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이는 자신한테 집착하던 얀진이의 사랑을 거부했었어.

그녀의 감정이 너무나 무겁고 질척이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얀진이는 얀붕이를 쉽사리 놓아줄 생각이 없었어.

얀붕이의 식사에 몰래 독을 타 먹이고,

해독제를 빌미로 결혼을 강요했지.

 

얀진이는 당연히 죽기 싫다면 

자신과 결혼을 할 거라고 방심했었어.

 

하지만 얀붕이는 중독된 상태로 도주했지.


다음 날, 얀붕이가 사라진 걸 알아챈 얀진이는 

광분하며 자신의 기사단에게 얀붕이를 찾을 것을 명령해.

 

얀붕이는 쇠약해진 상태로 어느 언덕길의 오두막에 도착했어.

 

그 곳은 버려진 걸로 보였는데,

안에는 약초와 관련된 서적들이 즐비했지.

얀붕이는 이 곳에서 해독제를 만들기로 했어.

 

하지만 약초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약을 만드는 건 대단히 힘든 일이지.

 

그렇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얀붕이의 상태는 점차로 안 좋아졌어.

 

하지만 얀붕이는 포기하지 않았어.

살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밤.

오두막 근처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났어.

 

얀붕이는 그 소리를 내버려둘 수가 없어,

찾아가보니 상처투성이의 소녀가 쓰러져 있었지.

 

천성이 착한 얀붕이는

소녀를 내버려두지 않고 치료해줬어.

 

하지만 외관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나아졌는데도,

소녀는 쉽사리 눈을 뜰 생각을 안했지.

 

얀붕이는 이 증상을 보고 

자신처럼 일종의 독에 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하지만 얀붕이는 이게 어떤 증상인지,

어떤 질병인지, 독인 건지 쉽게 알 수가 없었어.

 

찾아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허비될 텐데,

자신의 해독제만을 찾아내는 것도 빠듯한 시간이었지.

 

얀붕이는 선택의 기로에 섰어.

 

자신을 살릴지, 이 소녀를 살릴지.

 

얀붕이의 선택은..

처음 보는 이 생면부지의 소녀를 살리는 걸 택했어.

 

얀붕이의 지극정성에 

소녀는 눈만 떴지만, 자리에 일어날 수도 없고 말도 못했지.

 

하지만 얀붕이는 안도했어.

의식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치료효과는 좋아지거든.

 

소녀는 병상에서 짙은 약초내음을 맡으며,

항상 묵묵히 자신을 지켜봐 주는 등을 매일같이 바라봤어.

 

그 등은 그 무엇보다 커보였지.

소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그에게 깊은 안정을 느꼈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눈밖에 보지 못했어.

 

하지만 그 초록색 눈에는

시원하고도 잔잔한 청량감이 느껴졌지.

 

소녀는 누워있으면서도,

항상 그밖에 생각할 게 없었어.

 

우습게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이 곳이 어디인지 따위인지는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매일매일을.


- - -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한 얀붕이는

소녀가 걸린 것이 질병도, 독도 아닌 저주임을 알아차렸어.

 

그 저주란 대상자의 생명력을 점차로 빼앗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악독한 저주였지.

 

이런 저주에 걸렸으면서도,

지금까지 잘 버텨준 소녀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꼈어.

 

자신이 미숙하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이런 지식에 능통했었더라면.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 받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하지만 해주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얀붕이에게는 이제 그리 많지 않은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그렇다면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뭘까?

 

그건 바로 자신이 저주의 대속제가 되면 되는 거야.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소녀를 살리기 위해 쓴다면 기쁜 일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식을 준비해.

 

얀붕이는 의식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처음으로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봐.

 

소녀는 입술을 간신히 뻥긋거려.

입모양을 본 얀붕이는 소녀의 이름이 얀순인 걸 알아챘어.

 

얀순이, 참 좋은 이름이네.

앞으로는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살렴.

 

얀순이는 얀붕이의 따뜻한 말을 자장가 삼아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어.

 

의식이 끝나고 얀붕이의 몸에는

지금까지 얀순이를 괴롭혔던 저주가 옮겨졌어.

 

왈칵-

 

피를 토한 얀붕이는 

이제는 움직일 때마다 격통이 느껴지는 

비루한 몸뚱아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소녀가 깨어났을 때,

자신의 시체를 보고 트라우마를 안겨주기도 싫었거니와,

마지막 죽을 자리 정도는 자기가 정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아아.

 

꽃내음이 짙어진다.

나는 드러눕는다.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꽃들이,

알싸하게 향기롭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까.

얀순이는 가뿐한 몸을 일으켰어.

 

자신을 그동안 괴롭히던 

고통에서 해박되었고 자유를 느꼈어.

 

감사인사를 전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는데, 그는 보이지 않았어.

 

갑작스레 느껴지는 불길함과 피내음.

고개를 내려보니 피가 한바탕 쏟아져 있는 걸 보았지.

 

얀순이는 곧장 피의 주인을 찾아 밖으로 나서.

 

제발 제발 무사하길,

이 은혜를 제가 갚을 수 있도록 해주길..!!

 

여신이시여, 절 용사로 선택하셨다면

제발 그가 무사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신은 그런 그녀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어.

 

그녀가 목격한 것은..

 

동백꽃이 만개한 동굴 속에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이었어.

 

그의 손목을 짚었어.

 

혹시라도.. 혹시라도 살아있다면 성녀에게로 데려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줄 거야.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어.

이 숨 막히는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러나 맥을 짚어본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어.

 

장기간 독에 중독되어 온몸은 망신창이였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자신에게 걸려있던 저주였어.

 

내가 완쾌하고 난다면

당신에게 내 평생을,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만 받다가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이름도 알지 못하고 떠나보냈어.

 

난 그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했어.

그리고 맹세했지.

 

기필코.. 기필코 당신을 되살리겠노라고.

 

- - - - - - - - - 

 

얀진이의 기사단이 어느 허름한 오두막에 당도했어.

얀붕이가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지막 곳이었지.

 

기사단장의 수신호에 오두막에 진입했지만,

차갑게 식은 난로는 이 곳이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방증으로 보였어.

 

수색에 난항을 겪는 도중,

기사단원이 바닥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발견해.

 

기사단은 그 핏자국을 증거로 수집해

얀진이에게 복귀했어.


그 핏자국을 본 얀진이는 

얀붕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광분하려고 하지만,

 

기사단이 그 오두막에 

약학과 관련된 서적들이 가득했다는 말과 함께,

이미 해독제를 만들고 떠났을지 모른다는 희망적인 말을 해.

 

그제야 얀진이는 이성을 되찾고

흑마법사에게 이 피의 근원지를 찾으라고 명령했어.

 

자신을 방해하는 이가 있으면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거야.

 

최근에 용사가 미쳤다는 소문과 함께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리도 있지만, 

나와는 상관없겠지.

 

얀순이는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해,

저주를 거는 데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어.

 

자신만 걸렸더라면 용사의 사명감과 

마왕퇴치의 의무가 있기에 넘어가려고 했었어. 

 

하지만 결국 그 저주 때문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가 죽고 말았어.

 

그러니.. 그러니 복수를 해야만 해.

이건 오로지 그를 위한 나만의 장송곡.

 

그렇게 죽이고 죽이고 얼마나 족쳤을까. 

 

나를 죽이는 데 동참했던 건

귀족들 뿐만이 아니었어.

 

왕가와 내 일행도 포함되어 있었어.

 

그들은 내게 무릎을 꿇고 자비와 관용을 구걸했지만,

나는 거부했지.

 

모두 죽였지만 성녀만은 살려주었어.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말이야.

그렇게 들쑤시고 다니니

마왕이 내 눈 앞에 나타나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종용했어.

 

이제 더 이상 네 모습은 용사가 아니라고 말이야.

 

수많은 감언이설로 날 유혹했지만,

난 마왕에게 딱 한 가지만을 물었어.

 

죽은 사람을 온전히 살릴 수 있냐고.

 

마왕의 대답은.. 그런 방법은 절대 없다고 말했지.

 

난 대답을 듣자마자 마왕을 단칼에 베어 죽였어.

마왕이라는 자리가 아까운 놈이었어.

 

죽은 사람도 살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마계의 왕이라는 거지?

 

천계에서는 난리가 났어.

 

얀순이를 용사로 임명한 여신은 골치가 아팠어.

 

인간세상을 들쑤시고 학살하고 다닌 것은 둘째 치고, 

마왕 퇴치가 끝났는데도 용사의 힘이 전혀 없어지지 않는 거야.

 

원래 그 힘은 마왕 퇴치가 끝남과 동시에 압류할 수 있었거든.

하지만 용사의 힘은 어느 이유에서인지, 빼앗을 수 없었어.

 

결국 용사의 자발적인 반환이 아니면 가져갈 수 없지.

 

용사의 힘을 오래 갖게 된다면?

 

불로불사의 몸을 갖게 되는 거고, 

혹시라도 타락한다면

균형이 무너져 인간계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말거야. 

 

그렇기 때문에

여신은 꿈속에 현현해 얀순이를 설득하려고 했어.

 

하지만 얀순이는 여신에게 한 가지만을 물었어.

 

죽은 사람을 온전히 살릴 수 있냐고.

여신은 대답했지.

 

전생의 모든 기억을 잃고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기억을 가지고 환생할 수는 없지만.

 

그 말과 끝남과 동시에 

내가 선택했었던 얀순이는 여신의 목덜미를 콱 붙잡았어.

 

여신은 떨쳐내려고 했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얀순이의 손아귀를 떨쳐낼 수 없어,

고통에 찬 신음만을 켁켁 내뱉을 뿐이었어.

 

마왕이고 여신이고 둘 다 똑같아.

 

죽은 사람 단 하나 온전히 되살릴 수 없으면서.

 

뭐가 전지전능이라는 거냐.

뭐가 신이라는 거냐.

 

빛의 정의는 허상일 뿐이야.

 

한 때 나는 빛의 종복이었지만, 

이제 심판을 내리는 자는 나뿐이다.

 

여신의 목을 조이던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졌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여신은 꿈속에서 도망쳤어.

 

핏줄기를 쫓던 기사단의 종착지는

얀순이에게 당도했어.

 

왜 용사에게 도달했는지, 

의아했지만 기사단은 자신들의 책무를 다할 뿐이었지.

 

기사단은 여신을 찢어죽이지 못해 아쉬워하는 얀순이에게

얀붕이의 용모파지를 보여주며 이 자를 아느냐고 물었어.

 

얀붕이의 용모파지를 확인한 얀순이의 눈빛이 달라졌어.

드디어.. 드디어.. 은인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된 거야..!!

 

얀순이는 그렇다고 대답했어.

 

그러자-

 

스르릉.

 

기사단의 칼집에서 칼들이 뽑혀나왔어.

 

당장 그를 내놓으라고 겁박하는 기사단의 모습에

얀순이의 눈이 가늘어졌어.

 

방금 전에는 이름을 알 수 있다는 기쁨에 눈이 멀어,

잠시 망각했었지만 왜 그가 중독되어 있었는가.

 

얀순이의 촉이 맹렬히 이들에게 단서가 있다고 소리쳤지.

 

단숨에 기사단 수십을 찢어죽기고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단 하나만을 남겨놓았어.

 

그리고 용모파지를 내밀며 다정히 물었지.

이 사람의 이름이 뭐냐고. 

 

공포에 질린 기사단원은 살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걸 불었어.

 

용모파지에 그려져 있는 건 얀붕이라는 사람이며,

자신들의 주인이 얀붕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독을 먹이고 해독제를 빌미로 협박했었다고.

 

하지만 얀붕이는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도망쳤었다고, 우리는 얀붕이의 발자취를 따라온 것 뿐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이제야 모든 걸 알게 됐어.

 

해독제를 만들기 위한 길이었는데,

나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포기하고

날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했는지를.

 

왜 얀붕이님이 죽는 그 날까지도

자신에게 본모습을 안 보여줬었는지.

 

다 이 얀진이라는 미친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분노와 함께 얀붕이님의 끝없는 사랑과 헌신을 다시금 느낀 나는


이를 으득 갈곤,

기사단원에게 말했어.


네 주인에게 나를 인도한다면 너를 살려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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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진이는 대저택에서 결혼식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어.

 

얀붕이가 자신에게 도망친 건 분하지만,

결국 해독제를 만들었다면 살아있을 거야.

얀붕이는 똑똑한 아이니까.

 

하지만 괘씸했어.

감히 내 품에서 도망쳐?

 

자신의 기사단을 믿는 얀진이는 

곧 자신에게 잡혀올 얀붕이를 기대하고 있었어.

 

이번에는 저번처럼 방목하지 않고

가두고 키울 거야.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에게는 나만이 있다는 걸

몸으로 뼈저리게 새겨줄 거야.

 

행복한 상상에 빠진 

얀진이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곧 무슨 일이 벌어날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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