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에 나오는 일부 이름과 기관은 허구임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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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 벨라모스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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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말 만약에 말이야.

전생에서 분명히 죽었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낯선 풍경과 처음 보는 샹들리에가 보인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황당하고 어이없는 경우겠지?

그래. 나처럼.

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이 곳의 눈 뜨기 전의 나.... 그니까 전생에서는 아라비아 반도쪽으로 파병된 UAE 군사훈련 협력단, 일명 '아크부대' 의 부대원으로 활동 중이었고,
당일 새벽, 지뢰 매설 구역의 지형 정찰을 하다 대인지뢰를 밟고 죽었다.

명색이 파병 부대원인데 지뢰 하나 밟고 죽었다는게 어이없긴 하다만은.

뭐, 낯선 천장에서 몇 년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어린 나이의 신체로 눈을 뜬 상황이 더 어이없긴 하겠다.

이후 여기서 생활한지 몇 년 정도 지나자, 얼추 지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정리가 되었다.

일단 내가 있는 이 곳은 '에테르의 유산 : 레이븐 하트' 이라는 게임 속에 한 인물로써 들어온 거 같았다.

솔직히 VR이라는 기기로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면 이해했겠지만.....
그냥 이 인물 자체가 '나' 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게임 속에서의 두 번째 삶이라.....
나쁘지는 않네.

그보다 큰 문제는 내가 있는 곳이 '벨라모스'라는 가문 속 호위기사 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카이딘' 이라는 이름으로.

'요컨대 엑스트라.....라는 건가'

내 신분과 이 상황은 별로 문제가 될 만큼은 아니었다.

정작 문제는 다름 아닌 호위의 대상이였는데.....

'노바 벨라모스'

현재 내가 호위해야 하는 대상인 가문의 공녀이자 차기 주인.

다행히 내가 전생에서 잠깐 휴가를 갔었을 때 재밌게 이 게임을 오랫동안 플레이 했던 지라 기억에 남는다.

이 가문은 특히.

그도 그런게, 이 게임 상에서 가장 강한 가문임과 동시에 모종의 사건을 이유로 타락하여 후반부에 최종보스 격으로 올라가니까.

게다가 게임 상에서는 따로 전용 장비까지 갖춰야지 겨우 깰 수 있을 정도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뭐.....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내가 왜 여기 있지라고 생각해도 이미 늦었지만.

근데 이상한 점은 지금 그녀는 나와 같은 중학생 정도의 나이.
그녀가 타락하기 이전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온 시점이 게임 플레이 시작 시점보다 앞서있다는 뜻이다.

나름 이 게임의 매니아층 이었던 나는 누가보면 미친 짓이겠지만 단순 호기심 하나만으로 결심했다.

'미래의 이 타락하는 공녀를 한번, 구해보자.' 라고.

그래서 난 몇년동안 그녀의 곁에 서서 계속해서 감시해왔지만, 딱히 별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후계자 교육과 예법을 배우기 위해 황실에서 온 고위 귀족이 오고 난 이후에도 평상시처럼.....

잠깐 귀족.....황실....?

분명 게임 상에서도 그녀는 귀족, 특히 황실과 조금이라도 관련되었다면 사람뿐만 아니라
가문 자체를 멸망시켰을 정도로 악명 높았다.

'그렇다면.....?'

그 귀족이 공녀와 관련이 있을 지도모를 상황에 대비해 단검 하나를 품에 넣은 나는 베란다 쪽으로 통해 몰래 상황을 지켜보았다.

대저택에다가 3층 높이라서 그런가 좀 무섭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뒤로 한 채 집중해서 들어보니 말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저어.....근데 드레스는 의상점에 가도 충분히 맞출 수 있지 않나요.....?"

곤란한 듯 말을 주저하는 한 아름다운 목소리와,

"아뇨아뇨~ 황실은 일반 서민들과는 품격 자체가 다르답니다? 제가 맞춰드리는 의상으로 노바님은 더욱 고귀하실 수 있어요!"

듣기만해도 소름끼치는 듯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어.

타락한 공녀, 황실과 귀족.

이 모든 게 맞아 떨어진다.

방 안에는 황실 출신의 귀족이란 작자가 노바 벨라모스를 성희롱 하는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지금 이 상황이 처음은 분명 아닐테지.

베란다 창문을 통해 몰래 지켜보자 당황한 표정의 앳된 여자아이와,
줄자를 가지고 잔뜩 흥분한 듯한 표정의 덩치 큰 사내가 서 있었다.

"제....제가 나중에 저희 가문 사용인들에게 부탁해서 황실 쪽 의상을 알아봐달라고 할게요...... 이거는 조금....."

"어허, 사이즈 수치를 제대로 잴려면 옷을 벗어야 한답니다?
아무리 벨라모스 가문의 공녀라고 해도 엄연히 황실 귀족인 제 말을 들으셔야죠?"

"저....저기...그만....."

젠장, 시간이 없잖아.

'하, 이건 내 전생과 지금 생을 포함해서 제일 미친 짓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 콰앙! -

창문을 냅다 후려 재끼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뭐야, 네 녀석은! 창문으로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마치 쥐새끼 같은 놈이군!"

당황한 듯한 귀족을 그대로 냅두고, 일단 그녀에게 다가갔다.

"노바님, 괜찮습니까?"

"네...? ㄴ....네....!"

그녀는 이 상황이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벙찐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가 안전한 걸 확인한 난 서둘러 품 안에 있던 단검을 꺼내 그를 바라보았다.

"하? 이것이 미쳤나? 감히 지금 누구에게 칼을 겨누는 거야! 난 황실 귀족이라고! 이건 모욕죄에 해당한다!"

이미 흥분에 사고회로가 절여진 놈을 상대로 말이 통할 리는 없지.

죽이면 나와 노바 둘 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깔끔하게 빈사 직전까지만 때려 눕힐 수 있을까?

근데 이 놈, 귀족에다가 황실 출신이라 그런지 내 예상보다 그는 덩치에 맞지 않게 재빨랐다.

그의 주먹을 피하면서 빈틈을 발견했고, 나는 그대로 인파이트로 들어가 다리를 걸.....응?

아, 제기랄. 나 어린 아이였지.

전생에서의 기술이나 기법 등의 소프트웨어는 출중했으나, 아직 그걸 받아드릴 만한 육체. 하드웨어가 없음을 지금 체감했다.

귀족은 코웃음을 치며 역으로 나를 눕혔다.

그 여파로 손에 있던 칼을 놓쳤고,
바운드 자세로 내 위에 올라탄 그는 내 목을 힘껏 조르기 시작했다.

"너 같은 미천한 서민이 감히 날 위협하려 해? 난 니까짓게 감히 넘볼 수 없는 황실 소속이란 말이다! 뒤져.....뒤져!"

목숨을 걸었는데, 신체적 문제로 실패하다니 이러면 지뢰 밟고 죽은 전생과 다른게 뭘까.

.....싶었는데.

뇌에 산소 공급 부족으로 의식이 흐려갈 때 쯤, 내 목에 들어간 손아귀의 힘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이내 눈을 떠보니 귀족의 목덜미엔 내가 놓쳤던 단검이 꽂혀 있었고,
그의 어깨 너머로 노바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ㅋ....커헉!"

목을 부여잡고는 고통스러워 하더니, 이내 귀족은 옆으로 쿵 쓰러졌다.

"흐....흐흑....내가...사람을 죽였....죽였어...."

전생에서 파병 부대로 활동하면서 보았던 수많은 시체로 익숙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죽인다는 게 처음이겠지.

'그녀가 황실 귀족을 죽였다..... 이렇게 가다간 게임 설정과 똑같아 지는데.....'

순간 내 뇌에서 번쩍하고 스토리 하나가 뚝딱 완성되었다.

나는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가 어깨를 붙잡았다.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이목구비와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떨어지는 투명한 눈물.

마음이 약해질 뻔 했지만 다시 정신 차리고 그녀를 부른다.

"공녀님?"

"ㄴ.....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요. 귀족을 죽인 건 '노바 벨라모스가' 아니라 '카이딘' 입니다.

이 모든 죄는, 내가 덮어쓰면 된다.

"성희롱 할려는 귀족으로부터 저항하다가 소리를 듣고 달려온 제가 그를 죽이고 달아난 겁니다."

"그....그게 어째서 카이딘이 죽인 ㄱ...."

"지금 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히....히끅....!"

나는 단검을 옷소매로 닦고는 내 지문을 묻혔다.
그리고 귀족의 시체 옆에 놓는다.

이래야 범인이 나로 확정될테니.

"제가 말한대로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더 이상 대화의 필요성은 없다. 이대로 난 퇴장하면 된다.

이윽고 뒤에서 내 이름을 소리치는 공녀를 뒤로하고 베란다 쪽으로 나아간다.

난, 엑스트라니까. 이대로 퇴장하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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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의 밤.

다음 날 아침 대륙 전체에 수배령이 떨어지고, 힘겹게 도망자 신세로 다니게 되었다.

도망자 신세이니 당연히 신분따윈 있을리가 없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노예로 하루하루 벌어가고 있다.

전생에서 굴렀던 경험으로 여기서 똑같이 운동을 하다보니 제법 버틸만 해졌다.

게다가 귀족 살해죄로 개죽음 당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눈에는 안대가, 손에는 밧줄이 묶여 있는 채로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분명 잘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야밤에 기습을 당하다니....'

노예로써 또 어딘가로 팔려가는 걸까......

그렇게 날 데려간 곳은 어느 고풍스러운 향기가 나는 저택 같은 곳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카이딘 이라는 자를 잡아왔습니다!"

옆에서 날 잡아오던 한 사내가 정면을 향해 소리쳤다.

"잡아왔다고? 분명히 난 모셔오라고, 했을텐데?"

"커....커헉..."

내 옆에서 누가 잡아 올리듯 그는 버둥버둥거렸다.

"두 번은 없다."

"네....넵...!"

숨을 몇 번 헐떡인 그는 이내 내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안대를 벗으니, 앞이 보인다.

그리고 내 앞에는, 10년 전의 호위 대상이던 노바 벨라모스가 왕좌에 다리를 꼬고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옛날의 기억에 있던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매혹적이고 고압적인 분위기의 한 여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만났군요. 벨라모스 가문의 공작님."

...잠깐만, 공작?

그.....공녀의 남편을 칭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그게 무슨.....저는 그저 노ㅇ....."

"알아요. 그대가 노예라는 걸."

왜 그녀가 날 여기로 데려왔는지 두뇌를 풀가동하고 있을 때, 그녀가 소리쳤다.

"그 년을 데려와라."

이윽고 붕대로 입이 칭칭 감긴 한 여자가 묶인 채로 노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년은 그대가 노예일 때 주인 신분으로 고혈을 뽑아내던 여자입니다. 이름이...얀디아진? 이더군요. 맞나요?"

난 순순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꼬던 다리를 풀고는 몸을 숙여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 년만 없으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겠군요?"

노바가 미소를 살짝 짓더니 그녀의 손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곧 감전되는 듯한 소리와 비명과 함께 얀디아진이라는 여자가 쓰러졌다.

그것도 머리 부분이 새카맣게 탄 채로.

내가 아무리 전생에서 파병 부대로 활동 했다지만,
처음 본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잃은 나에게 그녀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대에게 선택지를 2가지 주겠습니다.
첫 번째는 벨라모스 가문의 주인인 저와 결혼하여 공작의 신분으로 평생 행복하게 사는 방법."

뚜벅뚜벅.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심장이 터질만큼 긴장되었다.

"두 번째는 이대로 계속 도망자로 다니면서 노예 신분으로 계속 힘겹게 사실 건지."

그녀는 이윽고 내 뺨에 손을 갖다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밧줄을 풀어드렸으니, 지금 바로 도망치셔도 되겠지만..... 제가 아는 그 구원자의 판단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하시겠지요?"

대륙에 수많은 노예들 중에 날 정확히 찾아내는 이 판단력과 실행력.....
아무래도 도망갈 구멍은 없어보인다.

난 이내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의 표시를 했다.

"후훗. 역시, 저를 구원해주신 길잡이시네요. 어서오세요, 공작님."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최종보스의 타락했던 노바의 눈빛과 같아 있었다.

목표를 향해 갈망하는 눈빛, 그것도 끈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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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사료.
누군가를 구한다는 설정은 제가 봐도 맛있네요.
단편이니 여기까지.
오늘 점심은 타코입니다. 타코에 뿌릴 소스는 '구원' 입니다.
오타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