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흐읍…………!”

 

불 켜진 화장실, 홀로 남은 사내가 세면대를 붙잡고 열심히 구역질한다. , 애처로울 따름이다.

 

그렇게 조용히, 헛구역질을 반복하던 사내의 입에서 마침내 붉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두말할 것 없이, 붉은 무언가의 정체는 피였다.

 

헤헤…….”

 

입술 주름 사이로 선혈이 번져가지만, 사내는 쓰게 웃을 뿐, 전혀 울상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익숙했고, 결정적으로 오늘은 즐거운 약속이 있었던 까닭이다.

 

조용히 피를 닦아낸 사내는 대수롭지 않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세안을 마쳤다. 행동 하나하나,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싫다. 정말.”

 

물론, 내심 불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

 

 

한낮의 시내, 한 여성이 벽에 기대어 휴대폰을 바라본다. 모델이라 해도 믿을 수준의 외모와 독특한 패션센스는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끌어모았지만, 본인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가 기다리는 상대는 따로 있었으니까.

 

약속 시간보다 한참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조금의 불만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을 뿐이었다.

 

이야. 오늘은 평소랑 또 색다르네.”

 

그렇게 한참 그녀가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데 집중하던 시점, 익숙한 목소리가 울리히의 귀를 찔렀다.

 

울리히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당연히 지휘관이었다.

 

일찍도 왔군, 아직 약속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그거 너한테도 적용되는 말인 거 알지? 지금 약속 시간 30분 전인데, 왜 이렇게 일찍 왔대?”

 

그만큼 내가 기대했다는 뜻이겠지.”

 

늘 그랬듯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답하는 지휘관이었지만, 진즉에 적응한 울리히는 가볍게 답변할 수 있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건 덤이었다.

 

그나저나, 네가 검은 옷을 입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사실 검은 옷을 더 좋아해, 뭐 묻어도 티 안 나잖아. 정복이 하얀색이라 슬플 따름이지.”


, 너다운 이유인가.”

 

울리히가 쓰게 웃었다. 지휘관은 누그럽게 웃었고.

 

그럼 갈까?”

 

뭐 정해놓은 곳은 있나.”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래, 그럼, 기대하지.”

 

 

 

***

 

 

 

그래서, 네가 고른 곳이 여기라고?”

 

.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울리히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지휘관은 뻔뻔한 미소를 그렸다. 이는 지휘관이 이끈 장소가 굉장히 이색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암흑 카페, 서로 불빛도 없는 공간에서 적당히 대화 나누고 보드게임도 한다. 엄청 재밌을 거 같지 않아?”

 

흥미로운 목소리, 옅게 반짝이는 눈, 잔뜩 기대했다는 신호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울리히는 말없이 수긍하며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 지휘관의 말을 들으니 구미가 다기는 것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걸 수도 있었고.

 

실례합니다.”

 

평소보다 약 1.5배 적극적인 지휘관의 손에 이끌려, 울리히는 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폰도 반납하고 방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깜깜하군.”

 

그러게,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야.”

 

조심스레 벽을 더듬어, 둘은 작은 탁자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았다. 중간에 점원이 들어와 주문한 음료와 보드게임을 놓고 간 건 덤이었고.

 

처음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하기 때문은 아니었고, 그냥 둘 다 침묵과 암흑을 즐기며 서로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 잠은 좀 잤나. 오늘 아침에 봤을 때 다크서클이 좀 줄어든 거 같았는데 말이야.”

 

그랬으면 좋겠는데, 화장으로 가린 거야. 결국 한숨도 못 잤어.”

 

……그런가.”

 

분위기 이상하네, 거짓말이라도 할 걸 그랬나.”

 

됐어. 거짓으로 얻은 안정보다는 진심의 불편함이 더 낫지.”

 

, 멋진 말, 노트에 적어도 돼?”

 

, 맘대로 해라.”

 

킥킥, 가볍게 웃어 보인 지휘관이 커피를 살짝 들이켰다. 빨대에 커피가 타고 올라가는 소리가 어두운 방을 가득 메웠고, 울리히 역시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슬슬 게임이라도 하나 할래? 진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나쁘지 않지.”

 

울리히의 대답을 끝으로, 둘은 말없이 젠가를 시작했다. 오가는 말 하나 없었지만, 분명 즐기고 있었고,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었다.

 

, , 나무토막이 하나씩 빠지고, 탑은 차츰 불안정해진다. 울리히의 집중력이 날카로워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

 

그렇게 반복해서 톡, , 나무토막을 빼던 와중, 둘의 손이 맞닿았다.

 

자욱한 어둠에 시야가 차단 된 만큼 둘의 감각은 평소보다 예민했고, 울리히는 찰나였지만 똑똑히 느꼈다.

 

지휘관.”

 

? 불렀어.”

 

손이 차갑다.”

 

그의 손이 이상할 정도로 차갑다는 것을.

 

기분 탓이야.”

 

아니. 똑똑히 느꼈다.”

 

손으로 컵 잡고 있어서 그래. 얼음 잔뜩 들어갔잖아.”

 

그럼 나무토막을 빼던 손을 내밀어 봐라.”

 

어머, 적극적인 여자. 싫지는 않아.”

 

-우당탕!

 

열심히 헛소리를 내뱉는 지휘관이었지만, 곧 붙들렸다. 둘의 신체 능력 차이는 현격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예상대로, 평소보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반겼다. 울리히의 표정이 한 층 가라앉았다. 

 

이럴 거 같아서 그랬다고 하면, 믿어줄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그런 성격이니까.”

 

그냥 체질이야, 알잖아. 손 조금 차갑다고 별일 있겠어.”

 

하아, 울리히가 묵직한 한숨을 내뱉으며 그의 손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혈액순환을 돕기 위함이었다.

 

연인의 스킨십을 연상시키는 애틋한 행위, 지휘관이 또 한 번 웃었다.

 

어두워서 그런가? 뭔가 더 따듯하게 느껴져.”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녀는 걱정하고 있었지만, 지휘관은 실실 웃으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만약 울리히가 그의 표정을 봤다면 아마 한숨을 한 번 더 내뱉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히히

 

 

 

 

***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덧 밤, 식사도 끝낸 두 남녀는 모항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중간에 들린 백화점에서 산 쇼핑백은 덤이었다.

 

오늘 재밌었어?”

 

당연하지, 재미없을 거라 생각한다면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다.”

 

후훗, 짧은 웃음을 덧붙인 울리히가 말했다. 나름 인정받은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 지휘관의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그럼 너는, 지휘관 너는 즐거웠는가.”

 

당연하지. 누구랑 보냈는데.”

 

, 그럼 다행이고.”

 

그 뒤로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지만, 말 그대로 잠시일 뿐,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다. 지휘관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연 까닭이다.

 

그나저나, 아까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거 기억나지?”

 

……그게 무슨 소리지?”

 

아까 암흑 카페에서 젠가 무너트린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젠가는 중단되지 않았나, 애초에 나는 무너트린 적도 없고.”


무슨 소리야. 아까 내 손 붙잡으려다가 쳐서 무너트린 거 몰라? 큭큭,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울리히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때 자신이 팔을 휘적이다 탑을 무너트렸다는 사실을, 급해 듣지 못했지만, 이제야 상기한 것이다.

 

……정말, 뻔뻔하군.”

 

그게 매력 아니겠어.”

 

뻔뻔한 미소, 울리히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소원이 뭐지?”

 

흐음. 가벼운 침음과 함께 고개를 숙인 지휘관이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팔목을 두드렸다. 승자의 여유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어차피 그가 꺼낼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음에도 나랑 같이 데이트해 줘. 이게 내 소원이야.”

 

…….”

 

울리히의 동공이 잠시 커졌다 이내 미소를 그렸다쓰지도어색하지도 않은그런 웃음이었다.

 

그런 거라면굳이 소원이 아니어도 돼.”

 

에이이렇게나 즐거운데이런 게 소원이 아니면 뭐겠어.”

 

……후후후그래마음대로 해라.”

 

어두운 밤이었다.

 

 







쓴 거 모 음