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초능력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초능력이라는 게 세상에 등장하기 전의 사람들은 굉장히 무서운 미래를 꿈꾸곤 했다.


초능력자가 등장하면 북쪽의 독재 국가는 사라지고, 전세계는 겁화에 휩싸이며, 세계정복을 꿈꾸는 미치광이들이 암약할 것이다! 라며.


실상은 꽤 달랐다.


'달리는 차량도 번쩍 들어올릴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기면 어떡할래?'라고 물으면, 지금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리 대답할 것이다.


'직장 다녀야지..'. 혹은, '그런 초능력 말고 출퇴근 대신해주는 능력은 없을까?'라고.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지 않았고, 초능력은 순식간에 '초'라는 글자를 잃어버린 채 능력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위협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대답은 다르겠지만, 방년 만 21세의 미필 남성, 김현우는 이리 말했다.


합법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폭력.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조직폭력배 기업이라고.


사실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컴퍼니의 문제점을 연일 신문에서 떠들어대고, 정치인들은 컴퍼니를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헐뜯지만.


그럼에도 컴퍼니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단 두가지.


아무리 뒤져보고 뜯어봐도 나오지 않는 범법에 대한 증거. 


그리고 컴퍼니가 가지고 있는 '무력'.


다른 어떤 능력도 필요없이, 이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든지 입사할 수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컴퍼니는 그 어떤 기관보다도 방대한 양의 초능력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방 안에서 키보드만 두들기던 히키코모리도, 하루하루가 간당한 카푸어도, 가출한 학생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입사할 수 있는 기업!


능력이 있는 당신, 지금 당장 입사하세요!


무엇보다 컴퍼니가 주먹을 스윽 들어올리자 컴퍼니를 해체해야한다며 떠들던 언론이 조용해지곤 하는 상황이 몇번이곤 반복되곤 했다.


수수께끼의 깡패들이 악질 언론사에 쳐들어가 횡포를 부리더라도, 알아보면 각자 그 언론사의 보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억울한 일반인들이고.


쥐잡듯이 뒤져봤자 컴퍼니와의 연결고리는 단 하나도 찾아보지 못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방년 만 21세의 미필 대학생 김현우는, 그 컴퍼니의 위협을 몸으로 막아내는 특수요원일을 맡게 된 것이다..!


*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다. 방금 강의가 끝난 강의실 안에서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기 짐을 챙기고 있었다.


친구 없이 대학 다닌지 어연 2년차. 강의가 끝나기 1분 전부터 이미 짐을 싹 챙겨놓았던 덕에 교수님과 거의 비슷하게 강의실을 나설 수 있었다.


"푸후..."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도 능력에 걸린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협회장님이 유독 능력 사용에 주의하라고 강조하신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사랑받는다'는 능력은 말만 들으면 좋은 능력이지만, 한꺼풀 안을 들여다본다면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능력이기도 하다.


'사랑을 하게 만든다'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제어를 할 수도 없고, 무조건 사랑의 대상이 자신이어야 하며, 심지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도 지정할 수 없다. 


능력이라고 하기에는 하자가 잔뜩 들어간 능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게 봐주신 히어로 협회장님이 '고용'해주신 덕분에 이 능력을 좋은 일에 쓰고 있...


아니다. 좋은 일인가? 으음.


일이라고 하기에는 제대로 된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업무 내용이라고 해도 합법적이라고 하기 어렵고, 아니, 애초에 그걸 업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러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떠오르기 시작할 때, 정문에 서있는 집채만한 리무진이 의문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아니, 아니, 하.


저거 학교에 타고 오지 마시라고 부탁드렸는데.


한숨을 한 번 더 푹, 내쉬곤 리무진으로 달려갔다. 이미 주변에는 아닌척, 안 보는 척하며 리무진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널려있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스마트폰을 들어올려 인스타용 사진을 촬영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왜 저러는 걸까.'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하는 것, 거기에 더하여 이런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저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운전수마저도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사진을 찍고 싶을까라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잠시만요, 실례할게요."


"아, 아앗!"


얼짱 각도로 리무진과 함께 인스타 스토리를 촬영하고 있던 여대생은 내가 문고리를 잡자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도망갔지만 개의치 않고 리무진 뒷자리에 후다닥 올라탔다.



"어머, 현우 군."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오늘도 리무진 타고 오셨네요."


"후후. 이 차가 아니면 마음이 안정되지를 않아서요."


살짝 늘어진 실눈, 요염한 눈물점, 몸에 착 달라붙는 얇은 드레스 - 세간에서 동탄 드레스라고 부르는 옷을 입은 묘령의 여자.


외모로나 나이로나 상상할 수 없겠지만, 이 사람이 바로 히어로를 총괄하는 히어로 협회장 - 장예령이었다.


그리고 나의 고용주시기도 하고.


"현우 군. 이번 주도 고생 많았어요."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는..."


끄트머리를 애매하게 흐린다. 고생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입발린 소리겠지.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며, 오늘은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겠지 걱정을 하며 사는 삶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꽤나 힘든 법이니까.


"생각해보니 고생이 맞네요."


"그렇죠~"


협회장님이 살폿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몸에 잔뜩 달라붙는 옷 탓에, 몸의 굴곡도 부드러이 요동친다.


그리고 내 마음도.


'히어로가 되면 저런 복장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는건가?'


능력자들 중에서도 최상위의 능력자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협회 - 히어로 협회의 협회장인 그녀이기에, 저런 수치스러운 복장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닐 수 있는 걸까.


내 눈이 새하얀 피부를 향해 나도 모르게 움직인다. 그 시선을 느낀건지, 협회장님이 옷 위로 드러나는 살갗을 손으로 살짝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이런, 현우 군. 아무리 저라고 해도 그렇게 빤히 들여다보면 부끄러워요."


"죄, 죄송합니다!"


"후훗. 방금 건 예의상 한 말. 보라고 입은 건데, 봐주면 저야 좋죠."


질끈.


눈을 있는 힘껏 감았다. 


가끔 저런 멘트가, 20대 초반의 미경험 남성에게는 얼마나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협회장님은 자각이 부족하다.


*


그 뒤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의 대화는 평범했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협회장과의 대화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 강의는 어땠냐, 점심으로는 뭘 먹었냐, 오늘 저녁에는 뭘 할 예정이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하게 된다.


"오늘도 대화 즐거웠어요. 이거는 이번 주 용돈."


턱-


딱 봐도 묵직한 쇼핑백이 손에 쥐어진다. 위에 덮여진 손수건을 살짝 드러내면 보이는 건, 무수히 많은 신사임당이었다..!


"이, 이렇게 많은 돈을.."


"후후. 업무추진비라고 생각하세요."


깨끗하게 씻었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된답니다?


협회장님의 첨언에 또 다시 망상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온갖 어둠의 경로를 통해 세탁된 돈을 사과상자에 실어 나르는 아저씨들과, 그걸 몰래 목격한 탓에 담궈지는 정의감 넘치는 기자. 그리고 돈은 돌고 돌아 나에게 전달되지만, 끝끝내 자신을 찾아내는 근성 넘치는 기자에게 고발을 당하면..


랄까. 요새 겁이 너무 많아진 것 같다.


집에 함께 사는 사람이 사람이다보니, 겁이라고 하기보단 경각심이라 하는 편이 옳겠지만서도.


고개를 휘휘 저어 망상을 저리 몰아낸 뒤, 쇼핑백을 들고 협회장님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자본주의의 미소가 아니라, 이번 한 주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다는 기쁨에서 나오는 미소다. 


절대 집 금고에 차곡차곡 쌓이는 5만원권들이 취업하지 않아도 놀고먹고 살 수 있게 도와주리라는 행복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었다.


*


협회장님의 업무추진비라 쓰고 용돈이라 읽는 든든한 지원 덕에 최근에 이사한 투룸. 그 앞에서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옷을 탁탁 털고, 신발도 한번 털어주고, 다시 외투를 벗어 팡팡 한 번 털어준 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투룸이라고 해도 거실이 넓은 구조인 덕에 그리 좁지는 않은 집이지만, 그건 혼자 살 때의 이야기. 동거인이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늦었네."


"차가 조금 막혀서요."


"...흐응."



키는 글쎄, 재본 적도 없고 재볼 수도 없지만, 아마 190cm는 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장신. 짙은 군청색의 긴 머리카락에 얼굴은 날카로운 늑대상. 


거기에 더해 머리 위로 뿅 튀어나와 있는 뾰족한 늑대귀까지.


꼬리만 없을 뿐이지, 완전 늑대를 닮은 여자. 심지어 몸매도 늑대처럼 잘 빠진-


"이봐."


"네, 넵!"


"...하아."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몸을 훑고 내려가던 눈이 휙 하고 위를 향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눈이 닿는 것보다 먼저, 그녀의 얼굴이 훅 다가온다.


"킁, 킁킁.."


처음에는 어깨 부근의 냄새를 맡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더니, 목덜미를 파고든다.


코에서 나오는 따스한 한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점점 머리가 다가오더니, 이내 아예 몸이 달라붙을 정도로 밀착을 해온다. 키가 나보다 10cm는 족히 큰 탓에, 위에서 아래로 덮쳐오는 듯한 자세가 되어버린 건... 아니, 이거 덮치는 거잖아.


"저기, 혜린 씨. 너무 가까워요."


"응, 응? 아, 미안. 그 여자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


내 말에 두어 걸음 물러나는 그녀의 얼굴은 벚꽃처럼 살폿 달아올라 있었다. 귀는 빳빳하게 서있었고, 손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허공을 휘적거렸다.


"협회장님 말씀이라면, 오늘 만나고 왔어요."


"...역시. 그 여자가 뭐래?"


"혜린 씨가 문제 안 일으키게 잘 보살펴달라던데요?"


"으득."


아까의 수줍은 모습은 어디가고, 컴퍼니를 이끄는 회장다운 폭력적인 늑대의 모습이 순식간에 전면으로 드러난다.


"언젠가 꼭 죽여주겠다고, 다음번엔 그렇게 전해."


"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저 좀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요?"


"..미안."


다시 그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으로 돌아온 혜린 씨는 한 걸음만에 현관에서 거실로 물러났다. 곳곳에 어느새 그녀 취향의 가구가 놓인, 아니, 저걸 가구라고 할 수 있을까. 폭신폭신한 쿠션 - 대형견용 쿠션을 사람이 쓰고 있는 건 인간 존엄성 측면에서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아니, 애초에 늑대 수인이니까 강아지용 용품을 쓰는 건 상관 없는가? 아니지. 그러면은 내가 마치 혜린 씨를 애완 늑대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잖아.


여전히 현관에 서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혜린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손에서 쇼핑백을 탁 뺏어들곤 총총 자기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턱, 소리가 나게 놓인 쇼핑백 안을 순식간에 휘저은 혜린 씨는 돈뭉치 하나를 집고 날아가듯 현관으로 달려갔다. 


"마트 가서 고기 사올게."


사올게~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미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겹쳐 들리지 않게 될 정도로 빠른 몸놀림에 혀를 내두르는 것도 잠시, 쇼핑백을 품에 품듯이 들어 방 안의 금고에 탈탈 털어넣었다.


이미 맨손으로 금고를 찢을 수 있는 사람과 동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다만, 그래도 침대 밑에 깔아놓는 것보단 안전하겠지.


쇼핑백을 종이접기하듯 잘 접어 책장에 집어넣은 뒤, 습관적으로 거실 구석에 놓인 청소기를 집어 방 청소를 시작한다.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어다니는 군청색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청소기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수인이라 그런가, 털 빠지는 것도 엄청 심하네. 


쿠션을 들어서 팡팡 한 번 털어주고, 쿠션 아래를 청소기로 밀어주고, 그리고 반복.


얼핏 보면 숙달된 동거인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동거관계가 시작된지는 몇달 되지 않았다. 


집 앞에 쓰러져있던 아가씨를 깨울 생각으로 어깨를 흔들었는데, 손에 흥건하게 피가 묻어나왔을 때는 정말... 


머리 위로 혼이 빠져나가는 만화적 표현이 마냥 허황된 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정신 없이 집으로 데려와, 응급약품으로 간단하게 소독을 하고, 있는 붕대 다 끌어모아 지혈하고..


구급차를 부르지 않은 건 경황이 없는 탓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행동 같기도 하다.


무려 컴퍼니의 회장인 혜린 씨가 돌아가지 않고 내 방에 지내는 걸 보면 아마 컴퍼니 내부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농후하겠고, 그 상황에서 구급차를 부르는 건 혜린 씨가 내 집에 숨어있다는 걸 알리는 것과 다를바 없으니깐.


솔직히 말해 닥쳐올 수도 있는 위협이 안 무서운 건 아니다. 위협에 대처할 능력이라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랑받는다'는 능력 뿐이고, 그마저도 협회장님 오피셜로 '관리해야할 수준은 아닐' 정도로 위협적이지도 않으니까. 성장 가능성도 낮다고 하고.


그렇지만 동거하며 정이 쌓인 혜린 씨가, 어떻게든 나를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다.


"...아."


방을 청소하다, 아무 생각없이 혜린 씨의 방문을 열어버렸다.


안에는 속옷들이 탈피 뒤에 남겨진 번데기처럼 방 구석에 널부러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백화점 1층에서 본 적 밖에 없는 고급 향수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어휴."


향수는 잘 정돈해놨으면서, 속옷은 왜 이리 함부로 벗어놓는거야. 


청소기를 방문 앞에 내려놓고, 조심스러운 - 혹은 경건한 손으로 위쪽 속옷을 한 벌 집어올린다. 


이건, 이건 나쁜 생각이 아니야. 아니, 애초에 20대 초반의 혈기 넘치는 남자와 동거하면서 속옷을 이렇게 무방비하게 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지.


그렇지만 혜린 씨가 나를 믿어서, 정말 믿어서 이렇게 무방비한 거라면? 여기서 속옷의 향기를 맡는다는 사소한 행동 하나조차 그런 신뢰를 배신하는 거 아닐까?


그런 번민에 휩싸이고 마는, 만 21세의 남자 김현우였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최혜린은, 문득 자신의 방에 남겨놓은 선물에 생각이 닿았다.


평범한 남자 - 아니, 애초에 남자라는 생물과 한 집에서 사는 그녀로서는 집주인이자 생명의 은인인 현우에게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몰랐다.


밥도 차려주고, 지낼 곳도 마련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무엇보다 자신을 제끼고 컴퍼니를 먹으려했던 괘씸한 놈들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했으니. 


반대파를 모두 축출한 지금에도 그와 함께 지내고 있는만큼, 그 값을 치뤄야한다. 


그녀는 대학생에 불과한 김현우와 다르게, 엄연히 컴퍼니라는 기업을 이끄는 회장님인만큼 계산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남자 대학생은 뭘 선물로 줘야할까.


이럴 때 돈이 만능이라는 걸 알고있지만, 협회장 그년에게 받은 돈이 금고 하나를 가득 채울만큼 많았으니 돈이 그닥 의미를 가지지 못할 거고. 


그렇다고 물건으로 선물하겠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남자 대학생이 원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게다가 김현우의 가치관은 피 흘리는 자신을 아무렇지않게 구했다는 점에서 일반 대학생과는 크게 다른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도 하니.


결국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촉'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초인적인 감각이야말로 그녀를 컴퍼니의 최상층에 올려놓은 능력이니.


그녀의 촉은 그녀가 입던 속옷들이 그에게 충분히 좋은 선물이 되리란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그녀의 방에서 나는 현우의 냄새가 그가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수령했다는 걸 알려주곤 했다.


오늘도 남겨준 선물을 즐겨줬으면 좋겠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여전히 건물 앞에 서있는 리무진의 뒷자리에 거침없이 올라탄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나한테 수작치는 건 모르겠는데, 현우한테는 손대지 마."


으직-


돈봉투 사이에 숨겨놓았던 도청기를 엄지와 검지로 벌레를 눌러 죽이듯 짓이긴다. 안에 들어있던 부품들이 벌레 내장처럼 후두둑 떨어져내린다.


"후후. 제가 왜 그분께 수작을 부려요."


"지랄마. 네년의 시커먼 속내를 내가 모를 것 같아?"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컴퍼니는 어떻게 그토록 많은 능력자들을 모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카리스마, 초인적인 능력, 그리고 직감이 늘 컴퍼니를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컴퍼니 입사자 중에는 능력을 가졌을 뿐인 잉여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히어로 협회를 장악, 히어로들을 모두 자신의 말만을 듣는 꼭두각시로 만든 협회장에게 가족, 친구, 연인을 잃은 이들.


그들이 컴퍼니에 힘을 더해준 덕분에, 컴퍼니는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던 것이다.


"현우는 안 돼."


"후후. 그것과 관련해서 말인데요, 오늘은 선전포고를 하려 왔어요."


"...선전포고?"


"네."


장예령은 독사처럼, 그러나 싱그러운 꽃처럼 빙긋 웃으며 양 팔을 확 벌리며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꿈을 꾸는 듯.


"저는 이 땅 위에 주인님의 왕국을 건설할 거랍니다."


"우습군. 네년의 입에서 '주인님'이란 말이 나오다니. 인간들은 모두 쓰레기라고 하지 않았나?"


세계적인 수준의 능력자들이 포진한 한국이지만, 그런 능력자들조차도 그녀에겐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영속되고 말았다.


지금 능력자협회는 그녀에 의해 움직이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상황.


능력자 협회를 기반으로 한반도를, 더 나아가 온 세계를 자신의 발 밑에 두겠다는 그녀의 원대한 계획은-


지금은 단 한 사람, 김현우를 위한 왕국을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후후. 지금도 그 생각은 그대로랍니다. 다만 그 '인간'에 제가 포함되었을 뿐이죠."


장예령은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건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본심이기도 했다. 


마인드 컨트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성체 중에 그녀가 지배할 수 없는 생물은 없다는 그녀의 자신감은.


김현우를 만나자마자 물에 설탕이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 남은 것은 - 


그분을 몰라보았던 자신에 대한 혐오. 그리고 그분에 대한 경애.


"저는 저보다 위대한 분이 있다는 걸 모른 채 날뛸 뿐이었던 어린 아이였고, 주인님은 무지몽매한 저를 일깨워주셨죠."


꿈꾸는 듯,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양 손을 가슴팍에 끌어모았다. 아니, 실제로 그녀는 사랑에 빠져있었다.


스스로 원인을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정신계 능력자였던 탓에 그분의 능력에 압도되어버린 게 아닐까. 


분하다, 혹은 지배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야 그녀가 그분의 능력에 지배당하는 것은 그녀가 주인님보다 약한 탓이니까.


"저는 당신도, 당신이 이끄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임도 주인님의 왕국에서 빼놓을 생각이 없답니다."


이 선전포고는 그걸 위한 거랍니다다.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몸에 힘을 빼곤 늘어지듯 좌석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혜린의 머리는 점점 어지러워졌다.


이 여자는 자신이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마무리를 짓기 위해 접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지만, 김현우와 마주치고 나서는 계속 저런 상태였다. 아니, 더 심해지고 있었지.


목숨을 건 라이벌인 건 마찬가지. 그러나 이제는 현우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그녀와, 그런 그녀를 막으려는 혜린의 싸움이 되었다.


혜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예령을 죽이면 됐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현우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어쩌면 그가 가진 능력 - 사랑받는 능력이 자신에게 적용된 건지도 모른다. 정신계 능력자였다곤 해도, 히어로 협회를 통째로 집어삼킨 괴물인 장예령이 저리 영락해버린 걸 생각하면 현우의 능력에서 벗어났을 거라는 건 착각이겠지.


그러나, 협회장의 말대로 능력에 당했다면 당한 사람의 잘못.  그녀는 현우와 함께 사는 지금의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자리 역시도.


그래, 이건 전장을 바꿨을 뿐, 여전히 자신과 그녀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기기 위해 모든 걸 쓸 생각이다.


그의 옆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아니라!


찌릿-


혜린은 머릿속을 갑자기 치고들어오는 핑크빛 상상에 협회장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은 게 틀림없다고.


절대 그녀가 그에게 푹 빠져버려서, 일생일대의 라이벌이자 적인 협회장을 쓰러뜨리겠다는 목표를 망각한 건 아니다.


절대. 


*


찰칵-


전조도 없이 열리는 현관문에 공중을 유영하던 현우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어째서 여자의 옷에서, 몸에서는 그리 좋은 향기가 나는 걸까. 어쩌면 자신은 변태인걸까, 라는 심각한 고민이었지만 실없는 고민이기도 했던 터라 현실로의 복귀는 반가웠다.


"고기 사왔어."


"아, 잘 사오셨.. 히익!"


현관에서 신발을 찢듯이 벗어던진 혜린은 20L짜리 쓰레기봉투에 가득 든 한우팩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짠."


"우, 우와.. 한우가 산처럼.."


1++ 한우팩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은 여간 장관이 아니었다. 


'돈이 좋긴 좋아..'


협회장이 준 돈으로 사치를 하는 것에 현우는 양심의 가책을 잠시 느꼈지만, 애초에 혜린이 어지간히 많이 먹어야지. 소고기를 먹으려면 이 정도를 사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


한 손에 한우 봉투를 든 혜린은 어쩐 일인지 거실로 들어오지 않은 채, 고목나무처럼 서서 현우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펴졌다가, 그러다가 온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펑 소리가 날 정도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완전 꼿꼿하게 선 귀는 덤으로. 


"..혜린 씨?"


"응? 아, 아니. 얼른 들어가자."


후다닥-


혜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순식간에 나를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설픈 콧노래까지 부르며.


으음. 무슨 일일까.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혜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도 없었고, 별 일이 없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결국 협회장 손에 넘어갈 거라면, 자신이 먹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그래, 별 일이 없다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