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이 무너진 무도회장을 비춘다. 타오르는 불의 색과 같다. 이미 근처는 뜨거운 불길로 물들었다. 얼굴을 스치는 눈부신 섬광이 마치 현실 같다. 하지만, 현실일 수는 없다. 현실이라면, 나 역시 저 타오르는 불길 속에 집어 삼켜져 한 줌 재가 되었어야 했으니까.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나는 타오르지 않았다. 불타버린 무도회장의 잔해. 이 곳이 바로 내 죄의 온상. 영원히 기억해야 할 나의 비극이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파스락 거리는 잿더미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 잿더미가 한 때 무엇이었는지, 몸서리치도록 잘 알고 있다. 하나로 긁어 모아줄 수 없다면, 차라리 바람을 타고 저 멀리 흩어지렴. ...그 어떤 것에도 갇히지 않고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도록.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잿더미를 보며 손을 모아 기도했다. 


  이 곳은 꿈이다.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꿈. 그렇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현실이었다면 저들이 불에 타기 전에 손이라도 내밀 수 있었을 텐데, 이 불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좀 더 착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씁쓸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입 안이 쓰다. 무너진 무도회장에 우르수스의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씨는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지만, 휘몰아친 눈보라에 몸이 떨린다. 춥다. 저 불은, 영원히 날 태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돌아왔네?"


  눈보라의 굉음을 뚫고 뚜벅이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잿더미로 뒤덮인 무도회장의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고급스러운 구둣발 소리. 우르수스의 하얀 눈을 닮은 드레스를 걸친 이 무도회장의 주인. 가증스러운 하얀 테디베어가 입을 찢으며 웃었다. 뒷짐을 지고, 귀 밑까지 찢어진 불길한 입으로 나를 비웃는 저 가증스러운 존재를 정면으로 마주섰다.


  눈이 마주치자, 일그러진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응시했다. 이대로 눈을 마주치면 집어 삼켜질 것만 같이 무서웠지만, 참았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다. 정면으로 끔찍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처음이었다. 


"바보 같은 나탈리야. 고작 박사의 말 한 마디에 네가 정말 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넌 영원한 죄인이야. 그들이 용서한다고 해서, 네가 용서한다고 해서 네 죄가 전부 사라질 것 같아?"


  나를 조롱하는 하얀 테디베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당장이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귀를 막지 않았다. 몸을 숙이지 않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 하얀 테디베어와 맞서듯 마주 섰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저 추악한 것은, 분명한 나의 죄책감이다. ...바로 나다. 


  그리고 이젠. 나를 똑바로 직시할 시간이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나를 매도하는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


"역시. 넌 그렇게 추악한 인간이야. 넌 변할 수 없어. 넌 영원히, 살인자로 남아야 해. ...안 그래?"


  나를 매도하는 내 목소리가 신랄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이토록 매섭게 스스로를 매도하고 있었구나. 나는 이렇게나, 나를 싫어하고 있었구나.


  나는 이렇게나, 겁을 먹었구나.


  나는 날 증오하는 하얀 테디베어를 끌어 안았다. 차갑다. 이대로 품 속에서 칼을 꺼내, 제 심장과 내 심장을 동시에 꿰뚫을 것만 같은 차가운 살기가 퍼졌다. 이거 놔. 하얀 테디베어가 몸부림을 쳤지만, 놓지 않았다. 그것이 내 등을 두드린다. 나 몸을 때리며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하지만 놓지 않았다. 날 두드리는 이 고통도, 나를 때리고 있는 저 추악한 존재도. 전부 내가 짊어져야 할 죄의 일부들이니까.


  그래서 껴안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나에게 내 체온을 나눠주며 끌어 안았다. 박사가 나에게 해주었듯이. 그가 나를 위로해주었듯이.


"네가 그런다고 바뀔 수 있을 것 같아? 네 죄가 사라질 것 같냐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하얀 테디베어. ...아니, 내가 외쳤다. 예전에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스스로의 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도망칠 생각은 없다. 답은 얻었다.


"아니. 내 죄는 절대 사라지지 않겠지. 나는 영원히, 그들을 죽인 살인자로 남아야 해. 나 혼자 죄가 없는 척, 깨끗한 척 살아갈 생각은 없어."


  나의 죄에 이미 마침표는 찍혔다.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수정할 수도 없는 나의 죄는 그 자체로 분명 추악한 죄책감으로 남아, 나라는 인간의 책에 영원한 문장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었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마침표를 찍은 뒤, 새로운 문장을 적으면 이야기는 계속 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죗값을 치뤄야지."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죽으려던 것 아니었어?"


"...아니. 난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려던 게 아니었어. 그냥, 도망치고 싶었던 것 뿐이지."


  내가 바랬던 죽음은 속죄가 아니었다. 내가 매일 손목을 그었던 것도, 남에게 내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씌우고 죽고 싶었던 것도. 전부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나는, 속죄가 아니라 도피를 바랬던 것이었다. 솔직하게 인정했다. 바보 같고, 멍청했다. 분명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멍청하겠지.


"난 죗값을 치를 거야. 내가 구하지 못했던 것 대신, 다른 사람들을 구해내면서. ...그리고 나와 같이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사죄하면서."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죄책감을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향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 향하게 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내린 답은 이것이었다. 더 이상, 죽을 수 없었다. 그들의 목숨을 대신해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던 그들의 몫까지 다른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이다. 내 목숨은, 더 이상 온전한 나만의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내가 끌어안은 몸에 불이 붙었다. 서서히 타오르는 그 불길이, 내 몸까지 옮겨 붙었다. 뜨겁다. 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서서히 검게 물들어가는 하얀 드레스가, 눈보라 속에서 흩어져 사라져간다. 


"넌 이겨내지 못할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난 약하니까."

"분명, 언젠가 다시 목을 매달고 스스로 죽으려 하겠지."

"맞아. 다시 이 꿈을 꿀 수도 있겠지."

"난 사라지지 않을 거야."

"사라지지 마. 네가 있어야, 난 이 죄책감을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끝 없이 저주의 말을 내뱉는 내 몸을 놓지 않았다. 둘이서 함께 불 타 엉겨 붙어도 상관 없었다. 결국 날 저주하는 나 역시, 부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이니까.


  그렇게 내 온몸을 감싼 불길이 날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기까지, 나는 따스한 품 속에서 눈을 감았다.

  또 다시 같은 꿈을 꿀 수 있기를.


.

.

.


"....박사님?"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 시키며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입가를 비틀었다. 혹여나 웃음소리가 세어 나올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감각이다. 그 때는 내 안에서 온갖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기분 나쁜 고양감이었다면, 지금은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소문을 들었다. 병실에 누워 있던 '그녀'가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을. 빠르게 회복하여 일상생활이 가능하게 됐다는 소식을. 그래서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박사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라다가 준비해준 달콤한 디저트와, 내가 직접 엄선한 고급 홍차와 함께.


"들어와요."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힘이 없는 목소리다. 뭐야 박사, 지친 거야? 작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박사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기대를 담아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깔끔하다. 하지만 분명히 변한 것은 있었다. 열흘 전, 내가 그의 품에 안겨 울었을 때와 비교하면, 소소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가령 예를 들면, 박사가 이미 달콤한 디저트를 오물거리고 있다거나, 그의 집무실이 묘하게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다던가, 비서 오퍼레이터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이미 주인이 떡하니 앉아 있다거나.


"아, 로사양. 어서 와요."


  박사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박사는 저번보다 더 야위었지만, 그래도 지친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보기 좋았다. 박사는 포크로 밀푀유를 한 입 먹었다. 부드러운 파이와 크림, 상큼한 딸기의 조합으로 올려진 디저트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돈다. 


"로사 양도 하나 먹을래요?"


"예...?? 아... 아뇨. 괜찮아요!"


  아 이런. 너무 티 나게 보고 있었나. 박사가 접시에 담긴 밀푀유 하나를 건넸다. 


"사양하지 마요.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자랑할만한 솜씨거든요."


  박사가 웃으며 다시 한번 밀푀유를 제안했다. 두 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솔직히 맛이 궁금해서 손으로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달콤하다. 파이는 은은하게 달콤하고, 크림은 부드럽다. 그리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크림 사이를, 상큼한 딸기가 싱그럽게 중재해주고 있다. 그래서, 혀가 지치지 않는 맛이다. 쉽사리 맛보기 힘든, 일류 파티시에의 솜씨가 엿보인다. 로도스에서 이렇게 높은 수준의 디저트를 먹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맛있어요. 박사님, 혹시... 어디서 구하셨나요? 괜찮다면 저도 몇 개 사고 싶은데요."


  박사님께 선물을 전해주고 나면, 이대로 돌아가 아이들과 티타임을 가질 계획이다. 이 상큼한 디저트라면, 분명 모두의 입맛을 만족 시켜줄 수 있겠지. 그래서, 탐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사가 먹던 것을 빼앗아 올 수는 없으니 출처를 알아 직접 구해야겠지.


"아 그거. 내가 가져왔어."


  하지만, 대답은 박사가 아니라 반대편에서 들렸다. 산처럼 쌓인 서류의 너머, 비서 오퍼레이터들이 앉는 보조용 책상에서. 시선을 돌리니, 그 자리의 주인이 나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강철을 펴 바른 듯한 강인한 은색 눈동자, 검은 광석이 돋아나 있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대비되어 보이는 새하얀 피부, 그리고 삐죽삐죽 길러진 산발의 은빛 머리카락. 


  실제로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로도스에서도 유명한 오퍼레이터. 라플란드 씨였다. ...불과 며칠 전 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던 장본인이자, 박사의 가장 소중한 사람. 호기심이 섞인 듯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거북했다. 내가 그녀를 기피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볼 낯이 없었다. 사경을 헤매는 그녀를 두고 내가 어떻게 행동했더라? 그걸 떠올리니 차마 라플란드 씨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그... 그러면 혹시 어디서 구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내가 만들었어. 파이부터 크림까지 전부."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나도 모르게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 엄청난 디저트를... 직접?? 그것도 딸기를 빼면 전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놀랐다. 아 이런, 대놓고 무례한 모습은 실례인데... 뒤늦게 올라온 수치심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딱히 신경쓰지 않는 걸까, 라플란드 씨는 오히려 재밌다는 반응으로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 몸에 감겨 있는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걱정이 됐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쌩쌩하게 움직였다. 오히려, 걱정이 실례가 될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그래, 기분이다. 더 만들어줄게. 재료가 좀 남았거든. ...몇 명?"


"....저까지 4명이요."


  소냐, 안나, 라다. ...그리고 나. 오늘 티타임은 조촐하게 열 생각이었다. 초대하고 싶었던 다른 한 명, 로잘린드는 지금 로도스 본함에 없다고 들었다. 아쉽지만, 그녀는 다음 기회에 초대해야겠지. 


"금방 만들어 올게. 반죽은 있지만, 굽질 않았거든. 여기서 박사랑 이야기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아... 감사합....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감사의 인사를, 라플란드 씨는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을 화답했다. 조금 사납게 웃긴 했어도, 따뜻하게 지어준 그 미소에서 나와 단 둘이 이야기하라는 숨은 배려가 묻어 났다. 내가 실제로 그녀를 대면한 것은 처음이다. 나는 그저 로도스에 떠돌던 그녀에 대한 여러 소문을 들었을 뿐이지만... 직접 만난 그녀는 소문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납게 생긴 것만 빼고.


"...근데."


  라플란드 씨의 발걸음이 멈췄다. 뒤돌아 나와 박사를 응시했다. 처음엔 나를 훑는 듯한 시선이 한번, 그리고 박사를 날카롭게 째려보던 시선이 한 번. 그리고 이윽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은색'에 환장하는 구나."


"응?"


  하지만 라플란드 씨의 말이 향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박사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한 마디를 쏘아붙히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집무실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집무실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의 의미를 나도 모르게 해석해버린 끝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래서 무마하려고,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다. 


"...여기요. 디저트랑... 홍찻잎이에요. ....나중에 라플란드 씨랑 같이 드세요."


"고마워요."


  박사는 웃으며 내 선물을 받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지금 기분은 어떤지, 몸은 괜찮은지, 뭐 도와줄 일은 없는지.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내가 박사에게 깊게 간섭할 자격은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박사는 지금, 내가 감히 예상하건데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아직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많이 남아 있겠지만, 최소한 그의 곁에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남아 있다. 사경에서 겨우 돌아온 연인과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 정도로, 내가 눈치가 없지는 않다. ....아, 이미 방해했나?


  그럼, 더 길게 빼앗을 수는 없지. 품 속에서 진짜 박사에게 건네주고 싶었던 물건을 꺼냈다. 끝이 뭉특하게 닳아 있는 고풍스러운 페이퍼 나이프. 내가 우르수스에서 가져온 몇 안되는 물건 중 하나다. 불타는 식량창고 속에서도, 내 품에 있던 바로 그 물건이다. 이 물건이 오늘 박사를 찾아온 용건이자, 오늘의 선물이다. 아까 건넨 디저트와는 달리, 순수하게 잘 써 달라는 의미의 선물은 아니다.


"...이건?"


"박사님이 가지고 계셔 주세요."


  박사에게 건넬 페이퍼 나이프는, 내가 항상 손목을 그을 때 사용했던 물건이다. 조금 시적인 말을 더해 억지로 꾸미자면, 나의 약함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건 나의 각오였다. 더 이상, 끔찍한 꿈을 꾸어도 손목을 긋지 않겠다는 각오. 더 이상, 날 옥죄는 죄에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는 각오. 이 페이퍼 나이프를 버리는 것은 그 각오의 첫걸음이다. 


"나름 고급품이라, 박사님께서 사용하셔도 좋아요. 오히려 그게, 저 칼에게도 좋은 것이겠죠."


  저 페이퍼 나이프도, 사람의 살을 베는 것 보다는 만들어진 본분에 걸맞게 편지를 뜯는 편이 더 어울린다. 이제 귀족의 신분을 버려 편지 하나 오지 않을 나보다는, 항상 서류에 파묻혀 사는 박사가 더 유용하게 사용해주겠지. 


"나탈리야."


  박사가 나즈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박사님."


"잘했어요."


  그 이상으로 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그저 따스하게 웃을 뿐이었다. 박사, 아마 당신은 모르겠지. 내가 당신의 품 안에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얻었는지, 당신의 그 말 한 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큰 깨달음을 주었는지. 


  그의 웃음을 보자, 가슴 한 켠이 울렁였다. 이대로 저번처럼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최소한 벌써부터, 그에게 그런 실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박사님."


  말로써 호의를 전하기로 했다. 내가 행동으로 그에게 품고 있는 내 호의를 표현한다면, 분명 나는 라플란드 씨에게 칼을 맞아도 할 말이 없어진다. 이제 겨우 죽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벌써 죽을 순 없지. 


  반대로, 날 부분을 잡은 페이퍼 나이프를 박사에게 건넸다. 손에 스치는 날붙이의 감각이 차갑다. 왠지, 무겁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손을 떠나는 순간의 느낌이 홀가분했다. 


"내게 삶의 의미를 준 당신을 위해, 앞으로 내 모든 것을 바칠게."


  아마 이제는 사용할 일 없을, 귀족의 예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께서 당부하시길, 언젠가 진심을 담아 대접할 은인을 만난다면 가장 첫인사로 선보일 최고 예법의 인사라고 하셨다. 아버님, 당신이 보시기에 지금의 저는 어엿한 어른처럼 보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치기 덩어리에 미숙한 어린아이로 보일까요?


  예법을 담아 고개를 숙였고, 박사에게 페이퍼 나이프를 건넸다. 박사는 이를 자신의 책상에 놔두었다. 그의 손이 항상 닿을 수 있는 곳에, 그의 눈이 항상 닿는 곳에.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나중에 필요하게 되면 언제든 말해요. ...빌려줄 테니까. 그래도, 꼭 저한테 말해주셔야 해요. 알았죠?"


"빌릴 일 없게 노력할게요."


"무리하진 말아요. 언제든 도와줄게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니까."


"박사님이야 말로, 무리하지 말아요. 저도 가끔은 도와드릴 테니까."


"그럼 서류 좀 도와주실래요?"


"그런 거 말고요."


  박사의 웃음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것만으로, 가슴 속에 응어리 져 있던 해묵은 덩어리들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처음으로 편안하다는 감각을 느꼈다. 귀족의 예법도, 학생회장의 위엄도 전부 내려놓은 채, 품위 없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박사와 조금 잡담을 나누며 웃고 떠드는 사이, 라플란드 씨가 가져온 밀푀유가 고급스러운 포장과 함께 내 손에 들어왔다. 더 이상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이를 받아들자마자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빠져 나왔다. 내가 나옴과 동시에 문이 잠기는 소리, 천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박사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쿡쿡 웃으며 복도를 지났다. 지나가다 만난 인사부 직원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지금 한창 열심히 식당에서 요리 중일 라다를 찾아가 티타임을 할 의사를 전했다. 뛸 둣이 기뻐하는 라다를 본 식당의 다른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라다의 일을 빼앗아가며 그녀에게 휴식시간을 마련해줬다. 라다와 함께 안나, 소냐를 데리러 갔다. 그렇게 처음으로, 모두의 앞에서 직접 홍차를 우렸다. 기분 좋은 홍차의 향기가 코 끝을 스쳤다.


  그 날은 처음으로, 모두와 웃으며 그 간의 근황을 물었다. 언젠가, 이들에게도 내 마음 속 깊이 숨겼던 진심을 이야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벌써부터 이 아이들에게 그런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상냥하게. 예전의 학생회장으로, 선배로 돌아간 것 처럼 다정하게 모두와 티타임을 즐겼다.


  고작 이 일로 날 괴롭히던 죄책감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약해진다면, 그 하얀 테디베어는 끊임 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이며, 내가 영원히 가져가야 할 죄책감의 상징이니까.


  하지만 더 이상 겁은 나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끊임 없이 날 괴롭힌다 해도 괜찮았다.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결심 했으니까. 설령 내가 날 용서할 수 없더라도, 나는 더 이상 날 죽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죽음으로서 내 죄에서 도망치기보단, 구하지 못한 만큼 남들을 구하며 속죄하며 살 생각이다. 이 길이 험난하리라 생각했지만 겁이 나지는 않는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내가 쓰러질 때, 날 받혀줄 다른 누군가들이 있으니까.


  내 이름은 나탈리야. 

  죄를 지었지만, 더 이상 여기서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한. 우르수스의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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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arknights/57706592

전편 링크


예아 반갑소.


이걸로 신청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로사 소설, 또 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는 완결.


1편에 2일, 총 10일에 걸친 시리즈가 완결되었다. 딱 5편으로 끊기는 건 오랜만이네.

간만에 쓰면서 재밌던 작품이었어.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제공받은 플롯이 아주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내가 한건 그저 플롯에 아주 약간의 살만 더 붙히고 따라 쓴 것 뿐이니까.


로사X독타라고는 했지만, 로사가 박사에게 갖는 감정이 100% 순수 사랑은 아니다, 라는 느낌으로 끝냈어.

소중한 사람의 위기라는 멘탈 위기를 위해 박사의 연인으로 라플란드를 넣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됨.

물론, 로사가 포기할 리는 없을테니 서서히 시간을 들여 유사 NTR을 시도할....수도?


그러니 대충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생각해줘요.

또 아주 별개의 이야기긴 한데, 왠지 라플란드는 요리 잘 할거 같음. 특히 항상 말하는 밀푀유 같은 디저트 더 잘만들거 같음.


이제 다음꺼는 일단 실론흑금 뷰빔 끝내고, 고민


하얀 늑대 11편은 조금 더 보류할 생각이고, 신청? 비슷한 걸 받은 것 중에 생각 중


1) 의식은 남아 있지만 이샤ㅡ믈라에게 몸을 빼았겨 절규하는 스카디.

-이건 아마 아이린 소설 후속 느낌? 아이린이 전편, 이게 후편 느낌. 

개인적으로 아이린 소설을 2시간만에 날림으로 적는 바람에 캐릭터의 디테일을 잘 못살렸다는 생각이 들거든. 똑같은 주제로 개 쩔게 적은 다른 것도 있기도 하고.


2)샤이닝X박사X니어

이건 신청받은건데... 샤이닝의 유사 NTR인가?? NTR기사에게서 NTR을 시도하는 샤이닝...

근대 일단 이건 좀 더 고민.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일단 단편 신청은 받지만 확정은 아님.

그래도 이 글쟁이는 시간이 걸려도 무료로 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