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 났다.

 

진절머리가 났다.

 

싫증이 났다.

 

사람에싫증이 났다.

 

 

 

 

 

 

 

쏴아아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는 축축이 젖어버린 바닥 이상으로 내 기분을 잡쳐놨다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괜한 심술만 들끓어 올랐다.

 

우산도우산을 들어줄 사람도 없는 상황몸은 점점 젖어가고이내 흘러내린다.

 

허나 흘러내리는 비조차 내 몸에 묻은 선혈을 씻어내긴 무리였다당연했다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옆구리에 한 발또 등에 한 발깊숙이 박힌 총알은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빼낼 수 없었다내 마음에 긁힌 상처와 비슷했다.

 

…….”

 

나는 그리폰의 지휘관전술인형들의 총애와 사랑그리고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그런 사람.

 

이었다.

 

큭큭닳고 닳아버린 헛웃음을 내뱉으며 담배를 꼬나문다가랑비에 젖어버린 까닭에 불을 낼 수 없었지만성은 잔뜩 낼 수 있었다.

 

짜증 나네진짜.”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화풀이한다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으나그냥 이러고 싶었다.

 

대체 왜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하며 한탄하기에는 답이 너무나 명확했다.

 

믿던 사람에게배신당했으니까.

 

404소대정확히는 UMP45, 나는 그녀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었다그냥 적당히적당히.

 

나는 그녀에게 돈을 주고그녀는 일을 수행한다비즈니스 파트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그녀와 약간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그냥조금 옛날이야기.

 

우연히도비슷했다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 간의 상처를 공감하며 아픔을 나눌 수 있었고웃을 수 있었다인정하긴 싫지만나름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차츰 길어져만 갔다같은 과거를 갖고 있던 사이인 만큼무언가 통하는 게 많았으니까사적인 대화를 일절 나누지 않던 예전과는 딴판이었다.

 

그리고내가 그녀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정신을 차리니내 주변에는 오직 그녀의 색뿐이 존재하지 않았다나도 모르는 세에 당해버린 것이다그녀는 같은 아픔을 가진 나를 원했고소유하려 했다.

 

허나 자각이 너무나 늦은 걸까나는 어느새 그녀와 단둘이갇혀있었다. UMP45는 수면제가 잘 들었다고 굉장히 흡족해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그녀의 귀기 어린 목소리가.

 

지휘관지휘관우리는 같은 신세잖아아픈 과거를 갖고 있잖아그러니까그러니까……함께 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리 말하며그녀는 내 왼 눈을 칼로 긁어버렸다비슷한 과거를 가진 만큼상처 역시 비슷하기를 원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명은 하지 않았지만덕분에 내 왼 눈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얇고 긴 흉터가 남아있다거울을 볼 때마다 절로 쓰라리다.

 

그렇게 꼼짝없이 당할 뻔했지만미쳐 날뛰는 그녀를 제압해 준 것이 다름 아닌 M16.

 

미친 짓거리는 거기까지 해지휘관은 네 소유물 같은 게 아니니까.’

 

이 역시 잊히지 않았다밀실에 갇힌 나를 구하러 등장한 그녀의 모습이따금 꿈에 나온다.

 

결국 UMP45는 제압당했고영영 이별하게 되었다아픈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다른 기억으로 그 상처를 메꾸면 되리라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철혈에게 잡혀서세뇌당했어게다가 가장 불행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동료와 싸우게 됐다는 거지이 정도 답변이면 만족하려나?’

 

M16까지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기 전까지는.

 

본인의 입으로 세뇌라 말했지만알 수 있었다그녀가 그곳에 남은 것은 전부 본인의 의지라는 것을.

 

별로 화나지는 않았다그냥 조금짜증이 났고싫증이 났고신물이 났다.

 

또 눈물이 났고구역질이 났고토악질이 났다.

 

그래서 도망쳤다.

 

까마득한 새벽편지라 하기도 애매한 종이 쪼가리 하나. ‘짜증 나이제 그만할래.’

 

그게 지휘관으로서의 마지막 유언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지휘관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을 정해놓고 나온 건 아닌지라자연스레 뒷골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더럽고추악했지만그렇기에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나름 운이 좋았다인형 기술자와 친해져 기술을 배울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할 줄 아는 건 총 쏘기랑 지휘하기 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니기쁜 마음으로 배웠다.

 

그렇게 살아갔다적당히시간의 흐름보다는 눈가의 아픔을 되새기며그냥 되는 대로 살아가면 무언가 바뀌리라 믿으며 살아갔다.

 

그리고 또 배신당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뒷골목에는 내가 알부자라는 소문이 번지고 있었다막상 본인만 모르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것이내가 알고 있는 소문의 정의와 정확히 부합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기술자가 나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기술을 알려준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어떻게든 떡고물을 받아먹을 생각이었던 거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는지혹은 그냥 마음이 급했는지아예 떡째로 가져가기로 마음먹은 기술자는 사람을 불러 내 거처를 급습했다불과 30분 전의 일이다.

 

그래서 다 죽였다.

 

자기가 미친 것 같다고그동안의 정을 봐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기술사의 시체도 방금 막 처리하고 나온 참이다참 역겨웠다.

 

물론 나 역시 적잖게 피를 봤지만피가 빠져나가는 것보다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게 훨씬 실감 되었다남들은 한 번도 경험하기 힘든 일을 세 번씩이나 당한 내 신세를 보니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는 만큼피 또한 계속해서 나왔다빨리 지혈하지 않으면 위급한 상황이지만그러기 싫었다그냥그냥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더 살아 봐야 의미 없을 거다상처만 늘어가고찢어진 마음은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다 놓아주고 싶었다상처받은 영혼을마음을의지를.

 

그렇게 생각하며종착지 없는 걸음을 계속하던 와중이었다.

 

이야반갑네.”

 

……너는.”

 

익숙하지만반갑지는 않은 그런 얼굴이었다. UMP45나 M16만큼은 아니었지만불쾌한 기억으로 가득 찬 인형이었으니까.

 

철혈공조의 보스급 개체드리머그리폰 시절 수 없이 격돌해 온 존재.

 

그런 그녀가반파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걸레짝이네.”

 

후후여자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되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 들었는데역시 소문은 소문에 불과한 건가?”

 

글쎄본래 좋은 사람이라는 건 주관적인 문제라서 말이야마음대로 생각해.”

 

몸에선 스파크가 튀고다리는 뭉개져 움직일 수도 없는 신세지만입담은 여전했다내가 알고 있는 그녀가 맞았다.

 

그래서우리 지휘관님은 왜 이런 뒷골목에서 돌아다니실까탈주했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보네.”

 

…….”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정확히는 대답하기 싫었다그냥 싫었다.

 

그나저나흉터가 멋지네내가 아는 누군가가 떠오를 거 같아

 

그 망할 년 입에 담지도 마아가리 찢어 죽여버리기 전에.”

 

걱정하지 마♪ 우리 지휘관님이 굳이 손 쓰지 않아도나는 곧 죽을 신세니까.”

 

…….”

 

후훗농담이야사과할 테니까 표정 좀 풀어.”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지만금세 식어버렸다머리를 잔뜩 적신 비가 식혀준 건 아니었고더 이상 화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우리 잘나신 철혈공조의 보스드리머께서는 이 더러운 시궁창 골목에서 죽어가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좋을까.”

 

간단해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거든소식 못 들었나 보네엘더브레인이 철혈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어.”

 

……?”

 

나는 표정을 찡그렸고드리머는 웃었다상황을 모르는 제삼자가 본다면아마 내가 피해자라고 착각할 것이라단정할 수 있었다.

 

쿡쿡……진짜 모르나 보네말 그대로야그래서 나랑 저기 디스트로이어는 거처 없이 돌아다니다 차츰 마모되었고그 결과가 이거지.”

 

그제야 눈치챘다드리머의 옆에는 눈에 초점을 잃은 디스트로이어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는 걸반파된 것까지 매한가지로.

 

그래서이번엔 내 차례지너는 왜 도망친 거야굉장히 촉망받는 인재 아니었어?”

 

너랑 같아뒤통수 거하게 얻어맞았어.”

 

……맞네똑같네.”

 

본디 머리가 좋은 그녀답게내가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는지 정확히 눈치챈 모양이었다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이 그 징표였다.

 

맞아똑같지같아.”

 

하늘을 바라본다여전히 어두웠고비가 내리고 있었다아까보다 더 거세졌다머리는 아까보다 더 축축했고이젠 눈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잔여 동력 1%이제 곧 한계야그래도 만족해이 정도면 나름 재밌는 인생이었거든.”

 

싱글싱글웃고 있는 그녀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나와는 정반대였다.

 

대체 왜이런 상황에 웃을 수 있는 걸까.

 

사람에게 배신당하고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피 흘려 죽어가고홀로 남은 쓸쓸한 상황에어떻게 웃는 거지.

 

나는나는 그렇지 못했는데.

 

그런 그녀에게서 경외감을 느낀 걸까아니면 동정심을 느낀 걸까그것도 아니라면 동질감을 느낀 걸까내 환부를 찌르던 격통이 옅어지기 시작했고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거 대충 붙잡아.”

 

?”

 

두 번 말하지 않았다나는 적당히 드리머를 붙잡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고그녀는 당황하다 내 말대로 디스트로이어를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수리해 줄게따라와.”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그냥 아가리 닫고 있어알아서 할 테니까.”

 

이건 동질감일까아니면 동정심일까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상황에서도 오히려 웃고 있는 그녀에 대한 존경심일까이성보단 본능에 이끌려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질질부족한 근력으로 그녀를 끌고 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인형 기술자의 공방자재도 많고어차피 이젠 주인도 없으니마음대로 사용해도 상관없을 거다.

 

숙녀를 이렇게나 거칠게 다루면미움받을지도 모르는데쿡쿡…….”

 

옷 찢는다거추장스러워.”

 

이야짐승이 따로 없네기대할게

 

헛소리는 가볍게 무시하고수리를 시작한다전문가 수준은 아니었지만그럭저럭 응급처치 수준은 됐다기대도 안 한 모양일까드리머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놀랍네.”

 

…….”

 

……잠깐너 그거 뭐야.”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지만이젠 그런 기력도 없었다선혈은 어느새 몸 앞쪽까지 번져나갔고드리머는 이제야 내가 중상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뒤지기 전에 너는 살리고 갈 테니까저건 네가 알아서 해이제 그럴 힘은 없거든.”

 

벌벌 떨리는 손은 나의 마지막 미련이요불꽃이었다화사하게 빛나고 있지만이게 마지막내 끝이었다.

 

남은 건 알아서 해이젠 앞도 안 보인다.”

 

……설마.”

 

총 맞았어두 방.”

 

미련을 놓으니이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아드레날린이 다 떨어진 걸까격통마저 날 괴롭혔다.

 

그래도 최후에 유종의 미를 거뒀으니까후회는 없다.

 

지휘관또 밥 안 먹었지어쩔 수 없네♪ 이거나 먹어.’

 

지휘관뭐해할 거 없으면 술이나 마실래혼자 마시기에는 영 적적해서 말이야.’

 

솔직히 많이 남았다.

 

 

 

 

***

 

 

 

 

 

…….”

 

드디어 일어났네.”

 

익숙한 천장나는 눈을 뜬다놀랄 법도 했지만그보다는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는 게 더 빨랐다.

 

일어나지 마지금 수혈 중이니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드리머는 지그시 내 가슴을 눌렀다어차피 인형의 힘에는 저항할 방도가 없으므로나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글쎄내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인데왜 날 수리 한 거야?”

 

질문을 던졌지만돌아오는 건 마찬가지로 의문문짜증이 마구 솟구쳤지만화낼 기운도 없었다.

 

그나저나 놀랐어엉성하긴 했지만네가 인형을 수리할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재밌네.”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드리머의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노란색노란색노란색…….

 

큭큭…… 또 노란색이야미칠 노릇이네.”

 

뭐가?”

 

근 1년 동안노란색 눈깔한테만 뒤통수를 두 번이나 처맞았거든,”

 

노란색한테만 두 번……아하

 

본디 비상한 머리를 가진 그녀답게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노란색 눈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눈치챈 모양이었다전혀 달갑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나는 널 배신하지 않을게동지끼리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근 1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대가리에 총 겨누는 사이였는데 동지라니정말 믿음직스럽네.”

 

히히드리머는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익숙한 누군가가 떠오르는 태도였다.

 

따지고 보면생긴 것도 많이 비슷했다애초에 그년도 철혈산 소체 아니었던가기분이 썩 나빠졌다.

 

그래서날 왜 구해준 거야무슨 보답이라도 바란 거야?”

 

그럴 리가이제 꺼져.”

 

후후후너무하네난 앞으로 여기서 지낼 생각인데.”

 

……누구 마음대로.”

 

어처구니없는 선언에 눈이 탁 뜨였다몸을 일으키려 했지만그녀의 손은 여전히 내 가슴 위에 존재했다.

 

누가 널 구해줬는데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 보답은 해줘야지.”

 

내가 널 구해준 건 머리에서 지웠냐마인드맵은 편리하네그렇지?”

 

무슨 소리야네 입으로 말했잖아무슨 보답을 바라고 구해준 게 아니라고.”

 

드리머는 가슴 위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천천히 또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은 정확히 심장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두근열심히 내 심박을 감상하던 드리머는 눈가에 호선을 그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아니거든너를 구해준 만큼꼭 보답받아야겠어.”

 

궤변이야.”

 

알아

 

드리머는 키득대며 웃음을 그렸다눈가는 호선을 그렸고손은 여전히 내 가슴 위에 존재했다.

 

인형이라 하기엔 그녀의 손이 너무나 따듯했다차갑게 굳어버린 내 가슴에 온기가 닿는 순간이었다.

 

…….”

 

작금의 사태가 너무 기묘해서일까아니면 죽다 살아난 내 신세가 어처구니없어서일까만약 그것도 아니라면그녀의 손이 너무나 따듯했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웃음이 났다.

 

 

 

 

 

 

 

 

 

 

 

…….”

 

가만히 흙탕물을 바라본다오염되어 더러웠지만꼴에 물이라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지만이 물은 진즉에 썩어 있었다더 이상 흐를 이유도물이라는 존재 가치도 사라진 지 오래하등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차라리 사라지는 게 더 나은 존재일 게 뻔하다더 이상 있어 봐야 민폐만 끼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물은 멈추지 않았다더럽고 추잡하지만계속해서하염없이끝없이 나아갔다.

 

마치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들어기분이 썩 나빠졌다.

 

……염병.”

 

추적추적비는 계속 내리고내 마음은 착잡해진다.

 

어쩌면 착잡하기보단 추잡하기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지워버렸다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까.

 

할 말 있으면 나와서 말해쥐새끼마냥 훔쳐보지 말고.”

 

내가 뭐 어쨌다고!”

 

잔뜩 곤두선 신경에서 비롯된 괜한 화풀이일까아니면 본심일까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덕분에 목소리의 주인공디스트로이어 또한 필요 이상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등장했다별로 보기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는 너 안 믿어분명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협박하기 위해 구해준 게 분명하잖아!”

 

땍땍거리는 모습이 심히 불쾌했다옛날이라면 적당히 웃으며 달래줬겠지만온갖 풍파를 맞아 심성이 뒤틀린 지금의 나에게는 무리였다.

 

미안해내가 대신 사과할게?”

 

…….”

 

하지만 저 여자드리머보다는 덜 불쾌했다싱글싱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참역겨웠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우선 첫 번째는 저 망할 년의 얼굴이 보기 싫다는 이유고두 번째는 저 망할 년의 목소리가 싫다는 이유였다또 세 번째는 저 뻔뻔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그냥 싫었다.

 

수상하잖아저런 인간 따위 그냥 죽이고…….”

 

에이안 되지우리는 서로 목숨을 구해준 사이라구?”

 

난 너한테 구해달라 한 적 없는데.”

 

나도 없어그런데 어떤 친절하신 분이 손수 수리해 주시더라고어찌 그리 심성이 고운지

 

그럼 받고 조용히 꺼지면 되잖아왜 여기 눌러앉아서 사람 속 긁는 거야?”

 

후후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줬으면 책임을 져야지이미 끝난 삶을 누구 덕분에 연장했는데.”

 

킥킥드리머가 입가에 손을 올리며 작게 웃었다본디 미소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너 되게 무책임한 사람이었구나?“

 

……염병한다.”

 

기어코 한 마디를 안 지는구나뇌리를 관통하는 짜증이 미간에 주름을 하나 만들었다.

 

너무 날 세우지 말고앞으로 같이 사는 사이인데 좀 풀어지면 서로 좋잖아?”

 

……미치겠네 진짜.”

 

이젠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사람이 어찌 저리 뻔뻔할 수 있지아니지사람이 아니라서 저리도 뻔뻔한 건가.

 

저 정신 나간 년이랑 계속해서 말을 섞었다간 늘어가는 건 미간의 주름과 스트레스뿐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도 바로 지금이었다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디가!”

 

알아서 뭐 하게.”

 

또 한 번 땍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가볍게 무시했다쿡쿡무언가를 비웃는 듯한 드리머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

 

 

 

기껏 밖으로 나섰지만불쾌한 기분은 깊어지면 깊어졌지나아지지는 못했다무언가 수상쩍은 소식이 귀에 들어온 까닭이다.

 

최근 어떤 패거리가 사람을 찾는다더군눈가에 흉터가 인상적이었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 수상한 패거리가 누구인지쯤은.

 

이젠 원망과 증오를 넘어 토악질이 나올 수준이었다기어코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건가대체 무슨 낯짝으로.

 

날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너 때문인데.

 

까드득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미간이 좁혀지고머리에는 열이 차오른다짜증이 잔뜩 뻗쳤다.

 

열 받은 머리를 달래기 위해 하염없이 걷지만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할 뿐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공회전에 불과했다.

 

어머돌아왔네반가워.”

 

결국 의미 없는 행동이란 걸 깨달아 거처로 돌아왔지만날 반겨주는 건 분노를 증폭시키는 존재뿐식지 않았다.

 

……꺼져.”

 

밖에 나간 사이 더 열 받은 거 같네스트레스 풀 겸 술이라도 한잔할래?”

 

살짝 입을 벌려 웃어 보인 드리머가 술병을 흔들었다주홍빛 액체에 찰랑하고 파문이 생겼지만이내 잠잠해졌다.

 

허나 내 마음에 생긴 파문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후후술은 약한가 봐남자답게 생겨서는이런 면도 있구나?”

 

……괜히 긁지 마도발해서 술 취하게 만들 셈이면 헛짓거리니까예전부터 한 번도 취해본 적 없어.”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힌다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아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그래그럼 그 예전에는 누구랑…….”

 

-.

 

 

헛짓거리였다.

 

-깽창!!!

 

드리머!!!”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일말의 망설임 없이 술병을 주워 던진 나머리에 술병을 맞아 피를 흘리는 드리머그 옆에서 경악하는 디스트로이어.

 

…….”

 

피가 흐르고술이 흐른다드리머는 싱긋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긴다.

 

피나네.”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피를 핥으며 더욱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당황이라는 감정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피할 수 있었잖아.”

 

뭐가,”

 

피할 수 있었잖아!!!”

 

때문에 더 분노했다.

 

너 인형이잖아……이런 것쯤은 가볍게 피할 수 있었잖아!!!”

 

맞으라고 던진 거잖아그럼 맞아야지 어째.”

 

피 질질 흐르잖아……유리 파편이피부에 박혔는데안 아파……?”

 

피했으면네 기분이 더 나빠졌을 거 같았거든.”

 

그럼그럼 애초에 시비를 안 걸었으면 됐잖아!!!”

 

태어나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낸 건 대체 얼마 만이지화내면서도 얼굴이 일그러지는 기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던가?

 

의문이 따라오지만그 이상으로 답답했다그냥전부전부전부.

 

그냥계속 조용히 지냈으면 넌 혼자 삭히다가 썩어 문드러질 거 같았거든.”

 

전부.

 

닥쳐네가 뭘 아는데왜 자꾸 친한 척하고아는 척이야다 뒤져가는 거 불쌍해서 거둬줬더니왜 그리 친근하게 굴고나에 대해 뭐든 아는 척이냐고!”

 

하긴나는우리는 너를 잘 모르지기껏해야 능력이 뛰어나다는 정도많이 맞아봤거든.”

 

스륵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드리머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도망치고 싶었지만굳어버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거리가 좁혀질수록 그녀의 미소는 차츰 비릿해진다마침내 지척에 도달한 그녀의 웃음은피보다 비릿했다.

 

그래도 며칠 같이 지내보니까 많이 뒤틀려 있을 뿐이 안에 있는 건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더라고,”

 

하고 내 가슴을 찌르며 내뱉은 말굳어버린 몸은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때화는 좀 풀렸어?”

 

-.

 

또 한 번 툭내 가슴을 찌르는 말과 함께불쾌감이 마침내 치사량을 돌파했다.

 

……크흐흐……크흐흐흐……크하하하하!!!”

 

자조 섞인 웃음은 더 이상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나는 미친 듯이 웃고 있었지만이건 웃음이 아니었다.

 

나는 토하는 중이다그동안 참아왔던 구역질을 웃음의 형태로 승화시켜 구토하는 중이다.

 

 

너무나역겨웠으니까.

 

갑작스레 웃음이 그치고문을 열어젖혀 밖으로 나선다비는 계속해서 내렸지만조금도 개의치 않고 밖으로 도망친다.

 

어디가!”

 

내버려 둬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이니까.”

 

들리는 목소리는 애써 무시한다아니난 애초에 저런 소리를 들은 적 없다.

 

그리 생각하며 한없이 걸어 나간다.

 

철벅 철벅물을 잔뜩 머금어 무거운 발걸음무거운 몸그 이상으로 무거운 마음.

 

짜증 난다짜증 난다전부 짜증 난다.

 

나 자신이너무나 짜증 나 견딜 수 없다.

 

불쾌감계속해서 폐부를 찌르던 불쾌감의 정체는 바로 자신에 대한 불쾌감이었다자신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그 행위가 너무나 역겨워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우욱……웨에엑…….”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에 기어코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나 홀로 토해낸다등을 두드려 주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나는나는왜 이렇게 된 걸까.

 

UMP45의 배신? M16의 배신그것도 아니라면 과거의 상처에만 사로잡혀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해 모든 것을 놓아버린 나 자신?

 

모르겠다이젠 정말 모르겠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이 비틀린 톱니바퀴의 시작은 다름 아닌 앞으로 평생 볼 일 없는 UMP45덕이라는 것이다.

 

흐흐……히히히……킥킥…….”

 

그래그래야 하는데.

 

찾았어찾았어드디어 찾았어.”

 

너는 왜.

 

……UMP45?”

 

대체 무슨 낯짝으로 나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걸까.

 

 

 

 

 

***

 

 

 

 

 

 

무언가 점성이 높은 액체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바둥거릴 순 있지만딱히 의미는 없었다그저 가라앉는 속도만 달라질 뿐그게 전부였다.

 

침몰하는 배에 비유하고 싶었다.

 

…….”

 

눈을 뜬다가장 먼저 보이는 건 노란색노란색그리고 흑갈색.

 

……일어났어?”

 

또 비릿한 미소.

 

…….”

 

말문이 막혔다무언가 할 말이 없던 게 아니라그냥 순수하게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이는 공포보다 어이없음에 가까웠다정말순수하게어이가 없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몰라.”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UMP45였다빙그르르가볍게 몸을 한 바퀴 돌려 보인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더없이 불쾌했다.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팔에 감긴 쇠사슬가까이서 웃고 있는 UMP9,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G11, 홀로 멀찍이 떨어져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HK416.

 

 

이러한 상황에내가 꺼낼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분노보단 의문에 가까운 목소리이젠 화낼 힘도 없었다정말지쳤으니까.

 

무슨 낯짝이라니섭섭하잖아 지휘관.”

 

UMP45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흉터를 훑어 내렸다기계 의수내 마음만큼 차가웠다.

 

우린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거의 1년은 지난 거 같은데그동안 배운 게 없는 거야?”

 

아니많이 배웠지정말까마득한 시간이었어.”

 

그녀는 눈꺼풀을 내렸다이내 들어 올렸다노란색노란색노란색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없는 네가 망가지는 소식을 들으며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며 살았지.”

 

같잖아서 토할 거 같아.”

 

지휘관이거 봐손에 흉터목에 상처무릎에 보호대내가 없는 동안 너는 차츰 마모된 거야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속도로 천천히.”

 

순서대로 손그리고 무릎을 가리키며 꺼낸 말이었다물론모두 내 것이었다.

 

그럼 이 눈깔에 흉터는네가 친히 칼로 긁어내려 만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이 흉터는?”

 

그건 우리의 증표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는 증표.”

 

조심스레자신의 흉터를 훑어내린 UMP45가 킥킥하며 웃었다본인 딴에는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걸까미칠 노릇이다.

 

우린 닮았잖아비슷한 과거를 가졌기에비슷한 아픔을 가졌잖아그러니까그러니까비슷한 흉터를 가져야 하는 것도 당연하잖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그만해진짜 역겨워서 죽을 거 같으니까.”

 

헛소리가 아니야네 입으로 말했잖아닮은 거 같다고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다고.”

 

그게 이거랑 같아?”

 

같지틀릴 이유가 있어?”

 

하고, UMP45가 내 뺨을 붙잡았다눈동자를 가까이하니심연이었다.

 

지휘관지휘관지휘관왜 그런 거야왜 도망친 거야?”

 

도망친 적 없어.”

 

우리서로 좋아했잖아그렇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잖아.”

 

우린 단순한 친구였지거기까지 간 적 없어.”

 

그럼 나한테 눈웃음치며 먼저 인사한 건 누구지비슷한 과거라며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건 누구지나에게 상냥하게또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 준 건바로바로다름 아닌 너잖아?”

 

단순한호의였어.”

 

아니아니아니거짓말하지 마지휘관너는 나를…….”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바로 그 순간, UMP45의 입이 멈췄다정확히는 사고가 멈춘 거 같았다.

 

고장 난 인형과 다름없었다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내 뺨에 가해지는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나는 가만히 쐐기를 박았다.

 

네가 싫어.”

 

진심이다.

 

네가 미워.”

 

진심이다.

 

네가 증오스러워.”

 

전부진심이다.

 

…….”

 

마침내 정신을 차린 걸까조용히 뺨에서 손을 뗀 그녀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짜증 나는 누군가가 연상되는 행동이었다.

 

괜찮아괜찮아정말 괜찮아.”

 

그녀는 웃었다마치 자기 자신을 어르려는 듯이조용히 웃었다.

 

내 사랑은일방통행이어도 상관없으니까.”

 

이번엔 비릿하게 웃었다.

 

-!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UMP45가 크게 발을 구른 까닭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렇게 극적인 재회를 했다는 거니까.”

 

싱긋다시금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가 나와 눈을 맞춘다또 입꼬리를 올리고눈까지 감아 보인다.

 

이젠 놓치지 않아양보하지 않아놓아주지 않아.”

 

그리고 천천히눈을 뜬다.

 

넘기지 않아.”

 

그녀가 손을 뻗는다더럽고추잡하고불결하기 짝이 없는 손을 뻗는다한없이한없이 다가온다나를 향해.

 

때문에 나는 그녀가 들을 수 있게 조용히 읊조린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진심이 아니었다.

 

-!

 

이야딱 맞춰왔네다행이다.”

 

……드리머?”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익숙한 만큼짜증 나는 목소리였다물론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만큼 격하게 당황하기도 했고.

 

……저건 또 뭐야.”

 

물론 당황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자리의 전원크게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니까.

 

나는 오기 싫었어드리머가 가자고 해서 온 거니까…….”

 

이번엔 디스트로이어, UMP45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짜증 나네.”

 

아까 나를 향했던 달콤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절로 오한이 서릴 정도였다.

 

어느새 404는 임전 태세를 갖춘 지 오래멀찍이 떨어져 방관하던 HK416이 총을 견착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야여기는 손님맞이가 영 별로네안 그래?”

 

드리머가 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눈가의 상처는 말끔히 지워진 지 오래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닥쳐봐지금 한창 좋을 때니까빨리 꺼져.”

 

 

입이 험하네남자가 싫어할 스타일이야.”

 

걱정하지 마지휘관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상관없어.”

 

걔 이제 지휘관 아니잖아이야너 다른 사람 좋아하는구나?”

 

투다다다대답 대신 총성이 울린다역린을 건드린 걸까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대화는 끝인가 보네가자디스트로이어.”

 

그렇게 한바탕소란이 일어났다.

 

 

 

 

***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드리머와 디스트로이어가 404를 제압하는 데까지는.

 

무력에 큰 차이는 없었다아니애초에 여기는 404의 주거지인 만큼본래라면 404가 무난히 승리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면바로 나였다드리머의 정밀타격에 자유를 되찾은 내가지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정반대의 상황철혈을 지휘하며 404소대를 제압하는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크흑……흐으…….”

 

UMP45가 바닥에 쓰러진 지금까지도.

 

고생했어헛짓거리하느라.”

 

조용히 먼지를 털어내던 드리머가 입을 열었다입가의 드리운 미소는 여전했고트레이드 마크인 독설 또한 여전했다물론 반갑다는 뜻이 아니었다.

 

상처는어떻게 된 거지.”

 

너 나가자마자 바로 지웠지볼 때마다 또 얼굴 찌푸릴 생각 하니까 벌써 한숨 나오더라.”

 

킥킥짧은 웃음을 덧붙인 드리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일말의 미련도 없는 그 모습약간 부럽기도 했다.

 

나도 저랬다면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무언가 달라졌을까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지……가지……말라고…….”

 

그런 내 생각을 끊어버린 건 다름 아닌 UMP45였다바닥을 기게 된 와중에도그녀의 의지는 굳건하다 못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또 없어지면나 죽을 거야죽어버릴 거라고……!”

 

쿡쿡그딴 게 협박이 될 거라 생각…….”

 

우뚝열심히 비웃던 드리머의 표정이 굳었다그 이상으로 굳은 내 표정을 바라본 까닭이다.

 

알고 있어지휘관그렇게 강한 척해도넌 결국 정이 많고 여린 성격이잖아그래서그래서지금 우릴 죽이지 않는 거잖아…….”

 

오답이었으면 좋겠지만전부 정답이었다그 증거로나는 지금 표정을 굳힌 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죽을 거야죽어버릴 거야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또 내 곁을 떠나면……나 정말로 죽을 거야.”

 

그녀의 눈빛, UMP45의 눈은 참 서글퍼 보였지만여전히 심해였다깊고 끈적해 비틀린 그녀의 눈은도저히 감당할 것이 못 되었다.

 

짜증 나고슬프고싫다그냥.

 

세상이 싫다.

 

……가자.”

 

과감해졌네다행이야.”

 

드리머의 입가에 다시금 웃음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고돌아오지 않아 메아리 된 목소리만이 내 귀를 찔렀다.

 

가지 마가지 말라고!!! 지휘관!!!”

 

…….”

 

죽어버릴 거야!!! 죽어버릴 거라고……지휘관!!!”

귀를 막았다허나 마음에 박힌 상처는 계속해서 내 치부를 찌르고긁고도려내 나를 아프게 했다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어느덧 UMP45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움직였지만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제발.”

 

결국 걸음은 멈추고 말았다나는 어느새 무릎 꿇어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뭐해.”

 

……싫어.”

 

인간너 지금 무슨…….”

 

싫다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하늘을 가른다나의 것이었다.

 

다 싫어……나약한 나도 싫고, UMP45도 싫고……M16도 싫고……그냥그냥……이 세상 모든 게 다 싫어…….”

 

귀를 막고 이를 악문 채 억지로라도 걸음을 옮기지만소용 없다.

 

UMP45의 처절한 목소리는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 박혀 흉터가 되었으니까.

 

밉고싫다이 세상이 싫다하지만 개중에서 가장 미운 건역시나 나였다.

 

나약한 내 자신이밉고 가증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 없다토악질 나오고구역질 나오고싫고싫어서싫었다.

 

모두가세상이내가너무나 싫었다.

 

이 세상 모든 걸 싫어해도 상관없잖아.”

 

절망에 삼켜져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나를 감싸 안은 건 부드러운 목소리또 양팔가벼운 미소.

 

드리머의 것이었다그 자애로운 미소는 마치 어머니의 그것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한다나보다 작지만나보다 컸다.

 

네가 이 세상 모든 걸 싫어해도내가우리가너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이상했다그녀의 품이 이렇게나 따듯했나그녀가 이렇게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나하염없는 의문이 따라왔다.

 

하지만 이내 지워버렸다지금 중요한 건 날 안아줄 사람이 생겼다는 거니까.

 

조용히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눈을 감았다온갖 생각이 내 머리를 헤집어놨지만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역시 하나.

 

제발……안아줘.”

 

따듯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지웠던 글들 완장 허락 받고 부계 파서 재업 오늘 두 개 내일 두 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