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꽤 빠르면서도 천천히 흘러 벌써 4달은 지났다. 그동안의 일을 요약하자면..


우선 대학교를 자퇴했다. 힘겹게 공부해서 겨우 들어간 곳이었지만 앞으로도 그녀를 만날 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기에, 난 학업을 포기했다. 당연히 자취방도 뺐다.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린 것(그녀가 바람을 폈다는 것은 제외하고)은 한달이 지난 뒤였다. 그분들은 처음에는 당황하셨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힘들어서 그랬다는 내 거짓말을 듣고는 납득하시며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분들을 속였다는 죄책감이 내 몸을 끌고 내려앉았었다.


지금은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아무도 날 모르는 도시로 이사를 가 조그만한 규모의 회사로 들어가 홀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그녀에 관한 기억은 아직도 나의 마음과 기억을 유린하고 있다.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셔야만 그녀를 잠깐이나마 잊을 수가 있으니, 말 다한 셈이겠지. 그래도 그녀가, 나같은 부족한 놈이 아닌 잘생기고, 육체미가 있으며, 부유한 그와 사귀는 게 났다고 여기며, 난 서서히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봤다. 이제 오후 9시였지만, 요 며칠간 외주때문에 이어진 야근으로 인해 내 몸과 정신은 너덜너덜한 상태이다. 일요일인 오늘도 거의 13시간이나 잤지만 피로함이란 것은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깨무는 집요한 녀석이니, 난 그것에게 당당하게 지기로 했다.


단잠을 부수는 알람 소리, 화면을 밀어 끄고 일어난다. 양치와 샤워를 한 후 가볍게 샌드위치를 먹고,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양복을 몸에 걸치고 집을 나섰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다 돼가서 그런가, 도시 곳곳의 가게나 가로등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광고나 물건, 현수막이 진열되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간다. 사실 회사라도 뭣한 게, 직원은 날 포함해 20명도 안 되는 곳이다. 사옥도 번듯한 단독 건물이 아닌 시에서소규모 회사를 지원하기 위한 건물의 한층 절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회사이기에 자퇴한 고졸인 나도 어렵잖게 입사가 가능했던 것이겠지. 그래도 모두 좋은 사람이고, 화목한 분위기여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어, ■■씨 왔어? 아직 정시 출근할려면 1시간은 더 남았는데 더 자고오지 그랬어?" 사무실에 유일하게 있는 40대 후반의 창립자이자 부장이 말했다. 확실히 평소라면 빨라도 20분은 있다가 왔을 거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오늘은 일찍 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요. 가끔은 빨리 오는 것도 색다르고 좋을 거 같아서요." 내 말에 딱히 할 말도 없었는지 부장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씩 시침이 정시 출근 시간에 가까워지자 다른 사원들도 출근했다. 어느새 모두가 모이자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일 하는 회의겸 보고를 한다.


"자, 다 모였죠? 요즘에 다른 회사에서 제품 테스트 외주가 와서 전부 다 고생하셨을 텐데, 수고 많았습니다." 부장이 말을 끝마치자 누구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박수를 쳤다. 말 한마디보다 더 깊은 서로에 대한 위로이자 수고였다. "아.. 그리고, 우리 회사에 신임사원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씨, 이쪽으로."


부장이 사무실 구석에 있는 휴게실을 향해 말하자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한 여사원이 나왔다. 어깨 바로위까지 있는 갈색 똑단발에 학창시절에 운동을 했는지 광택이 나는 살짝 탄 피부, 시원하게 뻗은 다리가 인상적인 사람이다.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그 여사원은 부장 옆으로 걸어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이번에 새로 입사하게된 ●●●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당차고 자신있는 그녀가 마음에 드는지 남녀 할 것없이 모두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맞이했다. 특히 남사원측에서 예쁜 신입이 들어와서 그런지 더 환호하는 듯 했다. 그 외중에 난 그녀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 외모도 그렇고 이름도 익숙한 기분이다. 멍하게 그녀를 보며 누구지 ,란 생각을 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면서 입을 열었다.


"■■■ 선배? 선배 맞죠?" 사원증도 걸지 않은 날 보면서 내 이름을 정확히 말하자 부장과 다른 직원 모두 놀란 기색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 나 또한 이제서야 그녀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 ##고등학교 다녔던 ●●이 맞죠?"


내가 모교를 거론하자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저 눈웃음을 보니 확실해진다.


"선배가 맞았네요! 우연도 이런 우연이 따로 없네요. 그쵸?" ●●은 함박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


점심이 되자 ●●은 내 자리에 와 여러 잡다한 말을 늘여놓았다.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왔는데 내가 있어서 놀랐다니, 좋은 대학교에 재학 중인 걸로 아는데 왜 자퇴하고 홀로 여기 있냐니.


"그냥 여러가지로 복잡해. 하나하나 말하면 너도 질려가지고 그만하라고 할 껄? 그리고 여기가 얼마나 좋은데? 도시치곤 공기도 맑고, 깨끗하고, 다른 직원분들도 상냥하고 좋은 사람들이고."


내 말을 들은 ●●은 그래도 호기심이 안 풀렸는지 뭐라 더 물으려 했지만, 다른 사원들이 다가와 자신들의 호기심을 풀려하자 그에 답하느라 못했다.


그리고 ●●이 내게 다가와도 나 자신이 저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번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난 아직도 고삐리때랑 달라진 게 없는 거 같다며,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은 나보다 한살 어린 후배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교우관계는 선생님과 몇 안되는 동성친구, 그리고 '그녀'뿐이었으니, ●●만이 유일하게 연하였던 친분이었던 셈이다. 후배와 친해지게 된 것엔 별 큰 이유도 없었다. 그저 같은 학원에 다녔던 것 정도.


그런 단순한 연결점을 후배 특유의 높은 사교성으로 내게 다가왔기에 서로 통성명과 짧은 담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후배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바로 ○○이 내게 고백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부끄러운 내 표정을 감추려 고개릉 돌렸을 때, 후배가 저만치에서 날 보고 있었다.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후배가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친구들과 잘 놀고 있는데 굳이 지나가는 날 붙잡아 대화를 나누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공포영화를 보기 위해 나에게 시간이 되냐고 묻거나, 연애의 ㅇ도 모르는 나에게 연애상담을 하거나.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 해도 그저 알기만 알 사람이 자신에게 이렇게 대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이 사람이 날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고백을 받은 후 난 의도적으로 후배를 멀리 했고, 후배도 날 멀리 했다. 그래야만 서로에게 남은 어색함의 연결점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을테니. 그리고 지금 다시 만난 시점에서도, 후배를 위해서라도 멀리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문득 상념에서 돌아와 후배를 보면, 다수의 사원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질문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어떤 것은 교묘하게 넘기며 대답하고 있다. 그리고 후배는 눈을 돌려 날 보고는 특유의 눈웃음을 짓는다.


그 눈웃음을 보고 짓는 방금까지의 다짐을 무시하는 내 웃음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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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써봤는데.. 어째 괜히 수정했단 생각이 강하게 든다, 얀데레 느낌도 전혀 안 나고. 거의 일주일만에 올렸는데 기다렸을 얀붕이들에겐 미안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한에서 답변하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