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1편 올린거 장편으로 가면 찍쌀까봐 압축해옴

하는김에 단편대회있길래 참가함

조오오오금 유혈묘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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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평범한 아파트의 평범한 현관에서 붉은색 노을빛이 길게 드리우는 거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는 거실의 바닥에는 비현실적으로 붉은 액체가 예쁜 물감처럼 흐트러져있고 그 위에는 동그란 공이 하나 놓여있었다.
옆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다고 표현할 수 있는 여자아이가 그 새하얌에 더욱 돋보이는 붉은 물감을 뒤집어쓰고는 시선을 숙이고 굴러가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나는 그 소녀를 향해 무언가 말을 하였지만 어째서인지 내 말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말소리를 듣고 나를 바라보았다.
텅 빈 얼굴, 이목구비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얼굴, 그것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꿈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짙은 쇠 냄새와 이질적인 달콤한 향기는 분명하게 현실에서 느껴본 냄새였다.



-띠리링


건조한 기계음이 무의식에서 떠다니던 나를 현실로 쭉 잡아끌었다.
매일 지겹도록 반복하지만 출근하는 아침의 기상이 익숙해지는 일은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후....."

눈도 뜨지 않은 채로 휴대전화의 알람을 끄고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결국 일어나야 하는걸 알면서도 끝까지 미루는 것도 결국은 매일 반복이다.

"출근하기 싫다.."

한숨과 함께 아무도 듣지 못할 불평을 내뱉으며 매일 돌아가는 쳇바퀴 위에 오늘도 몸을 올렸다.






-끼익


어제 사온 빵을 입에 대충 욱여넣으며 살짝 뻑뻑한 문을 열자 선선한 바람에 약한 담배 향기가 섞여 코를 찔렀다.

요즈음 달라진 점 중 하나인 매일 아침마다 복도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막 이사 온 여자 한 명, 아직 집 밖을 나서지도 않았건만 그 향을 맡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문을 닫고 왼쪽을 보자 당연하게도 그녀가 있어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나를 잠시 응시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1층과 2층을 합해서 4가구, 정말로 사람 사는 냄새 안 나는 이곳에서 굳이 저렇게 싸늘하게 대할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그녀에게 혹시 이런 걸 불편해 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결국 인사를 건네는 건 결국 나이기에 약한 숨을 내뱉고 계단으로 향했다.

사실 그녀가 처음 이사 온 일주일 전부터 내 머릿속은 그녀로 가득 차 있었다.
어깨 살짝 위로 올라오는 짙은 흑색의 단발, 오똑한 콧날 보자마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던 날카로운 삼백 안의 눈

미인은 맞지만,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낯간지럽고 기분 좋은 감정은 아니다.

그저 내 오랜 기억 속의 붉은 쇠 내음에 그녀의 눈이 있었던 것 같았다.







"오늘 한잔하는 거지?"

회사 건물의 정원에서 점심시간의 끝을 아쉬워하며 비어있는 종이컵의 모서리를 씹고 있자 앉아있던 동기가 대뜸 권해왔다.

"지옥의 한 달이 끝났잖아, 너무 힘들어서 머리가 다 하얗게 세는 줄 알았다."

"..그렇지"

정신없이 일하던 한 달이였지만 끝에 대한 감흥은 별로 없었다.
요즘은 그녀에 대한 생각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럴까.

"그럼 저도 갈래요"

뒤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여성의 목소리에 흘러가는 구름에 있던 시선을 뒤로 돌렸다.
옆자리의 후배가 매일 쓰던 과일향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흘렀다.

"언제 와 있었어?"

"방그미여"

가슴쪽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고 웅얼거리며 동기의 물음에 대답하고는 앞쪽으로 걸어와 난간에 몸을 기대고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럼 세명이서 갈까? 사람 많으면 시끄럽기만 하잖아"

동기 역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자 그녀는 불을 붙여주려는지 자연스럽게 자신이 쓰던 라이터를 꺼냈다.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을 보호하기 위해 불에 가까이 붙인 손과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이 혹여 불에 닿을까 걱정이 되었다.

"후...이렇게 세 명이면 저희 둘만 떠들잖아요, 우리 대리님 말 없기엔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숨을 내뱉을 때마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주는 건 비흡연자인 나를 위한 나름의 배려인가보다.

"조금 더 똑똑한 시리라 생각하면 적어도 술 들어간 과장보다는 훨씬 편해"

주변의 듣는 귀가 무섭지 않은지 크게 낄낄거리는 동기의 입에서 나온 연기의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후배의 얼굴에 베여있는 미소가 보였다.

"그래도 뭐, 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기억 못 하면서 떠벌거리는 사람보단 훨씬 좋죠"

아직 꽤 남은 담배를 옆에 있는 담배수거함의 재떨이에 비비고는 마지막 연기를 후욱 내뱉은 뒤 다시 나를 바라보며 하는 칭찬에 멋쩍어져 눈을 돌렸다.

조용한 입은 그저 내 업보이기에 누구에게 칭찬 같은걸 받을 이유는 없었다.








술에 취한 몸은 유난히 더 무거워 계단을 한걸음 올라갈 때마다 턱턱 거리며 발걸음 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마시는 일은 없지만 요즘 따라 혼란한 마음이 술을 끌어당겼다.

"..후.."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계단이 두,세계단 쯤 남았을 때 고른 숨에 담배 향이 스며들어왔다.
아침에 맡은 그 향기, 담배 향은 다 비슷할 터인데 어째서인지 이 향기만은 맡자마자 그녀가 떠오른다.

남은 계단을 올라 복도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같은 풍경에 그 부분만 오늘 아침에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딱히 볼 것도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침과 저녁마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나를 위하는 듯 매일 그곳에 서 있는 그녀를 보자면 말이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먼저 말을 건넸지만 취기 때문인지 꼬인 혀가 불친절한 억양을 뱉어냈다.
그러자 그녀도 언제나 그렇듯 삐딱하게 서 있는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술을 마시고 조금은 나에게 솔직해진 시선으로 그녀를 보자 그녀가 조금은 달라 보였다.

너무나도 짙은 흑색의 머리에선 하얗게 센 백발이 보였다.
오똑한 코에선 덕지덕지 붙어있는 붕대가 보였다.
깨끗한 백색의 피부에선 셀 수 없는 작은 상처가 보였다.
날카로운 눈에선 매일 흐르던 눈물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담배의 짙은 향에서

"...저기요"

다시 고개를 돌리려 하기에 그녀 쪽으로 다가가 벽에 몸을 기댔다. 차가운 벽이 술 때문에 달궈진 몸을 식혀주었다.

"..우리 어디서 봤나요?"

숨을 크게 고르고 나지막하게 물어보자 나를 바라보는 크게 떠졌다.
술에 취해 헛것을 본개 아니라면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그러니깐...우리가..."

-♬♪♩♬♪♩

이어가려던 말이 그날 따라 너무 크게 설정해둔 휴대전화의 벨 소리에 묻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어 전화를 끊었다.

"제 말은..."

말을 이어가려다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날아간 취기가 끓던 감정을 푹 죽이고 난 뒤 뜨거웠던 몸도 춥다고 느껴질 만큼 식어버리고 어지럽던 머리는 빠르게 냉정해졌다.
그리고 냉정해진 머리에 드리운 건 공포감이었다.
앞에 놓인 것이 정말로 판도라의 상자인 게 맞다면 그 안에는 희망 한 줌도 놓여있지 않을 것 같기에

"..죄송합니다."

의도보다 너무 가까워진 거리를 벌리며 손을 살짝 저으며 사과했다.
눈 둘 곳을 몰라 흔들리는 시야 속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살짝 벌린 그녀의 얼굴이 보였지만 급히 고개를 돌려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려 하자 늘 들리던 기계음이 들리지 않았다.

"..뭐야"

불꺼진 터치패드를 아무리 눌러봐도 도어락은 열릴 생각이 없었다.
배터리 문제든 도어락 문제든, 새벽이라 할 수 있는 지금 시간대에 무언가를 하기엔 몸과 정신이 너무 피곤해 짜증이 돋았다.

"..문, 잠기셨나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고 있자 아마도 처음 듣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예...오늘만 주변 숙박업소로 가야죠"

원하던 그녀와의 대화건만 이상하게 이 자리가 너무 불편해 일부로 대화가 끊어지도록 대답하고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등을 돌렸지만

"그러지 말고 저희 집에서 주무실래요?"

"...네?"

그녀의 입에서 태연하게 나온 말도 안 되는 제안에 표정 관리도 잊은 체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화 한번 제대로 한 적 없는 남자를 단지 문이 잠겨 곤란해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집에 들인다는 건 확실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다.
그러니깐..만약에 대화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가정이 맞다면

"....."

일그러진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간접적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얼어버렸던 머리에 조금 피가 돌자 나는 그녀의 눈이 불편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안 되죠, 신경 쓰지 마세요"

정석적인 거절을 건네고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뒤를 돌아 건물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무언가 말하려던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미 듣지 않기로 한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문은 다 고쳤어?]

다음날,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에 녹아있는 걱정에 잔소리가 시작됐음을 직감했다.

"고쳤대요, 부동산에서 집주인이 고쳤다고 연락 왔어요, 도어락의 배터리가 빠져있었다는데.."

멀쩡이 꽂혀있던 배터리가 어째서 빠져있던 건진 모르겠지만 고쳐준 쪽의 설명은 일단 그랬다.

[그쪽 집주인인 무슨 그런 것까지 부동산에 그런 것까지 맡긴 데니, 계약할 때도 코빼기도 한보이더구만]

"해줄 건 다 해주니 불편하게 많이 마주치는 것보단 훨씬 나아요"

[그래도, 사람이 얼굴을 봐야지 믿음이 생기는 법이야, 혹시나 사기일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네가 아니?]

"예..뭐.."

[그러고 보니 옆집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 왔다면서 그 사람은 괜찮니? 이웃이 좋아야 해 이웃이, 너 어렸을 때 일 생각하면 어휴...사는 사람들은 문제없는지도 조금 알아봤어야 하는데.....]

"대리님?"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전화를 끊을 핑계가 없을까 생각하던 중 고맙게도 핑계가 찾아와 주었다.

"미안해요 엄마, 이제 일해야 해서 끊을게요"

[어머나,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보네, 수고해 아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는지 조금은 아쉬운듯한 목소리였지만 이대로라면 끝도 없을 것 같았기에 이번주 주말쯤에 집에 가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 딱히 끊지 않으셔도 되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미안하다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후배에게 오히려 고맙다는 의미로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랑 통화하는 건 사람들 다 똑같네요, 어제는 집에 잘 들어가셨어요?"

내 몸짓에 그녀는 살짝 웃고 질문했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마신걸 보여준 일은 아직 동기 말고는 없었기에 걱정해주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그리 평화로운 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걸 말할 필요도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까 문 고쳤다는 이야기는 뭐예요?"

아마도 전화하던 내 목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문이 고장 나서 그냥 모텔에서 잤어"

어제의 일 중 일부분을 빼고 사실대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녀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대답이라면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르면 잘 드르간게 아니자나요"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지 이빨을 앙다물고는 마치 개가 으르렁거리듯 나에게 따졌다.
신입으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다양한 방식의 감정표현을 가진 그녀는 나와 그리 맞는 것 같지 않았다.

"후...그거 말곤 다른 거는요?"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 약간은 풀린 표정으로 다른 대답을 요구했지만,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기에 무슨 답을 원하는지 몰라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새 몇 주 동안 계속 기운 없으시잖아요, 말 없고 긴장 낮은 건 원래 그러셨지만..뭔가 좀.......음..아무튼 그래요"

무언가 설명을 하고 싶지만,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 듯 끝을 얼버무렸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기운이 없다고 생각해 걱정을 해주는 것 같았다.

"...후"

나오는 한숨을 푹 쉬고 어디까지 이야기 할까 머리를 굴렸다.
굳이 유쾌하지 않은 옛날의 이야기까지는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집에서 나가거나 들어갈 때마다 매일 담배 피우며 나와 있는 여자가 있는데 조금 신경이 쓰여서"

조금 지나치게 압축해서 말했다는 느낌이 없지 하나 있긴 하지만 이 말로 인해 딱히 무슨 오해를 하든 그저 이 대화를 끝낼 수만 있다면 별 상관은 없었다.

"여자요!?"

안타깝게도 내 대답은 대화를 끝내는 데에 있어선 독이었는지 그녀는 큰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성에 관심 있었어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걸로 풀죽어 있을 사람이었다는 게 더 놀랍네"

대화도 끝내지 못하고 오해는 오해대로 받을 최악의 대답을 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이뻐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무엇을 잠깐 생각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대뜸 물어왔다.

"...그런거 아니야, 그냥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두개의 목표 중 하나라도 달성하기 위해서 해명을 위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 사람은 대리님을 알아보나요?"

"어제 문이 잠긴 걸 보고 자고 가라곤 했는데"

"네, 미친년 아니에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남초회사에서 단련된 걸걸한 욕설을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그런 사람한테 잘못 걸리면 이거에요 이거!"

수갑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두 손목을 붙이고 들어내 앞에서 흔들었다.
처음 들어왔을 땐 얌전한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그런 건 아닐 거야"

"아니긴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가슴을 두 번 두드리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확실히 어제 제안은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그러지 말고 제가 한번 볼게요, 같은 여자가 딱 한 번 보면 안다니깐요, 그리고 그런 김에 대리님 집에서 한잔 하는 것도 좋고요"

말에 맞추어 손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였다.

"어제 택시 타고 집 앞까지 바래다줬는데 보답은 해줘야죠"

내 표정에서부터 거절을 느꼈는지 어제의 일을 들먹이며 따지기 시작했다.
필름이 날아갔으면 좋았으련만, 취해서 동기와 그녀를 힘들게 한 기억은 안타깝게도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알았어 대신 적당히 마시다 가"

"그럼요,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기분이 좋아진 듯 밝아진 목소리 톤으로 말하곤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신입일 때부터 자주 말썽을 피우던 그녀지만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대리님 부모님 분들도 말 수가 적으신 편인가요?"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쯤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신기할 정도로 말 수가 적으신데 집안 분위기도 그런가 해서요"

"성격도 부모랑 상관이 있나"

"그러지 않을까요? 사이코패스들도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받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대잖아요 그런 것처럼 영향이 있지 않을까요?"

"..어릴 때는 활발했지..축구도 맨날 하고"

주절주절 떠는 말을 대충 호응해 주며 빌라의 입구로 들어갔다.

"조용-하네요, 1층에 사람 사는 거 맞나요?"

"..아마?"

가끔씩은 1층 사는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최근에는 계속 엇갈리는지 전혀 얼굴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우연일 뿐 이사를 했다거나..그런 일은 보지 못했으니 아마 살고는 있을 거라고 대강 짐작할 뿐이다.

"아"

계단을 다 오르고 복도로 나오자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이유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평소와 같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야"

평소에는 인사를 건넸지만 오늘은 그녀가 거북해 바로 현관문 앞에 섰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다는 표현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아..네"

조금 낮게 깔리는 후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난간에 기대어있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잠깐 굳어있던 표정을 확 풀고는 미소 짓고 그녀에게 인사하자 그녀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스쳐 지나가면서 본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삐리릭

비밀번호를 입력한 도어락은 다행히도 정상적인 소리를 내며 열려 왜인지 모를 불편한 분위기를 뿌리치듯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나왔을 줄은 몰랐네요"

따라 들어온 후배가 문을 닫자마자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핑계 대고 술 한 잔 하려고 온 건데"

알고 있다, 사실 알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언제 밖에 서 있을지는 알 수 없으며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만나자고 할 수도 없다.
낮의 제안은 그저 한잔하자고 돌려 말한 것뿐이고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매일 나와 있어"

하지만 그녀는 오늘도 나와 있었다.
아침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멍청하게도 인제 와서야 이질감을 깨달았다.

"첫인상으로 판단하는 건 좀 그런데..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네요, 이쁘긴 하던데"

비닐봉지를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툭 하고 내려놓고는 봉지에 눌린 손이 아픈지 손을 후후 불었다.

"계속 서 있을 거에요?"

거실의 식탁 앞에 앉은 그녀가 맥주 캔을 나에게 흔들며 앉으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현관에서 본 집의 전체적인 모습은 분명 내 집임이 분명함에도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져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으음..."

알람없이 일어난 주말의 행복한 아침은 두통으로 시작됐다.
끝의 기억으로는 마시다가 소파에 기댄 채로 아마 그대로 잠들었던 것 같지만, 침대에 멀쩡하게 누워있는 것을 보니 결국 또 그녀에게 고생을 시켜버린 것 같다.

"후.."

힘들게 몸을 일으키자 침대 옆 베드테이블에 물 한 컵이 놓여있어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며 한 컵을 금세 들이켰고, 그제야 알코올에 눌려있던 시야가 트였다.

"..집에 갔나?"

거실로 나왔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고 혹시나 흡연하는 중인가 하고 현관문을 열어봤지만, 그곳에도 후배는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과의 문자를 보낸 뒤 다시 침대에 널브러지듯 몸을 던졌다.
여기까지 온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나 역시도 어느 정도의 마음이 있었지만, 어제는 너무 혼란스러웠기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문자는 보냈지만, 월요일에 다시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 뒤에는..아마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은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다음 주에 내내 회사에 나오지 않은 후배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일은 내 생에 다시는 없을 줄 알았다.
건물 주변의 CCTV에 그녀가 나가는 모습이 확실하게 찍혀있었기에 내가 의심을 받는 일은 없었지만, 경찰서라는 공간은 예전과 같이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갉아먹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몸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가는 느낌을 받으며 나아가자 큰 그림자가 앞에 드리웠다.
붉은색 노을빛을 등지고 있는 빌라에서 생긴 그림자였다.

회색깔의 빌라는 그 어떠한 인기척도 없이 소름이 끼치게 조용했다
어느 순간부터 1층에 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보이는 그녀도 보이지 않았다.

후배가 실종된 딱 그날부터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자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있다.
과일도 아니고 꽃도 아닌, 인공적인 향기 그럼도 분명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런 향
그 향기에 숨이 가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듯 몸을 난간에 기대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난간에 기대어 계단을 올라가자 그녀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집 현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자 짙은 쇠 냄새가 진동했다.
내 머릿속엔 붉은색으로 기억돼있는 냄새였다.

각각의 냄새엔 각자의 기억이 들어있듯이 이 냄새에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들어있었다.

몇걸음 더 걸어 문으로 들어가 평범한 빌라의 평범한 현관에서 붉은빛 노을이 길게 드리우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있는 거실의 바닥에는 비현실적으로 붉은 액체가 예쁜 물감처럼 흐트러져있고 그 위에는 역시 굴러가진 않지만 동그란 형태의 물체가 있었다.

공은 아니었다.

몇일전 사라졌다던 아마도 나를 위한 후배의 머리였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새하얀 소녀는 없었다.

"아....윽..."

입에서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자 찰팍 하고 피가 튀었다.

"...봤어?"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에 죄악의 무게가 실렸다.
얇고 고운 손이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아 준비했어"

목에 새하얀 팔이 감기고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가 귀에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내 가슴이 아팠다.

"이 아이가 좀 걸리긴 하지만 너는 모두 이해해준다고 했으니깐, 그건 아직 마찬가지지?"

행복했으면 좋겠다.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이해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니 말했었다.

"이거 봐 깨진 향수병에 다친 손가락이야"

눈앞에서 보니 소름 돋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피가 흘렀다.
가로로 쭉 그어진 기다란 상처,
흥건한 피 위에 앉아있으면서도 난 그 상처가 너무나도 슬프고 아프고 괴로워 보였다.

"말해줘, 나에게"

나를 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냘픈 팔에 아이러니하게도 있지도 않은 멍 자국과 상처가 보였다.
그게 너무 안쓰러웠다.
그래서 어릴 땐 책임지지 못할 업보를 쌓고 도망갔고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결국은 짊어지어야한다, 그 책임을

"..괜찮아"

그녀의 손을 붙잡고 너무나도 회피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붉은 쇠 냄새와 이질적인 달콤한 향기, 그 늪에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정신을 놓고 그 늪으로 쭉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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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를 던지고 그에따라 읽는 사람이 과거일을 상상하도록 쓰고싶었는데 좆망한듯, 이해 안되는 사람 있으면 어차피 과거 이야기도 다 설정해 뒀으니 궁굼하면 답글로 달께

너무 짦다보니 얀도 마지막에 잠깐 나와서 올릴까 말까 고민함;; 너무 짦아져서 생긴 문제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