람항로가 처음으로 배신자처럼 느껴진다.

 

핵심은 적생중축이 우리 쪽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붙여서

 

'어떤 함선'의 휴가지 신청을 요청했다고 한다.

 

무슨 계략이 있는 게 아닌지 이쪽도 의심해보았지만,

 

딱히 계략을 벌일만한 위험성이 없다는 것.

 

세이렌의 기세에 서로 지쳐가는 와중,

 

적색중축도 메이저 함선들의 발언권이 강하기에 하는 수 없이

 

이런 휴가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쪽은 결국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기에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팔아넘기는 형태가 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벽람항로도 여유가 없는 만큼 받아들여달라는 결론.

 

도망칠 수 없는 선택지는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분명 그로세 그녀가 올 것이다.

 

이전에 '또 보자'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한 것이었나.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불안하게 움직여보지만, 딱히 바뀌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한번 하고 생각을 정리해본다.

 

그로세가 다시 온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1. 다른 함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경우는 함선끼리의 다툼이 될 수 있고 세력 간의 분쟁이 될 수도 있다.

 

가능하면 이 방법은 쓰지 말아야 한다.

 

또한 상부는 그녀의 존재를 묵인한 상태.

 

나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2. 압도적인 권력으로 그녀의 개입을 막는다.

 

함선이 아닌 군 자체의 헌병이나 병력을 동원해 나를 보호하는 것.

 

좋아 보이는 방법이지만, 이 기지에는 나를 제외한 인력이 없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선택지가 돼버린다.

 

3. 그녀랑 마주치지 않도록 도망간다.

 

차라리 그때 나도 휴가를 길게 써서 기지를 비워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올 때 정도면 다른 함선도 있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방법은 정해졌다.

 

파견 나갔던 함선들이 오는 시간,

 

그로세가 이쪽에 오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오고 2일만 버티면 휴가를 써서 나갈 수 있다.

 

엄연히는 1박 2일. 하룻밤만 무사히 넘기면

 

그 뒤는 복귀하는 함선들에게 맡기고 나갈 수 있게 된다.

 

하룻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그 때에 대한 생각은 일단 두고

 

장기 휴가를 위한 짐을 먼저 챙겨 놓는다.

 

준비되는 순간 바로 나갈 수 있도록.

 

 

 

10

 

우리 기지의 그리운 얼굴들이 돌아오기까지 얼마 안 남은 날.

 

원래라면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들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오늘의 나는 매우 뒤숭숭한 기분으로 항구에 나와 있다.

 

프리 뭐시기 그로세.

 

이름은 기억하지만 제대로 말해주기 싫을 정도로 불편한 상대.

 

그녀를 맞이하러 일부러 나온 것이다.

 

그렇게 싫으면 나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혹여나 기지 이곳저곳을 뒤집으며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는 그녀의 위험성을 생각할 때

 

차라리 먼저 나와서 선수 치는 게 이로울 것 같았다.

 

태양이 저물어가는 황혼 속 수평선.

 

보고 싶지 않은 이를 기다리며 그림 같은 장소에 서 있는다.

 

이런 기분일 때 사람들은 담배를 폈었나.

 

담배를 피지 않았지만, 만약 가지고 있었다면

 

주저 없이 한 대 피워버릴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진다.

 

'툭툭'

 

만쥬의 안내와 함께 수평선 쪽을 바라보니 검은 형체가 보인다.

 

"올 것이 왔군."

 

실제로 어떤 속력으로 다니는지 모르지만,

 

야속하게도 몇십분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항구에 도착한다.

 

"잘 와주었구나 아가야. 나를 맞이하러 나와준 거니?"

 

"아니, 딱히 맞이한다는게-"

 

"기특하구나."

 

'덥석!'

 

갑자기 와락 끌어안아진다.

 

얼마나 팔 힘이 강한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다.

 

"으으움! 으으으으우우움!"

 

다른 사람이 봤었다면 한심스러운 모습이겠지만,

 

만쥬들은 제 할 일을 위해 돌아갔기에 그나마 다행일까.

 

팔을 버둥버둥거리며 그녀로부터 떨어지려 하지만,

 

그녀의 팔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잠깐의 동안이라도 이렇게 그리워지는구나.

 

아가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개소리하지 말라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호흡이 죽어가는 탓에 축 늘어진 상태였다.

 

"어머, 미안하구나.

 

아가를 위한 시간은 많이 있으니 천천히 하자꾸나."

 

"허어억...... 허어어억......"

 

그녀의 과격한 페이스에 초반부터 넉다운되었다.

 

함선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힘은 내가 느낀 함선의 힘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매혹적인 외형과 괴물 같은 내면.

 

그녀를 알면 알수록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된다.

 

"자 가자꾸나."

 

"잠깐 어딜-"

 

인형을 안는 것처럼 양팔로 내 어깨 밑을 끌어안는다.

 

물론 나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아 그녀에게 매달리는 형태가 되고

 

또다시 무기력하게 그녀에게 끌려다니는 모양.

 

"전투보다는 이런 게 좋아. 아가, 자, 아앙 해봐. 아앙-“

 

다짜고짜 식당에 끌려가서 자유롭게 먹을 수 없는 식사를 당하거나

 

"잘 어울려. 귀엽네 우리 아가."

 

검은 망토 같은 것을 나에게 입히더니 혼자서 만족하는 등

 

그녀의 장난감이 되어서 철저하게 휘둘리고 있다.

 

물론 반항하거나 말대꾸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오늘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꾹 참고 버텼다. 

 

정신없이 휘둘려 생각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

 

내 업무실로 같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혹여나 있을 위험을 감지해서 의식이 번쩍 돌아온다.

 

익숙한 자리에 굳어져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클래식 음악이 들려온다.

 

"아가, 음악을 좋아했구나."

 

비트가 터지는 음악을 좋아해서 음향기기를 들이기는 했는데,

 

클래식을 틀으니 어색했어도 들을 만하다.

 

"흐흐응~"

 

그런데, 같은 취향을 나와 공유하게 되어서 기뻐하는 얼굴을 보이는 그녀.

 

이렇게 보면 매력적인 여성인데,

 

성격 하나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보며

 

다시금 외형보다는 본질이 중요하다고 납득한다.

 

클래식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그녀는

 

포트에서 물을 따라 음료를 만들고 있었다.

 

티타임이라도 가질 생각인 것 같은데,

 

본 게임은 지금부터인 것 같다.

 

"자 아가야. 뜨거울 테니 조심히 마시렴."

 

자연스럽게 내 앞에 놓여있는 코코아를 보며

 

쓸데없는 부분에 섬세한 모습을 보여준다.

 

저번에는 의심과 경계심으로 음료를 마시는 것부터 마찰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녀의 행동에 적응이 되었는지 부담 없이 잔을 들어서 마신다.

 

이렇게 수상한 그녀와 느긋한 티타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나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 같다.

 

"이렇게 함께 마시니 맛도 특별하게 느껴지는구나. 아가도 그렇게 느끼니?"

 

"......"

 

강제적으로 긍정을 유도하는 질문에 일부러 침묵을 지켜본다.

 

"그렇군. 아직 아가는 부끄러운가 보구나."

 

참아라. 참아야 한다.

 

저 싸구려 도발에 넘어 가다는 페이스를 놓친다.

 

"아가, 왜 내가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지 않니?"

 

"?!"

 

생각하지도 못한 직구로 놀란 모습을 보이게 된다.

 

"묻는다 해서 알려줄 건가요?"

 

"물론. 아가가 알고 싶어 한다면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지."

 

"그러면, 알려주세요.“

 

"아가를 만나고 싶어서 왔단다."

 

"쯧!"

 

왠지 모르게 예상된 대답이어서 노골적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아가, 그런 태도는 좋지 못하단다."

 

"제가 환영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

 

이번에는 그녀의 침묵.

 

이쪽을 웃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낀다.

 

"하아...... 뭐, 상관없겠지요. 그로세씨가-"

 

"엄.마."

 

"으그극......"

 

"불러보렴?"

 

"............ 이 기지에 온 것은 단순 '휴양'을 원해서 온 것으로 되어있으니

 

마음껏 즐겨주시길..."

 

애써서 그녀의 요구를 무시한다.

 

"흠... 언젠가는 나를 그렇게 부르게 될 거란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엄마'라는 단어는 내가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단어는 내 사전에 없.기.때.문.에.

 

"아가랑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갈게."

 

"네?"

 

생각하지 못한 이른 철수에 내가 미련이 있는듯한 반응을 보여버렸다.

 

"이후의 즐거움은 다음 날에 또 하자꾸나."

 

시원스럽게 방을 떠나는 모습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무언가 아쉬운 느낌.

 

뭐가 아쉬운 것이지?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원한 것인가?

 

한 여성과 두근거리는 관계에 미련이 남은 것인가?

 

형식적인 자리라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는 것을 원했던 것인가?

 

내가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살짝 미친 것 같다.

 

어차피 내일부터 그녀를 만날 일이 없다.

 

멀리 떨어져서 지내다 보면 혼란스러운 내 정신도 회복되겠지.

 

 

 

 

11

 

늦은 밤.

 

나는 항구에서 파견 갔다가 돌아오는 함선들을 맞이한다.

 

"미안해.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기지 일을 맡기게 되어버렸네."

 

"아니에요. 오히려 지휘관이 기지를 지키느라 쉴 때가 없었지요.

 

기지는 우리에게 맡기고 푹~ 쉬었다 오셔요."

 

베스탈과 몇 구축함들의 복귀와 동시에 내가 출발한다.

 

혹시라도 계획이 꼬일까,

 

틈을 주지 않도록 하여 이렇게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만쥬들이 운전하는 보트에 짐을 싣고 올라타 인근의 항구를 향해 출발한다.

 

보트의 엔진음은 그녀들이 기지에 도착하는 소리와 섞여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1시간 정도 무사히 가면 되기에 어두운 밤바다를 멍때리며 바라본다.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조용히 울리는 보트 엔진음과 파도 소리에 졸음이 쏟아진다.

 

'......'

 

좌석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콰당!'

 

전신을 흔들어 깨울 폭음과 충격을 느낀다.

 

'위이이이잉!'

 

"뭐-뭐야!"

 

눈을 뜨고 보트와 만쥬들을 확인하니

 

"에?"

 

뭐랄까. 바이킹 놀이기구처럼,

 

우리 보트가 해수면 위 수직으로 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뒤집혀가는 보트 속에서 만쥬들을 서로 부둥켜안으며 바다로 던져진다.

 

'풍덩!'

 

'부글부글부글'

 

"푸하아아아!"

 

수면 밖으로 나와 물에 뜨는 것을 잡는다.

 

내가 챙겨온 짐가방이나 나무 파편들이 떠 있어서 만쥬들에게도 잡게 해준다.

 

"혹시 조난 장비 있어?"

 

만쥬들이 능숙하게 장비를 꺼내며 무전을 작동시킨다.

 

엄연히 해군이기에 이런 대비가 잘 되어 있지만,

 

늦은 밤에 기지와 거리도 있는 만큼 시간은 조금 걸릴 것 같다.

 

인근 경찰에게 구조받을 수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자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도대체 어떤 이유로 보트가 뒤집히고 부서졌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만쥬들에게 물어보니 항해 도중 이상 징후는 없었다고 한다.

 

또한 세이렌이 나타났다면 기지 쪽에서 먼저 알아차렸을 텐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이유 모를 상황에 한 가지 의심이 생겨난다.

 

'설마 그녀가?'

 

그렇게 의심이 싹을 틔우고 있을 때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

 

어두운 밤이기에 식별이 불가능 하지만, 무언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정말로 그녀인 것일까?'

 

정말로 만약 그녀가 벌인 일이라면, 얼마나 미쳐있는 것일까.

 

최악의 상황이 아니기를 바라며 먼 곳을 바라보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바다 위 그것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였다.

 

"아가, 괜찮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어오는 그녀에게 대답할 여유도 없이

 

"어째서......"

 

원망과 절망의 마음만이 솟구친다.

 

 

 

 

12

 

그녀에게 순순히 구조되어서 만쥬들과 함께 돌아오는 길.

 

그녀의 배 갑판 위에서 나는 멍하게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휴가 계획이 깨진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정말로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면 순진하게 납득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시선은 조용한 밤바다라도 바라보아야 했다.

 

"아가. 무슨 생각 하니?"

 

나의 옆에 오는 그녀.

 

"......"

 

하고 싶은 말은 많이 있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 왜......"

 

"으음?"

 

"왜 저희 보트가 뒤집힌 것일까요?"

 

"......"

 

부디 그녀로부터 진실을 듣고 싶었다.

 

"조용하던 바다였는데, 갑자기 배가 충격에 휩쓸리더군요. 혹시 아시나요?"

 

"세이렌..."

 

"네?"

 

"아가가 탔던 보트 아래에 잠수형 세이렌이 있더구나."

 

"그렇다면 다른 세이렌은 어디 있었을까요. 혼자 나오지는 않을 텐데."

 

"글세... 세이렌은 혼자서 다니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

 

"왜 우리 기지는 세이렌을 탐지하지 못했을까요."

 

"그거 아니? 세이렌은 우리의 기술을 아득히 뛰어넘기 때문에

 

얼마든지 예측 못 할 일이 있을 수 있단다."

 

"...... 한 가지... 약속할 수 있어요?"

 

"음? 어떤 약속?"

 

나는 옆의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도 같은 여유로운 표정.

 

그녀로부터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이쪽도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해줘요... 세이렌은... 정말로 있었나요?"

 

"그래. 거짓말이라..."

 

나의 물음에 그녀는 눈을 감더니

 

"그러면, 아가도 거짓말하지 않을 수 있겠니?"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 강한 눈빛으로 마주본다.

 

"......"

 

내가 불리해질 수 있는 대화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서로에게, 그리고 각 진영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일을 매듭짓고 싶었다.

 

"거짓말.... 하지 않겠습니다. 세이렌은 정말 있었나요?"

 

"좋아. 세이렌은 없었단다."

 

"그러면, 포격은 당신이-?"

 

"이번에는 내가 묻자꾸나. 기지를 떠난 이유는 뭐지?"

 

"............"

 

내 질문에 질문을 답으로 받았다.

 

"...... 휴가를 위해 떠나고 있었습니다."

 

"듣지 못한 소식이구나.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지?"

 

"개인 사정으로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개인 사정이라 함은?"

 

"제가 그것까지 말해야 할 필요가-"

 

"거짓말. 하지 않기로 했지?"

 

"............"

 

"다시 한번 묻자꾸나. 기지를 떠난 이유는 무엇이지?"

 

"...... 당신을..."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휴가를 냈습니다."

 

"...... 솔직하게 말해주었구나. 아가"

 

"......꿀꺽"

 

"하지만, 나에게 말도 없이 떠나려 한 것은 잘못되었단다."

 

"......"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 거니?"

 

"반성? 반성이라고?"

 

말도 안 되는 말에 분노가 올라온다.

 

"당신이... 제멋대로인 건데, 나더러 반성이라고?

 

나는 분명 절차와 방법을 거치고 움직인 거야.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렇다면, 왜 나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았니?"

 

"내가 왜 당신한테 허락 받아야 하는건데!"

 

"아가를 돌보기 위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당신이 왜 나를 돌보는 척하고 있냐고!

 

나는 그런 거 부탁한 적 없다고!"

 

그녀는 내 속마음을 읽으려는 듯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본다.

 

"당신 미친 거 아니야?

 

왜 멋대로 사람을 니 장난감 마냥 취급하는 건데?

 

나 이래 보여도 벽람항로의 지휘관이야?

 

적색중축은 선전포고라도 하려고 이짓거리 하는거야?"

 

"아가, 이건 세력과는 관계없는 우리만의-"

 

"우리? 지금 우리라고?

 

내가 언제부터 너랑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그리고 당신이 멋대로 비집고 들어와서는 친한 척 우길 셈?

 

너는 어떤 짓을 해도 가.족.처럼 될 수는 없다고!"

 

"......"

 

가족이라는 단어에 그녀가 반응한 것으로 보아,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가족처럼 여긴 것일까.

 

"그리고 당신 같은 타입은 싫어서 말이야.

 

가족으로도 삼고 싶지 않아."

 

"아... 하하......"

 

눈빛이 달라지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아가. 아가가 지금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아니, 나는 너의 헛소리를 들을 생각 없어.

 

소꿉놀이라면 너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라고.

 

괜한 남 끌어들이는 미친 짓은 그만해."

 

"아가 많이 흥분했구나. 차라도 마실까?"

 

"당신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나를 내려줘! 기지로 돌아갈 테야!"

 

"아니, 불안정한 아가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단다."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힘으로 날 찍어누르기나 하고......"

 

힘의 주도권이 정해져 있는 이상, 말로 이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해보기나 했냐고..."

 

그렇기에 이런 때를 대비해 준비했던,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을 꺼내 든다.

 

"이젠 질렸어... 차라리... 이렇게 저질러 버리는 게 나아."

 

허리춤에 감춰두었던 군용 단검을 든다.

 

함선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겠지만,

 

상처를 내거나 위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알려지게 되면

 

나는 징계 및 벽람항로로부터 떠날 수 있게 된다.

 

성공과 실패 어느 쪽이든 간에

 

그녀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아가, 지금 들고 있는 건..."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이번 기회로 그녀도 나를 포기할 수 있을까.

 

"니 말 들을 생각 없어... 너만 없으면...

 

모든게... 모든게 괜찮았을 텐데!"

 

단검을 앞으로 향한 채 양손으로 쥔다.

 

"나라도 당하고만 있을 생각 없다고!

 

으아아아아아!"

 

평소라면 도저히 못 할 일이기에 기합을 넣어서 돌진한다.

 

그녀와 몇 걸음 안 되게 가까워질 때

 

'짜악!'

 

그녀의 팔이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콰당!'

 

그녀의 힘에 내 무게중심이 무너져 넘어진다.

 

'챙그랑'

 

맞은 곳은 내 손이 아닌 것 같은데, 칼날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녀는 칼날을 손으로 쳐서 칼을 부러뜨린 것이다.

 

"......"

 

부서진 칼날을 보며 잠깐 멍해졌을 때,

 

나는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칼날의 남은 부분으로 내 목을 긋자.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면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읍!"

 

칼날을 들어서 내 목을 찌르려 할 때

 

'텁, 짜악!'

 

두 번째 소리가 퍼진다.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뺨을 때렸는지

 

고개가 옆으로 꺾인다.

 

뺨의 아픔은 둘째 치고 무기력하게 당하는

 

자신의 모습에 마음이 꺾인다.

 

"아가, 위험하잖니. 방금 행동은 옳지 못했단다."

 

"개소리...... 하지마..."

 

"제대로 사과하면, 용서해 줄게."

 

"너한테..."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본다.

 

무기력감과 분노가 섞여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내 눈에서 나오고 있다.

 

"너한테... 용서받지...... 않을거야."

 

"아가......"

 

나에게 다가서 쪼그려 앉은 그녀의 표정은

 

분노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아가는... 내가 싫니...?"

 

내가 옛날 엄마로부터 버림받았을 때의 표정.

 

그 표정이 그녀의 표정과 겹처진다.

 

옛날의 기억이 살아나면서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어떻게든 참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기 때문이다.

 

"싫어요... 흣... 너무 싫어서...

 

싫어서...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 그렇구나..."

 

그녀는 눈을 감고 체념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일어선다.

 

"아가의 마음을 몰라주면 진정한 보호자라고 할 수 없지...

 

나중에 또 보자꾸나. 아가."

 

그녀는 뒤돌아가며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배는 우리 기지를 향해 도착하고 있어서 곧 내릴 수 있었다.

 

 

 

 

12

 

만쥬들과 함께 기지에 도착하였을 때, 날은 깊은 밤이 되었다.

 

원정에 귀환하였던 그녀들은 한참 쉬고있을테고

 

만쥬들도 야간 근무 체제로 있을 것이다.

 

"하...... 하하......"

 

기지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벗어났다는 성취감과 한편으로 느껴지는 미안함.

 

버림받은 기억이 있었던 탓에

 

누군가를 버리는 것이 마음 아프게 느껴진다.

 

"하하하......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이유 모를 허무함을 느끼면서 업무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음속에는 무언가 남아있는 것 같지만,

 

애써서 무시해버린다.

 

 

< 시간 경과 >

 

 

바닷물에 젖었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을 때

 

'위이이이이잉!'

 

요란한 경보음이 울린다.

 

세이렌을 발견했을 때 울리는 경보.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이 기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쥬의 보고를 받고 지휘실로 향한다.

 

"곤란한걸..."

 

이전에 마주쳤던 세이렌 정찰 부대의 규모가 아니다.

 

벽람항로 주력함대급 정도의 규모.

 

정찰대만 조심히 물리치면 되었던 이전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

 

원정에 돌아온 그녀들은 아직 쉬지도 못했을 터.

 

그녀들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만쥬들이 상부에 긴급 보고를 하였지만,

 

지원이 오기까지는 적어도 3시간.

 

그녀들과 만쥬들을 데리고 급히 대피하는 방향을 정한다.

 

그녀들에게 내 생각을 전하니

 

"안 돼요 지휘관."

 

대피하자는 나의 말을 단호히 거부하는 베스탈.

 

"우리를 걱정해주시는 지휘관의 마음도 알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임무를 포기하지는 않아요."

 

"임무는커녕 흔적도 없이 죽을 텐데, 무모한 일 하지는 말자고.

 

내 명령이니 같이 대피하자."

 

"거절합니다."

 

"?!"

 

"이 기지를 지키는 것이 저희들의 임무.

 

모두의 추억이 있는 이곳을 쉽게 양보할 수는 없어요."

 

"너희들이 죽을 바에는 기지를 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기지를 버려서 모두가 괜찮아진다면 좋아요.

 

그러나 이 거리는 대피할 때에 따라잡히는 거리에요.

 

세이렌의 발을 묶을 필요가 있어요."

 

"......"

 

확실히 세이렌과의 거리는 충분히 위험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못 한다.

 

"위험하다 해도 상관없어. 같이 있다 보면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정말! 이럴 때 고집부리지 말아 주세요. 지휘관!

 

지휘관을 위험한 곳에 놓고서 우리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을 것 같나요?"

 

누가 봐도 옳은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잃는다.

 

상황이 급하다 보니 지금 올바른 판단이 되지 않는다.

 

그저 그녀들을 죽게 할 수 없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먼저 가요 지휘관. 우리들은 싸우기 위한 존재.

 

죽음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에요."

 

"아니... 그래도-"

 

"말 안 듣는 지휘관의 명령 따윈 듣지 않을 거에요!

 

나중에 만나면 큰 주사를 놔줄 테니 각오해요!"

 

"............"

 

내 답을 듣지도 않고 출발하려는 그녀들.

 

"베스탈! 꼭 살아 돌아와야 해!"

 

이 기지의 함선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너무 소중하다.

 

베스탈과 그녀들을 잃는다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 나중에 꼭 만나는 거에요. 지휘관."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달려 나간다.

 

왠지 이 모습이 그녀를 보는 마지막 모습일 것 같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하지만, 그녀들의 희생을 헛수고로 해서도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좋아......"

 

책상을 치며 절규한다.

 

비전투 인원의 단점이 실감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럴 때 나는 누구보다 쓸모없는 지휘관이 되어버린다.

 

짐을 부지런히 옮기는 만쥬들을 보다 휴대용 무전기를 본다.

 

그리고 한 생각이 떠오른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녀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멀리 떠났을까?

 

아니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까?

 

지휘실의 무전을 잡고 조정한다.

 

"여기는 동남 보급기지의 지휘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응답 바람..."

 

무전을 마치고 기다린다.

 

빗소리와 여러 신호음이 들리는 가운데,

 

기다리는 시간만큼은 너무 길게 느껴진다.

 

설마 그녀가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혹은 무전을 듣더라도 내가 그녀를 버린 것 때문에

 

침묵하지는 않을까.

 

'쿠웅!'

 

멀리서 폭음이 들려온다.

 

세이렌과의 교전이 시작된 것 같다.

 

피난을 시작하려면 지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그녀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쿵!'

 

마지막으로 응답을 기다리다가 폭음을 듣고 떠날 준비를 한다.

 

"-로세"

 

"?!"

 

폭음과 잡음에 묻혀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여기는 동남기지! 잘 들리는가?"

 

"여기는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신호 양호"

 

"그로세씨!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아가에게서 부탁을 받는구나.

 

기쁘지만, 그럴 수 없단다.

 

나도 세이렌을 상대하느라 바쁘구나."

 

그녀가 호락호락하게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저희 기지의 함선들이 죽을 위기에 있습니다.

 

그녀들이 죽는다면 저는 정말 괴로울 것 같습니다!"

 

"그녀들을 걱정하고 있구나.

 

그런데 아가는 언제쯤 나를 걱정해주려나."

 

"그로세씨는 충분히 강합니다!

 

그녀들과 이 기지 그리고 저를 구할 수 있어요!"

 

"나도 저들처럼 연약했다면 아가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힘들다.

 

그녀는 원하는 것이 확실하다.

 

기브 앤 테이크.

 

"아가, 내가 싫다고 하지 않았니?"

 

"그...그건..."

 

어떻게 만들었던 자유인데, 이제와서 가볍게 부수어지려 한다.

 

'쿠구궁!'

 

베스탈과 그녀들이 향한 쪽에서 소리가 들려오자

 

저울질할 여유가 사라진다.

 

'나중에 꼭 만나는 거에요. 지휘관.'

 

그녀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상황은 아무래도 좋다.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로세씨......

 

싫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참 기쁜 소식이구나. 하지만-"

 

그녀의 말에 숨을 삼킨다.

 

저들의 목숨을 가지고서 얼마나 거래하려는 것인가.

 

나를 그렇게까지 떨어뜨리고 싶은 것인가.

 

"아가가 반항적이지 않았니?

 

그러니까 한 가지 더 약속하자꾸나.

 

앞으로는 내 말을 잘.듣.기.로."

 

"............"

 

숨을 멈췄다.

 

'무엇이든지 해달라'와 같은 요구.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요구다.

 

터무니없는 조건이지만,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그녀들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가 팔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스읍......"

 

말하기가 어렵다.

 

떨리는 목소리로 억지로 힘을 준다.

 

"그로세씨의 말...

 

잘 듣도록... 하겠습니다......

 

약속...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도와주세요...

 

부탁입니다..."

 

"아가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말하더니 통신이 멈추었다.

 

'투슈우우웅!'

 

그리고 밖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벌어지고 있다.

 

그녀는 분명 세이렌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도록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녀는 일부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교활함이 무서울 따름이다.

 

 

 

 

14

 

내 함선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팔렸다.

 

나는 주고받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하하......"

 

내 함선들의 안전이 확보되자 곧바로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내 무너진 자존심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그녀들이 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전과 달리,

 

너무나 쉽게 팔려버린 자신의 가치가 아까웠다.

 

사람은 참으로 비열한 생물이다.

 

맨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어 업무실로 돌아간다.

 

방 찬장에서 독한 술을 꺼내 병째로 마신다.

 

평소라면 마실 일이 거의 없겠지만,

 

이번만큼은 이를 의지하고 싶다.

 

식도로부터 위까지 타들어 가는 느낌.

 

비굴해진 자신에게 걸맞은 벌이라 생각한다.

 

멍한 정신 속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음미하고 있을 때

 

고등학교 시절 배운 음악이 생각난다.

 

검색하여 재생한다.

 

스피커로부터 현악의 전주와 함께 창문을 활짝 연다.

 

세찬 비를 배경 삼아 바람 소리의 응원 가운데

 

무대의 주인공처럼 자세를 잡는다.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서 노래를 부른다.

 

Lascia ch'io pianga - 조지 프레드릭 헨델, '리날도' 2막

 

"Lascia- ch'io pianga"

울게 하소서

 

"Mia cruda sorte"

비참한 내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à!"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à!"

나에게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벌컥 벌컥’

 

통증을 잊으며 독주를 들이킨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처량한 자신을 한탄할 뿐이다.

 

"Lascia- ch'io pianga"

울게 하소서

 

"Mia cruda sorte"

비참한 내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à."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멋지게 곡을 부르며 비참한 자신의 신세를 느끼고 있을 때

 

'짝짝짝짝'

 

등 뒤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린다.

 

"오셨군요..."

 

누구인지 뻔히 알기 때문에 굳이 뒤돌아보지 않는다.

 

"노래 실력이 훌륭하구나. 앙코르. 부탁할 수 있을까?"

 

"아쉽지만, 앙코르는 없어요."

 

의자에 쓰러져 앉으며 술병을 손에 든다.

 

반도 못 비운 술을 마시려 입에 가져갈 때

 

"아직 아가에게는 이르단다."

 

그녀가 사뿐하게 술병을 뺏어간다.

 

"아... 제꺼-"

 

"이거 말고도 좋은 것은 많이 줄 테니 참으렴?"

 

술마저 빼앗기자 피로감이 몰려온다.

 

의자에 기대어서 눈을 감는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짓을 한다 해도

 

이제는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가, 많이 피곤했구나?"

 

"누구-"

 

'누구 때문인데' 라고 말하려다 포기한다.

 

이제는 뭐가 어떻게 되어도 좋아졌다.

 

그냥 술기운에 잠들고 싶을 뿐이다.

 

그녀와 말을 주고받는 것도 지금은 지쳤다.

 

잠든 척 조용하게 있는다.

 

'뚜벅뚜벅'

 

그녀가 다가오더니 나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는다.

 

나를 내 침실로 데려가는 것 같다.

 

'나 이제 겁탈당하는 걸까나'

 

침실에서 그녀가 나를 범한다 해도, 나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는 팔렸기 때문이다.

 

침대의 감촉을 느꼈을 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나를 감싼다.

 

무엇을 할 생각일까 궁금하지만,

 

피곤함이 몰려와 그냥 잠들기로 하였다.

 

 

 

 

15

 

살짝 좋지 않은 기분에 잠이 깬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똑같은 침실의 풍경이었다.

 

어제 옷 입은 그대로 잤었던 것 같다.

 

왜 이렇게 몸이 안 좋은가 했더니 어제 마셨던 술이 생각난다.

 

숙취의 영향으로 속도 안 좋고 머리가 욱씬거린다.

 

왜 술을 마셨을까 하니 그녀가 생각난다.

 

혹시 그녀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하지 않았나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달리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없었다.

 

속옷까지도 어제 입었던 그대로.

 

그녀가 갈아입히거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옷을 벗길 일이 없었나 보다.

 

확실히 자는 동안은 위화감 없이 쭉 잤던 것 같다.

 

잠들 동안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도 건들지 않았다는 것.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입이 심하게 말라 있어서 물을 마시러 나간다.

 

"잘잤니 아가."

 

그리고 내 책상에서 우아하게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는 반항할 의지도 없어서 순순히 말을 받아준다.

 

그녀가 읽고 있었던 것은 내가 벽람항로에 막 들어와서 찍힌 사진들.

 

"어떻게 찾은 건가요 그거."

 

"아가가 푹 잘동안 한번 찾아보았단다. 여전히 귀엽구나."

 

"네......"

 

평범하게 대화하며 커피를 음미하며 환히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이전의 원수가 아닌 가족 같은 관계가 된 것 같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이런 따뜻한 모습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컵에 물을 담아 마시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을 때

 

"아가, 배고프니?"

 

그녀가 뒤에서 내 어깨를 감싸온다.

 

"네. 같이 식당으로 가서 밥 먹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단다. 내가 가져다줄게."

 

"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착한 아이는 말을 잘.들.어.야 한다?"

 

"네-네에......"

 

아이를 타이르는 듯 상냥한 말투였지만, 그녀의 굳센 고집이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강압에 조용히 방에서 기다린다.

 

 

< 시간 경과 >

 

 

'끼이익'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을 때 흠칫 놀랐다.

 

식사 말고도 무언가를 잔뜩 들고 왔기 때문이다.

 

"저... 그건 다 뭔가요."

 

"아가를 위한 거란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면서 책상에 음식을 놓는다.

 

"자, 여기"

 

그리고는 무언가를 나에게 씌우려 하는데,

 

"네?"

 

저건 그거다. 아기들이 밥 먹을 때 흘릴까 봐 입는 것.

 

턱받이라고 해야 할까?

 

나에게 그걸 씌우려 하고 있다.

 

"아니 아니, 그건 필요 없어요-"

 

"사양하지 말렴."

 

표정과 말투는 매우 따뜻한데,

 

이와 반대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계속 공포를 느낀다.

 

"...... 네."

 

이전이라면 반항이라도 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입장 때문에 말을 삼킨다.

 

미용실의 가운을 입은 것이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 음식을 먹기로 했다.

 

"저... 수저 좀 주세요."

 

평범하게 있어야 할 수저가 보이지 않아 가볍게 물어본 것이지만

 

"그럴 필요 없단다. 내가 먹여줄게."

 

그녀의 말과 표정의 괴리에 무서워지려한다.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을 때 나는 포기하고 그녀의 놀이에 맞춰주기로 했다.

 

"아~앙"

 

기억에도 없는 타인의 먹여주기.

 

내가 해준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행동에

 

끝없이 거북함을 느끼며 묵묵히 먹는다.

 

반대편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

 

'마치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표정을 하면서 혼자 행복에 젖어있다.

 

그녀와 눈 마주치기가 어색하여 시선을 내려보지만,

 

검은 천으로 드러난 그녀의 큰 가슴이 책상 위에 부각되어서 더욱 당황스럽게 한다.

 

분명 매혹적인 그녀의 외형이지만,

 

선을 넘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녀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내 시선은 어색하게 옆을 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시선과 낯선 섭취 방법 때문에

 

음식이 잘 삼켜지지 않는다.

 

이러다가 토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 잘근잘근 많이 씹는다.

 

토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평범했었던 식사를

 

의무적으로, 기계적으로 하게 되었다.

 

"잘... 먹었습니다."

 

평소보다 몇 배 더 힘든 식사를 마치고서 한숨을 쉰다.

 

"흥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식기를 정리한 그녀가 문을 나가려 할 때

 

"아, 저기. 저도... 나가도... 될까요?"

 

답답한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어서 한번 물어보지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잠깐 기다리렴?"

 

라는 말을 남기고서 빠르게 나간다.

 

왜 나는 방을 나가는 것도 그녀에게 물어본 것일까.

 

이전의 나는 이 '문'을 나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은 이 문밖을 나가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진다.

 

익숙한 공간에서 처음 맛보는 생소함.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시간 경과 >

 

 

"자, 아가."

 

방에서 어색하게 기다리기를 몇분.

 

그 후 그녀가 도착하면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는데

 

"휠체어?"

 

이 기지에 몇 있을 휠체어를 가지고 나에게 권한다.

 

"여기에 앉으라고요?"

 

"응."

 

상냥한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 오늘만 몇 번째.

 

하지만, 거절할 틈도 없이 나는 쭈뼛쭈뼛 휠체어로 다가간다.

 

전신 불구의 환자처럼 휠체어에서 남이 끄는대로 다닌다.

 

"언제나 봐도 아름다운 바다구나."

 

그녀 혼자 감상을 말할 때도

 

나는 어디로 끌려가는 것인지 조마조마하다.

 

혹여나 기지에서 만쥬나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해보았지만,

 

그런 경로만 피하여 다니는 것 같다.

 

혹시 베스탈과 그녀들은 괜찮은 것일까.

 

어제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들었다.

 

"저..."

 

그녀가 싫어할 것 같지만

 

"혹시 괜찮다면, 가고싶은데가..."

 

그래도 물어보기로 한다.

 

"음? 어디로 가고 싶니?"

 

"저... 어제의 그녀들을-"

 

"꼭... 만나고 싶니?"

 

아직까지 말투는 상냥하다.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존재.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내가 뒤돌아보지 않아도

 

압박감이 등 뒤에서 느껴진다.

 

그래도 말해본다.

 

"네..."

 

내 모든 것을 바꿔서 살린 그녀들.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좋아."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녀는 흔쾌히 받아준다.

 

그리고 온 곳은 안이 보이는 식당 창문 옆.

 

그녀들은 환자용 옷을 걸치고 티타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붕대나 반창고가 이곳저곳 붙어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 다행이야......"

 

즐겁게 떠드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안심한다.

 

'?'

 

그리고 느껴지는 물기.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있다.

 

내 모든 것을 바꾸어 지금의 그녀들을 만들었다.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나는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창문 하나를 두고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

 

나도 저기에 갈 수 없을까.

 

이전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없을까.

 

눈물이 조용히 내 허벅지를 적시고 서글픔을 느끼며

 

"도와-"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휠체어를 뛰어나와 창을 열어 그녀들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렇지만

 

'캉'

 

창에 내 손은 닿을 것도 없이

 

검고 투명한 막이 내 앞을 막는다.

 

아니,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뚜벅 뚜벅'

 

"어째서 아가는...

 

내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를 찾는 걸까."

 

등 뒤에서 다가오는 그녀

 

"베스탈! 애들아!“

 

검은 막 너머로 보이는 그녀들을 불러보지만, 

 

견고해 보이는 막은 이를 허락해주지 않는다.

 

'탁'

 

내 어깨를 잡아 옆의 벽으로 돌리고 나를 마주 본다.

 

"응? 아가. 한번 말해보지 않으련?"

 

크게 뜬 그녀의 눈에는 무엇이 담겨있는 것일까.

 

분노? 슬픔?

 

"저들은 원래 죽었어야 했을 존재."

 

내 뺨을 어루만지며

 

"아가의 부탁으로 살려주었지만,"

 

다시금 포식자 같은 눈빛이 나를 꿰뚫어 본다.

 

"쭈우웁"

 

뺨을 만지던 손이 내 턱을 받히며 그녀가 입을 겹쳐온다.

 

"으응"

 

끈적하게 얽혀오는 혀와 그녀의 호흡에 온몸이 저릿저릿 떨린다.

 

"------!"

 

창 너머로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들을 두고, 나는 다시금 희롱당한다.

 

"하아."

 

그녀와 내 입에서 투명한 실을 늘어뜨린다.

 

"후훗."

 

나는 자신의 소유인 것을 확인하여 기뻐 보이는 그녀였지만, 곧바로

 

"자, 아가. 선택하렴."

 

'철컥'

 

그녀의 오른손이 창을 향하더니 갑작스럽게 의장이 전개된다.

 

"저들을 없애버리고 여기서 살까?"

 

방금의 야릇한 분위기가 갑자기 식어간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차가운 불꽃을 품고 있다.

 

"아니면, 나와 함께 둘만의 집에서 살까?"

 

나를 내려다보면서 최종 선고를 하는 것 같다.

 

 

 

 

16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흔히 듣던 말로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때’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자유가 없을 때’가 되겠다.

 

모든 자유를 빼앗겼을 때.

 

모든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내 앞의 그녀는 

 

“자, 아가야.”

 

내 모든 것을 빼앗아서 죽이려 하고 있다.

 

내가 죽거나 창 너머의 그녀들이 죽거나.

 

"......"

 

뒤를 돌아 창 너머 그녀들을 본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휘관. 공작함 베스탈입니다.'

 

깨닫고 보면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그들.

 

'지휘관은 신사적이네...... 오히려 울컥해. 캐신...... 그렇게 매력 없어?'

 

함께 지냈던 시간과 이 장소는 너무 소중해서

 

부수고 싶지 않다.

 

"......"

 

다시금 눈물이 흐른다.

 

검은 막에 닿은 손은 창에 닿을 수도 없고

 

내 눈물이 그녀들에게 전해지는 일도 없다.

 

"......"

 

내 뒤의 그녀도 조용히 내 고민을 기다려주고 있다.

 

말없이, 양보도 없이.

 

눈물이 멎고 감정이 가라앉는다.

 

뒤를 돌아 그녀를 마주 본다.

 

"결심했니?"

 

내 눈물진 얼굴을 보고도 변함없이 꿰뚫어 보는 표정.

 

그 눈을 마주 보고, 굳게 결심했다.

 

그녀를 꼭 이기겠다고.

 

"둘만의 집에서... 함께 살겠습니다."

 

"잘 생각했구나, 아가."

 

그녀의 말과 함께 내 의식은 끊겼다.

 

 

 

 

17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두운 방 안이었다.

 

상반신을 일으키니 이불 안의 맨몸이 드러났다.

 

속옷마저도 남김없이 벗겨져서 알몸인 상태다.

 

이불 외에는 걸칠 것이 없어 몸에 어색하게 두른다.

 

침대를 나가보려 움직였더니

 

'철컹’

 

무언가 차가운 금속에 부딪힌다.

 

왼쪽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침대 아래로 이어지는 쇠사슬은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

 

"설마..."

 

나를 이곳에 감금시킨 것인가.

 

나를 여기서 꺼내달라며 발악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로부터 어떤 반응이 있을지 몰라 위험하다.

 

방 자체는 조명이 꺼진 데다가 창문도 없어서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시간 감각도 모르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어둠만이 있다.

 

마치 독방에 들어온 기분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시간 경과>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흐리멍텅하게 있었을 때

 

'끼익'

 

문이 열리고 눈 부신 빛이 보인다.

 

어두움에 적응된 눈이 빛을 봐서 눈을 살짝 감게 된다.

 

"잘 있었니 아가."

 

방의 전등을 키며 그녀가 들어온다.

 

"저... 왜 저는 묶여있지요?"

 

"제대로 반성할 때까지는 이렇게 있어야 한단다.

 

걱정하지 않아도 나머지는 제대로 보살펴 줄 테니까."

 

"네? 그러면 화장실이라던가-"

 

"그것마저 '보살펴' 주는 것이란다?"

 

"?! 저 화장실을..."

 

"그래? 그러면 같이 가자꾸나."

 

 

<용변 해결>

 

 

화장실에서 그녀가 보는 앞에 일을 봐야 했었다.

 

얌전히 보고만 있고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게

 

아직 덮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혹여나 이후 화장실을 가고 싶어질 때를 대비하여

 

'기저귀'를 나에게 채웠다.

 

 

<식사>

 

 

이전이랑 같이 그녀가 먹여주는 형태.

 

음식 메뉴마저 그녀가 정해준다고 한다.

 

 

<수면>

 

 

잠들 때는 그녀와 같이 잔다.

 

그녀는 검고 투명한 란제리를 입고 부대껴오는데

 

기저귀 아래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달래느라 힘들다.

 

내 체형이 작은지 그녀가 껴안으면

 

인형 껴안은 것처럼 품에 쏙 들어가게 된다.

 

내가 인형을 안고 잔 적은 있어도

 

남에게 안겨진 상태는 너무나 익숙하지 않다.

 

'아가가 원할 때는 얼마든지 해줄게?'

 

침대에서 조용히 자는 그녀를 보니

 

내가 나서기 전까지는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시간 경과>

 

 

방은 창문이 없기 때문에 시간 짐작을 할 수 없다.

 

아침이 되었다는 것은 방 안에 있는 시계의 알림으로만 알 수 있다.

 

그녀가 일어나면 

 

"잘잤니 아가?"

 

라는 대사와 함께 제멋대로 내 몸 여기저기에 입맞춤하고서 아침을 준비한다.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렴?

 

나도 금방 돌아오도록 할게."

 

그녀가 외출하면 나는 다시 어둠 속에 홀로 남게 된다.

 

 

<시간 경과>

 

 

어둠 속에 있다 보면 사람은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시각, 청각, 촉각 등

 

그리고 예민해진 신경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시간 체감을 흐리게 만든다.

 

이전에 들어본 적 있다.

 

군대 영창을 가게 될 경우 가장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정신과 시간의 방으로 불릴 정도로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다.

 

'내가 왜 이렇게 있어야 하지?'

 

'여기를 나갈 수 있을까?'

 

'그녀에게 뭐라 하면 이 상태를 끝낼 수 있을까?'

 

끊임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괴롭히며 정신을 갉아먹는다.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른다.

 

텅 빈 집에 혼자 남아 할 것 없이 보내던 때.

 

먹을 것도 몇 없어서 아빠가 돌아올때만을 기다려야만 했던 때.

 

지금의 상황과 겹쳐지면서 어렸을 적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싫어.'

 

'혼자 두지 마.'

 

용변의 신호가 있어 자존심으로 어떻게든 참아보려 하다가

 

언제 올지 모르는 그녀 때문에 기저귀에 싼다.

 

축축한 느낌이 싫다.

 

먹을 것과 물은 가까이에 있지만, 저걸 벌써 먹었다가는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두렵다.

 

'베스탈과 그녀들은 어떻게 지낼까?'

 

'나를 찾고 있을까?'

 

밖의 걱정도 해보지만 단서가 조금도 없는 이 방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생각이 된다.

 

'괴로워.'

 

'추워.'

 

온도 자체는 따뜻하게 되어있던 것 같지만, 깊은 어둠이 온기를 뺏어가는 것 같다.

 

'지금 몇 시가 지났지?'

 

'아직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끊임없는 질문, 의심, 자책, 후회.

 

어두움 속에 혼자 있는 것은 싫었다.

 

"그로세......"

 

 

 

 

18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녀에게 있어서 그를 데리고 온 이후 함락시키는 것은 간단하였다.

 

방의 깊은 어두움과 시간은 그에게 효과가 좋았다.

 

하루 만에 그는 순종하게 되었다.

 

이틀 만에 그는 자신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제 오늘이다.

 

아침에 방을 나서며 돌아본 그의 모습은 마치 버려진 강아진 마냥

 

그녀에게 가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는 듯했었다.

 

그녀가 정성 들이고 기다려온 과실이 이제 열매를 맺었다.

 

'지금 이 문을 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가 있는 방문 앞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흥분감에 몸이 달아오른다.

 

'훌쩍... 훌쩍... --......'

 

그의 흐느끼는 소리에

 

'오늘은 드디어 그를 안을 수 있겠다.'

 

라는 확신과 함께 문을 연다.

 

"...엄마...... 죄송해요..."

 

문이 열리자 그녀를 바라보는 공허한 눈빛.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을게요......"

 

그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이성을 죽이며

 

"그러니까...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오... 끄으으윽......"

 

그의 의지, 모든 것은 녹아서 흐르는 눈물에 담긴다.

 

투명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자아.

 

침대 위에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착하구나 아가. 드디어 나의 마음을 알아준 거니?"

 

강하게 안아 붙는 그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품 안으로 머리를 안아준다.

 

"네. 엄마가 너무 좋아요."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행복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

 

이제. 모든 계획이 다 이루어졌다.

 

"아가. 미안했구나. 나도 아가를 홀로 두기에 마음이 아팠단다.

 

이제부터는 떨어지지 말자꾸나."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다가 입까지 내려가 혀를 섞는다.

 

"츄우웁. 츄웁."

 

그가 그녀의 혀를 요구하는 듯이 격렬하게 얽혀온다.

 

그의 하반신이 부풀어 오른 것이 느껴진다.

 

"푸하. 아가. 혹시 나를 봐서 아래가 괴롭게 되었니?"

 

"아... 그... 그게 아니라..."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한다.

 

거절의 마음 없이 순수한 욕망과 수줍음의 결정체.

 

"오늘부터는 내가 직접 도와줄게?"

 

그의 아랫부분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속삭인다.

 

그의 발목의 족쇄를 풀고 화장실로 이끈다.

 

그를 씻기고 깨끗하게 한다.

 

"응. 읏. 으읏..."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굳게 서 있는 그의 물건을 보고 덮칠 뻔했지만,

 

처음은 침대에서 하기로 하여 참는다.

 

"자. 처음은 느긋하게 하자꾸나. 이리 오렴?"

 

침대 안으로 쭈뼛쭈뼛 수줍어하는 그를 이끈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어떤 가림도 없다.

 

태어난 상태 그대로 서로에게 모든 것을 보인다.

 

"하아... 엄마......"

 

처음 경험하는 감각에 그가 어찌할 줄 몰라 떨고 있다.

 

그의 손을 잡아 품 안으로 안는다.

 

"쮸우웁, 쮸웁."

 

품속에서 그와 키스하며 몸을 예열시킨다.

 

"긴장하지 말렴?"

 

뜨겁게 달아오른 그와 투명한 실을 늘어뜨리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너무 빨리 분출되어도 안타까우니 페이스는 천천히.

 

"우선, 아가가 받아야 할 것부터 하자꾸나."

 

그의 입에 가슴을 갖다 대며 끈적한 밤이 시작된다.

 

 

< x 시간 경과 >

 

 

그는 오늘부로 그녀에게서 다시 태어났다.

 

인간의 욕심과 연약함으로 얼룩진 과거를 지우고

 

그녀의 색채로 덧칠한다.

 

"으! 으으읏! 어-엄마!"

 

강한 쾌감과 욕망으로 머리가 그녀의 존재로 가득 찬다.

 

새하얗게 변한 기억에 그녀와의 시간으로 채운다.

 

"하아... 하아... 기운이 넘치는구나, 아가. 기분은 어떻니?"

 

과거, 어디서 와서 무엇을 했었는지, 어찌 되든지 좋아졌다.

 

"좋아요. 헤헤... 아, 한 번 더 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그녀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면 되기 때문에.

 

"후후훗... 사양하지 말고 오렴? 흐우응!"

 

그녀의 존재는 너무나 달콤하고 포근해서, 다른 걱정은 필요 없을 듯하다.

 

이대로 평온하게 있으면 된다.

 

"그래 아가.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으니..."

 

그녀와 영원히.

 

 

- Fin -



현생은 바쁘고, AI 이미지 생성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